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장애인과 함께하는 잔치
본문
예수님은 잔치를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잔치를 좋아하시는 것은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잔치를 이어가는 유일한 기관으로 설립되어 이 잔치를 계속이어가고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잔치를 보여주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잔치가 열렸음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임하였음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성도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표현하고있습니다.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잔치를 오늘날에도 계속 베풀려는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예수님의 잔치를 따라 하려면, 초청대상자를 선별하라고 하십니다.
초청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잔치를 참여한 뒤에, 자신도 잔치를 베풀며 갚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초청자 명단에서 빼어야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장애인 저는 자들과 지체장애인 소경들을 청하라 시각장애인
초청할 사람은 여러분의 호의를 갚아 줄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14절에서 이유를 설명하여 주고있습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현대어눅14:14 그러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한 대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이제 본문 말씀은 여기까지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여야합니다.
이 고민을 풀어 주시려고 예수님은 쉽게 설명하여주시는 친절을 또한 베푸십니다.
16절 이하의 비유 본문입니다.
복이 되어 돌아오는 잔치를 베풀라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복된 잔치가 바로 우리 교회가 이어 가야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복된 잔치가 아니라 복 없는 잔치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조차 이 땅에서 갚아 줄 것을 기대하는, 자본주의의 사고가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지나친 귀족화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천민적이며 노예적인 종의 기독교 문화를 버리게 됩니다.
예수의 진리는 한번도 치료받지 못한 문둥병자를 만져주며, 가장 가난한 자들과 죽은 자들에게 조차 뜨거운 애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진리와 진리의 현장이 언제나 함께하는 삶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믿으려합니까
진리로 사는 우리의 행동을 보고 믿으려 하겠습니까
진리와 진리의 현장이 분리되고, 예수의 진리는 학교의 윤리 교과서의 문장처럼 여겨지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설교는 훈계나 도덕이 되어 버렸고, 성경은 우수한 윤리교제쯤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능력 없는 교회의 모습을 향해, 무서운 욕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로 인하여 그 명예가 땅에 떨어졌고, 교회는 잔칫집이 아니라 진리의 과외 교습소 정도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진리를 전하여 준 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진리를 생명으로 말하였고, 진리를 위하여 그 생명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단이나 거짓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행동에 우리는 조소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을 진짜 처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요.
자! 우리 이제 예수님의 잔치를 한번 열어 봅시다.
떨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를, 이를 통하여 회복하여 드립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잔치를 열려면 몇가지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이 요소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비유가 본문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눅 14:16-24)
잔치의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잔치의 주인 즉 잔치를 여는 분이 누구냐가 중요하지요.
누구의 잔치냐에 따라서 참여할 것인가 모른척 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의 주인은 틀림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는 주인이라고 했고, 마태는 왕이라고 적고있습니다.
누가는 (눅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마태는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를 천국 잔치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세요 모든 것이 준비된 곳입니다.
인간의 희락과 만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수 있는 잔치입니다.
고통의 죄를 용서받는 영원한 기쁨의 잔치입니다.
우리 다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혼인잔치를 놓치지 맙시다.
우리의 이웃들도 이 잔치를 놓치지 못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에 사람들은 오기를 싫어합니다.
소를 사고, 밭을 사고, 결혼을 하고, 주식을 투자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바쁨니다.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오기를 싫어합니다.
일부러 펑크를 냅니다.
우리는 지금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에 왔습니까 사람의 잔치에 왔습니까
이 자리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때에 교회는 인본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요소는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들은 잔치를 섬기는 일군들입니다.
일군은 주인의 것으로, 주인이 맡긴 것으로, 주인을 위하여 주인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손님의 필요를 다 채우고, 잔치를 잘 진행 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은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의 가장 큰 일군 즉 큰 머슴이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최대의 잔치인 부흥회를 살펴보면 대체로 일군들만의 잔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흥회라 하여도 주일예배 출석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흥회가 더러 있습니다.
어떤 일군이 예수님의 잔치를 섬길 수 있을 까요 우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주님의 일군입니다.
자신이 일군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매우 힘이 듭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 속에, 자신을 종으로 혹은 일군으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 까요
오늘날 교회는 오직 한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분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관이 되어야합니다.
주인이 많은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모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좋은 일군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뽑으신 일군이 어떤 사람일까요
주인 되신 주님은 세가지 명령을 잔치를 섬기는 일군들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명령은 순종을 조건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1. 주인이 가라는 곳은 어디나 달려 가야합니다.
복음은 장소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인의 잔치에 손님들을 청하여야합니다.
(눅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2. 모든 사람에게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여야합니다.
(눅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린이 전도, 어른전도, 잔치로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나가 보면 압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 쉽도록 도와 드리려고합니다.
이 두번째 명령은 장애인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명령입니다.
주님의 잔치는 이 두번째 명령을 순종하는 일군들이 많을 때에 진정한 잔치가 가능합니다.
장애인선교 복음의 옥토요, 복음의 고속도로입니다.
잔치의 유일한 손님으로서의 장애인을 초대하여야합니다.
장애인은 천국의 잔치를, 주님의 잔치가 되게 하는 요소입니다.
진리와 현장을 연결해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갖고, 장애인은 이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여러분을 일부러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찮은 사람들을 불러 쓸모 있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셨습니다.
주인은 다시 반복하여 명령합니다.
(눅 14: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것을 마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습니다.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이상한 잔치라고 오해를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부름을 받아 일군된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이 선포하시는 진리에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잔치를 맛보았고, 이제 일군이 되기까지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며, 일군으로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복음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었고, 결국 이 복음의 일군들이 전하여준 믿음의 기초 위에 오늘날의 교회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일구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의 전략이며, 선교사들의 전략입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합니다.
장애인 선교는 이 땅의 가장 고귀한 사역입니다.
장애인은 이 땅의 가장 복된 복음의 옥토입니다.
여러분들이 일군인 것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일군의 특권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군이 일이 없을 때 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일하는 기쁨을 누리는 일군들로 잔치는 아름다워 집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잔치를 좋아하시는 것은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잔치를 이어가는 유일한 기관으로 설립되어 이 잔치를 계속이어가고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예수님의 잔치를 보여주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잔치가 열렸음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임하였음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성도들과의 만남의 자리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표현하고있습니다.
계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잔치를 오늘날에도 계속 베풀려는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예수님의 잔치를 따라 하려면, 초청대상자를 선별하라고 하십니다.
초청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잔치를 참여한 뒤에, 자신도 잔치를 베풀며 갚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초청자 명단에서 빼어야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장애인 저는 자들과 지체장애인 소경들을 청하라 시각장애인
초청할 사람은 여러분의 호의를 갚아 줄 수 없는 무능력한 사람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14절에서 이유를 설명하여 주고있습니다.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현대어눅14:14 그러면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한 대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다.
이제 본문 말씀은 여기까지 끝이 났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하여야합니다.
이 고민을 풀어 주시려고 예수님은 쉽게 설명하여주시는 친절을 또한 베푸십니다.
16절 이하의 비유 본문입니다.
복이 되어 돌아오는 잔치를 베풀라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복된 잔치가 바로 우리 교회가 이어 가야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복된 잔치가 아니라 복 없는 잔치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조차 이 땅에서 갚아 줄 것을 기대하는, 자본주의의 사고가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지나친 귀족화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천민적이며 노예적인 종의 기독교 문화를 버리게 됩니다.
예수의 진리는 한번도 치료받지 못한 문둥병자를 만져주며, 가장 가난한 자들과 죽은 자들에게 조차 뜨거운 애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진리와 진리의 현장이 언제나 함께하는 삶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불신자들이 우리의 말을 듣고 믿으려합니까
진리로 사는 우리의 행동을 보고 믿으려 하겠습니까
진리와 진리의 현장이 분리되고, 예수의 진리는 학교의 윤리 교과서의 문장처럼 여겨지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설교는 훈계나 도덕이 되어 버렸고, 성경은 우수한 윤리교제쯤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능력 없는 교회의 모습을 향해, 무서운 욕설을 내뱉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들로 인하여 그 명예가 땅에 떨어졌고, 교회는 잔칫집이 아니라 진리의 과외 교습소 정도로 전락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진리를 전하여 준 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진리를 생명으로 말하였고, 진리를 위하여 그 생명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이단이나 거짓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행동에 우리는 조소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짓을 진짜 처럼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요.
자! 우리 이제 예수님의 잔치를 한번 열어 봅시다.
떨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를, 이를 통하여 회복하여 드립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예수님의 잔치를 열려면 몇가지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이 요소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비유가 본문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눅 14:16-24)
잔치의 요소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 잔치의 주인 즉 잔치를 여는 분이 누구냐가 중요하지요.
누구의 잔치냐에 따라서 참여할 것인가 모른척 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오늘 본문의 잔치의 주인은 틀림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는 주인이라고 했고, 마태는 왕이라고 적고있습니다.
누가는 (눅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마태는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를 천국 잔치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고 싶지 않으세요 모든 것이 준비된 곳입니다.
인간의 희락과 만족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준비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릴 수 있는 잔치입니다.
고통의 죄를 용서받는 영원한 기쁨의 잔치입니다.
우리 다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혼인잔치를 놓치지 맙시다.
우리의 이웃들도 이 잔치를 놓치지 못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에 사람들은 오기를 싫어합니다.
소를 사고, 밭을 사고, 결혼을 하고, 주식을 투자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바쁨니다.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오기를 싫어합니다.
일부러 펑크를 냅니다.
우리는 지금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에 왔습니까 사람의 잔치에 왔습니까
이 자리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할 때에 교회는 인본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요소는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들은 잔치를 섬기는 일군들입니다.
일군은 주인의 것으로, 주인이 맡긴 것으로, 주인을 위하여 주인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손님의 필요를 다 채우고, 잔치를 잘 진행 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은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잔치의 가장 큰 일군 즉 큰 머슴이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최대의 잔치인 부흥회를 살펴보면 대체로 일군들만의 잔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부흥회라 하여도 주일예배 출석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흥회가 더러 있습니다.
어떤 일군이 예수님의 잔치를 섬길 수 있을 까요 우리입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부름을 받은 주님의 일군입니다.
자신이 일군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매우 힘이 듭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 속에, 자신을 종으로 혹은 일군으로 믿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 까요
오늘날 교회는 오직 한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분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관이 되어야합니다.
주인이 많은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라기 보다는 사람들의 모임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좋은 일군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뽑으신 일군이 어떤 사람일까요
주인 되신 주님은 세가지 명령을 잔치를 섬기는 일군들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명령은 순종을 조건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1. 주인이 가라는 곳은 어디나 달려 가야합니다.
복음은 장소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인의 잔치에 손님들을 청하여야합니다.
(눅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2. 모든 사람에게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여야합니다.
(눅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린이 전도, 어른전도, 잔치로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나가 보면 압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 쉽도록 도와 드리려고합니다.
이 두번째 명령은 장애인 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명령입니다.
주님의 잔치는 이 두번째 명령을 순종하는 일군들이 많을 때에 진정한 잔치가 가능합니다.
장애인선교 복음의 옥토요, 복음의 고속도로입니다.
잔치의 유일한 손님으로서의 장애인을 초대하여야합니다.
장애인은 천국의 잔치를, 주님의 잔치가 되게 하는 요소입니다.
진리와 현장을 연결해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을 갖고, 장애인은 이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여러분을 일부러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찮은 사람들을 불러 쓸모 있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셨습니다.
주인은 다시 반복하여 명령합니다.
(눅 14: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이것을 마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있습니다.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이상한 잔치라고 오해를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부름을 받아 일군된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이 선포하시는 진리에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잔치를 맛보았고, 이제 일군이 되기까지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며, 일군으로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복음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주었고, 결국 이 복음의 일군들이 전하여준 믿음의 기초 위에 오늘날의 교회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일구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의 전략이며, 선교사들의 전략입니다.
그리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전략이 되어야합니다.
장애인 선교는 이 땅의 가장 고귀한 사역입니다.
장애인은 이 땅의 가장 복된 복음의 옥토입니다.
여러분들이 일군인 것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일군의 특권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군이 일이 없을 때 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일하는 기쁨을 누리는 일군들로 잔치는 아름다워 집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을 드립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