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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누가 장애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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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처럼 특정인을 위한 날이 많은 나라도 드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학생의 날, 재향군인의 날, 경찰의 날 등등… 이외에도 달력을 보니까 몇 개가 더 있더군요.
어느 한 날을 정해서 특정인의 수고를 격려하고 기념하는 일은 필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이 생기게 된 속사정을 알아보면 그 동기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버이날이 없었어도 부모를 잘 모셨습니다.
스승의 날이 없었어도 스승을 하늘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어린이라면 내 아이, 남의 아이 따질 것 없이 다들 잘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게 아주 오래된 얘기가 아닙니다.
그때는 일년 삼백육십오일이 어버이날이요, 스승의 날이요, 어린이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좋은 전통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할 수 없이 이런 날들을 만들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후로는 5/8만이 어버이 날이요, 5/5만이 어린이 날이요, 5/15일만이 스승의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년 중 이날 한 날만 잘 넘기면 인간이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날이 되면 전국적으로 법석을 떱니다.
찾아다니고, 선물도 주고, 관광도 시켜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도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버이날이 됐는데도 찾아 올 자녀가 없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날이 됐는데도 선물 한꾸러미 못 받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스승의 날이 됐는데도 누구 하나 찾아와 주는 이 없는 외로운 스승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놓고 비관하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겼습니다.
신문을 보면 어버이날에 많은 수의 어버이가 죽고, 어린이날에 많은 어린이가 죽게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일년 중 그 날이 가장 저주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년 중 그런 날이 하루가 더 있습니다.
4월 20일입니다.
4월 20일이 무슨 날인지 아마 아시는 분이 별로 없으실 겁니다.
바로 장애인의 날입니다.
일년 중 장애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이 그 날인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저도 그것이 싫어서 4월을 피해 이제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나라에 살면서 부러운 것은 사회의 모든 편의시설이 그래도 장애인들을 꽤 배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에 관한 국민들의 인식도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높습니다.
전에 제가 여기서 멀지 않은 Klosterneuburg의 Weisser Hof 라는 재활병원을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중증 장애인들이 많은데 - 교통사고가 나서 전신이 마비된 사람, 암벽을 타다가 낙상해서 앞으로 몇 년 동안을 누워서만 생활해야되는 사람,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사람 등 별별 종류의 장애인들이 다 있었습니다 - 하지만 상태가 어떻든 그 병원에서 몇 년이고 훈련을 받으면 거의가 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정부가 다 책임을 지는 거지요.
그것은 국민과 장애인들 본인과 치료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모든 면에서 너무 많이 부족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캐나다 토론토의 한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갑자기 부흥하자 그 목사님은 교육 목사님을 한 분 초빙하기로 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 물색을 하시던 중 아주 적격자를 발견하셨답니다.
어릴 때 한국에서 이민을 와서 우리말도 잘하고 영어도 훌륭하게 구사하는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다만 한 가지, 그 분이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 후유증으로 한 쪽 다리를 저셨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당회에 그 안건을 내 놓았답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한 장로님이
“그런데 거 병신은 재수가 없어서 말이야.... ” 이렇게 말하더라는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어른들이 이런 얘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결국 초빙문제는 부결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의 장애인에 대한 전통적 사고는 이렇듯 사회전반에 뿌리깊이 박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장애인에 대한 용어부터 바꿔야합니다.
소경이나 장님이란 말 대신에 뭐라고 써야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문둥이는 한센씨 병, 또는 나병환자라고 바꿔야 합니다.
귀머거리는 청각장애인, 벙어리 대신에 농아인 혹은 언어장애인, 그리고 귀신들린 자, 미친 자 대신에 정서장애인 혹은 정신지체자, 정신 박약자... 이런 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특히 그런 용어들 중에 당장에 없어져야 될 단어는 병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정신문화재 가운데 병신춤이란 춤도 있는데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우리 성경에도 병신이란 말이 나옵니다. 성경도 다시 번역되어야만 합니다.
정말 어떤 병신이 그렇게 성경을 병신같이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더 고약한 것은, 그 사람들은 고통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죄와 연관시켰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것은 그 본인의 죄든가 그 부모의 죄 때문에 징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생각엔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자 제자들은 대뜸 묻습니다.
“예수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이것은 정말 무자비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어려운 처지는 생각 못하고 그렇게 된 원인에만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그들에 대해 한 터럭의 연민도 가질 필요없고 따라서 해 줄 일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자기는 “저런 ‘병신’이 아닌” 것에 대한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주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대답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이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의 피눈물나는 아픔은 보지 못하고 누구의 죄 때문인지 그런 것을 캐묻고 있느냐 너희들의 생각은 겨우 그것 밖에 되지 않느냐 봐라 이제 내가 저 사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
이렇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그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다른 기적 이야기를 읽어보면 말씀 한 마디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는 아주 먼 거리에서 앓고 있는 사람도 예수님의 말 한 마디로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당신의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런 수고를 자처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소경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본인 자신도 절망 속에 빠져 있으면서 죽지 못해 살아온 그런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될 일이지만 그 사람에 대한 더 깊은 사랑의 표시를 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수 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체온은 그에게 옮겨져서 눈을 뜨는 것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천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 소경에게 발견한 것은 죄의 견본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발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한 인격이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왜입니까
한 사람을 보다 깊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람의 결점과 실패가 점점 더 많이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그 분은 더 놀라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 하나하나를 깊이 알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랑은 바뀌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장애를 가지고 이 예배를 드리는 분이 계십니까
꼭 눈멀고 귀먹고 홀로 설 수 없어서 장애인이 아닙니다.
무언가 부족한 게 있어서 평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분들은 모두 장애인입니다.
이런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오늘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리고 그런 분들의 가족이나 친지가 계십니까
먼저 그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혹시 여러분들을 보고 아까 그 장로님처럼 재수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처럼 징벌의 원인을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여러분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할 것이고 살 의욕을 무참하게 꺾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여러분을 더 사랑하십니다. 정상인보다 더 애착을 가지시고 여러분이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십니다. 함께 우시고, 함께 신음하실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절반 이상이 장애인과 함께 하신 사역이었습니다.
그 분의 위로와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원하시기만 하면 여러분의 장애를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능력을 믿고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혹, 여러분이 평생 그 장애를 짊어지고 사는 것을 주님께서 원하신다해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생애에 더 큰 뜻을 두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 이 소경의 경우에는 고침을 받음으로써 영광을 드러내는 뜻이 있었듯이 여러분의 장애애도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고쳐주시든지 안 고쳐 주시든지, 주님께는 우리가 모르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시면서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나에게 장애가 없다고 생각하는 정상인들, 보통 사람이신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곁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아직도 장애인들을 보면 재수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와는 별개의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장애인이 되는 것,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장애인들의 80% 이상이 후천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모든 장애인들 중에 20%만 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났고, 나머지 80 %는 살아가면서 사고나 병의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잠재적 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니다.
장애인, 그들은 별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한 순간에 그보다 더한 장애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십시다.
예수님같은 태도로 장애인들을 대합시다.
한 인격체로 존중해 주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십시다. 그들이 치료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눈을 뜨는 그 일은 2000년 전의 사건이지만 지금도 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사랑으로 기도하고 도우시기 바랍니다.
헨리 나우웬이 예일과 하버드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들어간 곳이 라르시 공동체였는데 그곳은 지체 부자유 장애인들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물론 나우웬은 거기에서 사제로써 일하려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어서 태어나면서부터 육체적인 장애와 정서적 장애를 동시에 앓고 있었던 아담 아네트라는 사람을 직접 돌보게 되었습니다.
나우웬이 그 아담을 죽기까지 돌보고, 그 사람 하나를 주제로 ‘아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 아담을 돌보기 위해 이 곳에 왔지만 그러나 오히려 아담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아담이 나에게 축복이 되었다. 나는 아담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했다. 아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했고, 아담의 그 투병과정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광야생활을 볼 수 있었다. 아담의 그 말할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고난을 보았고 아담의 죽음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소망을 발견했다. 아담은 아무 것도 안 하고 거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나를 가르쳤다. ”
그러면서 그 책의 서론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담은 내 생애 최고의 스승이었고, 안내자였고,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그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쳤고 더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그를 돌보러 왔지만 그가 나를 변화시켰다. ”
이 아담이라는 사람이 죽는데, 나우웬이 아담의 장례를 치루고 나서 이 책의결론부분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나는 아담의 진리의 증인이다. 라르시가 나의 공동체가 되고 나의 안식처가 된 것은 바로 아담때문이었다. 나의 팔로 아담을 붙들고 완전히 순수하고 자유롭게 그에게 다가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내게 소속감을 주었다. 그는 육체적 존재라는 진실에 뿌리를 내리게 해 주었고 공동체에 닻을 내리도록 해 주었으며, 함께 하는 우리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깊이 경험하게 해주었다. 아담과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 내가 어디에 서 있을지 모른다. 이 공동체에서의 첫 14개월 동안 아담을 씻기고 먹이고 옆에 있으면서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안식처를 얻었다. 그것은 단순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나의 몸, 나의 공동체의 몸, 교회의 몸, 여호와 하나님 몸 안에 있는 안식처였다.
나는 예수님의 삶에 대해 듣고 읽었지만 그 분에게 손을 대거나 그 분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담에게 손을 댈 수가 있었고 그때 그 분을 보았으며 그의 삶에 다가설 수 있었다. 그를 목욕시키고 면도를 시키고 이를 닦아줄 때 나는 육체적으로 그를 만졌다. 조심스럽게 그의 옷을 입히고 아침 식탁으로 그를 데려다 주고 숟가락질을 도와 주면서 그를 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안마를 해주고 체조를 시키고 수영장과 목욕탕에서 곁에 앉아 있으면서 그를 만졌다. 머레이, 캐시, 브루너도 그를 만졌다. 그것이 우리가 한 일이었다.
그를 만진 것,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곧 아담에 대한 이야기였다.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리라. 아담에게 손을 댄 모든 사람들은 각각 어딘가가 온전해졌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축복된 경험이었다“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장애인 아담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참 스승을 만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다가가고, 만지고, 함께 하는 것은 곧 우리의 복입니다.
그리고 나우웬처럼 어디서도 찾지 못했던 안식을 거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장애인이든 그렇지 않든지 모두 예외없이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앓고 있는 진짜 장애, 진짜 병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진정한 장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다 읽지 못했는데 꽤 깁니다.
예수님과 눈 뜬 소경이 만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유대인, 바리새인들은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도 그 소경이 눈 뜬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사실 이 소경이었던 사람은 상당히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을 자세히 얘기한 걸 보면 분명히 그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눈을 떳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그가 애당초 눈 먼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와 소경이 공모한 사기라고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경이었던 사람을 소환해서 설득도 하고, 그게 안되니까 욕을 하고 위협을 해서 쫓아내버렸습니다.
정말 무서운 장애가 무엇입니까
참된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참된 말씀을 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바로 말하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진정한 봉사를 할 줄 모르는 영적 장애가 바로 진짜 장애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그 바리새인들이 영적 장애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정통합니다. 언제 어디서 메시야가 올 것인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신 메시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뿐이며, 그것 역시 자기들의 방법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경건한 척 하지만 사실은 회칠한 무덤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무지한 가운데서 그런 논거를 내세웠다고 하면 그들이 죄는 가벼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계시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메시야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장 고질적인 중증 영적 장애인으로 취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마지막에 가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었나 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대듭니다.
“우리도 소경인가”
진짜 눈이 멀어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하니까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다같이 9: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고쳐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라면 소경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장애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쳐 줄 여지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가망이 없는 장애는 영적 장애입니다.
오늘의 얘기인 이 요 9장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처음에는 육신적인 소경이 장애인인 것처럼 보이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짜 장애인은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 얘기로 돌아와 보십시다.
우리는 오늘 이 두 경우 중에 어디에 가깝습니까
나서부터 눈이 멀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몸과 마음의 장애를 모두 벗어버린 그 사람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알 걸 다 알면서도 자기 기득권을 뺏기기 싫어서 영의 눈을 감아버리는 바리새인에 가깝습니까
기억하십시다.
자기 자신이 눈 먼 것을 깨닫고, 보다 잘 보고 보다 많이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다 더 깊이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 말씀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그것을 모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소경이며 그 상태는 절망적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손 쓸 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약점을 이해하는 자만이 굳건히 설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소경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보는 것을 배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달 동안 재활실습을 마치고 그 소감을 얘기했던 자매의 말이 생각납니다.
누가 장애인입니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장애인은 없습니다. 다만 몸이 불편하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
누가 장애인입니까
육체적, 정서적 장애는 장애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을 뻔히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말씀을 외면하고, 입이 있어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이 장애인입니다.
이 아침에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계신 여러분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아침에 장애가 없으신 여러분들에게 장애인들을 올바로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돕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이 귀한 아침에, 우리들의 진정한 장애, 영적 장애가 우리 주님의 크신 능력으로 치유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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