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한 사람 장애인
본문
지금 일본에서 사전 통보 없이 방사능오염수를 유출해서 우리정부측은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한일 간의 마찰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비록 방사능수치가 낮아 인체에 해를 주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국민들의 의심과 염려는 식을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일 방사성 물질 유출로 인한 여러 가지 해독들 중에 인체에 암을 유발한다든지 기형아를 출산 한다든지 하는 지식적 측면에서 공포와 특히 후쿠시마(福島) 제1원자력발전소의 방사성 물질 유출로 토양이 기준치 이상으로 오염될 경우 벼농사를 금지하기로 했다는 보도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방사능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잘 아시다시피 현대의 산업화를 넘어서 지금은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지요. 참 세상이 편리해졌습니다. 이렇게 편리해진 삶의 대가로 지불 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내용이지만 환경파괴입니다. 최근에 환경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마는 자연의 파괴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우리의 몸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 방사능유출은 바다와 토지와 인간을 파괴하는 아주 강력하고도 위험한 것이기에 세계가 심각하게 일본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동차가 편리를 주지만 공기를 탁하게 하고 또 현대의 농업의 대단한 기술은 많은 풍작을 안겨 주시만은 농약을 과다하게 치고 유전자를 변형하고 이런 일을 하면서 중요한 것을 주는 것 같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리는 이런 안타까움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생겨난 역기능적 산물이 있다면 이른바 장애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신생아출생을 보면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신체적 문제를 안고 태어난 신생아들이 많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장애에는 선천적 장애인 보다 오히려 후천적장애인이 수가 90%를 넘어 가고 있습니다. 후천선 장애인들 중에는 이런바 산업재해, 교통사고, 약물문제 이런 문제로 생겨난 수많은 장애인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후천적 장애인들을 보면 우리 모두도 어쩌면 예비 장애다 할 만큼 누구도 이 장애에 대해서 예외가 아닌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체적 장애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대 사회 속에서 급격이 증가하는 것은 정서적 장애인들입니다. 수많은 중독자들 인터넷 중독자 게임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쇼핑중독자 핸드폰중독자 같은 부적응 인들이 생겨나면서 이런 정서적 장애인들은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 생애를 보면 그 생애가운데 절반을 장애인들을 만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 장애인들을 주목하셨고 또 그 장애인들을 회복하는 것이 사역에 중요한 목표가 되셨는데 오늘 읽었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 중에 한 명의 장애인을 만났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만나셨고 어떻게 회복시켰었고 어떤 태도로 그들에게 다가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중한 본문이 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한 장애인을 향한 태도와 마음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시대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어떻게 섬겨야 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발단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로 맹인들이 위치한 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냥을 해서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 한 모퉁이에 아마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기관심에만 빠져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이 길거리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 유독 머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1절 말씀에 그 내용을 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보신지라’는 동사 한 구절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게 많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특별히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보셨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세상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잊혀 질수 있는 사람, 많은 사람들 중에 관심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을 관심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셨던 그 시선이 이 한 장애인을 향한 주님의 섬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 특별히 유명하지도 않고 정말 무명의 한 사람을 향하여 갖는 관심의 시선 하나 거기서부터 장애인들을 위한 섬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길을 가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보였을 것입니다만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지나쳤지만 예수님은 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보셨습니다. 말씀드렸지만 한 사람에 대한 관심 있는 시선이 바로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대할 때 이런 관심 있는 시선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니까 예수님 때문에 이 한 맹인을 제자들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이 맹인에 대한 궁금함이 생겨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이 2절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절에서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시기를‘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들은 장애자를 가르쳐서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 성경에는 소경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제자들이 이 한 사람을 두고 맹인이라는 용어를 붙었을 때 단순히 장애인을 가르치는 지시적 용도만으로 불렀을까 아니면 그 당시 유대사회가 그랬듯이 이 제자들도 똑같이 장애인을 향하여 다소는 비하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그를 향하여 맹인 그렇게 불렀을까 모르긴 해도 제자들은 비하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애자를 향하여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예수님은 ‘맹인’이런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이 사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맹인이 장애우일 수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먼저 이 장애인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예수님이 이 한 사람을 보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사회가 이런 점에서는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태도도 많이 개선이 되고 용어도 많이 순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분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도 장애인을 섬기는 많은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 중에 그의 90%이상이 기독교가 운영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장애인을 섬기는 기본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도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어려운 일을 하지 못합니다. 흔한 예로 만 원짜리 지폐를 끄집어냈는데 하나는 새 돈이고 하나는 구겨진 돈입니다. 만 원짜리가 구겨졌다고 해서 만 원짜리의 돈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입니까 구겨져도 여전히 그것은 만 원권입니다. 비록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똑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말아야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맹인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진 것이 예수님 ‘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을 가만히 들어보면 제자들이 고정관념에 대단히 매여 있었다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제자들의 질문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애는 곧 죄의 결과다 하는 전제위에서 질문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누구의 죄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하시기를 누구의 죄다 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말씀하시기를 ‘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예수님이 장애인을 보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정말 광범위한 경우에서 보면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은 사실 죄의 결과가 맞습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이 신체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모든 문제가 죄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한 개인의 장애인을 두고 이것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아니하시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섭리가 있다 이렇게 보셨고 장애를 극복할 수 없는 숙명으로 보신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려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불교나 힌두권이 더 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마는 장애에 대한 건강치 못한 고정관점이 그 사회는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애는 죄의 결과다 전생의 죄의 결과다 이렇게 보는 관념이 그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은 대단히 힘들고 가족들도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그 깊은 원인을 우리가 다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장애가 신체적 장애라 할지라도 정서적 장애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은혜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또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그 비장애인이 건강한 신체적 조건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아니고 욕망의 손에 붙잡히면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 그 자체가 나쁘다 좋다 이렇게 보기보다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어떤 분이 중증장애아를 키우고 있는데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새벽마다 눈물의 기도가 아니면 기도를 이어갈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그 부부에게 다가가서 손을 꼭 잡으며 ‘집사님 힘드시죠’그랬더니 그 부부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님 저희들은 행복합니다. 저 중증장애아를 저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셔서 저희들은 저 아이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과 매일 영적 교제를 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감사하시요’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누구의 손에 붙들려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임신을 하고 검사를 했더니 장애아라는 것입니다. 낙태수술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새벽에 나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낙태를 허락해 주세요 저는 장애아를 키울 수 없습니다’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그 집사님의 마음에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만이 그 아이를 잘 키우고 양육할 수 있기에 내가 너에게 맡기는 것이란다’그래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의 죄가 아닙니다. 특히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 죄는 모두의 공유된 죄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파괴의 주범이 누구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모두의 죄라는 죄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들보다 낫다 이 관점도 잘못된 관점이고 또 비장애인은 장애인들보다 축복을 받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이라든지 또 비장애인은 장애인들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다 잘 못된 고정관념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더 많은 관심 예수님의 더 많은 사랑은 바로 그 시대의 장애인들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심판대 앞에서는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지만 어쩌면 천국에서는 바로 이들이 더 관심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애에 대한 시대적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시기를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 왔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그 목적 그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일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많습니다마는 그 일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마9:35 ‘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해 놓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믿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즉 제자 된 사람을 온전한 제자가 되게 하려고 계속해서 가르쳤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 즉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하여 전도하시고 선교하신 일입니다 세 번째 모든 병과 약한 것에 처한 사람들을 고치시는 일 즉 육체적인 장애나 정서적인장애나 여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 이것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신 세 번째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 왔다 했을 때 그 일이 어디에 해당되느냐하면 이 세 번째 일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이른바 이 길거리에 앉아 있는 한 맹인을 회복시켜서 온전하게 하는 이 일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려 왔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으시죠 무엇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까 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성숙한 제자로 양육되기 위해서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매일같이 노력하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또 무엇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고 얘를 쓰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고 또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한사람에게 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높은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고 무시 받고 멸시받는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존귀하게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장애인을 고치면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어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려 왔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여야 하리니’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수인칭대명사를 쓰시면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제자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동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한 맹인을 만나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관심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난 이후에 물론 지적 호기심이 생겨서 질문은 했지만 결국 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수많은 장애인을 품으며 기적을 행하며 섬기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 일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때라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하는 이 말씀은 삶의 고통 앞에서 지적 호기심으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즉각 고통을 제가하기 위해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일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제자들로서 이 일을 감당하고 함께해야 되는데 어떻게 행동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될까요. 우리가 당장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해서 많은 장애인들을 고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까요 예수님도 그 시대의 장애인들을 기적으로 다 고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몇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병들고 약한 사람들의 고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히 여겨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들을 향해 고정관념을 갖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들을 섬길 때 우리가 그들 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섬기지 말아야 됩니다. 그들에게 마치 동냥하듯이 섬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저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던 장애자는 신체장애자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정서적으로 공감을 하지 못하는 한 무리를 만납니다. 제자들 속에서 정서적 불안정함 정서적 장애를 우리가 읽어냅니다. 또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보면 이 장애자를 가지고 예수님을 고사하려고 달려드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무리들을 봅니다. 한 사람의 불행을 가지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려고하는 바로 이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을 보면서 너무나 어두운 영적 장애를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장애는 어떤 신체적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지고 보면 어떤 부분이라도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으면 그는 장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좋은 일을 보면 기뻐해야 되는데 남의 좋은 일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무엇인가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슬퍼해야 되는데 그 일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면 내 마음에 지금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되고 정상적이라면 정말 기도가 뚫려야 되는데 말씀도 잘 들리지 않고 기도도 잘 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나에게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형태가 다를 뿐이지 장애의 종류는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장애를 자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대할 때 나는 정상인이고 당신은 장애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류가 다를 뿐이지 나도 동일하게 장애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장애인을 위한 정말 참된 섬김은 나는 높은 자리에 있고 너는 낮은 자리에 있고 이렇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헨리나우웬이라는 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일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도 하신 분이고 지명도가 높으신 분입니다.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마음이 공허하고 해서 대학교수를 사임하고 라르쉬공동체라는 곳에서 신체장애 정신장애자를 가진 아담아넷트라는 사람을 맡아서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을 섬기면서 자기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기는 모든 면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담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자기 속에 장애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안에 영적인 장애가 있구나 이것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게 된 것이 바로 ‘아담’이라는 책이지요. 이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을 있습니다. ‘나는 처음 아담을 돌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그러니 오히려 아담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담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나는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했다 아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했고 아담의 투병과정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광야생활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의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고난을 봤고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망을 발견했다 아담은 아무것도 안 하고 거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아담은 내 생애에 최고의 스승이었고 안내자였고 그리고 소중한 친구였다’ 자기가 장애자를 만나보니까 자기 속에 장애를 발견하면서 자기는 아담을 섬겼고 신체적으로 섬겼지만 아담은 영적으로 섬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른바 ‘아담’이라는 책을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장애교실을 운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귀난치병환자의 쉼터를 만들면서 장애인을 섬기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며 우리에게 부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애인의 주일을 맞이하여 무관심하게 묻혀있는 아주 작은 자 아주 연약한 자 이런 자들을 위하여 보다 더 마음의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가면서 섬김으로 서로 회복되고 서로 치유되는 그런 정말 아름다운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장애인들을 대할 때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로 인식해야 됩니다. 구약은 신앙공동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로 신앙공동체입니다. 민족적공동체가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입니다. 누구든지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도 그런 관점에서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 공동체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신앙공동체입니다. 연일 어느 신앙공동체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우리영명 공동체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공급받고 보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장애인들을 우리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가 2012년에는 희귀난치병자를 위한 쉼터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신앙공동체에서 함께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하며 모든 면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공동체에서 지체들 아닙니까 몸의 어느 부분이든지 그것이 크든지 적든지 간에 아프면 그 모든 몸은 그 아픔에 반응하며 집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서 장애인들도 아픔을 감내하면서 살지만 특히 부모들은 그 아픔이 배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죄로 여기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와 유교문화의 고리에서 아픔을 당하는 자들이 이웃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 부모가 되지 않아서 우리는 괜찮은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자녀로 인식하셔야합니다. 장애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일평생을 고통과 번뇌로 살아갑니다. 그들의 아픔과 번뇌를 함께 짊어지고 가는 공동체,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그 일을 우리에게 감당케 하셨습니다. 영명공동체가 이 일을 위해 힘 써는 복된 공동체가 되시기를 소망하며 여러분들의 헌신과 씨앗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잘 아시다시피 현대의 산업화를 넘어서 지금은 정보화시대에 살고 있지요. 참 세상이 편리해졌습니다. 이렇게 편리해진 삶의 대가로 지불 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내용이지만 환경파괴입니다. 최근에 환경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마는 자연의 파괴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우리의 몸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본 방사능유출은 바다와 토지와 인간을 파괴하는 아주 강력하고도 위험한 것이기에 세계가 심각하게 일본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자동차가 편리를 주지만 공기를 탁하게 하고 또 현대의 농업의 대단한 기술은 많은 풍작을 안겨 주시만은 농약을 과다하게 치고 유전자를 변형하고 이런 일을 하면서 중요한 것을 주는 것 같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리는 이런 안타까움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생겨난 역기능적 산물이 있다면 이른바 장애인들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신생아출생을 보면 이전보다도 훨씬 많은 신체적 문제를 안고 태어난 신생아들이 많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장애에는 선천적 장애인 보다 오히려 후천적장애인이 수가 90%를 넘어 가고 있습니다. 후천선 장애인들 중에는 이런바 산업재해, 교통사고, 약물문제 이런 문제로 생겨난 수많은 장애인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후천적 장애인들을 보면 우리 모두도 어쩌면 예비 장애다 할 만큼 누구도 이 장애에 대해서 예외가 아닌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체적 장애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대 사회 속에서 급격이 증가하는 것은 정서적 장애인들입니다. 수많은 중독자들 인터넷 중독자 게임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쇼핑중독자 핸드폰중독자 같은 부적응 인들이 생겨나면서 이런 정서적 장애인들은 많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 생애를 보면 그 생애가운데 절반을 장애인들을 만나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 장애인들을 주목하셨고 또 그 장애인들을 회복하는 것이 사역에 중요한 목표가 되셨는데 오늘 읽었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 중에 한 명의 장애인을 만났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만나셨고 어떻게 회복시켰었고 어떤 태도로 그들에게 다가갔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중한 본문이 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한 장애인을 향한 태도와 마음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시대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어떻게 섬겨야 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서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발단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로 맹인들이 위치한 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냥을 해서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 한 모퉁이에 아마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기관심에만 빠져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이 길거리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 유독 머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1절 말씀에 그 내용을 봅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지만 ‘보신지라’는 동사 한 구절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볼게 많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특별히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이 보셨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세상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잊혀 질수 있는 사람, 많은 사람들 중에 관심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을 관심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셨던 그 시선이 이 한 장애인을 향한 주님의 섬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한 사람 특별히 유명하지도 않고 정말 무명의 한 사람을 향하여 갖는 관심의 시선 하나 거기서부터 장애인들을 위한 섬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길을 가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보였을 것입니다만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지나쳤지만 예수님은 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보셨습니다. 말씀드렸지만 한 사람에 대한 관심 있는 시선이 바로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들을 대할 때 이런 관심 있는 시선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보니까 예수님 때문에 이 한 맹인을 제자들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마음속에 이 맹인에 대한 궁금함이 생겨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이 2절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절에서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하시기를‘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들은 장애자를 가르쳐서 맹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 성경에는 소경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제자들이 이 한 사람을 두고 맹인이라는 용어를 붙었을 때 단순히 장애인을 가르치는 지시적 용도만으로 불렀을까 아니면 그 당시 유대사회가 그랬듯이 이 제자들도 똑같이 장애인을 향하여 다소는 비하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그를 향하여 맹인 그렇게 불렀을까 모르긴 해도 제자들은 비하하는 뉘앙스를 가지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애자를 향하여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예수님은 ‘맹인’이런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이 사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맹인이 장애우일 수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먼저 이 장애인이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예수님이 이 한 사람을 보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사회가 이런 점에서는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에 대한 태도도 많이 개선이 되고 용어도 많이 순화가 되었습니다. 이런 부분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현재도 장애인을 섬기는 많은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 중에 그의 90%이상이 기독교가 운영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장애인을 섬기는 기본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도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어려운 일을 하지 못합니다. 흔한 예로 만 원짜리 지폐를 끄집어냈는데 하나는 새 돈이고 하나는 구겨진 돈입니다. 만 원짜리가 구겨졌다고 해서 만 원짜리의 돈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입니까 구겨져도 여전히 그것은 만 원권입니다. 비록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똑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말아야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맹인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던진 것이 예수님 ‘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을 가만히 들어보면 제자들이 고정관념에 대단히 매여 있었다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제자들의 질문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애는 곧 죄의 결과다 하는 전제위에서 질문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누구의 죄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하시기를 누구의 죄다 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말씀하시기를 ‘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예수님이 장애인을 보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정말 광범위한 경우에서 보면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은 사실 죄의 결과가 맞습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이 신체적인 문제만이 아니고 모든 문제가 죄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한 개인의 장애인을 두고 이것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아니하시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섭리가 있다 이렇게 보셨고 장애를 극복할 수 없는 숙명으로 보신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려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불교나 힌두권이 더 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마는 장애에 대한 건강치 못한 고정관점이 그 사회는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애는 죄의 결과다 전생의 죄의 결과다 이렇게 보는 관념이 그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은 대단히 힘들고 가족들도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는 그 깊은 원인을 우리가 다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장애가 신체적 장애라 할지라도 정서적 장애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은혜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또 비장애인이라 할지라도 그 비장애인이 건강한 신체적 조건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아니고 욕망의 손에 붙잡히면 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불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 그 자체가 나쁘다 좋다 이렇게 보기보다 누구의 손에 들려 있느냐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어떤 분이 중증장애아를 키우고 있는데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새벽마다 눈물의 기도가 아니면 기도를 이어갈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그 부부에게 다가가서 손을 꼭 잡으며 ‘집사님 힘드시죠’그랬더니 그 부부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님 저희들은 행복합니다. 저 중증장애아를 저희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주셔서 저희들은 저 아이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과 매일 영적 교제를 합니다. 그러니 오히려 감사하시요’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누구의 손에 붙들려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임신을 하고 검사를 했더니 장애아라는 것입니다. 낙태수술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새벽에 나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낙태를 허락해 주세요 저는 장애아를 키울 수 없습니다’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그 집사님의 마음에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만이 그 아이를 잘 키우고 양육할 수 있기에 내가 너에게 맡기는 것이란다’그래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구의 죄가 아닙니다. 특히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이 죄는 모두의 공유된 죄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파괴의 주범이 누구입니까 인간 아닙니까 모두의 죄라는 죄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들보다 낫다 이 관점도 잘못된 관점이고 또 비장애인은 장애인들보다 축복을 받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이라든지 또 비장애인은 장애인들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다 잘 못된 고정관념입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더 많은 관심 예수님의 더 많은 사랑은 바로 그 시대의 장애인들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습니다. 역사적 심판대 앞에서는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모르지만 어쩌면 천국에서는 바로 이들이 더 관심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애에 대한 시대적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배려의 마음을 가지고 다가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시기를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이렇게 말씀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 왔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그 목적 그 일이 도대체 어떤 일일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많습니다마는 그 일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마9:35 ‘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해 놓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믿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즉 제자 된 사람을 온전한 제자가 되게 하려고 계속해서 가르쳤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일, 즉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하여 전도하시고 선교하신 일입니다 세 번째 모든 병과 약한 것에 처한 사람들을 고치시는 일 즉 육체적인 장애나 정서적인장애나 여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일 이것이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신 세 번째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려 왔다 했을 때 그 일이 어디에 해당되느냐하면 이 세 번째 일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이른바 이 길거리에 앉아 있는 한 맹인을 회복시켜서 온전하게 하는 이 일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려 왔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으시죠 무엇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까 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성숙한 제자로 양육되기 위해서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매일같이 노력하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또 무엇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고 얘를 쓰는 것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고 또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한사람에게 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그랬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참 위대하고 놀랍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높은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고 무시 받고 멸시받는 한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존귀하게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장애인을 고치면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어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려 왔다고 하셨는데 바로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여야 하리니’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수인칭대명사를 쓰시면서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제자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동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한 맹인을 만나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관심하다가 예수님 때문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난 이후에 물론 지적 호기심이 생겨서 질문은 했지만 결국 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수많은 장애인을 품으며 기적을 행하며 섬기는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 일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때라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하는 이 말씀은 삶의 고통 앞에서 지적 호기심으로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즉각 고통을 제가하기 위해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일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제자들로서 이 일을 감당하고 함께해야 되는데 어떻게 행동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될까요. 우리가 당장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해서 많은 장애인들을 고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할까요 예수님도 그 시대의 장애인들을 기적으로 다 고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몇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병들고 약한 사람들의 고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귀히 여겨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그들을 향해 고정관념을 갖지 말아야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들을 섬길 때 우리가 그들 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섬기지 말아야 됩니다. 그들에게 마치 동냥하듯이 섬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저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던 장애자는 신체장애자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정서적으로 공감을 하지 못하는 한 무리를 만납니다. 제자들 속에서 정서적 불안정함 정서적 장애를 우리가 읽어냅니다. 또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보면 이 장애자를 가지고 예수님을 고사하려고 달려드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 무리들을 봅니다. 한 사람의 불행을 가지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려고하는 바로 이 바리새인들과 제사장을 보면서 너무나 어두운 영적 장애를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장애는 어떤 신체적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따지고 보면 어떤 부분이라도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않으면 그는 장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좋은 일을 보면 기뻐해야 되는데 남의 좋은 일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면 내 마음에 무엇인가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어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슬퍼해야 되는데 그 일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면 내 마음에 지금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되고 정상적이라면 정말 기도가 뚫려야 되는데 말씀도 잘 들리지 않고 기도도 잘 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나에게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형태가 다를 뿐이지 장애의 종류는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장애를 자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장애인을 대할 때 나는 정상인이고 당신은 장애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종류가 다를 뿐이지 나도 동일하게 장애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장애인을 위한 정말 참된 섬김은 나는 높은 자리에 있고 너는 낮은 자리에 있고 이렇게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헨리나우웬이라는 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일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도 하신 분이고 지명도가 높으신 분입니다.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마음이 공허하고 해서 대학교수를 사임하고 라르쉬공동체라는 곳에서 신체장애 정신장애자를 가진 아담아넷트라는 사람을 맡아서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을 섬기면서 자기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기는 모든 면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담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자기 속에 장애를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안에 영적인 장애가 있구나 이것을 생각하면서 글을 쓰게 된 것이 바로 ‘아담’이라는 책이지요. 이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을 있습니다. ‘나는 처음 아담을 돌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그러니 오히려 아담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담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나는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했다 아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했고 아담의 투병과정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광야생활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의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고난을 봤고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망을 발견했다 아담은 아무것도 안 하고 거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아담은 내 생애에 최고의 스승이었고 안내자였고 그리고 소중한 친구였다’ 자기가 장애자를 만나보니까 자기 속에 장애를 발견하면서 자기는 아담을 섬겼고 신체적으로 섬겼지만 아담은 영적으로 섬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른바 ‘아담’이라는 책을 발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장애교실을 운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희귀난치병환자의 쉼터를 만들면서 장애인을 섬기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며 우리에게 부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애인의 주일을 맞이하여 무관심하게 묻혀있는 아주 작은 자 아주 연약한 자 이런 자들을 위하여 보다 더 마음의 관심을 가지고 깊이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가면서 섬김으로 서로 회복되고 서로 치유되는 그런 정말 아름다운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장애인들을 대할 때 이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로 인식해야 됩니다. 구약은 신앙공동체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로 신앙공동체입니다. 민족적공동체가 아니라 유대인 공동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입니다. 누구든지 공동체 일원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도 그런 관점에서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 공동체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우리교회는 지금 신앙공동체입니다. 연일 어느 신앙공동체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우리영명 공동체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공급받고 보호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장애인들을 우리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가 2012년에는 희귀난치병자를 위한 쉼터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신앙공동체에서 함께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하며 모든 면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공동체에서 지체들 아닙니까 몸의 어느 부분이든지 그것이 크든지 적든지 간에 아프면 그 모든 몸은 그 아픔에 반응하며 집중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시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서 장애인들도 아픔을 감내하면서 살지만 특히 부모들은 그 아픔이 배가 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죄로 여기며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와 유교문화의 고리에서 아픔을 당하는 자들이 이웃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 부모가 되지 않아서 우리는 괜찮은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자녀로 인식하셔야합니다. 장애자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일평생을 고통과 번뇌로 살아갑니다. 그들의 아픔과 번뇌를 함께 짊어지고 가는 공동체, 교회가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고 또 그 일을 우리에게 감당케 하셨습니다. 영명공동체가 이 일을 위해 힘 써는 복된 공동체가 되시기를 소망하며 여러분들의 헌신과 씨앗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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