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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두 부류의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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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제 31차 유엔총회에서는 1981년을 세계 장애인 해로 정하고 "모든 국가는 장애인들의 사회적 참여가 여러 분야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다른 국민들과 동일한 기회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며 신장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우리 나라는 유엔의 권고에 따라 세계 장애인의 해인 81년에 "장애인 복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촉구하고 장애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며 장애인의 재활 의지를 고취"할 목적으로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공식 지정하면서 각종 기념행사를 치러왔습니다. 그 후 1989년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면서 장애인의 날은 정식으로 정부기념일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이러한 정부의 시책과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를 중심으로 88년 서울 장애인 올림픽이 열린 이듬해인 89년부터 장애인의 날인 20일을 전후한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선포하고 장애인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이란 누구입니까 이 질문의 답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쉽게 말해 버릴 수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장애의 원인이나 유형 그리고 그 정도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입장에서 또는 어느 측면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개념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 문화, 환경적 차이 혹은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 장애인의 개념에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애인 하면 휠체어를 탄 사람,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장애인이란 "상해, 질병, 유전적인 원인으로 만성적인 신체적 혹은 정신적 불능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됩니다. 한편 1973년 미국의 재활법에 따르면 "주요 생활 활동분야에 있어서 한 분야 이상 실질적인 제한을 주는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을 가진 자"라고 정의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장애인 복지법 1장 2조에서는 "장애인이라 함은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또는 정신지체 등의 정신적 결함으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장애인이란 신체적, 지적, 정서적, 언어적 등의 어느 영역에 있어 일정한 결함이나 편차로 인해 사회가 요구하는 보통의 성취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불편을 겪는 장애인들에 대하여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격으로서 마땅한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많은 부분은 장애인들을 고쳐주시고 또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 들어가시는데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누가는 이 손이 오른손이라고 하였고(눅6:6) '마른'이란 단어가 분사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선천적으로 불구가 된 것이 아니라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후천적인 영향으로 팔이 서서히 말라 발육이 중단되고 오그라드는 병으로 중풍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의 장애인들의 수를 400만명으로 보는데 그 중에서 89. 4%가 후천적인 영향으로 인한 장애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잠재적으로 신체장애자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손 마른 사람을 가운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시는지 엿보고 있었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율법에 의하면 생명이 위급하지 않는 경우에는 안식일 날 치료하지 못하도록 하였기에 생명이 위급하지도 않는 병자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 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식일 문제로 인하여 바리새인들과 한바탕 설전을 벌인 뒤였습니다. (막2:23-28) 그러니 예수님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더욱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물으시니 사람들이 모두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은 저희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고 노하시면서 손 마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나가서 곧 헤롯 당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본문에서 두 부류의 장애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육적인 장애인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장애인입니다.
1. 육적 장애인
선천성 장애인들이 느끼는 삶의 불편과 아픔은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아픔의 깊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후천적 장애인들이 가지는 삶의 좌절과 고통도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가졌다가 후에 교통사고나 다른 사고로 인하여 장애인들이 되면 그 고통과 좌절을 이기지 못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고, 인생을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만납니다. 그것은 그만큼 장애가 주는 고통과 절망이 크고 삶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 손 마른 장애인도 그 고통과 삶의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생을 이제 한 손을 쓰지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괴로웠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장애인들은 여러 면에서 건강한 사람들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아픔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사회에서도 차별을 하기에 장애인들은 살아가기에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런데 그 손 마른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함께 기뻐해 주어야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회복시켜 주심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등장합니다. 소경, 다리 저는 자, 나환자, 소경, 혈루병자, 귀신들린 자 등등의 장애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저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고침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죽을 수밖에 없는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평생을 앉은뱅이로 소경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일어나게 되었고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한때 이런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제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만 되면 특히 새벽에 콧물이 줄줄 나와서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새벽기도회 때에는 수시로 나오는 콧물 때문에 설교하다가도 훌쩍, 기도하다가도 훌쩍, 성경을 읽다가도 훌쩍 훌쩍 거렸는데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가 끝난 뒤 강대상에는 콧물 닦은 화장지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 제발 콧물 좀 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혹시 새벽에 제가 훌쩍 거려도 "아 우리 목사님 알레르기가 있어서 저러시구나"하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4월 둘째 주일날 유초등부 설교를 하러 갔었습니다. 그런데 사회를 보는 아이가 감기가 걸렸는지 훌쩍거리는데 정말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새벽마다 훌쩍 거렸으니 제 자신이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교우들이 정말 신경이 많이 쓰였겠다 싶더군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를 해도 잘 낫지 않더니만 울산에 오고 부터 거의 나아진 것 같습니다. 울산 반석교회 공기가 좋은 것인지 그때 기도가 지금 열매를 맺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의 작은 불편이 해소되어도 이렇게 기쁜데 평생을 고치지 못하여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질병을 고치고 회복되었으니 그 기쁨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삶의 희망이셨고, 그들의 기쁨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장애인들의 희망이요 소망이 되시고 기쁨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사가 되셔서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도 육체의 장애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성도들이 계시다고 한다면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손길과 권능 아래서 회복되어지고 쾌유되어지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친근한 벗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 해전 SBS에서 이문열씨가 쓴 "형제의 강"이란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복만은 첫째 아들이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그 아들만 사랑하고 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면서도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셋째 아들 준호는 미움을 받고 자랍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상을 받아도 무시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화가의 꿈을 키워가는 준호는 자신의 신체장애를 비관하면서 마지막으로 작품을 하나 완성해 놓고 자살을 하는데 그는 죽기 전에 평생 자신을 구박하고 폭행만 하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누어있는 자리에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부지 아픈 다리를 사랑하이소. 나도 이 아픈 다리를 사랑합니더" 이 말을 하고 자살하게 되는데 그 아픈 다리는 다름 아닌 자신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프고 연약한 지체가 더욱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 중에 연약한 식구를 더 사랑해야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핸디캡마저도 사랑해 주어야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연약함. 육체의 장애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2. 영적인 장애인
한편 그곳에는 또한 부류의 장애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체 장애인보다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아주 위험한 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도 고칠 수 없다는 아주 고약한 생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막2:27) 육체의 질병보다도 정신적인 질병은 무척 고치기 힘들고 치료의 시간도 많이 들어갑니다.
우리들 주변에도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신병자들만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자들이 아니라 완악하고 교만하고 비뚤어진 사고를 가진 사람들 모두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핸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병원 원목 밑에서 임상 목회 훈련을 받는 존이라는 사람이 해리슨이라는 사람을 상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해리슨은 48세의 농부로서 다리수술을 받으려고 큰 병원에 입원한 환자입니다. 존은 이 사람과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었는데 해리슨은 지금 무척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수술 받기 위해 마취를 하면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또한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그는 삶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를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고 기다리는 것이라고는 담배를 수확해야하는 고딘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상담을 마친 후 존은 돌아갔는데 바로 그 다음날 해리슨은 수술 도중에 죽고 맙니다. 핸리 나우웬은 이러한 일들을 아주 깊이 분석을 하였는데 해리슨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가 죽은 것은 삶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있지만 다리를 수술하여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가도 기다려 줄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그의 현실과 고작 기다리는 일이란 것이 힘든 담배농사이기에 그는 삶에 큰 의욕이 없었던 것입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삶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기다려 준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돈을 벌러 먼 외국에 나가서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이 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남편이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힘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살아갈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도 공항이나 역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기다림 때문에 빨리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기억조차 아니하는 이런 삶 속에서 인간은 낙망하며 괴로워하며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작은 다리 수술에서도 정신적으로 질병에 걸려 삶의 의욕을 꺾으면 죽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정신적인 질병은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병이 들면 더욱 위험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잔인한 일을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막가파니 지존파니 하는 파들이 왜 생깁니까 영적으로 병이 들어 영이 마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건전한 사고의식이 마비되고 인격이 파괴되고 윤리의식마저도 사라집니다. 지극히 명백한 선악간의 판별마저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신체장애만 있는 사람은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온갖 더럽고 추한 소식은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정신적 영적으로는 질병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요즘 홈 쇼핑 텔레비전을 보면 홍삼 다이어트가 인기입니다. 정말 홍삼이 몸에 좋긴 좋은데. 그런데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홍삼은 정말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 홍삼 때문에 스트레스 쌓입니다. 정말 짜증이 납니다.
어째서 우리 나라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그렇게 모두 부정과 부패의 주범들입니까 정말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청문회라도 하여서 속 시원하게 파헤쳐서 다시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모두 육체적으로는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정신은 썩었으며 그들의 영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소망이 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실 때 그들은 손 마른 사람에 대한 동정심은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이나 들먹이면서 긍휼과 사랑과 이해는 외면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놀라운 신적인 권세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면 사람이 이렇게 완악 해 집니다. 사랑과 긍휼이 마음에서 사라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비판하기를 좋아하고, 남의 약점이나 잡아 매장시키려고 하고 불순한 목적과 비열한 행동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장애아입니다.
오늘날에도 남이 잘되면 배아파하고 오히려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남이 잘된 것을 함께 기뻐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잘못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삶 속에서 언제나 불평과 원망을 일삼는 사람은 영적인 장애인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혹시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픈 분들이 있으십니까 욥기에서 보는 사단처럼 두루 돌아다니면서 항상 남의 약점이나 찾아다니고 허물을 들춰내기를 즐겨하는 분들이 있지나 않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장애인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 장애인까지 고쳐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노라 하면서 영적 정신적 장애로 살아 왔다면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건강한 정신과 영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질병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분들도 모든 질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들도 잠재적인 장애의 가능성을 깊이 깨닫고 장애인들을 내가 그 연약한 부분을 채워주어야 할 벗이요 친구들임을 깨닫고 장애인들과 더불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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