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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우를 보는 예수님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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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비록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경을 알지만 모든 것에 대하여 다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면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겼습니다. 역사 이래로 가롯유다 만큼 많은 욕을 먹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롯유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됐고 결과적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을 하시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에덴동산에 두신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는데 왜 그런 것을 거기다가 만들어 두셨는가 하는 질문들이 많습니다 . 이렇게 물어 올라치면 저도 무엇이라고 똑 부러지게 설명을 하지 못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도 그런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건강하게 사시다가 천수를 누리고 가시는 분들의 죽음 앞에서는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토리 같은 어린 자식들을 두고 남편이 갑자기 죽게 된다던 지 어머니가 죽은 줄도 모르고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들을 둔 집에서는 그 무엇으로도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
왜 우리 집 아이들이 이렇게 정박아로 태어나고 자폐증을 가지고 다리가 뒤틀리는 소아마비가 되는지 어느 날 멀쩡하게 출근하러 나간 사람이 저녁에는 교통사고로 장애자가 되는 일들은 그리고 이런 일들이 왜 하필이면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지 누구도 분명하게 대답할 수가 없는 법이지요.
이런 말씀 가운데 하나가 요한복음 9장 1절에서 나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세계보건기구(WHO)의 장애인수 통계를 보면 세계 인구의 10%가 장애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인구가 60억이라고 본다면 6억 정도가 장애인입니다. 우리 정부의 통계는 140만명 입니다만 장애협의회의 통계에 의하면 400만명입니다. 그 중 25%가 교통사고 장애라고 합니다.
이러한 운명적인 사건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답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극복하는 비결인 동시에 이렇듯 불행을 겪고 있는 장애우들을 똑바로 보는 신앙적 자세를 확립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그의 인생 문제를 선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을 시키셨습니다.
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그것도 철저하게 가난하여서 얻어먹고 살아야 하는 거지였습니다. 아무리 불행해도 이 사람만큼 불행할 수 없고, 아무리 자기를 쓸모 없다고 생각해도 이 사람만큼 철저하게 무용지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책임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적어도 본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나만 장님이어야 하고 나만 고생하고 나만 불행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가지면 무엇하고 많으면 무엇합니까 잘 살고 출세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뭇 사람이 추구하는 욕망과 꿈이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읽읍시다. (요9: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대답입니다. 절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눈으로 이 장애의 운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세상을 이러한 비극적 운명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선물입니다.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이 진정으로 눈을 뜨기 원하시는 것은 바로 영의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글에서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고통이라고 해서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을 잃었다고 해서 믿음까지 잃는 것이 아니요, 건강을 잃었다고 인생까지 잃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다. '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고통이 고통 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 물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손해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 자체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태도를 깊이 영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철저하게 쓸모 없는 존재와도 같은 이 소경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보이는 현상 깊은 곳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들 눈에는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나 여호와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으며, 사람들의 판단으로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 더 없이 망가지고 철저하게 불행한 이 사람을 통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 개별적으로 경륜하시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두 눈과 두 다리가 멀쩡한 여러분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그래도 불행하다고 그래도 쓸모가 없다고 원망하시겠습니까
2. 예수님은 그의 인생에서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적인 생각을 가져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심지어 미래적 원인을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놓고 그의 과거가 무엇이냐, 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미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마 이 소경이 40년 동안 살면서 한을 많이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불행한 사람일까" 이 사람이 40년 동안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살았을 테니 그가 얼마나 불행한 세월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문제를 알고 보니까 자신에게 미래를 위해서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어떤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이 사람이 자신에게서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고 나서 얼마나 기쁨이 있고 소망적이었겠습니까 지금까지 자기자신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고민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오늘 비로소 그 해답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난 후에 이 소경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인은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미래에 두고 해석을 하면 모두가 소망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그 결과가 이렇게 소망적이고 미래적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이 태어나면 왜 좋아합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에 들어가면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공부하기 힘들고 고생입니다. 그것은 미래적인 소망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이 현재보다도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 미래가 있어야 합니다. 삶은 오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고, 뜻은 언제나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면 반드시 지금보다 내일이, 이곳보다 저곳이 더욱 더 아름답게 준비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십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이 원인이었고,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파헤친들 더욱더 오리무중이요, 여호와 하나님밖에 누가 알겠습니까
내가 이런 집에 태어난 것이, 이런 사람을 만나지 말았더라면, 내가 이곳에 오지를 않았더라면, 내가 실패하지 않았으면 등등 이제 쓸데없는 변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적인 의미를 생각하십시다. 미래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과 생명을 살리는 선교적 의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많은 토론을 중지시키십니다. 제자들이 '누구 죄입니까 본인의 죄입니까 부모 죄입니까' 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도 저도 아니라고 쟁론을 무시하셨습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옮겨 놓으십니다. 여러분, 고난은 기회입니다. 위기가 바로 창조의 기회요, 실패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변장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고난 당하는 분을 보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스로 고난 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특별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가난은 기회입니다. 고난이 봉사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진 것도 기회요 못 가진 것도 기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4절에 예수님은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라고 하시며 일의 필요성을 말씀합니다. 일을 하되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특수성과 밤이 오리니 속히 해야 한다는 시급성을 말씀합니다.
3. 끝으로 주님은 이 비극적인 인생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그를 빛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을 예수님이 먼저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가 어둠 가운데 걸어가는 것을 아파하시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어둠을 밝혀나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목말라 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셨고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보셨고 그리고 보지 못하는 소경을 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보지 못하는 인간의 불행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정죄하는 눈초리로 보시지 않았고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여 주고 싶어하시는 동정과 사랑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며 그에게 이렇게 분부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를 격려하시면서 우리에게 한가지 일을 분부하십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해 보시기 위함입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 비과학적이고 비의학적으로 보이는 듯한 분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격려와 분부를 받은 그 불행한 사람은 주님의 분부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 즉시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결국 소경은 눈을 뜨게 되었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소경은 먼저는 그의 부모를 보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절하며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9:38).
종교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는 남의 고난을 볼 때에 다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불행과 죄를 직결시켜버립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는 의 때문이라 하고,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의를 위하여 고생한다고 하고, 남이 고생할 때는 벌받은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둘째, 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습니다. 이해해 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 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까'하고 그 깊은 고통을 이해해주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셋째, 자기를 예외시합니다. 나와 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고, 상대방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이러한 잘못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는 없을까요
역지사지란 말이 있습니다. 그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되기도, 그의 아픔이 우리 자녀들의 아픔으로도 다가오기도 합니다. 내가 독하게 내뱉는 말들이 어느 날 우리 자식들이 죄 없이 당한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나의 불행을 보는 시각이 분명하게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우리는 언제 장애인이 될지 모르는 예비 장애인인 것입니다. 내가 사고를 낼 수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내 자녀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하다고 어떻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잘못된 시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고 도와주어 자활할 수 있도록 장애복지시설과 장애인학교를 만들고자 하면 혐오시설이며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동네가 일어나서 피켓을 들고 반대시위를 벌입니다. 이것이 과연 축복 받을 백성들의 자세이며 사고일까요 우리는 오히려 장애인시설과 장애인을 돕는 기관을 우리 동네에 들어오도록 유치작전을 벌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저 아이가 장애가 된 것은 자기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래. 지금 네가 건강하지만 언제 저렇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저런 아이를 네가 건강할 때 도와줘야 한단다. '라고 가르쳐 주며 어릴 때부터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친구가 될 수 있도록 키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입니까 굶주린 자, 나그네 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을 지극히 작은 자로 주님은 정의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가 있다고 한다면 장애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이 민족의 편견과 사고를 바꾸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가 앞장서야 될 것입니다. 일찌기 우리교회는 20여년 전에 장애자와 노약자들을 위하여 예배당 통로를 경사로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장애아동들을 위한 주일학교가 시작이 되었고 소외된 노인들을 위한 경로대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님 예수님은 이들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손을 내밀어 눈을 뜨게 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이들이 내일에 대한 소망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일어서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찾아주시고 기도하여 주시고 격려하여 주시어야 될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열매를 생명의 빛이신 예수를 이들에게도 전하여야 됩니다. 소자 아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이 사늘해질 때마다 항상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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