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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청년아

본문

오늘의 신약의 본문은 매우 대조적인 두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분은 30 초반의 가난한 청년인데 반하여 다른 청년은 나이는 분명치 않으나 역시 젊은 부자입니다. 이 부자 청년에 관해서는 복음서 세 곳에서 모두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사도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기록한 마태는 “청년”이라고 했고 누가는 “관원”이라고 했고 마가는 그냥 사람이라고 했는데 세 기자 모두 그를 부자 또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종합을 해 보면 관운도 좋아서 젊은 나이에 출세를 한 사람이고 거기에다가 부까지 겸한 사람입니다. 당대에나 지금이나 관원으로서는 아직 젊은 나이에 정상적인 방법으로서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요즈음 건축과나 세무과에 있는 공무원들 중에는 불법적으로 뒤를 봐주고는 큰돈을 챙기는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이 관원은 적어도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이런 부정을 저질러서 부를 쌓은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부는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 청년은 돈 많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호강을 누리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겉모양부터가 다른 이 부자 청년이 빈 털털이 사람들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가장 가난한 갈리리 호수 동네 출신 어부들, 호수 가에서 고기나 잡아먹고 살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고기배나 그물까지도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위하여 다 버리고 빈 털털이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돈 많이 가진 이 청년을 보는 순간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얼굴에서나 옷에서나 말의 표현에서나 자기들과는 딴판인 자기들 또래의 이 청년을 보면서 묘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이런 부자요 관원인 그 청년이 젊은 30대 초반의 청년 예수님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말해서 아무런 부러울 것이 없는 이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예수라는 청년을 찾아왔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분이었지만 그의 주변에 둘러 선 12제자들마저도 모두 가난뱅이들인 그런 분을 찾아와서 “영생을 얻는 길”을 구하고 있는 것이 정말 놀라왔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 부자 청년이 처음에 찾아 와서는 무릎을 꿇은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제일 귀하게 여겨지는 부로 철철 넘치는 이 청년이 아주 가난한 예수님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신기하였을 것입니다.
실로 이 청년은 세상의 일반적인 부자들과는 달랐습니다. 돈 꽤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거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그의 질문의 요지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돈 많은 부자로서 세상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이 평안히 살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이런 청년이 매우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오다니! 실로 세상적인 기준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최고의 경건은 율법을 지키고 십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 부자는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 했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종교적 만족도 채워졌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데에 그의 문제를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율법의 계명을 다 지킴에서 영적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대의 유대의 율법주의가 한 영혼의 핵심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경직되고 형식화된 율법주의 종교로서는 이 청년에게 영혼의 만족을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형식적인 절기지킴과 위선적인 제사행위가 판을 치는 그런 종교에서 이 청년은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을 외형적으로는 다 지켰습니다. 엄격한 유대가정의 교육을 받고 자라오면서 형식적으로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모든 일을 중지하고 조용히 율법책인 토라를 읽으면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실로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였습니다. 그의 집에나 주위에는 이방신의 우상이나 잡신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른 적도 없습니다. 그 거룩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을 위한 계명도 다 지켰습니다. 부모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 많은 재산을 남겨주신 부모님께 효자 노릇을 다했습니다. 혹시 그의 부모님들이 저 나라에 먼저 가셨을 경우에도 부모를 공경하여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살인은 물론 아니 했습니다. 간음도 안 했습니다. 도적질도 물론 아니 했습니다. 거짓 증언을 해 본적도 없습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아내가 있고 남종이나 여종이 풍부하고 소도 나귀도 많은데 왜 이웃의 소유를 탐하겠습니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부자였습니다. 실로 그의 고백 그대로 믿어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젊은이의 대답을 어여삐 여겼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청년이요, 늠늠한 청년으로서 점수를 후하게 주었습니다.
이 정도로 대화가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주문은 이 청년에게 아주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청년 예수가 부자 청년에게 준 이 권면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 청년에게서 부를 제하라니 그 결과는 뻔합니다. 아마도 그의 관운도 돈이 많아서 생긴 것 같은데, 그가 가진 돈이 없어지면 관원 자리도 떨어져 버릴 것이고, 그의 사회적인 인기는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고 말 것입니다. 실로 그의 부는 그의 전 존재를 붙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존재의 기초를 제하라니요! 예수님은 그의 삶의 핵심을 찌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자청년의 종교성은 “소유”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소유모델의 신앙이란 인간을 위주로 하는, 인간을 위한 신앙을 말합니다. 올바른 신앙이란 자신의 존재를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존재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에릭 프롬은 이것을 "존재"(Being)의 믿음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종교성입니다. 그런데 저 부자 청년이 가졌던 종교성은 소유(having) 모델이었습니다. 그가 계명들을 열심히 지킨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영광되게 하고 그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소유를 불리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데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정이 확보된다고 여기고 안식일을 잘 지켰던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 것도 재산을 많이 물려준 것을 고마워서 자기 본위의 부모순종이었습니다. 기타 다른 계명을 지킨 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순종하기 위함보다는 자신이 사람들 앞에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의 사회적인 인기는 계속 올라가고 자기의 재산은 더욱 증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가졌던 종교성은 일반 사람들이 가졌던 종교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신앙과 구속의 은총에 감격하여 그 존재 자체를 좋아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따르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영생을 구한 것도 소유모델의 한 모습이었습니다. 이 땅에서도 잘 살고 저 세계에서도 잘 사는 보장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시한 종교성은 그와는 반대입니다. 섬김의 길을 그는 제시하였습니다. 타자를 위한 삶을 권고하였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 중간에나 길 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길 입구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고 따르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앙과 일반 종교성과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의 길을 물었고 그리고 그 길의 올바른 해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 들어서기 위한 십자가를 거부하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십자가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먼저 이웃을 섬기고 그리고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사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참된 종교성과 영성을 그는 거부하였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처음 입구에서 십자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가졌던 소유모델의 종교성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매우 현세적이었고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땅과 저 땅 양쪽 모두에서 안락한 삶을 추구하려고 한 일반 종교성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지켰다고 고백한 십계명을 실제로 그는 거부한 셈입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의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실천은 공념불에 불과하였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을 따라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5계명에서 10계명을 잘 지켰는가 하면 그것도 실은 아닙니다. 예컨데 7계의 경우 그 부자 청년이 자기 자신은 나쁜 짓을 아니했다손 치더라도 가난한자들이 먹을 것을 위하여 몸을 팔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죄는 없었는지요 그들에게 그 많은 재산 중 얼마를 나눔에서 많은 여인들의 간음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외의 도적질이나 탐심이나 기타의 인간의 범죄들이 돈 때문에 발생하고 있음을 그가 안다면 그 많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서 그 사회를 보다 밝은 사회로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쪽이 많이 가짐으로서 다른 쪽은 범죄케 하는 오늘의 우리 사회 현실을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소위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겠다는 사람으로서 그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는 제자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한변호사사협회가 며칠 전에 펴낸 2003년도 한국의 인권상황보고서에 보면 지난 1년간 빈익부 부익부의 현상이 더 심화되었고 그 결과로 300만 명의 사람들이 기초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로 자살자들이 계속 이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청년 예수는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외치시기까지 하시면서 청빈의 삶을 사심에서 참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돈 때문에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고 가정이 파괴되고 심지어 자살까지 서슴치 않는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청년들은 청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청렴하고 정직하고 청빈한 예수님의 청년상을 배워야 합니다. 청년들만이 아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예수님의 삶을 본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지금 실직 상태에 있거나, 공부를 하고 있거나, 직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여! 부자 청년에게서 거꾸로 배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지금의 사회적인 환경이 매우 악조건이지만 이왕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었으면 부자 청년의 종교성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오직 청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위하여 있는 것을 다 포기한 그의 제자들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소유에 기초한 신앙이 아니고 존재에 기초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청년 예수의 모습을 가지고 산다면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의 잘못된 종교관이나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말고 오로지 청년 예수의 모습을 본받아 미래의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만 산다면 그는 저 부자 청년이 구했던 영생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생과 내생의 값진 삶을 얻습니다. 이런 사람을 사는 젊은이들은 이사야가 증언하는 "독수리의 날개치고 올라가는" 웅비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처지는 삶이 아닌 높이 솟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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