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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인들을 꾸짖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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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한 부분이 불편한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팔이나 다리가 불편한 분을 지체 장애인, 눈이 안보이는 분을 시각 장애인, 귀가 안들리는 분을 청각 장애인, 장애가 심한 분을 중증(重症) 장애인, 한가지 이상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을 복합 장애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분들은 육신적 장애인입니다.
육신적 장애인이 장애인의 전부인 것으로 알기 쉬운데 또 다른 종류의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우선 영적인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자기가 죄인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장애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인 장애는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장애인들에 대해서는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영적인 장애를 면하기 위해서는 육신적인 장애는 입어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3-47)
영적인 장애인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손과 발이 없는 지체 장애인, 시각 장애인이 되는 편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육신적인 장애보다 영적인 장애가 더 무서운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읽은 성경 말씀에 "불구자" "절뚝발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한글성경이 1911년에 번역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들어 갔습니다.
요즘 장애인 단체에서는 성경의 이런 단어들을 바꿔 달라고 계속해서 건의하고 있고 새로 번역되어 나오는 한글 성경에서는 이런 단어를 쓰지 않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2절을 1993년에 나온 표준 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그 꺼지지 않은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소경은 눈먼 사람으로, 문둥병자는 나병 환자, 또는 악성 피부병 환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더 확대 되어야 합니다.
여하튼 육신적인 장애보다 영적인 장애가 훨씬 더 무섭습니다.
정신적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정신 장애인이 아니고 정신적 장애인입니다.
정신 장애인이라면 정신에 이상이 있는 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분들, 적은 분들, 또는 형식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 정신적 장애인들입니다.
육신적 장애인 보다 정신적 장애인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육신적 장애를 수치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자신의 장애를 수치로 여겨서는 안되고 장애인이 아닌 분들도 장애인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육신적 장애는 수치도 아니며 저주도 아닙니다. 그저 약간, 또는 매우 불편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장애에서, 또 어떤 사람의 장애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발견하는 사람은 성숙한 장애인이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 합심기도회에 시각 장애인인 수원 대영침례교회 유한주 목사님이이 와서 좋은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 신학교에 강사로 나가 가르치고 있을 때 한 신학교에서 저에게 배운 분입니다.
그 분이 그 날 간증을 끝내고 제가 뒷마루리를 하면서 한 말이 있지요. "나는 이 시각 장애인 학생의 시험지나 레포트는 읽지도 않고 A를 주었습니다" 사실은 그 다음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 날 그 분의 간증이 너무 늦게 끝나 앞부분만 꺼내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것입니다.
저는 정말 시각 장애인 학생들의 (그 학생 말고 다른 시각 장애인 학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답안지나 레포트는 어느 정도 기본 요건만 갖추고 있으면 A를 주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뭐 차례대로 질문하다가도 장애인 학생 차례가 되어 그 학생이 대답하면 그만, 못대답해도 꾸짖지 않고 건너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시각장애인 학생 답안지가 시원치 않으면 F도 주고 레포트를 늦게 내면 손바닥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마침 그 교수가 저와 신학대학 동기동창이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서 충고 비슷하게 "이거 보시오, 신 목사 조금 지나치지 않소 어떻게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같은 기준으로 채점을 하고 더구나 벌을 주고 그럴 수 있소" 했습니다.
조직신학 교수의 대답이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장애인이나 장애인을 가진 부모님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도 그 장애인 학생을 따뜻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그에게 장애를 주신 것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이고 내가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된 일 아니겠소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 학생이나 나나 마찬가지요. 그 학생이 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일부러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니 양해해 주시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당신이 나보다 백 배 낫다. 당신은 정말 신학교 교수 자격이 있다' 했습니다.
육신적 장애를 수치로 여기지 말고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발견 하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장애는 수치입니다. 변명할 길이 없는 수치입니다.
장애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적 장애를 수치로 여기는 사람은 육신적 장애인 플러스 정신적 장애인입니다.
관공서나 큰 건물의 주차장에 가면 장애인들을 위한 주차칸들이 있습니다. 장애인이 아니면서 장애인 주차표시가 있는 칸에 차를 주차해 놓은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장애인입니다.
미국에서는 장애인 스티커가 붙지 않은 차량이 장애인 주차장소에 주차했다가 적발되면 아주 비싼 벌금이 부과됩니다. 1988년에 미국에 갔을 때 그런 경우 벌금이 200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미국에 살다가 최근에 귀국한 목사님에게 요즘은 벌금이 얼마냐고 물어 보았더니 점잖게 대답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그런 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벌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는데 300불쯤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은 육신적 장애인을 꾸짖으신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그런 기록이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장애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최초로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1장부터 장애인 고쳐 주신 이야기가 가득차 있습니다.
1장 23절에 회당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정신 장애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고 1장 34절에는 "예수께서 각색 병든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2장은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중증 장애인) 고친 이야기로 시작되고, 3장은 한 편 손 마른 사람(지체 장애인) 고쳐 주신 이야기, 시각 장애인인 바디메오를 비롯해서 시각 장애인들을 고쳐주신 기록은 성경 여러 군데에서 찿아 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기록된 문서에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기록된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신적인 장애인들은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마땅히 돌보아야 할 사람들, 주린 사람들, 목 마른 사람들, 나그네된 사람들, 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갇힌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염소"라고 부르며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꾸지람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정신적 장애인이 아닙니까
만일 "장애인 사회" 또는 "장애인 국가(공화국)"라는 말이 있다면 어떤 사회가 장애인 사회이고 어떤 나라가 장애인 국가라고 생각하십니까
"장애인들이 많이 사는 사회가 장애인 사회이고, 그런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장애인들로 이뤄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가 장애인 국가가 아닐까요"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답이 아닙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거나 아니면 그저 형식적인 관심을 표하는 사회나 나라를 장애인 사회, 장애인 국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국은 이제 장애인 국가를 막 벗어나고 있습니다.
장애인 복지법이 제정된 것이 1989년 12월 30일, 불과 8,9년 전의 일입니다. 1988년에 올림픽 개최의 의무사항인 제8회 장애인 올림픽 대회가 서울에서 열리지 않았더라면 더 늦게 제정되었을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취업을 돕기 위해서 장애인 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의 일입니다.
최근에는 횡단보도에 시각장애인들을 위해서 볼록볼록한 보도 블록을 깔아 놓는다거나 파란 신호등이 켜지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시설이 늘어나고 있고 지하철역 몇 군데에는 휠체어를 타고 오를 수 있는 리프트 시설이 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도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수화가 동시에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만족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장애인 고용촉진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무원의 경우는 정원의 2%, 일반사업장은 1% 이상 5%내에서 장애인을 고용하게 되어 있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장애인 고용 부담금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기업주들이 장애인을 채용하지 않고 장애인 고용 부담금을 내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채용하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과 여러 가지 배려가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그 전에는 "불구자"를 비롯하여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상하게 그 전에 나온 사전은 물론이고 1992년에 나온 한글학회우리말 큰 사전에는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아직 실려 있지 않습니다.
장애 빌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애 빌딩이라면 장애인들이 많이 출입하는 빌딩, 장애인 단체들이 입주해 있는 빌딩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아닙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없는 빌딩에 오면 장애인들은 "아, 이 빌딩은 장애 빌딩이군요" 합니다. 아주 불편합니다. 휠체어 통로가 없으면 장정 두엇이 동원 되어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야합니다. 그 장애인인 젊은 여성이면 더 민망스라운 장면이 벌어집니다.
홍콩 여행을 하는 분들은 호텔에 체크 인 할 때 관광 가이드들에게 이런 안내를 들었을 것입니다.
"샤워를 할 때는 반드시 욕조에 들어가서 휘장을 치고 그 안에서 샤워를 하십시오. 홍콩은 영국의 통치를 오래 받아서 장애인 복지 시설이 많이 보급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목욕실에 출입할 수 있도록 턱이 없습니다. 만일 욕조 밖에서 샤워를 하다보면 바닥에서 미쳐 물구멍으로 빠져 나가지 못한 물이 방으로 흘러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수도 꼭지를 모르고 틀어 놓았다가는 방이 물바다가 되고 그러면 벌금을 많이 물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홍콩의 호텔들은 장애 빌딩이 아닙니다.
장애 사회는 나라의 발전 단계에서 거치는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북한 같이 사회주의 국가였거나 사회주의 국가인 나라들은 이 점에서 지금도 정말 형편 없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은 조금 빠른 속도로 장애인 복지가 향상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장애인을 잔질인(殘疾人)이라고 합니다. 잔질인 복지가 많이 향상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전 통치자였던 등소평의 아들 등박방(登撲方)이 휠체어를 사용하는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대통령이 스스로 "나도 장애인이다" 말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앞으로 장애인 복지가 빠른 속도로 향상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장애 빌딩들은 지금 숫자가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새로 짓는 건물들은 최소한 휠체어 통로들은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가 장애 교회이어서는 안됩니다.
장애인들에 대해서 관심이 적은 교회,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이웃들을 돌보지 않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교회를 예수님께서는 심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오늘 염소들을 꾸짖으신 것 이상으로 심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교인들끼리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 "어느 교회에 나가십니까" 이런 인사를 나눕니다.
"나는 어느 교회 나갑니다" 하는 대답을 통해서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로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락교회 나갑니다" 하면 '아 이 사람은 고향이 북한인가 보다',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영락교회는 북한에서 피난 온 분들이 세운 교회입니다.
"나는 S교회 나갑니다" 하면 '아 이 사람은 복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게 됩니다.
"S 장로교회 나갑니다" '아, 이 사람은 지성적인 것을 좋아하나 보다' "기장 교회(기독교장로회) 나갑니다" '아, 이 사람은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구나!'
"어느 유명한 교회에 나갑니다" '아, 이 사람은 인기 있는 목사님, 소문난 목사님(탈렌트 목사님이라고 하지요)을 좋아하는구나!'
많은 경우에 맞습니다.
여러분 "목양교회에 나갑니다" 하는 대답을 듣고 사람들이 '아, 이 사람 성서적이고 복음적이고 영적이고 체험적이고 치유하고 보편적이고 선교 지향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로구나!' (이런 것들은 목양교회의 표어입니다)하는 판단을 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왜 드리는줄 아십니까
엊그제 장로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이십니까" 그랬더니 "어느 교회 장로인데 원래는 한영교회 출신입니다" 했습니다. 제가 그 장로님 다시 보았습니다.
한영교회는 영동 시장 부근에 있는 2층 짜리 교회입니다. 서울대학 교수이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앞장 서고 있는 손봉호 장로님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2층 짜리 교회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엘리베이터 시설을 한 것이 아니라 다 지어 놓은 다음에 '아차!' 하고서 뜯어 고쳤습니다.
그 장로님, 건축회사 사장인데 공사 실적을 보니까 장애인을 위한 시설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장애인 교육기관인 다니엘 학교도 지었습니다. 다니엘 학교,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님이 전력을 기울여 짓는데 인근 주민들이 너무 심하게 반대해서 국가적인 문제가 되었던 학교가 아닙니까
저는 "장로님을 좀 일찍 알지 못한 것이 아쉽군요" 했습니다. 오늘 저희 교회 건축 실무위원회 모여서 건축 실무 검토하는 것으로 아는데 저희 목양교회 신축 성전은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빠진 것은 없는지 다시 한 번 검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차 시설은 잘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의무적으로 갖춰야 하는 장애인 주차 공간은 2대인데 6대 자리가 가장 편리한 자리에 설계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장애인 선교주일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 새롭게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내가 영적인 장애인 아닌가 한 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정신적인 장애인 아닌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 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면 정신적 장애인입니다. 염소입니다. 육신적 장애인보다 더 큰 장애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혹시 장애 교회는 아닌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꾸짖으십니다.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혹독하게 꾸짖으십니다. 가혹하게 질책하십니다.
그런 꾸지람 받지 않고 양의 반열에 들어 칭찬 받는 여러분과 저, 목양교회, PC 통신을 통해 이 설교를 읽는 모든 분 되시기를 장애인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졌던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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