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졸업]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본문
우리는 다시 한 번 크리스마스를 맞았습니다. 거리마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글자가 보이고, 징글벨이 울려 퍼졌습니다. 서울의 명동과 광화문, 그리고 대도시의 중심가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해마다 울리는 구세군의 거리 종소리도 들립니다. 술집과 음식점과 휴양지가 사람들로 넘치고, 오락장도 한 철을 만났습니다. 모두가 즐거운 표정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하여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크리스마스의 주인공,곧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본래의 이미지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이 왜 오셨는지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오직 교회들만이 특별한 예배와 행사를 갖고 그의 오심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저는 오늘 선교헌신예배와 신학교 졸업식을 맞아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의 사역을 살펴보고, 우리의 남은 사역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제자를 양육하신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신 후 남아 있는 우리는 그가 하시던 일을 본받아 계속해서 이 일들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첫 번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요한계시록 5:1-5을 읽어보겠습니다.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시록의 이 말씀은 일곱 인 심판이 세상에 떨어지기 직전에 하늘에서 있었던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느 주일 밧모섬에서 요한 사도는 말세에 되어질 특별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개의 인이 찍혀서 봉해진 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까 봉해진 인을 떼어서 책을 볼 사람이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통곡합니다.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이기에 사도가 통곡했을까요? 그것은 이 책이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책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입니다. 이 책은 회복문서요, 이 땅의 모든 것을 원위치로 돌릴 수 있는 계약서요, 사단의 항복문서요, 마귀의 종말을 고하는 문서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록대로 보면,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예수님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천하만국이 마귀에게 넘어가서 지금 그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천하만국을 언제 주셨나요?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것을 마귀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모두 아담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의 속삭임에 빠져서 범죄하자 자연스럽게 아담의 모든 권리는 마귀에게 넘어갔을 뿐입니다. 죄는 마귀에게 속하고, 죄를 지으면 죄의 종 곧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종의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주인의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렇게 팔아넘겨진 것들을 회복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레위기 25장에 있는 토지무르기와 속량 제도입니다. 사람이 가난하여 자기 토지를 팔았거나 혹은 스스로 종으로 팔렸으면 자기 근족이 와서 무르거나 속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때에는 장로들의 입회하에 원래의 매매계약서에 찍힌 인을 하나씩 떼면서 그 조건을 이행하면 완전히 무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책은 바로 이 무르기 계약서입니다. 마귀에게 넘어갔던 사람들과 세상을 무르는 계약서, 곧 마귀에게 넘어갔던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사단을 멸망시키는 중대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인을 떼고 거기 있는 조건을 충족시켜줄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을 보고 요한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장로 중 하나가 와서 다윗의 뿌리가 이겼기 때문에 이 인을 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뿌리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어린양 한 분만이 마귀에게 넘어갔던 사람들을 속량하고, 땅을 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속량을 받고 마귀의 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회복이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고 확장됩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내용은 엄청난 것입니다. 복음은 마귀에게 빼앗겼던 것을 하나하나 다시 빼앗아 오는 전투요, 전쟁입니다. 성경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마귀의 군사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빼앗아오고 땅을 회복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비유를 여러분 모두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등이 있는데, 이 천국 비유는 저 하늘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모두 복음의 전투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확장되는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전사들입니다. 날마다 기도로 전도로 물질로 헌신으로 복음을 위하여 싸우는 전투요원들입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넘어갔던 사람들과 땅이 회복됩니다.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미워하는 그 이상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복음의 전투를 사도들이 이어 갔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싸움입니다. 부자 만들어 주고, 출세시켜주는 요술키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가는 길에는 사적인 것을 챙길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시간도 드려야 합니다.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재능도 드려야 합니다. 자기 생일도 찾아먹을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마귀의 진을 파하고, 천국을 확장하는 일에 전력을 쏟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왕께서 친히 뽑으신 정예 군사들입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이 대열에 뽑힌 것을 감사하고 여기에 내 생명을 드려도 좋다는 결단이 있기를 말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축복이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두 번째 일은 병을 고치신 일입니다.
우리 모두 스가랴서 3:2-5(1315p)을 읽겠습니다. (네번째 환상)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예수님께서는 3년의 사역기간 중에 모든 병을 고치시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병을 고치신 일은 단순히 병을 고쳤다는 의미보다는 사실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치료에서 우리는 이 눈먼 자가 바로 어두움에 있던 우리의 영적 모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 죽었던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어있던 우리의 영적 모습을 봅니다. 또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허물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우리의 영적 모습을 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모습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입니다. 엄청난 치료가 필요한 상태의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택함 받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죄의 불 속에서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무엇엔가 쓰려고 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불속에서 나온 우리는 너무나 시원하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던 연기도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우리를 건지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날카로운 칼을 갖고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몸에 붙어 있는 검정 숯들을 하나하나 긁어내기 시작합니다. 쓴뿌리도 잘라내시고, 병든 가지도 잘라내셨습니다. 이때 우리는 아파서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주님, 그만하세요. 이러다가 내가 죽겠습니다. ”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멈추시고 칼을 갖고 나가셨습니다. “휴 이제야 살았다”하고 우리는 안심했습니다. 다음 날입니다. 이번에는 작은 칼을 갖고 들어 오셨습니다. 우리는 몸을 떨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작은 칼로 우리 몸을 요모조모 조각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다시 아프다고 아우성쳤습니다. 살을 짤라내는 아픔은 참으로 참기 어려웠습니다. 작업을 다 마친 주님은 다시 칼을 갖고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여호와 하나님은 다시 오셨는데, 이번에는 칼이 아니라 뻬빠를 갖고 오셔서 온 몸을 긁기 시작하십니다. 다시 우리는 아프다고 소리소리 쳤습니다. 다음 날 여호와 하나님은 붓과 페인트 통을 들고 오시더니 부드럽게 여기저기를 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 참 멋있구만” 여호와 하나님은 불속에서 타고 있던 가망없는 숫불 덩어리 나무를 세상에서 가장 개성있는 멋진 예술품으로 치료하시고 조각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숯덩이를 치료하고 조각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약 40년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라는 숯덩이를 치료하고 조각하는데도 40년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를 치료하고 조각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실까요?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각하실 때, 아프지만 믿고 울면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영광과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속에서 타고 있던 쓸모없는 나를 치료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면류관을 씌워주셔서, 제사장을 삼고 왕을 삼아 자기와 함께 보좌에 앉혀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불붙었던 나무의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치료의 결과입니다. 조각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썩어질 이 땅의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축복을 외치지만 가만히 그 축복이라는 것을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에게 다가올 엄청난 소망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합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지 도대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소망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숯덩어리였던 우리를 치료하시고 조각하신 다음, 준비하신 영원하신 소망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한 번 성경을 찾아볼까요?
먼저 에베소서 2:6을 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계시록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 두 구절들은 모두 우리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이거 굉장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답니다.
다음, 디모데후서 2:11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계시록 20:4,6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 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왕과 왕노릇은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며 만국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제 곧 세상이 끝나고 주님께서 오시면 이 일이 삽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의 모습은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약속대로 썩지 않고, 병들지 않고, 약하지 않는 몸이요, 강하고 영화롭고 신령한 몸으로 천사의 섬김을 받으면서 어떤 분은 열 고을, 어떤 분은 다섯 고을을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있다고 해도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땅의 고난을 참는 것은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는 믿음으로도 참지만, 이토록 엄청난 소망을 바라보면서 또한 참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의 것에 너무 매이지 마세요. 썩어질 것을 지나치게 바라보지 마세요. 그저 필요한 만큼 받았으면 감사하고, 오직 주님께서 지금 명하신 일을 충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상급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직분과 대우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소망을 전하는 선교의 일꾼들입니다. 이 일에 힘을 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세 번째 일은 제자를 양육하신 일입니다.
우리 창세기 4:26을 함께 보십시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다시 마태복음 1:1도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담의 아들 “셋”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죽은 아들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입니다. 즉 셋도 아벨처럼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본문을 보면 셋이 105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셋이 자기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은 때로부터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고, 예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왜 셋의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은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드렸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에노스”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병든 사람, 죽음과 부패로 사라져갈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에노스가 그 이름대로 병들어서 일찍 죽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에노스는 아들 딸 잘 낳고 905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즉 에노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의 아버지 셋이 신앙적인 큰 의미를 깨달았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은 병들었고, 결국 부패와 죽음으로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의 가계는 믿음의 계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계보는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계보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저는 이 믿음의 계보를 선교적인 측면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계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이 계보는 예수님을 정점으로 해서, 구약 계보는 예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상향식 계보요, 신약 계보는 예수님으로부터 내려가는 하향식 계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히브리서 11장 때문입니다. 주님 이후부터 이 계보는 혈통을 벗어나서 오직 제자훈련을 통해서 이어져갔습니다.
또 하나, 이 계보는 생명의 계보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믿음을 잃은 영적 죽음의 계보라면, 셋의 계보는 비록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계보입니다. 그래서 이 계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이 생명의 계보는 이제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명을 다른 제자에게 이어주어야 합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장래의 소망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주님의 이 아름다운 명령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사역하고 충성되게 헌신하기를 여러분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오늘 우리는 헌신하는 날이요, 또한 결단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헌신되고 결단한 분들은 가장 복된 분들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헌신과 결단이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크리스마스의 주인공,곧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본래의 이미지는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이 왜 오셨는지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오직 교회들만이 특별한 예배와 행사를 갖고 그의 오심을 다시 한 번 새겨봅니다. 저는 오늘 선교헌신예배와 신학교 졸업식을 맞아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의 사역을 살펴보고, 우리의 남은 사역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제자를 양육하신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신 후 남아 있는 우리는 그가 하시던 일을 본받아 계속해서 이 일들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첫 번째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요한계시록 5:1-5을 읽어보겠습니다.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계시록의 이 말씀은 일곱 인 심판이 세상에 떨어지기 직전에 하늘에서 있었던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느 주일 밧모섬에서 요한 사도는 말세에 되어질 특별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보좌에 앉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오른손에 일곱 개의 인이 찍혀서 봉해진 책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보니까 봉해진 인을 떼어서 책을 볼 사람이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크게 통곡합니다. 도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이기에 사도가 통곡했을까요? 그것은 이 책이 세상의 역사를 바꾸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책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입니다. 이 책은 회복문서요, 이 땅의 모든 것을 원위치로 돌릴 수 있는 계약서요, 사단의 항복문서요, 마귀의 종말을 고하는 문서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록대로 보면,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예수님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천하만국이 마귀에게 넘어가서 지금 그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천하만국을 언제 주셨나요?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것을 마귀에게 주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모두 아담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마귀의 속삭임에 빠져서 범죄하자 자연스럽게 아담의 모든 권리는 마귀에게 넘어갔을 뿐입니다. 죄는 마귀에게 속하고, 죄를 지으면 죄의 종 곧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종의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주인의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렇게 팔아넘겨진 것들을 회복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레위기 25장에 있는 토지무르기와 속량 제도입니다. 사람이 가난하여 자기 토지를 팔았거나 혹은 스스로 종으로 팔렸으면 자기 근족이 와서 무르거나 속량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때에는 장로들의 입회하에 원래의 매매계약서에 찍힌 인을 하나씩 떼면서 그 조건을 이행하면 완전히 무를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책은 바로 이 무르기 계약서입니다. 마귀에게 넘어갔던 사람들과 세상을 무르는 계약서, 곧 마귀에게 넘어갔던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사단을 멸망시키는 중대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인을 떼고 거기 있는 조건을 충족시켜줄 사람이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을 보고 요한이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장로 중 하나가 와서 다윗의 뿌리가 이겼기 때문에 이 인을 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뿌리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어린양 한 분만이 마귀에게 넘어갔던 사람들을 속량하고, 땅을 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속량을 받고 마귀의 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회복이 있는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고 확장됩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지만,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내용은 엄청난 것입니다. 복음은 마귀에게 빼앗겼던 것을 하나하나 다시 빼앗아 오는 전투요, 전쟁입니다. 성경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마귀의 군사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빼앗아오고 땅을 회복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비유를 여러분 모두 아실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씨 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등이 있는데, 이 천국 비유는 저 하늘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모두 복음의 전투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확장되는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전사들입니다. 날마다 기도로 전도로 물질로 헌신으로 복음을 위하여 싸우는 전투요원들입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마귀에게 넘어갔던 사람들과 땅이 회복됩니다. 그러니 마귀가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미워하는 그 이상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복음의 전투를 사도들이 이어 갔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싸움입니다. 부자 만들어 주고, 출세시켜주는 요술키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가는 길에는 사적인 것을 챙길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시간도 드려야 합니다.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재능도 드려야 합니다. 자기 생일도 찾아먹을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마귀의 진을 파하고, 천국을 확장하는 일에 전력을 쏟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왕께서 친히 뽑으신 정예 군사들입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이 대열에 뽑힌 것을 감사하고 여기에 내 생명을 드려도 좋다는 결단이 있기를 말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축복이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두 번째 일은 병을 고치신 일입니다.
우리 모두 스가랴서 3:2-5(1315p)을 읽겠습니다. (네번째 환상)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예수님께서는 3년의 사역기간 중에 모든 병을 고치시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병을 고치신 일은 단순히 병을 고쳤다는 의미보다는 사실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치료에서 우리는 이 눈먼 자가 바로 어두움에 있던 우리의 영적 모습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주님께서 죽었던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어있던 우리의 영적 모습을 봅니다. 또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허물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우리의 영적 모습을 봅니다.
지금 스가랴서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모습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입니다. 엄청난 치료가 필요한 상태의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택함 받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죄의 불 속에서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무엇엔가 쓰려고 불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불속에서 나온 우리는 너무나 시원하고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몸에서 나던 연기도 이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우리를 건지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날카로운 칼을 갖고 다가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몸에 붙어 있는 검정 숯들을 하나하나 긁어내기 시작합니다. 쓴뿌리도 잘라내시고, 병든 가지도 잘라내셨습니다. 이때 우리는 아파서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주님, 그만하세요. 이러다가 내가 죽겠습니다. ”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멈추시고 칼을 갖고 나가셨습니다. “휴 이제야 살았다”하고 우리는 안심했습니다. 다음 날입니다. 이번에는 작은 칼을 갖고 들어 오셨습니다. 우리는 몸을 떨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작은 칼로 우리 몸을 요모조모 조각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다시 아프다고 아우성쳤습니다. 살을 짤라내는 아픔은 참으로 참기 어려웠습니다. 작업을 다 마친 주님은 다시 칼을 갖고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휴”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여호와 하나님은 다시 오셨는데, 이번에는 칼이 아니라 뻬빠를 갖고 오셔서 온 몸을 긁기 시작하십니다. 다시 우리는 아프다고 소리소리 쳤습니다. 다음 날 여호와 하나님은 붓과 페인트 통을 들고 오시더니 부드럽게 여기저기를 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 참 멋있구만” 여호와 하나님은 불속에서 타고 있던 가망없는 숫불 덩어리 나무를 세상에서 가장 개성있는 멋진 예술품으로 치료하시고 조각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숯덩이를 치료하고 조각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약 40년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라는 숯덩이를 치료하고 조각하는데도 40년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를 치료하고 조각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실까요?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각하실 때, 아프지만 믿고 울면서 참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영광과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속에서 타고 있던 쓸모없는 나를 치료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면류관을 씌워주셔서, 제사장을 삼고 왕을 삼아 자기와 함께 보좌에 앉혀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불붙었던 나무의 아름다운 소망입니다. 치료의 결과입니다. 조각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는 것은 썩어질 이 땅의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축복을 외치지만 가만히 그 축복이라는 것을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우리에게 다가올 엄청난 소망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합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지 도대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소망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숯덩어리였던 우리를 치료하시고 조각하신 다음, 준비하신 영원하신 소망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한 번 성경을 찾아볼까요?
먼저 에베소서 2:6을 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계시록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 두 구절들은 모두 우리를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이거 굉장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답니다.
다음, 디모데후서 2:11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계시록 20:4,6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 계시록 22:5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왕과 왕노릇은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며 만국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제 곧 세상이 끝나고 주님께서 오시면 이 일이 삽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의 모습은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약속대로 썩지 않고, 병들지 않고, 약하지 않는 몸이요, 강하고 영화롭고 신령한 몸으로 천사의 섬김을 받으면서 어떤 분은 열 고을, 어떤 분은 다섯 고을을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있다고 해도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땅의 고난을 참는 것은 주님의 고난을 바라보는 믿음으로도 참지만, 이토록 엄청난 소망을 바라보면서 또한 참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의 것에 너무 매이지 마세요. 썩어질 것을 지나치게 바라보지 마세요. 그저 필요한 만큼 받았으면 감사하고, 오직 주님께서 지금 명하신 일을 충성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상급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직분과 대우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소망을 전하는 선교의 일꾼들입니다. 이 일에 힘을 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세 번째 일은 제자를 양육하신 일입니다.
우리 창세기 4:26을 함께 보십시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다시 마태복음 1:1도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담의 아들 “셋”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죽은 아들 “아벨” 대신에 주신 아들입니다. 즉 셋도 아벨처럼 믿음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본문을 보면 셋이 105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셋이 자기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은 때로부터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물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고, 예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왜 셋의 아들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은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를 드렸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에노스”라는 이름에 있습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병든 사람, 죽음과 부패로 사라져갈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에노스가 그 이름대로 병들어서 일찍 죽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에노스는 아들 딸 잘 낳고 905세까지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즉 에노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의 아버지 셋이 신앙적인 큰 의미를 깨달았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은 병들었고, 결국 부패와 죽음으로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의 가계는 믿음의 계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계보는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 계보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저는 이 믿음의 계보를 선교적인 측면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계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이 계보는 예수님을 정점으로 해서, 구약 계보는 예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상향식 계보요, 신약 계보는 예수님으로부터 내려가는 하향식 계보입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히브리서 11장 때문입니다. 주님 이후부터 이 계보는 혈통을 벗어나서 오직 제자훈련을 통해서 이어져갔습니다.
또 하나, 이 계보는 생명의 계보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믿음을 잃은 영적 죽음의 계보라면, 셋의 계보는 비록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계보입니다. 그래서 이 계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이어집니다. 이 생명의 계보는 이제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명을 다른 제자에게 이어주어야 합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장래의 소망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요, 주님의 명령입니다.
나는 주님의 이 아름다운 명령을 오히려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사역하고 충성되게 헌신하기를 여러분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오늘 우리는 헌신하는 날이요, 또한 결단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헌신되고 결단한 분들은 가장 복된 분들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헌신과 결단이 있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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