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 청년의 신앙!
본문
신앙 생활이란 항상 낭만을 느끼며 황홀한 상태에 머무는 환각 상태는 결코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은 단 한번의 승리 때문에 편히 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마지막 결산하는 그 날까지 방심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영적 긴장감이 감도는 영적 전투장이요,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과 안정된 축복의 삶속에 때로는 가혹한 시련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뒤흔드는 모든 시련은 나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들고, 인내를 배우게 하고,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시련이나 고통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국력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무려 세 번이나 걸쳐 유다를 침략하여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의 침략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이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고(1:17),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더하게 하셨습니다(1:20).
이들의 형통은 다니엘서 2장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바벨론 온 도(道)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고,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道)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게 되었습니다(2:48-49).
이렇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들에게 고난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의 발단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금으로 신상(神像)을 만들어 세우고(높이 27M 폭
2. 7M)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기 소리를 때 그 금 신상에게 절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그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배를 거역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어 죽이는 극형이 선포되었습니다(5-6절).
두라 평지를 뒤흔드는 음악 소리에 모든 사람들이 금신상에게 굴복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데 이들이 원래 훌륭하고 신앙이 대단하기에 이런 제목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총이 우리를 놀라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답게 새 청년의 신앙이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던져 주는 의미에서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같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세 청년의 신앙!
1.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는 말은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곧 생각할 여지나, 가치가 전혀 필요치 않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곧 이 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정력 낭비라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음을 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가서 고발을 하였습니다. 이 고발의 소리를 듣고 왕은 분노하여 그들을 끌어 오라고하여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14절에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라고 하면서 이제라도 예비하고 있다가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을 것이라고 재차 참배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기회를 줄 터이니 절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으로 명예를 주고 돈을 주고 권력과 영광을 주고 직장을 주면서 기도 시간을 빼앗고, 봉사의 시간을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명 표준으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저들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생명도 불사했습니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판가름하는 최후의 시기에 저들은 전 세계를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힘 앞에 담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힘으로 한판 승부를 벌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눅11:28),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하였고, 11절에서도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패역한 백성은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 하지만(사30:9),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신앙의 인격을 걸고 복종해야 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권위보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타협을 거부했습니다. 죄와 타협하며 삶을 지탱하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순교의 재물로 드리려는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이권 앞에 쉽게 양보하며 타협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질을 조금 더 얻기 위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신자들, 여호와 하나님의 날과 여호와 하나님의 물질을 도적질하기에 급급한 신자들,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를 늘 품고 사는 신자들, 여기 저기 멍들어 있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붙은 세 청년의 신앙고백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 청년의 신앙!
2.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죽음이라는 것으로 그들을 위협한 것에 대한 그리고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神)이 어떤 신이겠느냐(15절下)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상의 권위로 세 청년을 위협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손에서 구원해 낼 신이 없다는 극에 달한 교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며 그 분을 신뢰하였습니다.
저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피조세계를 운행하며 다스리는 권능이 주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상 29장 11절에는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기 12장 13절에서도 지혜와 권능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태양을 머물게 하는 권능을 행사하셨습니다. 불순종한 요나에게 대풍을 불게 하여 사명을 수행하도록 권능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아합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권능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은 이런 권능의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여호와 하나님 믿고 있습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며 능력을 행하시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는 왕의 위협의 손에서도,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건져 주시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습니다.
세 청년의 신앙!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은 죽기를 작정한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을 형통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고 낮아지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셔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만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희생도 하겠다는 신앙 즉 순교자적 신앙이었습니다.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리리 그 몸을 풀무 속으로 던짐을 당하길 원했습니다.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느니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성공만을 구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데에 그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셔도, 나를 형통케 하지 않으실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지 않아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 질병의 고통에서 능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셔도 나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앙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장 17절과 18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에게 축복하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 고통 속에서 구원하지 않아도,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는데 내어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청년의 신앙!
4. 구원을 체험한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26절에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영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결국 저들의 신앙고백에 의해 느부갓네살 왕은 분이 가득하여 그 풀무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지시하며 그들을 던지라고(19-20절)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을 결박하여 던지는 순간에 던지던 자들은 불에 타 죽게 되었고 세 청년은 풀무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23절).
이러한 모습은 곧 진리를 지키는 신실한 자에게 대한 세상의 푸대접입니다.
그러므로 창세 이래로 수없이 많은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를 전하며 사수하다가 복음을 대항하는 잔인한 세상에 의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불의와 악법이 진리의 사람들을 풀무 불 속에 던져 버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풀무 불 속에 찾아오신 "신들의 아들"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24-25절).
칼빈은 이를 천사라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불꽃 속에서 구원의 주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시 환난을 만나는 그 때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불꽃은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주 만물을 생성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셔서라도 자기 목적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결박했던 줄만 타 버리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옷도 타지 않는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은 이사야 43장 2절을 응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기적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느부갓네살(사단)의 승리로 끝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는 구속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결과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호와 하나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공포하며, 드디어 그들을 바벨론 도(道)에서 더욱 높였다고 하였습니다(28-3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청년의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구원을 체험한 신앙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곧 황금(돈)과 과학주의와 지식과 권력, 스포츠와 미신과 점성술과 심령 과학 등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풀무불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불길이, 운명론의 불길이, 우상 숭배의 불길이, 세속 주의의 불길이, 과학만능주의의 불길이, 종교 다원주의의 불길이, 정욕의 불길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승리를 하려면 우리의 신앙이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되어야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신앙이 뚜렷해야 하고, 죽음을 불사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직접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세상의 현장에서 구속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 생활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적 전쟁은 단 한번의 승리 때문에 편히 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마지막 결산하는 그 날까지 방심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영적 긴장감이 감도는 영적 전투장이요,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안과 안정된 축복의 삶속에 때로는 가혹한 시련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뒤흔드는 모든 시련은 나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들고, 인내를 배우게 하고,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는 시련이나 고통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국력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은 무려 세 번이나 걸쳐 유다를 침략하여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의 침략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이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고(1:17),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더하게 하셨습니다(1:20).
이들의 형통은 다니엘서 2장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함으로써 바벨론 온 도(道)를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고,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道)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게 되었습니다(2:48-49).
이렇게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들에게 고난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의 발단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두라 평지에 금으로 신상(神像)을 만들어 세우고(높이 27M 폭
2. 7M)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의 모든 관원을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악기 소리를 때 그 금 신상에게 절해야 했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그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배를 거역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어 죽이는 극형이 선포되었습니다(5-6절).
두라 평지를 뒤흔드는 음악 소리에 모든 사람들이 금신상에게 굴복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데 이들이 원래 훌륭하고 신앙이 대단하기에 이런 제목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은총이 우리를 놀라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오늘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답게 새 청년의 신앙이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던져 주는 의미에서 "세 청년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같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세 청년의 신앙!
1.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는 말은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곧 생각할 여지나, 가치가 전혀 필요치 않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곧 이 일로 생각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정력 낭비라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절하지 않음을 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게 가서 고발을 하였습니다. 이 고발의 소리를 듣고 왕은 분노하여 그들을 끌어 오라고하여 회유책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본문 14절에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라고 하면서 이제라도 예비하고 있다가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을 것이라고 재차 참배의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기회를 줄 터이니 절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으로 명예를 주고 돈을 주고 권력과 영광을 주고 직장을 주면서 기도 시간을 빼앗고, 봉사의 시간을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명 표준으로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저들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생명도 불사했습니다.
죽음이냐, 삶이냐를 판가름하는 최후의 시기에 저들은 전 세계를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힘 앞에 담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힘으로 한판 승부를 벌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눅11:28),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하였고, 11절에서도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패역한 백성은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 하지만(사30:9),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신앙의 인격을 걸고 복종해야 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권위보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타협을 거부했습니다. 죄와 타협하며 삶을 지탱하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순교의 재물로 드리려는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이권 앞에 쉽게 양보하며 타협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질을 조금 더 얻기 위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신자들, 여호와 하나님의 날과 여호와 하나님의 물질을 도적질하기에 급급한 신자들,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를 늘 품고 사는 신자들, 여기 저기 멍들어 있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붙은 세 청년의 신앙고백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 청년의 신앙!
2.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7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죽음이라는 것으로 그들을 위협한 것에 대한 그리고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神)이 어떤 신이겠느냐(15절下)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상의 권위로 세 청년을 위협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손에서 구원해 낼 신이 없다는 극에 달한 교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며 그 분을 신뢰하였습니다.
저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피조세계를 운행하며 다스리는 권능이 주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상 29장 11절에는 여호와의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욥기 12장 13절에서도 지혜와 권능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과의 전쟁에서 태양을 머물게 하는 권능을 행사하셨습니다. 불순종한 요나에게 대풍을 불게 하여 사명을 수행하도록 권능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아합의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3년 6개월 동안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신 권능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저들은 이런 권능의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여호와 하나님 믿고 있습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여호와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우리의 삶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며 능력을 행하시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는 왕의 위협의 손에서도,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건져 주시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습니다.
세 청년의 신앙!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18절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은 죽기를 작정한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을 형통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고 낮아지고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셔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만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희생도 하겠다는 신앙 즉 순교자적 신앙이었습니다.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기보다는 차리리 그 몸을 풀무 속으로 던짐을 당하길 원했습니다.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느니 자기 생명을 버리려고 한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축복과 성공만을 구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데에 그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셔도, 나를 형통케 하지 않으실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지 않아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린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 질병의 고통에서 능력을 행사하지 아니하셔도 나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신앙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박국 3장 17절과 18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에게 축복하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이 고통 속에서 구원하지 않아도,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는데 내어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청년의 신앙!
4. 구원을 체험한 신앙이었습니다.
본문 26절에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영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결국 저들의 신앙고백에 의해 느부갓네살 왕은 분이 가득하여 그 풀무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지시하며 그들을 던지라고(19-20절)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을 결박하여 던지는 순간에 던지던 자들은 불에 타 죽게 되었고 세 청년은 풀무 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23절).
이러한 모습은 곧 진리를 지키는 신실한 자에게 대한 세상의 푸대접입니다.
그러므로 창세 이래로 수없이 많은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를 전하며 사수하다가 복음을 대항하는 잔인한 세상에 의해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불의와 악법이 진리의 사람들을 풀무 불 속에 던져 버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풀무 불 속에 찾아오신 "신들의 아들"이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24-25절).
칼빈은 이를 천사라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불꽃 속에서 구원의 주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시 환난을 만나는 그 때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불꽃은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주 만물을 생성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셔서라도 자기 목적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결박했던 줄만 타 버리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옷도 타지 않는 완전한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은 이사야 43장 2절을 응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성도 여러분!
이 구원의 기적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느부갓네살(사단)의 승리로 끝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는 구속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결과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여호와 하나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공포하며, 드디어 그들을 바벨론 도(道)에서 더욱 높였다고 하였습니다(28-3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청년의 신앙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었습니다.
구원을 체험한 신앙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우상들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곧 황금(돈)과 과학주의와 지식과 권력, 스포츠와 미신과 점성술과 심령 과학 등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풀무불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불길이, 운명론의 불길이, 우상 숭배의 불길이, 세속 주의의 불길이, 과학만능주의의 불길이, 종교 다원주의의 불길이, 정욕의 불길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승리를 하려면 우리의 신앙이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되어야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신앙이 뚜렷해야 하고, 죽음을 불사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직접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세상의 현장에서 구속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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