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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인을 춤추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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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장애인의 수는 215만 명으로 대략 국민 20명 중 1명 즉 5%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2003년 7월 장애 범주가 10종(지체, 시각, 청각, 언어, 정신지체, 발달장애, 정신장애, 신장장애, 심장장애)에서 15종(호흡기장애, 간장애, 안면장애, 장루요루장애, 그리고 간질장애 등 5종 추가)으로 확대됐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국민의 20% 정도를 장애인으로 간주하고 있고 WHO가 전 세계 나라들의 대략적인 장애인 수 평균을 10%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우리도 인구의 10%인 480만 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말씀은 나면서 앉은뱅이인 사람이 매일 성전 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는데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장애에서 일으켜 정상인이 되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성전에 함께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도행전 3장의 말씀입니다.
 첫째,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했습니다. 이 사람은 태생으로 절망의 삶을 지고 온 사람입니다.
앉은뱅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생활에 있어서 경제적 필요를 얻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에 대한 앎이나 그의 나라나 영원한 것에 소망이 없습니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앎으로 만물의 시작을 알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앎으로 그 만물이 어디를 향하여 서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앎으로 사람으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왔으며 존재하는지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앉은뱅이는 만족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므로 항상 영적인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길들여져서 살아가는 사람들 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이고 도전적이기도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처럼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며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세리장으로 큰 부를 축적한 ‘삭개오’가 되도 그렇습니다. 많은 지식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공회원 니고데모가 되도 그렇습니다.
앉은뱅이는 믿음이 없이 성전 주변을 맴도는 인생입니다.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장소는 성전 앞이었습니다. 성전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행스러운 존재인지, 딱한 사람입니다. 모태 신앙인이라고 소개를 받는 사람이라도, 교회에 나온 지 많은 세월이 지난 신자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송도 잘 알지만 감동이 있는 찬송을 부르지 못합니다. 성경 지식도 많이 알지만 그 말씀을 받아드리고 순종하지를 못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제목만 들어도 미리 설교 원고를 다 쓰고 있습니다. 앉은뱅이입니다.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서 교회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일 수가 있고, 그의 자녀 일 수가 있고, 목사 아들과 딸일 수도 있습니다. 개인생활이 잘 풀리면 신바람 나게 나서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만사를 부정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이런 딱한 사람들이 교회 주변에는 많습니다.
 둘째, 예수를 만난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이들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생활 전선에서 수고하며 땀을 흘려야 했고 주님이 부르실 때 오직 믿음으로 일어나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받아드리기가 일쑤였고 늘 남과의 비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갈등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어려운 일이 닥쳐 올 때면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몸 사렸으며 죽음의 위협이 찾아 왔을 때는 모두가 도망치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세상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권위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주신 독생자를 만났고, 아들의 음성으로 가르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죄의 저주를 짊어지고 사는 사람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나타내 주시는 분임을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세상 죄, 아니 우리의 죄, 나의 죄를 대신해서 골고다에서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바 되셨음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을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몸소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난 이들이며 그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을 받아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대적들에게 끌려갈 때에 두려워 도망을 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강림의 체험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임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새로운 힘, 새 언어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령이 이들에게 임하자 능력 있는 증인으로 변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침없이 증거를 했습니다. 이들의 신앙을 꺾으려는 자들이 많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고 쫓겨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해도 이들의 신앙을 버리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서슬이 퍼렇게 믿는 자를 죽이려고 기회를 찾는 이들 앞에 당당하게 서서 예수님을 증거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정한 기도 시간에 성전을 찾아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리하셨습니다. 기도할 마음이 필요합니다. 기도에 대한 기대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세계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세는 기도하므로 아말렉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끕니다. 시내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는 그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기도의 능력으로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엘리야는 기도로 850명의 이방신의 제사장을 물리치고 하늘을 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에 한 사람이 벙어리이며 간질을 앓는 아들을 데리고 와서 당신의 제자들이 못 고치더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으면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기리라 하셨고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은 기도하게 만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협력하는 사람이며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이웃을 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두 사람은 라이벌 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베드로는 요한을 가리키며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었습니다. 주님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너나 잘 하거라. 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 몸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이기적이던 사람들이 이웃의 필요가 보이고 아픔이 보이고 이웃에 대한 배려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제대로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앉은뱅이가 보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셋째, 앉은뱅이가 일어나 춤추는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뭔가 얻기 위하여 손을 내밀고 바라보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내게는 은과 금은 없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일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장애인이 춤을 추게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했고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득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뭔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그 가진 것을 가지고 세상일을 풀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뿐임을 깨닫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풀어 가려고 합니다. 나는 교회를 찾아오는 걸인들을 만날 때면 먼저 교회가 인색하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간 돈을 건네주고 심술부리지 않고 서둘러 돌아서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지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경제적 도움을 주지 말자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선물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영혼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하며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그 영혼이 사모하고 있는 것이 무엇임을 바라볼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주목하고 바라보게 해야겠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믿음과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합니다. 말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냥 앉아있지 말고 모여 있을 때 기도하고 흩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해지는 만남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을 춤추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기도를 권하며 엘리야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다했습니다. 엘리야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기도하는 그 대상 여호와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480만 장애인들이 일어서서 춤출 수 있게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도 넉넉하게 채워져야겠지만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받아서 춤추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으며 예배하며 기도하는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증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80만의 수에 드는 이들만 장애인이 아닐 것입니다. 주를 모르는 모든 이들은 영적인 장애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춤추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남을 춤추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춤을 출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날 예수 그리스도 까닭에 춤을 춰 보신 경험이 있으신지요 분명 여러분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화평을 맛보며 춤추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거듭남의 감격과 성결케 하시는 은총에 내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진 축복을 맛보며 배워 본적이 없는 춤사위가 절로 나온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이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 춤을 출 수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들을 춤추게 만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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