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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인과 함께 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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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충격은 단 한 번도 학교라는 곳을 가보지 않은 그녀의 해박한 지식이었습니다. 그녀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기도 하였습니다. 부모가 읽어주는 성경을 들으며 똑같은 글자가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씩 짝 맞춰 나가는 과정을 통해 글을 깨우쳤다는 그녀의 능력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오로지 책만을 통해 접한 사상과 문물을 통해 한 인간의 세계가 그토록 깊고 폭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그녀를 22년 동안이나 방안에 가두어 놓았던 장애보다도 더 큰 경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겸손을 일깨워 주었고 한 인간의 놀라운 존재의 가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녀가 처음 열린 우리당의 비례대표 1번 국회의원 후보로 등장했을 때, 그녀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놀라기 보다는 열린 우리당의 파격적인 공천이 제게는 더 놀라운 일이었고, 그때의 제 생각은 열린 우리당이 참 머리를 잘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국회의원이 된 후 그녀의 활동을 가끔씩 뉴스에서 접하면서도 별다른 감응은 없었습니다. 그저 국회의원이 되니 활동 범위가 넓어졌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고 난 후, 장애인에 대한 나의 편견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한 영혼의 존귀한 모습,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인간의 실존을 제 눈과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난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올해도 많은 교회에서 이번 주를 장애우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과 관련된 설교나 행사가 행해지고 있는 교회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소외받는 인간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장애인들 입니다.
그런 장애인에 대한 관심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를 보면 과연 교회가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년 전 한 때 장애인 올림픽을 전후로 일기 시작한 교회의 대 장애인 시책이 용두사미 격으로 사그라지는가 하면, 대부분의 교회가 그 이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 가 할 정도로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교회들에서는 ‘밀알회’와 같은 장애인 부서를 따로 두고 전문 목회자를 두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교회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나 구색 맞추기 정도의 생색내기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장애인 문제를 가뜩이나 폭주하고 있는 목회 업무에 부과되는 추가 업무 정도로 여기지나 않는지, 혹은 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움직임에 마지못해 편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이런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것이 교회의 솔직한 입장이라면 우리는 이것이 기독교 정체성과 관련하여 매우 큰 문제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입장의 배후에는, 교회는 장애인 없이도 충분히 교회일 수 있는데 다만 장애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 라는 현실적인 생각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신 동범 집사님의 처남을 가끔 머리에 떠올립니다. 물론 그분은 처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결혼하던 날을 떠올려보면 그는 훤칠하고 건장한 신랑이었습니다. 하지만 뇌졸중 후, 상당기간 동안의 식물인간 상태를 거쳐 깨어난 후 그는 2급 척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우리 교회에 휠체어를 타고 참석하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제 머릿속에는 그분이 분명히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분이 우리 교회에 참석하게 되는 날이 우리 어지니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로 서게 되는 날이라고 믿었습니다. 좀 과격한 표현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장애인이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복음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문제는 교회의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선택적인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문제입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단순한 하나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진정성이 달린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몇 년 전 저는 일산에서 열리는 ‘청각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강 영숙 사모님이 그 음악회에 출연했기 때문에 그런 음악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 교회의 사모님이 그 음악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그곳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교회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참석했던 것입니다. 처음 출발은 좋았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음악회에 참여한 모든 목사님들이 다 함께 축도에 참여하여 손을 들고 간절히 장애인들을 축복하던 그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해의 음악회부터는 이미 강력한 힘이 지배하는 모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권위와 서열이 두드러지는 더 이상 사랑과 섬김이 자리 잡을 수 없는 전문가들의 행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앞으로 우리 어지니교회에 그 역할을 맡기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장애인 사역이 힘든 일이며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별 소득이 없는 ‘퍼주기 식’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의 사랑 가득한 섬김이 필요한 낮은 자들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애인 사역은 교회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입니다.
진실로 교회는 복음의 산물이요, 복음의 담지자요, 복음의 실천자이며 전수자입니다. 따라서 참된 복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참된 교회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은 본질적인 면에서 복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 관계를 무시하면 복음이 왜곡되고 그 결과 교회는 참된 교회의 면모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복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장애인은 복음 선포의 우선 대상입니다. 두 번째로, 장애인은 복음의 바른 이해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장애인은 복음의 실제성이라는 문제를 성찰하게 합니다.
첫 번째, 장애인은 복음 선포의 우선 대상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부터 장애인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표징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배경이 된 말씀은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당신의 메시아 직에 대한 취임 선서에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18-19)
장애인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기피 대상이었습니다. 실재로 인간에게는 새로운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려고 할 때 자신의 취향과 이상에 맞는 자들로만 구성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역사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분명한 예를 든다면, 위대한 게르만 족의 기치를 내세운 나치는 유대인과 장애인을 제거함으로써 이상적인 인류 건설을 꿈꿨습니다. 육백만 유대인 학살은 사실 순수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독일인들의 필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숙고 끝에 내려진 신중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취향과 이상에 맞는 자들에 대한 선별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여러 종파들은 각기 자신들의 이상을 중심으로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규합하는 한편, 여타의 인간들을 금기시 했습니다. 자연 이방인들은 그들의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신들 내부에서도 선별 작업은 계속되어서 쿰란 공동체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하였습니다. 이처럼 ‘유유상종의 법칙’이라는 인간의 본능은 너무도 자주 집단이기주의의 구실을 제공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려줍니다.
그러나 분명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유유상종이라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은혜로 널리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초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배타성이 아니라 포괄성이 그 주도적인 원리입니다.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 적어도 인간의 차원에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권리는 없으며, 만일 그런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악마적인 일에 틀림없습니다. 그 반대로 이제까지 그런 초대에서 소외된 자까지 초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복음 전파의 시작인 것입니다.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 초대가 복음의 초대요, 그럴 때에만 복음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은 장애인을 주목합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의 우선적인 대상입니다. 그들이 장애인이라는 그 특성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이 제외된다면 복음의 초대가 진정한 초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선교할 때 전도자와 피전도자가 함께 변한다고 말했습니다. 전도를 받는 피전도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어 변하고, 전도자는 자신의 고정관념이 바뀌어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를 초대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인,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주가 되셨으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고정관념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세계선교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고정관념은 오늘날 장애인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교회의 일치와 인류의 일치라는 주제에 대해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는 분명한 장벽이 존재하며 이러한 장벽은 모든 지역, 모든 인종에 걸쳐 존재하고 교회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인 이사야가 선포하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추인하신 지 이미 2천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이 악마적인 장벽은 아직도 염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늘날 교회의 복음 선포가 불성실하다는 증거요, 오늘날 교회가 해결하고 떠맡아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의 역동성으로 인해 후대에 귀감이 될 만한 사건이 많았던 만큼, 오늘날의 교회가 이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교회 전통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며 앞으로 교회는 이 사실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를 돌아 볼 때 교회는 적어도 장애인 문제만큼은, 복음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오히려 사회 통념에 의해 변질되는 모습을 보여 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경우 대표적인 두 종류의 장애인실태를 살펴보면, 청각장애인이 약 30만, 시각 장애인이 약 15만인데, 그중에서 기독교인은 각각 1만 명 미만과 1만 5천 명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니까 청각장애인의 3퍼센트, 시각장애인의 10퍼센트가 교인인 셈입니다. 여기에 정신지체장애인, 복합장애인 등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실정을 장애인들의 신앙심 부족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요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만 그들만의 책임일까요 교회가 장애인들의 물질적인 평등을 논하기 이전에 최소한 그들의 영적인 평등을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분명 복음 전파의 우선 대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지금은 누구의 책임소재를 따질 때가 아니라 누가 이 일에 앞장 설 것인가를 결단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제 또 다른 이유에서 우리 어지니교회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흥시켜주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부족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장애인 문제는 복음의 바른 이해에 관한 문제입니다.
장애인에게 주목할 때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직면하게 되며, 또 이런 대면을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검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유지하고자 하는 면모는 경쟁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물질 추구이며, 그로 인해 행동주의와 업적주의가 찬양을 받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냉혹한 논리가 인간 사회,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엄연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 본 십자가의 신학이 매몰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겸허의 절정인 십자가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십자가가 표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며 단순히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피해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나누시며 더 나아가 그 고통을 통해 구원을 제시하셨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십자가는 고통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의미 있는 고통과 고난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인에게는 인간의 고통이 집약적으로 나타납니다. 장애인의 존재는 우리에게 고통의 문제를 직면하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곧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요 궁극적으로는 복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면, 그래서 십자가 없이 영광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일입니다. 더구나 십자가는 소극적인 안전의 삶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와 섬김의 삶을 야기하지 않습니까
생존경쟁의 논리 속에서는 강자만의 자리가 있을 뿐입니다. 거기서 약자는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도태되어야 할 대상, 제거해야 할 골칫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사회가 장애인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이러한 그릇된 인식을 교정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약함 속의 능력’이라는(고후12장) 새로운 힘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십자가가 있는 한, 더 이상 강함만이 강함이 아니요, 약함만이 약함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류를 힘의 지배에서 건져냈습니다. 따라서 복음은 능력 여하에 따라 인류를 등급 매기고 장애인을 2류 인간 취급하는 인식도 마땅히 교정시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선물이라는 점을 명백히 합니다. 구원의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의 베푸심이요 인간의 믿음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 중심적 업적주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주의와 업적주의의 인생관도 복음으로 교정시켜야 합니다.
적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장애인의 조건이 구원받는 일에까지 불이익을 초래한다면 그것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장애인을 돕는 일은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또한 이 희생은 합리주의의 영역이 아니라 사랑의 영역에 속합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거룩한 편애는 복음 안에서만 가능하고, 그것은 곧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장애인은 복음의 실제성이라는 문제를 성찰하게 합니다.
장애인은 복음의 실제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구원의 소식이요, 구원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회복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죄와 곤경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복음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전파되어야 할 뿐 아니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믿는 복음을 내용을 삶 속에서 경험해야 하며, 삶 속에서 경험하는 그 복음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복음을 믿지만 완전히 복음적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그 간격을 인식하고 메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록 완전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도래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주제는 우리의 계속적인 기도이어야 합니다.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삶은 우리가 복음을 경험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요즘 뜻하지 않게 치매노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들과 함께 교제하며 함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분들의 딱딱하게 굳은 손을 잡으며 뼈가 만져지는 어깨와 등을 두드려드릴 때, 많은 위로와 사랑을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하기 힘든 어색한 일이었고, 무언가 냄새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즉흥적이지만 찬양팀이 이루어졌습니다. 한쪽이 마비되고 입이 비뚤어졌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복순이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마이크를 잡고 찬양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기타를 치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우리는 함께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저만 혼자 신나서 찬양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크게 노래를 부르다보니 제 소리가 제게 크게 들렸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순간 놀라운 찬양팀을 보았습니다. 다른 어떤 큰 교회 찬양팀의 세련된 찬양보다 엉성하고 부족한 우리의 찬양이 여호와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이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착각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들과의 함께함을 통해 복음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비록 짧은 순간이었을지라도 그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저는 믿고 싶습니다.
적절한 예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부족한 것 같아서 헨리 나우엔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네덜란드 출신의 사제로 심리학과 영성 신학을 전공한 교수입니다. 그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노틀담 대학과 예일 대학,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명 강의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게다가 수십 권의 저서를 통해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상아탑에 머물며 책만 파고드는 책벌레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여러 현실들에 정면으로 맞서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반성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쏟아낸 사람입니다. 수도원에서 수도생활도 했고, 대학을 옮기는 도중 남미에 가서 가난이라는 현실과 직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장 바니에가 이끄는 라르쉬 공동체와 관련을 맺고 급기야 데이 브레이크라는 한 작은 장애인 공동체를 섬기는 사목이 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처음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는 매우 당황스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학자로서의 명성과 사제로서의 권위가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경험에 따라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헨리, 그게 아니에요. 이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 교수이며 사제인 그가 정신지체 장애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헨리의 영성은 깊어지고, 성숙해나갔습니다.
그는 밖으로 강연을 하러 나갈 때, 공동체에서 함께 생활하는 장애인들 중 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 이야기 중 하나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그의 책 에필로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빌이라는 장애인과 동행하였습니다. 헨리의 연설이 끝날 무렵 빌은 자신이 한 마디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헨리는 마이크를 빌에게 넘겼습니다.
-빌은 마이크를 잡고서는 아주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했다. “지난 번 헨리가 보스턴에 갔을 때는 존 스멜츠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저와 함께 워싱턴에 오는 것을 원했고 저는 이 자리에 함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 그 말이 전부 다였고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중략)
비행기 안에서 빌은 나에게 말했다. “헨리, 우리 여행이 어땠어요” “물론 너무 좋은 여행이었지. 같이 와서 기뻐요. ” 나는 대답했다 빌은 찬찬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함께 이 일을 해낸 거지요 그렇죠” 그때 나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느니라. ”(마18:20)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
저는 빌과 헨리의 모습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헨리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글을 적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장애인은 이렇게 우리에게 복음의 실제성이라는 문제를 성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장애인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함께해야 할 동반자이며, 동시에 특별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도와야 할 존재이며 동시에 함께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난 4월 20일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서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과 재즈 피아니스트 진 보라가 공연을 하였습니다. 관중은 겨우 몇 십 명의 장애 아동들뿐이었습니다. 두 유명한 연주자는 진정으로 그들만을 위한 연주를 하였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아들은 자신들만을 위해 열린 그 음악회에서 신나게 춤을 추며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뒤틀린 몸으로 웃고 박수치고 춤추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다만 장애인의 날 행사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존중 받고 그들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섬기고 또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들의 그 깊은 외로움을 우리가 다 치유할 수는 없다할지라도 그들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진정한 교회로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로 이 땅 위에 우뚝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과 함께 하는 교회. 어지니교회의 또 다른 이름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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