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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희망은 그들에게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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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노래를 잘 합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 첫 예배를 드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모든 신학생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절로 화음을 이루어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부러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음치입니다. 어느 정도 음치인 고 하니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 때부터 대한민국 모든 백성이 함께 외치는 구호였던 “대~한민국”하면서 박수를 치던 “짜작짝 짝짝”을 저는 지금도 잘 못합니다. 이상하게도 입으로는 되는데 박수로는 안 됩니다. 입하고 손하고 따로 놉니다. 진짜 음치 박치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곡으로 음악시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 가곡이나 골라서 부르는 시험이었습니다. 제가 부른 노래는 ‘기러기’였습니다. 내 깐에는 좀 아는 노래라고 생각해서 불렀습니다. 학생들이 다 부른 후에 선생님이 점수를 불러 주었습니다. 제 점수를 불러줄 차례가 되었습니다. “김종수! 95점!”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기분이 좋으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김종수! 다시 불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기러기가 꽤나 고생했습니다. 그래 다시 부르는데 몇 소절 안가서 선생님이 “됐어. 그럼 그렇지. ”라고 말하며 “75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점수만 따진다면 과히 나쁘지 않은 점수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반에서 제일 낮은 점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노래가 관한 망신살스런 에피소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너무 많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하겠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경동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는데 그 날 마임극을 했습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텔레비전으로 중계도 했습니다. 그 마임극을 마치고 당시 경동교회 담임목사님이었던 강원용목사님이 마임극을 한 사람들을 수고했다고 밤늦게 불러 회식을 하자고 하여 갔습니다. 회식이 한참 무르익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갑자기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속으로 부를 노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 차례가 되자 갑자기 강원용목사님이 “너는 그냥 넘어가고… 다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제 노래 실력을 아는 것이지요. 정말 망신이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를 하면서 전도사님을 구할 때마다 늘 물어 봅니다. “그 사람 노래 잘하나” 우리 교회 이성은전도사님도 노래를 잘 합니다. 제가 못 하기에 다른 교역자는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꼭 찬양을 잘 하는 사람을 뽑습니다. 그래야 제 부족함을 메꿔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음치 박치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까지 노래를 피해본 적은 없습니다. 누가 되었건 노래방에 가자고 해도 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못 불러도 노래방에서 누구보다도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놉니다. 이렇게 뻔뻔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실 목사는 어느 정도 노래를 잘 해야 합니다. 예배에 찬송이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지요. 만일 목사의 자격 조건으로 노래를 잘 해야 한다면 저는 평생 목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노래를 못하는 것이 목회를 하는 데에는 큰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오늘도 목회를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만 따진다면 저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노래 장애인이지만 세상은 그 장애로 제가 선택한 직업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노래를 못하는 제가 일상의 삶, 생존의 삶을 제한 받고 있지 않습니다. 노래하는 능력이 남보다 처지기는 하지만 이 사회가 제가 노래를 남보다 못하다고 일상의 삶, 생존의 삶을 제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장애에 있어서는 많은 경우 직업의 제한을 받습니다. 직업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이란 신체나 정신의 기능이, 많은 사람들이 속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시각 장애인은 보는 능력이, 정신 장애인들은 정신의 여러 측면들 중에서 어떤 부분이 수준의 차이를 보이는 사람일 뿐입니다. 오죽하면 외국의 학자들은 장애인을 편견 없이 부르는 명칭을 찾다가 ‘differently abled’(능력의 차이를 지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장애를 능력의 차이로 본다면,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들은 달리기 장애인이고, 노래를 못하는 사람은 노래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장애인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 사회가,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의 생각이나 태도가 그 근원일 수도 있습니다. 노래를 못한다고 해도 살아가기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도 운동선수가 목표가 아니라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선천적, 후천적으로 걷는 기능에 심각한 장애가 있는 경우는 문제가 됩니다. 걷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는 몹시 불편하고 정신적인 좌절도 크겠지만 그래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와 틀이, 걷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게 되어 있다면 그것은 진짜 문제입니다. 장애로 인해서 직업을 가지기 어렵고, 장애 때문에 온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고, 활동이 심하게 제약을 받는다면 그런 사회야 말로 정말 ‘장애 사회’인 것입니다. 이런 사회의 틀 뒤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아니 편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모호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만일 노래를 잘 못하는 것 때문에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을 하는데 심각한 지장이 있다면 어떨까요 노래방이 유행인 요즘 같아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 인간관계를 정상적으로 맺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합니다. 이럴 때 음치는 정말 심각한 장애로 분류될 것이고, 전문 병원들이 생겨나 호황을 누릴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되지만 장애에 대한 통념의 기본 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사회적 약자’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 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사회에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서는 비정상적인 정상인도 많고 정상적인 비정상인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장애인인 셈입니다. 문제는 그 능력의 차이를 얼마나 포용하는 사회이냐 일 것입니다. 만일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사회라면 그 사회는 장애자를 양산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야 말로 사회 자체가 병든, 장애 사회일 것입니다.
근래에 장애인의 복지에 관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상화’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일견 비정상적인 장애인들을 정상에 가까운 상태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도 있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정상’과 ‘사회적 약자’라는 말의 뜻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정말 정상화되어야 할 것은 장애인들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범주와 벽을 만드는 사회 자체일 것입니다. (장애인은 ‘어떤’ 장애를 겪는 ‘어떤’ 사람들이다, 기독교사상 2006년 8월호)
만약 우리 자녀가 장애인과 사귀며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에 몹시 걸릴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과 사는 것도 힘든데 장애인과 결혼하면 어떻게 제대로 살겠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부모는 장애인과 결혼하면 자식도 장애인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식함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의식이 결국은 이 사회의 장애인들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범죄는 어떤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는 것이라고 합니다. 삶이 제아무리 힘겨워도 희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실망하여 극단적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너 같은 녀석은…. ” 이런 말은 듣는 이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런 말은 자기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부풀려 되돌려주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보이지 않는, 그리고 점진적인 살해행위입니다. 사는 동안 겪는 이런 저런 차별로 인해 검게 타버린 가슴은 때로 총알이 장전된 권총처럼 위험합니다.
지난 2006년 10월 27일 파리 북서쪽 클리시 수 부아에서 경찰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모리타니와 튀니지 출신의 10대 소년 두 명이 감전사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소요사태는 거의 보름 동안 계속되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문화선진국이라는 프랑스의 어두운 이면을 보았습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1990년에 했던 ‘사회통합연설’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거리에서 태어나 지저분한 주위환경에 둘러싸인 더러운 건물에서 회색 빛 벽과 풍경을 보고 회색 빛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평소에는 외면하다가 화를 내거나 금지시킬 일이 있을 때만 자기를 쳐다보는 주류사회를 보면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
마치 관동대지진 때 이 재앙을 조선인의 탓으로 몰아 부친 일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잘못된 일이 생기면 이들 아프리카 이민자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던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을 질타한 말입니다. 불어로 대도시의 외곽지역을 지칭하는 방리유(Banlieue)라는 말은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도시의 소외계층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 듯합니다. 날마다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취업의 기회조차 박탈당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살아갈 희망을 되돌려주는 것보다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성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고, 그들을 잘 돌보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런 성서 정신의 온전한 육화(肉化)입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소외된 사람의 벗이 되어주시고,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예수의 정신이 아니고는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방리유의 사람들을 보며 “인간 쓰레기”라고 했던 프랑스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는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가요 그런 이들을 보면 괴물로 변해버린 인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체장애, 피부 색깔, 가난으로 인해 차별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이들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끝내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도 빼앗아가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애인이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것은 정상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 왕하 7:3 이하는 우리의 희망의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잘 알려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왕하 6:24 이하를 보면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왕은 무능했고 백성들의 마음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여러 달 적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왕하 6:25는 기근의 충격을 나귀 머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에 팔리고,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는 형편없는 음식이 은 다섯 세겔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언급함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 세겔은 당시 노동자 4일 치 임금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왕하 6:28과 29에서 말하듯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여인들이 자기들의 자식까지 잡아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극단적인 굶주림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성마저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사람에게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자기의 겉옷을 찢어 비통한 심정을 표현할 뿐이었습니다. 비통한 마음은 곧 원망으로 바뀝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도우실 생각만 있다면 그런 상황에까지 몰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할 뿐입니다. 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꾸민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기 이를 데 없다. 은나라의 탕왕은 칠 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자 목욕재계하고 흰 띠를 몸에 두르고 상림의 들에 나아가 기도를 하며 자기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육사자책(六事自責)’입니다.
1. 정치가 알맞게 조절되지 아니하였는가
2. 백성이 직업을 잃지는 않았는가
3. 궁실이 화려한가
4. 여자들의 치맛바람이 심한가
5. 뇌물이 성행하는가
6. 아첨하는 사람이 들끓지는 않는가
고사에 의하면 탕왕이 이렇게 자기를 돌아보며 자책을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 천리에 걸쳐 큰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남에게서 그 탓을 찾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자기를 돌아봅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런 의미에서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리석은 마음에 깃드는 것은 복수심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 복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인 예언자 엘리사를 죽이겠다고 마음먹고는 왕하 6:31에서 말합니다. 엘리사가 자신과 나라에 저주를 내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왕하 7:1에서 왕이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예언자는 왕에게 말합니다.
“야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 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스아는 약 7. 33L로 엄청난 가격 절하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때 왕을 모시고 온 한 장관은 왕하 7:2에서 조롱하듯 말합니다.
“야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자 엘리사는 그가 내일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는 하겠지만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다. 사람의 희망이 그친 자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병들이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 바다가 넘실거릴 때, 그래서 모두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 홍해 바닷물이 열렸습니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 앞에 만나가 내렸고, 목마름에 죽어가던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사납게 일렁이는 바다 위로 발을 내디뎠을 때 물은 육지처럼 그의 몸을 받쳐주었습니다. 죽음의 골고다 언덕은 부활의 문이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되는 시작은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3절은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들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은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비-국민 취급을 받습니다. 그들은 성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율법이었습니다. 하물며 ‘신의 채찍’이라 불리는 나병을 앓고 있는 장애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과 철저히 버림받았다는 소외감 그리고 굶주림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성 근처에서 굶어죽거나 전쟁에 죽거나 어차피 죽을 것이니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고 말하며 새벽녘에 일어나 아람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머물던 막사는 그대로 있는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조심스런 생각에 그들은 아람 진영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다녀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지천으로 널린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값진 보화들을 찾아 숨겨놓기도 했습니다.
본문 6절과 7절은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면서 독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이 기적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경과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 밤에 아람 사람들의 진영에 병거 소리와 군마 소리와 큰 군대가 쳐들어오는 소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아람 왕과 군인들은 잠결에 그 엄청난 소리를 듣고는 이스라엘이 헷 족속의 여러 왕들과 이집트 군대를 불러들여 자기들을 급습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일으키신 공포로 말미암아 비이성적인 혼란과 공포가 급격하게 번져가면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야훼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은 성 밖의 사람들, 즉 나병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프랑스식으로 말하자면 ‘방리유’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것은 들판에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늘 업신여김을 받던 이른 바 암하레츠 즉 땅의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의 소리를 제일 민감하게 듣고, 세상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들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황급히 성으로 달려가 아람 사람들이 달아났음을 성문지기들에게 알리자, 그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왕궁에 그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왕과 신하들은 그런 사실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저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달려나가 아람진영을 마음껏 약탈합니다. 식량이 지천이 되자 내일이면 식료품값이 내려갈 것이라는 엘리사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왕은 뒤늦게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하지만 성난 민심은 왕의 임명을 받은 관리를 밟아 죽이고 맙니다.
열왕기상 7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토막을 민중의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은 남의 탓만 하는 무력한 왕에게 있지 않습니다. 제 이익을 탐하기게 급급한 관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희망은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어째 먼저 가장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장애인 나병환자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들이 희망을 노래할 때 비로소 이스라엘 전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병환자들이 먼저 희망을 갖는 사회라면 정말 건강한 사회일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희망을 갖는 나라라면 성숙한 나라일 것입니다. 어찌 성 밖에 쫓겨 사는 나병환자들 뿐이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방리유, 우리 시대의 성 밖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존재들입니다. 이주 노동자들, 쌀 개방을 앞두고 절망한 농민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 철거당하고 있는 도시 빈민들, 비정규직 임금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노동자들… 우리 사회가 그들을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이웃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배려를 다할 때, 그래서 그들이 희망의 노래를 부를 때 우리 사회는 살만한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희망의 뿌리, 김기석, 기독교사상 2006년 8월호) 오늘 성서는 희망은 바로 그들,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고통당하는 바로 성 밖 이웃에 의해 희망은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현실은 암담합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우 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국가인권위원회의 축소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 것이 장애인들입니다. 단지 숫적인 축소가 아닙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우들을 위한 시설이나 지원이 법적으로 지켜지지 않을 때 시정할 수 있는 권한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사실상 장애우 차별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아니 이들에게 희망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희망을 잃을 때 우리 사회도 희망을 잃어 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도 엘리사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를 통해 이들에게 희망을 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그마한 장애우 헌금을 합니다. 이 헌금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는 데 쓰일 것입니다. 이들의 작은 희망이 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희망은 바로 이들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절 셋 째 주일 이 아침, 아직도 제 이기심으로부터 부활하지 않은 우리를 돌아보며 이 땅의 장애우들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근본임을 깨닫는 은총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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