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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세상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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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장애인이나 환자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장애인에 대하여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그들을 동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특히 장애인이나 환자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하는 레위기에 나타난 정결과 부정의 문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보기에 좋다고 하셨고, 더욱이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하지만 피조물을 정결과 부정의 원리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이미 노아 시대에 방주에 들어가는 동물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런 구분은 이스라엘의 역사 과정에서 생성된 후대의 시대적 산물이거나 필요에 의한 인위적 결과로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구약시대에 인간이나 동물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외형적으로 건강한 모습(정결)을 유지해야 했다. 그 정결이란 주로 겉으로 드러난 흠이나 상처의 부재를 의미했다. 제사장의 경우 눈이 근시거나 코가 삐뚤어져도 혹은 습진이나 버짐만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신체적 조건에서 자격 미달자가 되었다. 제사장의 영성이나 도덕이 중요한 조건이 아니라 외형적 조건이 제사장의 적합성을 결정했다. 그 신체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 제사장은 사회-종교적 차별과 소외를 겪었다. 제사장도 그러할진대 일반 장애인의 형편이 어떠했을까 하는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편 예수의 초기 활동 역시 장애인과 환자들의 치유 사건으로 가득하다. 예수께서 병자나 장애인이나 죽은 자들을 살리신 본문이 복음서에서 무려 70여 곳에 이르고 있다. 그 가운데 장애인(중풍, 시각 장애인, 지체장애인, 청각 장애인 등)에 관한 기사가 26개의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본문들로부터 장애인에 관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바디메오를 제외하고는 어느 장애인의 이름도 밝혀있지 않다. 복음서에 나타난 장애인은 대체로 가난하고 실업자이며 거지이거나 부랑자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성가신 존재로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만이 유일하게 지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가까이 두시고 그들의 불편한 신체를 고쳐 주셨다. 하지만 문제는 이 본문들이 장애인들에게 적지 않게 당혹스러움을 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치유된 것은 그들의 믿음이나 죄 사함 혹은 주인이나 친구들의 믿음으로 치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죄가 있거나 믿음의 부족으로 장애나 병을 얻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진짜 마음을 보기로 하자. 본 설교 본문인 요한복음 9장은 나면서 시각 장애인이 된 무명의 거지를 소개하고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우연히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의 모습이 유독 불쌍하고 초라해서인지 그는 곧 그들의 대화거리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궁금한 것은 그의 장애의 이유였다. 이때 예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의 장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예수는 장애와 죄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하셨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가 장애의 삶을 통해 나타나실 것이라는 엉뚱한 대답을 하셨다. 그는 장애의 관점을 과거에 두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나게 할 미래로 옮기셨다. 예수는 장애를 여호와 하나님 존재와 활동과 영광의 자리로 여기고 계셨던 것이다. 비록 그는 시각 장애 때문에 가정과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예수는 그의 시력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가정과 사회와 종교로 복귀하도록 그의 장애를 고치셨다. 그가 시력을 되찾은 후 그가 모친과 이웃들과 함께 있었던 것을 보면 그는 분명 가족에게로 되돌아갔음이 틀림없다.
한편 우리는 이 장애인이 시력을 회복한 후에도 자신감이 없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의 이웃이 그에게 예수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도 모른다는 답답한 대답만 할 뿐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듯하다. 그의 대답은 예수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 보인다. 시력 회복에 대한 감격도 기쁨도 없어 보인다. 사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인이어서 생존을 위한 방법은 동냥 밖에 없었다. 그가 거지가 된 것을 보면 그의 부모조차 그를 보살피지 않았거나 너무 가난한 집안이어서 본인이 구걸이라도 해야 했던 것 같다. 그의 실제적인 장애는 없어졌어도 그가 평생 어둠 속에 살았던 마음의 장애나 사회적 장애는 아직 그대로이다. 그는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았기에 지금 볼 수 있는 눈이 있어도 이 눈과 함께 살아야 할 방도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배워야 했다. 육체적 장애는 극복되었지만 앞으로 그가 심리적 사회적 영적인 건강함이 회복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제 그는 구걸도 하지 못한 체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할 방도를 찾아야 했기에 어쩌면 더 막막해 하면서 혼란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많은 장애인이 장애를 입은 후 혹은 장애를 극복했어도 평생 풀어야 할 다른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장애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다. 현대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더욱 복잡하게 되었고 또한 각종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후천적 장애인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우리 모두 잠재적 장애인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한계가 있고 상처받기 쉬우며 약하기 때문에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건강이란 살아가는 힘이요, 고난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를테면 건강은 신체기관의 상태가 아니라 살아내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차가 있다. 똑같은 개인일지라도 시간과 장소와 나이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생긴다. 단지 장애나 질병의 유무가 인간 가치의 척도이거나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진정 건강하고 성숙한 사회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공존하되 상호보완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장애 운동은 지금까지 주로 시민 단체나 장애인 단체들이 주도해 왔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해 왔다. 그러나 교회나 기독교 신학은 장애인 권리나 접근에 대하여 매우 미온적이거나 무관심해 왔다. 때문에 많은 장애인들이 일반 교회로부터 따로 떨어져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많은 교회가 장애인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있지 않지만 교회의 모든 건축 구조나 인식이 장애인을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교회,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가 묻고 싶다. 시각 장애인만이 모이고, 지체 장애인만이 모이는 교회,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일까 가끔 한 가족 전체가 장애인인 경우를 볼 때 “여호와 하나님, 어쩌자고 이러십니까”고 울부짖지 않을 수 없다. 가족 가운데 한 명이라야 어떻게 함께 어우러져 살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의 경우도 비슷하다.
21세기에도 장애인 스스로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 때문에 싸워야 한다면 그것은 수천 년 전 이스라엘 사회에 흐르던 레위적 세계관에 아직도 사로잡혀 사는 것이다. 지금도 장애인에게 있어서 삶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와 같다. 이 세상에 아직도 함께 저항해야 할 마지막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장애인에 관한 편견과 차별과 소외일 것이다.
많은 장애인들은 나 잘할 수 있다고, 제발 이 사회의 한 구석이라도 끼어달라고 외쳐대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쳐 내는 세상에서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보겠다고 세상을 향해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요구조차 거부하거나 외면하거나 침묵한다. 그러는 한 장애인은 교회에 올 수가 없다. 개별적인 교회나 성도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일종의 편견이나 편의 시설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물리적 조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늘 소외되고 차별받다 보니까 교회에 온다고 하여도 적응도 쉽지 않다. 때문에 장애인들이 끼리끼리 모인다. 천국도 그럴까
예수께서 장애인이나 환자들을 그의 사역 초기에 돌보셨던 것은 그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약자는 장애인이나 환자들이었기에 예수는 그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다. 이것은 예수와 복음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세상의 약자들 어쩌면 현대 사회의 약자인 장애인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일과 영광을 드러내야 참으로 교회의 의미가 제대로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교회는 참으로 죄인과 약자와 장애인의 편안한 공동체가 되어야 교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이미 2000년 전 장애인과 병자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따르는 모델이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회와 신학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상호 의존적으로 기대고 기대어주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길을 과제로 삼고 앞장서야 할 것이다. 모든 장애인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 세상 속에서 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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