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장애인] 주의 은혜를 전하는 자

본문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알리고 장애인의 재활의욕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가 공식적으로 정한 법정 기념일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장애인의 날이 들어 있는 주를 장애인선교주일로 지킵니다. 사실은 장애인의 날이나 장애인선교주일이 따로 정해져 지키는 날이 없어야 합니다. 평상시 우리 삶 속에서 서로 사랑을 베풀고 특히 기독교인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구지 장애인에 대한 특별한 한 날을 정해 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일 년 365일 중 4월 20일만 장애인의 날이라면 나머지 364일은 비 장애인의 날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365일을 축복된 날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장애인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이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해주시는 올바른 인간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장애인이라는 어감 자체는 그리 좋은 단어는 아닙니다. 장애인(障碍人)라고 할 때 障碍와 장애물(障碍物) 이라고 할 때 障碍는 뒤에 있는 사람과 사물만 다를 뿐이지 장애라는 한문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국어사전에 장애물이라는 뜻은 ‘가로막아서 거치적거리게 하는 사물’이라는 뜻인데 뒤에 사람人자를 붙여 장애인이라고 하면 ‘가로막아서 거치적거리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사용된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어감 자체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障碍人이라는 한문 표기를 長愛人이라고 하면 길게 사랑해야 할 사람의 의미가 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누구를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 끝까지 길게 사랑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 위해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호칭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반대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정상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정상인에 대한 반대말은 비정상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비정상인이 됩니다. 신체의 불편함 때문에 사람의 인격까지 비하 됩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에 대한 반대어는 비장애인이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그리고 장애우, 장애자, 불구자라는 호칭도 장애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정신박약아, 정박아는 정신지체인, 귀머거리는 청각장애인, 벙어리는 언어장애인, 장님, 소경, 봉사는 시각 장애인이나 맹인으로, 꼽추, 곱사등이는 척수장애인으로, 앉은뱅이는 하반신장애인으로, 절름발이 반신불수는 지체장애인으로, 문둥병, 나병은 한센병으로, 미치광이, 정신병자는 정신장애인으로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실 장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내 가족의 일이며 나의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과는 별로 관계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장애인 중 선천적 장애인은 4%에 불과합니다. 90%이상이 후천성 장애인입니다. 장애인의 대부분이 건강하게 살다가 교통사고, 재해, 질환 등 기타 사고로 인해서 장애를 입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언제 장애를 입을지 모르는 예비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10%를 장애인으로 추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율에 의하면 우리나라 인구가 5천만 명이라면 장애인이 500만 명이라는 의미입니다. 10명 중 한 명이 장애인이라면 우리 가족 중 한 명은 장애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이웃집의 문제나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집의 문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세상 그 어떤 곳보다 더 앞서가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가 더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부도 장애인 고용 촉진법을 만들어 공공기관이나 일정 규모 이상 사업장에는 일정수의 장애인을 고용하게 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과태료까지 물리는 강력한 조치를 합니다. 일정 건축물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의무화해서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장애인들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는데 소극적입니다. 장애인 목회자를 청빙하여 교역자로 근무하게 하는 교회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10명 중 1명을 장애인으로 보내 주셨는지를 신앙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를 부흥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게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서로 도우며 더불어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 14: 28,29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1/10을 십일조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는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은 물론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였습니다. 특별히 장애인이라는 말의 언급은 없지만 장애인도 경제적 자립이 어렵고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에 구제하는 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에 준하는 수준까지 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모두가 장애를 가진 자들입니다. 성경도 장애의 종류만 다를 뿐 여러 장애인이 나타나 있습니다. 신체적 장애, 정신적 장애도 있지만 특별히 영적 장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2:18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이사야 43:8에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영적 장애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배워야 합니까 죄로 가로막힌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은 보지 못하고 보이는 세계나 물질만 보게 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그렇다 보니 장애에 대한 개념도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합니다. 육체의 장애가 있으면 모든 삶까지 그렇게 보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사실 가장 큰 장애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애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 잠시 빌린 것뿐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필요한 우리의 육체를 등한시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육체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뜻이 있고 장애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육체를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알고 깨달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입니다.

분명 장애는 힘들고 어렵고 고난인 것은 사실입니다. 장애가 있는 것을 좋아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의 아픈 곳에 숨어 계십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정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항상 고난 주간에 장애인의 날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이것을 알고 정한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라는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더 가깝게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 집약된 곳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내려 오셨지만 육신의 몸은 인간이었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잠을 자지 않으면 잠이 오고 몸에 못을 대면 피가 나고 아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인간의 것들을 참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난, 그것도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더 빨리 만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하는 통로며 고난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아무 고통이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빨리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고난 없는 축복, 고난 없는 영광이 없음을 직접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장애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장애는 삶을 망가지게 하며 모든 영혼까지 병들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하십니다. 고난은 특히 몸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장애를 문제로 보지 않고 의미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33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렇습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고생시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하겠습니까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고난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을 드러내시며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이 과정이 힘든 것이지 분명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축복해 주십니다. 저도 제 자신이 몸에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또 현장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가슴으로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남에게 보여 지는 신체적적 장애는 아니었지만 20대초부터 앓고 있던 신장장애가 저를 괴롭혔습니다. 한참 공부해서 직장생활을 해야 할 때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했지만 여전히 몸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신학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기로 작정은 했지만 여전히 연약한 몸은 결혼도 포기하게 하고 어떻게 보면 인생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몸이 사역하는데 방해가 될까 바 부교역자로 근무 할 때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겼습니다. 연약한 몸이 알려지면 교회 사역을 하지 못하고 먹고사는 일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안산제일교회에 장애인 부서를 맡으면서 저의 교만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부모님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삶과 함께 하는 봉사자와 교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며 오히려 더 큰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하시는 고훈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만나면서 그분들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다르게 고난을 주셨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종이 한 장의 차이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장애는 결코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축복인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신체적 장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고난을 주신 것 중에 하나이며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난이라는 종류만 다를 뿐이지 여호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장애인 스스로가 깨달아야 하고 또한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함께 하면 극복되어지는 것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울 된 것은 그에게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옥에 여러분 갇히고, 매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고, 사십에 한 번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형제들의 위험,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고, 광주리타고 도망을 치고, 돌에 맞아 거반 죽은 상태로 버림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육체의 가시 즉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바울이 스스로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특별히 육체의 가시인 질병이 치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함이라”라고 바울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는 기도하는 것들이 모두 응답받는 것들입니다. 건강하고, 돈 잘 벌고, 어려운 일 없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처해 있는 극한 어려움이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약함이 은혜입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을 찾게 되고 약한 것만큼 여호와 하나님이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은혜의 순간들을 장애인 사역을 하며 현장에서 직접 보았고 제 자신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건강도 회복해 주셨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참소망을 주시는 교회를 저에게 맡겨 주시고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도 제가 만난 기적의 여호와 하나님을 이 참소망 교회를 통해서 만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연약한 자를 더 사랑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장애인을 사랑하십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 등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약자보호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신명기 14장에 기록된 십일조입니다. 당시 구약시대에는 십일조 용도는 레위인에게 사용되었지만 고와와 과부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추수법도 그렇습니다. 곡식을 밸 때 밭모퉁이까지는 베지 않았습니다. 떨어진 이삭도 줍지 않았습니다. 감람나무 열매나 포도를 딸 때도 남겨 두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위해서 이미 출애굽 중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 하시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께 하신 것으로 동일 시 하십니다. 마태복음25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요 반대로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크게 3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마태는 마 4:23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르치고, 천국의 복음을 전파 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 ‘가복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1/3이 연약한 육체를 고치는 장애인 사역을 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한센스, 혈루병, 지체장애인, 중풍병, 38년 된 병자 등 많은 병과 장애를 고치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이후에 보면 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묻게 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고 하시면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이미 공생애를 처음 시작 하며 취임설교 때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장애인을 보시고 고치실 때를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9-3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맹인 두 사람을 만나셔서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눈을 만지실 때 보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7:31-37에 보면 갈릴리 호수에서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더듬는 자를 만나서 고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고치셨습니다. 그 외도 이렇게 예수님께서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고치실 때 그냥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시므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 ‘불쌍하다’는 원문의 뜻은 “창자가 끊어 질듯 한 아픔과 가슴이 찢어질듯 한 아픔”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장애인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들의 장애를 안타깝게 여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이 약하다는 것은 그 만큼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약하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음을 가지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위로가 되면 치료가 된 것입니다. 육체가 치료되지 않아도 영혼이 치유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이 없고 은혜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이 단계의 신앙까지 성장하도록 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고난을 주셨습니다. 육체의 장애는 그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라는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가고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보았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각자 주신 고난들을 신앙적 의미로 받아드리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과 고난을 다 감수하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분명 영광으로 나타나심을 믿고 십자가만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