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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인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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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류가 동질화될 수 있는 방법은 상위에 있는 부류가 내려가서 하나가 되는 하향 동질화가 있는가 하면, 하위에 있는 부류를 끌어올려서 하나가 되는 상향 동질화가 있습니다. 물론 양쪽 모두 함께 오르고 내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느 산골에 눈이 하나 뿐인 원숭이들만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두 눈이 멀쩡한 원숭이가 흘러 들어와서 살게 되자 ‘불구 원숭이들’의 텃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눈을 가진 원숭이는 자기가 왕따가 된 이유를 깨닫고 스스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다른 원숭이들과 잘 어울리면서 편히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하향동질화의 예가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 뇌성마비 장애우 한 분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저는 늘 그러듯이 지갑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돈을 손에 쥐면서 항변하듯 말씀하십니다. “왜 교회는 우리 장애인이 가면 돈부터 주느냐 다른 이유 때문에 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하느냐” 그 분은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기에 얼굴을 찌푸려가며 힘겹게 말씀하시는데, 저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큰 실수를 했구나!’
 저는 장애우를 만나면서 ‘도움’이란 단어를 먼저 생각했지, ‘이해와 대화 - 하나의 인격화’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글을 보니까, 한 장애인이 “나는 일 년 중 4월이 되는 것이 가장 싫어요!”라고 절규하듯 내뱉은 문구를 본 일이 있습니다. 4월 20일, 1년 365일 가운데 유일하게 ‘장애인의 날’로 제정되어서, 많은 장애우들이 가장 바쁘게 이리 불려 다니고, 저리 불려 다니는 날이 되었습니다. 1년 동안 그들이 우리들의 이웃인지 모르고 살다가, 4월이 되어서야 그들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일반 사회를 향한 절규의 목소리일 것입니다.
 저는 이번 장애인 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교회는 장애인 주일을 4월이 아닌 다른 달로 정해서 지켜야겠다. ”는 생각을 가져보고 앞으로 여러분과 의논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찾아오는 장애우 단체들만이라도 성의껏 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작년 장애인 주일에는 ‘동행’이란 제목을 통해, 장애우들은 결국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이웃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장애우들에 대한 성경의 이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모두를 통하여 장애우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을 통해 “가난하고 억울하고, 갇히고 장애를 입은 이 땅의 많은 소외된 백성들을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행보를 보여주셨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61장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그 분은 이 땅에 아름다운 소식을 가지고 오시되, 마음이 상한 자를 위해서, 포로 된 자를 위해서, 갇힌 자를 위해서 오신다. ”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35장 5절 이하에서는, 이 땅에 오실 구세주의 목적에 대해, “소경의 눈을 밝게 하시기 위해서,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주시기 위해서, 절름발이가 걷고 뛰는 것을 위해서, 벙어리가 혀로 말하고 노래하는 것을 위해서 오실 것”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광야 됨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사막과 같은 이 땅의 건조함과 삭막함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풀도 안자라는 죽음의 땅을, 풀이 나고 갈대가 나고 부들이 나는 생명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시면서, 실제적으로 장애우들의 치유를 위한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은 한결같이 ‘이 땅의 장애우를 위해서 메시아가 오셨다!’고 외쳐도 될 정도로 곳곳에서 ‘장애우를 위한 메시아’에 대한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1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을 열면, 세례 요한의 소개를 받은 예수님이 세상을 향하여 일성을 날리십니다.
“때가 찼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논리의 순서대로라면, “때가 찼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라는 선포와 외침 다음에는 ‘예수님의 어떤 행동이나 말씀이 나와야 순서’에 맞겠습니까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니까, 이제는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지적해 주는 순서가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깨달아야 회개를 하든지, 안하든지 할 것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인 됨의 증거들’을 사람들 코앞에 들이대면서 “봐라! 너희가 얼마나 죄악 된 백성인지 눈을 뜨고 똑바로 봐라. 너희가 얼마나 패역한 백성인지, 너희가 얼마나 진리와는 거리가 먼 백성인지, 너희가 얼마나 빛과는 거리가 먼 백성인지 눈을 뜨고 똑바로 보고, 귀를 씻어 똑바로 들어라!”고 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서는 한결같이 백성들의 죄악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일 대신에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일에만 몰두하는 예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 1장은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강조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마가복음을 열자마자 우리는 부지런히, 아주 많이 바쁘게 병자들을 치유하러 다니시는 예수님,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하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십니다. 오늘 본문처럼 문둥병자를 치료하십니다.
 마가복음 2장으로 넘어가면,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당시 죄인 취급을 당했던 세리 레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마가복음 1장 34절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이와 같이 주님은 인간이 얼마나 회개를 필요로 하는 더럽고 추한 죄인인지를 밝혀주고 증명하는 일 대신에 병자들을 부르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역 초기뿐만 아니라 3년 공생애 기간 내내 있었습니다. 때로는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고, 때로는 눈먼 소경을 고쳐주셨고, 때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때로는 귀 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정말로 이 땅의 병든 자, 소외된 자, 억울한 자, 그리고 장애인의 치유와 해방을 위해서 오셨다. 그렇다면 건강인을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니란 말씀인가”란 질문입니다.
 이제부터 이 문제를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추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2절은 ‘병 고침’을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표적’은 실체가 아닙니다. 표면에 드러난 이적성 - 즉, 병을 치료해 주고, 적은 떡으로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고 하는 등의 이적성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그 내면에 숨겨져 있는 사실이 궁극적인 목적이란 의미입니다.
 물론 병 고침과 오병이어 등의 이적은 1차적인 목적 성취입니다. 즉 병 고침을 통해 그 환자 자신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오병이어를 통해서 사람들은 배부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병 고침과 오병이어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의 맛을 느끼게 해 주는 ‘표적-그림자-Sign’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짜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서 간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를 보신 주님께서 민망히 여기사 그를 깨끗케 해 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주님의 이 말씀은 레위기 14장 말씀을 기초로 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14장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나음을 입었을 때의 정결의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정결의식을 치루는 제사장에 대해서 레위기 14장 18절 하반절부터 이렇게 기록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은 속죄제를 드려 그 부정함을 인하여 정결함을 받으려는 자를 위하여 속죄하고, 그 후에 번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번제와 소제를 단에 드려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정결하리라
 분명 어떤 병에 대해서 치료받은 것을 확증하고 감사드리는 예식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속함을 얻는다는 속죄의식’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즉 “장애는 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9장이 명확하게 답변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소경된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리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아닙니다! 병마는, 장애는 웃시야나 게하시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인의 죄악의 결과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시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표적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시신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시신을 보고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고 감탄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검은 죄의 형상이요,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좀 심한 표현을 쓰겠습니다. 혹시 장애우와 관련되신 분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피고름과 진물이 묻어나는 장애인을 직접 곁에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불편한 육신으로 인하여 고통과 질고 속에서 부르짖는 장애인을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들의 겉모습을 향하여 아무도 아름답다고도, 보기 좋다고도 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죄인이란 말씀은 결단코 아닙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예기를 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기회만 있으면 전남 고흥에 있는 나환자섬 소록도를 방문하려고 하고 있고, 지금까지 대략 네다섯 번 정도 다녀왔습니다. 일명 한센병이라고도 하고, 나환이라고 부르는 문둥병환자들만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섬인 소록도를 제가 처음 방문했던 것은 1985년 여름이었습니다. 아직 목회자에 대한 비전이 없이 일반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저에게 있어서 너무나 많은 신앙적 의미를 도전 받았던 전도여행이었습니다.
 그 소록도에 들어가면서 저는 정말로 제 자신에게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환자 그들이 어떻게 생겼을까’가 아니라; “그분들을 처음 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에 사로잡힐까 또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을까”였습니다.
 마침내 나환자들이 모여 있는 제일 큰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저는 정말 한 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왠지 저는 죄인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 옆에서 가르쳐준 것도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그들의 겉모습을 통해서 저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의 형상들을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은 썩어 들어가고 있어서 흰자만이 찌그러진 채 있었고, 입은 돌아가 있어서 침이 계속적으로 흘러내리고 있고, 치아는 성한 것이 없이 모두 빠져있거나 썩어 있었고, 손가락은 모두 잘려 나가서 손 뭉텅이만 남아 피고름에 젖어 있었고; 그들의 발은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가 제대로 걷지 못하는 형상은 곧, 저의 영혼의 형상이었고, 저의 죄인 된 형상 그 자체였음을 깨닫는 순간 참회할 때나 흘릴 수밖에 없었던 뜨거운 눈물이 두 볼 가득히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런 깨달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분들과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할 때, 저는 앞에 계신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하기보다는, 아무 두려움이나 거리낌 없이 끌어안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할머니께서 저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으로 밀쳐내는 것을 느끼면서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머니! 괜찮습니다. 저의 겉모습이 할머니의 속 영혼의 모습이요, 할머니의 겉모습이 바로 저의 죄인 된 영혼의 속모습인 걸요! 할머니의 모습이 저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장애우들은 우리의 볼 수 없는 영혼을 직접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장애우와 환자들을 치유하심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심을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장애우는 우리와 별도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장애인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요, 부모입니다!”라고!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요 부모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입니다. 여기 서 있는 저의 모습이요, 여러분 모두의 모습입니다. 다만 그들이 우리 영혼의 불편함과 부족함을 대신해서 겉으로 드러내주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결혼 직전에 제 아내와 함께 수화를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수화를 배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청각장애우들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장애우들은 우리의 ‘도움의 대상’이기 이전에, 우리의 ‘이해의 대상이요 우리 자신’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 자신을 학대하거나,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곁에 붙여준 장애우를 이해하고 돕는 일에, 그리고 그들을 찾아가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건강과 물질과 열정을 나누는 일에 열심을 품을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장애우들의 겉모습이 우리의 속 모습이요, 우리의 겉모습이 주님께서 아끼시고 보살피시는 저 장애우들의 속 모습임을 고백하심으로 말미암아, 정말 장애우들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그들의 이웃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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