[청년] 부유한 청년
본문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마 탄 왕자님이 신데렐라 공주 앞에 나타나 단번에 팔자 고친 것처럼 젊은 여성들이 “어느 날 내 앞에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내 인생이 달라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바뀌었다고 하네요.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빨간색 외제 스포츠카를 몰고 내 앞에 돈 많은 간지남, 훈남(혹 여러분이 구세대라 이 말 뜻을 모르시면 주변의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세요)이 나타난다면” 하고 꿈꾼답니다.
물론 허황된 꿈을 꾸는 일부 젊은이들의 이야기겠지만 그만큼 요즘 상대방을 평가할 때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아가 돈이 행복의 기준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다, 돈 있어야 행복해진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지난 달 캐나다의 한 은행이 자산 100만 달러 이상인 부자 캐나다인 3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의 약 50%가 돈이 행복감을 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자산이 500만 달러 이상인 사람 중 31%는 “돈은 문제를 해결하는 만큼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온다”고 답했고 응답자 중 49%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없을 것 같아 걱정”라고 답했고 35%는 “자녀가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할까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돈 많은 부자는 두발 쭉 뻗고 편안하게 자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오히려 그 돈이 더 많은 근심 걱정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100만 달러 이상의 복권 당첨자 중 45%, 절반 가까이가 당첨 이전보다 불행해졌다고 합니다. 재산을 다 읽거나 가족과 친구관계가 파탄이 나고, 건강을 해치거나, 일찍 죽거나 등등 말입니다. 열심히 번 돈이 아닌 한 순간에 굴러들어온 일확천금이 과연 행운인지 아니면 재앙이 될 지는 두고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재물'은 무엇인가
물론 돈 좋습니다. 돈을 가지면 좋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돈이 있다는 것은 참 편리한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고 참 마음 편하게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돈 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돈을 잘 벌고 부자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헌금도 많이 하고 기부도 하고 교회에서 필요할 때 귀한 일도 하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교인들 부자 되라고 늘 기도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은 편리한 것이고 돈을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지만 돈은 절대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은 수단입니다.
이 원칙만 잘 지키면 우리는 건전한 부자가 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중립적인 것입니다. 중립적이라는 말은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돈을 벌고 쓰냐에 따라 돈이 악하게 될 수도 있고 선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돈은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선을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돈은 수단입니다. 돈을 잘 벌어서 잘 쓰십시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돈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고 더 의지하고 먼저 찾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돈은 악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망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제일 큰 문제는 돈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를 방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영광 돌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축복이 아닙니다. 돈은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그 돈 때문에 우리는 넘어지고 패망하게 됩니다. 불행해집니다.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성경은 이 사람이 아직 젊은 청년이고 부자였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은 그가 관원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젊은 나이에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이미 누리는 꽤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였지만 마음속에 큰 공허와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생의 문제를 주님께 묻습니다. 참 좋은 신앙자세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주님은 이 청년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이런 계명들을 지켜라”(17절). 어떤 계명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 이것은 십계명을 간추린 것입니다. 사실 부자로 살면서, 또 관원으로 살면서 이런 계명 다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청년은 “내가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 부족한 게 있습니까” 바로 이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흔히 이 말씀은 엄청난 오해를 받습니다. 이 말씀을 부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참 오해를 많이 합니다. 돈 없는 사람은 이 말씀을 보고 “거봐, 24절에 예수님도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잖아 그러니까 부자는 구원 받기 힘들어. ” 하고 부자들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뭐 이런 말씀이 다 있어 돈 많은 게 무슨 죄야” 당황하고 또 한편으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데 대해 괜한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이 말씀이 부자는 무조건 재산 팔아 가난한 사람들 나눠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은 더욱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이 말씀은 부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해석해야 할까요 마지막 절인 22절에 보면 그 까닭이 나옵니다. 함께 읽을까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우리 각자는 이 말씀을 자기의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합니다. 다같이 ‘재물’이라는 낱말에 괄호를 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괄호에 각자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을 채워 넣으면 됩니다. 이 청년처럼 재물이 많은 분은 괄호 안에 (재물)이라고 채우시고, 권력이나 지위가 높은 분, 명예나 인기를 누리시는 분은 괄호 안에 (권력, 지위, 명예, 인기)라고 채우면 됩니다. 지난 주 설교에 나온 요셉처럼 외모나 능력이 출중하다면 그 말을 채워 넣으면 됩니다. 어떤 분에게는 괄호 안에 채울 말이 건강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 이 부자 청년에게 ‘재물’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소중하고다보니 너무 중요하다보니 어떤 이유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은 주님 명령을 듣고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전적으로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이 청년의 재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며 주님을 따르도록 결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이 재물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사랑하는 청년아, 네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싶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무개야, 네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싶다면 가서 네 ‘그 것’(재산, 명예, 지위, 건강, 외모, 능력, 자녀)을 내려놓고 나를 따라와라. ”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것을 꽉 붙잡고 안 놓는 이상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 자,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전에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참 마음이 편했습니다.
왜요 나는 돈이 없으니까 포기할 일도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부담이 없습니까 그런데 제가 풀어드린 대로 읽으니 이 말씀이 엄청난 부담이 됩니다. 이게 부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집착하는 것을 포기해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고 하시니 얼마나 부담됩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데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여기 해당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와 주님 사이는 계속 방해를 받게 되고 우리는 결코 주님을 ‘온전히’(21절) 그냥 ‘대충’이 아닙니다. ‘적당히’가 아닙니다. ‘온전히’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신앙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이 부분이 변하지 않으면, 이 부분을 포기하지 못하면 우리는 적당히 잘 믿는 교인은 될지언정,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괜찮은 종교인’은 될지언정 절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고추밭은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산 송정동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님이 1993년 20여 명이던 교회에 부임해서 현재 재적 2000여명에 이르는 교회로 부흥시키기까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책에 ‘고추밭을 뽑힌 권사님’이라는 아주 인상적인 일화가 나옵니다. 권사 임직을 하면서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권사의 직분은 너무 중요한 사명입니다.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이 직분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저와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또 새신자들을 심방하고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한 권사님이 새벽기도에 반은 나오고 반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로하시고, 교통편이 좋지 않지만 직분이 소중한 줄 알고 반드시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반만 참석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한 번 더 얘기했더니 너무 바쁘시다는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아들이 법원 앞에서 주차장을 하는데 그 일을 도와주기 때문이랍니다. 그건 아들에게 맡기고 권사 직분 잘 감당하라 해도 늘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성도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목사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권사님이 고추 농사를 지으십니다.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고추농사를 지으시는지 아마 그 근방에서 제일일 겁니다. 아침, 저녁으로 고추밭에 가서 벌레도 잡고, 물도 주고, 약도 쳐주느라 바쁘답니다. ”
그래서 목사님은 권사님을 다시 불러 물었다. “권사의 직분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추밭은 날마다 가신다면서요. 고추농사 때문에 바쁘시다면서요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이들에게 고추도 주고, 고춧가루 주는 데는 관심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권사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날마다 그 권사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밭을 다 뽑아버려라. ” 그건 좀 심하다싶어 그냥 넘어가려는데 계속해서 그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답답해서 물어물어 권사님의 고추밭을 찾아갔더니, 정말 소문대로 고추농사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고추밭을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농사짓는 장로님에게 잡초 약을 달라고 하니 분무기가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집사님에게 낫을 빌려 베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웃통을 벗고 손으로 뽑기 시작했습니다. 두세 시간을 뽑으니 손에 물집도 잡히고 너무 더워 더 이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1/3 정도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처음에 권사님이 그 고추밭을 보고는 남의 밭인 줄 알고 돌아갔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이상해 다시 가 보니 자기 고추밭이 맞았습니다. “내가 누구하고 원수를 졌기에 이런 일이 생기나” 생각하니다리가 후들거리고 오후 내내 실성한 사람처럼 벽에 기대 앉아 있었습니다. 권사님 딸의 전화를 받고 목사님이 들어갔는데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부르니 그제야 대답합니다. “목사님. 제가 평생 원수 진 사람이 없는데 어떤 죽일 놈이 우리 고추밭을 다 뽑아놓았습니다. 혹시 그 놈이 우리 집에 불이라도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권사님, 실은 그 죽일 놈이 접니다. 여기 손을 보십시오. ” “왜 목사님이”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예수 믿고 권사까지 되셨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지금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린다고 하셨는데 예수 믿고 이렇게 심장이 떨린 적이 있으셨나요 옆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안타까워 고추밭 뽑힌 것처럼 가슴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이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사이에 7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더니 권사님이 젊은 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이 고추가 뭐라고…” 다음날부터 권사님이 새벽기도를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온 지 3달 밖에 안 되는 성도가 함께 새벽기도를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상해 물어보니 “목사님, 저도 권사님 밭 옆에 고추를 심어놓았습니다. ” 권사님 댁 고추밭이 모두 뽑힌 이유가 새벽기도 나오지 않아서인 것을 알고는 그분도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권사님은 열심히 새벽기도 나오고 전도해서 그 해 12월에 이 권사님이 전도해 세례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되었습니다.
손현보 목사님과 고추밭 권사님 이야기를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지 8년째로 접어듭니다. 이제 목회도 익숙해지고 성도들과 관계도 친숙해지고 꽤 편합니다. 그래서 최근 들어 내가 너무 성도들 입맛에 맞추려고 대충 목회하지는 않았는가, 성도들과 잘 지내야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원망 안 듣고 융통성 없는 목사 소리 안 들으려고 내가 성도들을 이래도, 저래도 괜찮은 듯 내버려두어 성도들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지 못하고 복 받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나의 고추밭’은 무엇일까요 이 권사님처럼 교회를 나름대로 섬기면서도 고추밭에 정신이 팔려 주님의 일을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일은 게을리 한 채, “내가 계명도 잘 지키고 종교생활도 그럭저럭 잘하고 이만하면 잘 믿는 거지” 하며 적당히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성도를 여호와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주일성수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고추밭은 무엇입니까 일이 바쁘고 사업과 장사가 바빠서요
돈 벌고 사업 잘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것 때문에 주일성수 못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못하면 물질 사업의 축복이 도리어 저주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자녀 집 가야하고 모임에도 가야 해서 주일 성수 못하세요 좋은 데 놀라가서요 여러분, 그게 나의 고추밭입니다. 내가 전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고추밭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부자 청년처럼 재물일 수도 있고, 직장이나 사업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사로잡고 집착하게 하고 바쁘게 만들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고추밭입니다. 저도 앞으로 여러분의 그 고추밭을 가차 없이 뽑아버리려고 합니다.
욕 좀 먹어도 좋고 ‘죽일 놈’ 소리 들어도 좋으니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사인 제가 안 뽑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가차 없이 뽑아버리시지 않겠습니까 손 목사님은 고추밭 1/3은 남겨두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뽑아버리시면 더 무섭게 다 뽑으십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제가 뽑을 겁니다. 아니 목사가 뽑기 전에 여러분이 스스로 뽑아버리시면 제일 좋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고추밭이 무엇인지, 부자 청년처럼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며 스스로 그것을 뽑아버리고 주님을 당당하게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적당히 종교적인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허황된 꿈을 꾸는 일부 젊은이들의 이야기겠지만 그만큼 요즘 상대방을 평가할 때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아가 돈이 행복의 기준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혹시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다, 돈 있어야 행복해진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돈을 행복의 조건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지난 달 캐나다의 한 은행이 자산 100만 달러 이상인 부자 캐나다인 39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의 약 50%가 돈이 행복감을 높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자산이 500만 달러 이상인 사람 중 31%는 “돈은 문제를 해결하는 만큼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온다”고 답했고 응답자 중 49%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없을 것 같아 걱정”라고 답했고 35%는 “자녀가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할까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돈 많은 부자는 두발 쭉 뻗고 편안하게 자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오히려 그 돈이 더 많은 근심 걱정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100만 달러 이상의 복권 당첨자 중 45%, 절반 가까이가 당첨 이전보다 불행해졌다고 합니다. 재산을 다 읽거나 가족과 친구관계가 파탄이 나고, 건강을 해치거나, 일찍 죽거나 등등 말입니다. 열심히 번 돈이 아닌 한 순간에 굴러들어온 일확천금이 과연 행운인지 아니면 재앙이 될 지는 두고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재물'은 무엇인가
물론 돈 좋습니다. 돈을 가지면 좋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돈이 있다는 것은 참 편리한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고 참 마음 편하게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도 돈 좀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이야 어떻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돈을 잘 벌고 부자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헌금도 많이 하고 기부도 하고 교회에서 필요할 때 귀한 일도 하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 교인들 부자 되라고 늘 기도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은 편리한 것이고 돈을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지만 돈은 절대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은 수단입니다.
이 원칙만 잘 지키면 우리는 건전한 부자가 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돈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중립적인 것입니다. 중립적이라는 말은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돈을 벌고 쓰냐에 따라 돈이 악하게 될 수도 있고 선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돈은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선을 행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돈은 수단입니다. 돈을 잘 벌어서 잘 쓰십시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돈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고 더 의지하고 먼저 찾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돈은 악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망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제일 큰 문제는 돈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를 방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영광 돌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은 축복이 아닙니다. 돈은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그 돈 때문에 우리는 넘어지고 패망하게 됩니다. 불행해집니다. 결정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성경은 이 사람이 아직 젊은 청년이고 부자였다고 말씀합니다. 누가복음은 그가 관원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젊은 나이에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이미 누리는 꽤 잘 나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였지만 마음속에 큰 공허와 갈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생의 문제를 주님께 묻습니다. 참 좋은 신앙자세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주님은 이 청년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영생을 얻으려면 이런 계명들을 지켜라”(17절). 어떤 계명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 이것은 십계명을 간추린 것입니다. 사실 부자로 살면서, 또 관원으로 살면서 이런 계명 다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청년은 “내가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 부족한 게 있습니까” 바로 이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21절)
흔히 이 말씀은 엄청난 오해를 받습니다. 이 말씀을 부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돈 없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참 오해를 많이 합니다. 돈 없는 사람은 이 말씀을 보고 “거봐, 24절에 예수님도 부자는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잖아 그러니까 부자는 구원 받기 힘들어. ” 하고 부자들을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뭐 이런 말씀이 다 있어 돈 많은 게 무슨 죄야” 당황하고 또 한편으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데 대해 괜한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이 말씀이 부자는 무조건 재산 팔아 가난한 사람들 나눠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부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은 더욱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이 말씀은 부자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이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해석해야 할까요 마지막 절인 22절에 보면 그 까닭이 나옵니다. 함께 읽을까요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우리 각자는 이 말씀을 자기의 상황에 맞게 해석해야 합니다. 다같이 ‘재물’이라는 낱말에 괄호를 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괄호에 각자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을 채워 넣으면 됩니다. 이 청년처럼 재물이 많은 분은 괄호 안에 (재물)이라고 채우시고, 권력이나 지위가 높은 분, 명예나 인기를 누리시는 분은 괄호 안에 (권력, 지위, 명예, 인기)라고 채우면 됩니다. 지난 주 설교에 나온 요셉처럼 외모나 능력이 출중하다면 그 말을 채워 넣으면 됩니다. 어떤 분에게는 괄호 안에 채울 말이 건강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 이 부자 청년에게 ‘재물’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소중하고다보니 너무 중요하다보니 어떤 이유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은 주님 명령을 듣고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전적으로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이 청년의 재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며 주님을 따르도록 결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이 재물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사랑하는 청년아, 네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싶다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무개야, 네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싶다면 가서 네 ‘그 것’(재산, 명예, 지위, 건강, 외모, 능력, 자녀)을 내려놓고 나를 따라와라. ”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것을 꽉 붙잡고 안 놓는 이상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 자,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전에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참 마음이 편했습니다.
왜요 나는 돈이 없으니까 포기할 일도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부담이 없습니까 그런데 제가 풀어드린 대로 읽으니 이 말씀이 엄청난 부담이 됩니다. 이게 부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집착하는 것을 포기해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다고 하시니 얼마나 부담됩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데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여기 해당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와 주님 사이는 계속 방해를 받게 되고 우리는 결코 주님을 ‘온전히’(21절) 그냥 ‘대충’이 아닙니다. ‘적당히’가 아닙니다. ‘온전히’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신앙의 아킬레스건입니다. 이 부분이 변하지 않으면, 이 부분을 포기하지 못하면 우리는 적당히 잘 믿는 교인은 될지언정,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괜찮은 종교인’은 될지언정 절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나의 고추밭은최근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목사님! 전도가 너무 쉬워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산 송정동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님이 1993년 20여 명이던 교회에 부임해서 현재 재적 2000여명에 이르는 교회로 부흥시키기까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책에 ‘고추밭을 뽑힌 권사님’이라는 아주 인상적인 일화가 나옵니다. 권사 임직을 하면서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권사의 직분은 너무 중요한 사명입니다.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이 직분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에 나오셔서 저와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또 새신자들을 심방하고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한 권사님이 새벽기도에 반은 나오고 반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연로하시고, 교통편이 좋지 않지만 직분이 소중한 줄 알고 반드시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반만 참석했습니다. 안되겠다 싶어 한 번 더 얘기했더니 너무 바쁘시다는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아들이 법원 앞에서 주차장을 하는데 그 일을 도와주기 때문이랍니다. 그건 아들에게 맡기고 권사 직분 잘 감당하라 해도 늘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성도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목사님.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가보시면 알겠지만 권사님이 고추 농사를 지으십니다.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고추농사를 지으시는지 아마 그 근방에서 제일일 겁니다. 아침, 저녁으로 고추밭에 가서 벌레도 잡고, 물도 주고, 약도 쳐주느라 바쁘답니다. ”
그래서 목사님은 권사님을 다시 불러 물었다. “권사의 직분도 제대로 못하면서 고추밭은 날마다 가신다면서요. 고추농사 때문에 바쁘시다면서요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아이들에게 고추도 주고, 고춧가루 주는 데는 관심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권사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날마다 그 권사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라면 그대로 두면 안 된다. 고추밭을 다 뽑아버려라. ” 그건 좀 심하다싶어 그냥 넘어가려는데 계속해서 그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답답해서 물어물어 권사님의 고추밭을 찾아갔더니, 정말 소문대로 고추농사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고추밭을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농사짓는 장로님에게 잡초 약을 달라고 하니 분무기가 없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집사님에게 낫을 빌려 베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웃통을 벗고 손으로 뽑기 시작했습니다. 두세 시간을 뽑으니 손에 물집도 잡히고 너무 더워 더 이상은 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1/3 정도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처음에 권사님이 그 고추밭을 보고는 남의 밭인 줄 알고 돌아갔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하니 이상해 다시 가 보니 자기 고추밭이 맞았습니다. “내가 누구하고 원수를 졌기에 이런 일이 생기나” 생각하니다리가 후들거리고 오후 내내 실성한 사람처럼 벽에 기대 앉아 있었습니다. 권사님 딸의 전화를 받고 목사님이 들어갔는데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부르니 그제야 대답합니다. “목사님. 제가 평생 원수 진 사람이 없는데 어떤 죽일 놈이 우리 고추밭을 다 뽑아놓았습니다. 혹시 그 놈이 우리 집에 불이라도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권사님, 실은 그 죽일 놈이 접니다. 여기 손을 보십시오. ” “왜 목사님이”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권사님은 지금까지 수십 년 예수 믿고 권사까지 되셨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 때문에 감격한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은 지금 고추밭 때문에 심장이 떨리고 치가 떨린다고 하셨는데 예수 믿고 이렇게 심장이 떨린 적이 있으셨나요 옆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안타까워 고추밭 뽑힌 것처럼 가슴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까” 권사님이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사이에 7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더니 권사님이 젊은 목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이 고추가 뭐라고…” 다음날부터 권사님이 새벽기도를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온 지 3달 밖에 안 되는 성도가 함께 새벽기도를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상해 물어보니 “목사님, 저도 권사님 밭 옆에 고추를 심어놓았습니다. ” 권사님 댁 고추밭이 모두 뽑힌 이유가 새벽기도 나오지 않아서인 것을 알고는 그분도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권사님은 열심히 새벽기도 나오고 전도해서 그 해 12월에 이 권사님이 전도해 세례 받은 사람만 11명이나 되었습니다.
손현보 목사님과 고추밭 권사님 이야기를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지 8년째로 접어듭니다. 이제 목회도 익숙해지고 성도들과 관계도 친숙해지고 꽤 편합니다. 그래서 최근 들어 내가 너무 성도들 입맛에 맞추려고 대충 목회하지는 않았는가, 성도들과 잘 지내야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원망 안 듣고 융통성 없는 목사 소리 안 들으려고 내가 성도들을 이래도, 저래도 괜찮은 듯 내버려두어 성도들을 바른 신앙으로 이끌지 못하고 복 받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나의 고추밭’은 무엇일까요 이 권사님처럼 교회를 나름대로 섬기면서도 고추밭에 정신이 팔려 주님의 일을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일은 게을리 한 채, “내가 계명도 잘 지키고 종교생활도 그럭저럭 잘하고 이만하면 잘 믿는 거지” 하며 적당히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성도를 여호와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주일성수를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고추밭은 무엇입니까 일이 바쁘고 사업과 장사가 바빠서요
돈 벌고 사업 잘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것 때문에 주일성수 못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못하면 물질 사업의 축복이 도리어 저주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자녀 집 가야하고 모임에도 가야 해서 주일 성수 못하세요 좋은 데 놀라가서요 여러분, 그게 나의 고추밭입니다. 내가 전도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고추밭은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부자 청년처럼 재물일 수도 있고, 직장이나 사업일 수도 있고,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사로잡고 집착하게 하고 바쁘게 만들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 고추밭입니다. 저도 앞으로 여러분의 그 고추밭을 가차 없이 뽑아버리려고 합니다.
욕 좀 먹어도 좋고 ‘죽일 놈’ 소리 들어도 좋으니 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사인 제가 안 뽑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가차 없이 뽑아버리시지 않겠습니까 손 목사님은 고추밭 1/3은 남겨두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뽑아버리시면 더 무섭게 다 뽑으십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제가 뽑을 겁니다. 아니 목사가 뽑기 전에 여러분이 스스로 뽑아버리시면 제일 좋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고추밭이 무엇인지, 부자 청년처럼 주님을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며 스스로 그것을 뽑아버리고 주님을 당당하게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적당히 종교적인 삶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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