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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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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장애인주일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장애로 고통 당하는 성도들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우리 총회는 4월 셋째주일은 장애인주일로 정하여 교회 안팎에서 소외 당하는 장애인들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돌보며 위로하며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장애인 주일을 정한 것이다. 금년 4월 셋째주일은 부활주일이므로 오늘 장애인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오늘 장애인을 위로하는 순서 몇 가지를 하려고 했다가 아직도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므로 오늘은 장애인에 대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의 자세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다음 해부터는 장애인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세우고 많은 봉사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인을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 정신지체로 설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은 2002년도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자는 1, 294, 254명으로 되어 있다. 금년도부터는 만성 중증호흡기질환, 안면기형, 간질환, 장루, 간질까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자는 장애인 혜택을 받을 전망에 있다. 이렇게 보면 장애인은 상당수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와 이웃에 장애인 한 두 사람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장애인들을 돌보는 단체나 제도는 매우 미약하여 장애인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그 가정에서 돌보거나 돌볼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가정에서는 소외를 당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장애인과 그 가족은 이중삼중으로 고통과 소외를 당해온 것이 사실이다. 복지사회를 목표로 많이 발전을 해온 우리나라에서 앞으로 장애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며 국가에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아직은 국가의 그런 경제적인 힘이 없어서 많은 장애인들이 올바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교회가 여기에 많은 관심과 프로그램과 시설과 재정을 투자하여 장애인을 위하여 선교의 전략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오늘은 장애인에 대하여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원리적인 것에만 말씀드리려고 한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교회는 장애인들에 대해 예수님처럼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길에서 되어진 일이다. 이 길은 마지막 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가시는 길이다. 예수님의 선교의 활동지인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사마리아를 지나 엠마오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베뢰아 지역을 지나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뢰아를 지나 여리고를 거쳐가는 길을 택하셨다. 이 길은 멀고 험하다. 왜 예수님께서 이 길을 택하셨는가 예수님의 일정을 보면 이 길에서 하신 일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만나 구원시키며 제자로 삼는 사건이 나온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두 소경을 고치시는 기적의 사건이 나온다.
이 두 사건을 서로 연결시켜보면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삭개오를 구원시키고 두 소경을 고치시기 위해 그 먼길을 돌아서 여리고로 오신 것을 알 수 있다. 여리고의 입구에서 삭개오를 구원시키고 여리고를 막 빠져나가는 출구에서 오늘 본문의 두 소경을 고쳐주신다.
예수님 주위에는 언제나 장애인들이 떠나지 않았다. 오늘이나 옛날이나 장애인들은 항상 소외를 당했다. 예수님은 그 소외 당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고쳐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믿음과 용기를 주셨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도 장애인들을 고쳐주시는 일을 하셨다.
 첫째는 삭개오이다. 그는 세리장이지만 키가 작고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인간 장애자였다. 둘째는 오늘 본문의 소경이다. 예수님은 소외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와 소경을 찾아가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막 들어오시면서 삭개오를 회개시키며 구원하셨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몇 일을 유하고 여리고성을 막 빠져나가려고 할 때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예수님 주위에는 많은 소리가 있었다. 29절을 보면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라고 했다. 큰 무리가 모이면 큰 소리가 있다.
이 세상은 큰 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에 농부들도, 노동자들도, 어민들도, 교사들도 많은 사람이 모여 큰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소리가 아니라 작지만 절박한 소리, 고통의 소리, 간절한 소리를 들으신다. 큰 무리의 소리에 비하면 두 소경이 부르짖는 소리는 너무 작아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소리를 들으셨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때론 큰 소리로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이 들으시는 소리는 큰 소리보다 간절한 소리이다. 진실된 소리이다. 고통의 소리이다. 믿음의 소리이다.
성도 여러분, 선교가 무엇인가 사도행전 16:9절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우리를 도와달라 하는 그 소리를 듣고 그리로 가서 도와 주는 것이 곧 선교이다. 선교는 고통의 소리를 듣고 그리로 가는 것이 선교이다.
지금 예수님은 소경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계신다. 그 고통의 소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 소리인가 바로 소경 시각장애인에게서 나오는 소리이다. 아마 우리나라 국립대학교에서는 처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각장애인이 충북대학교에 교수가 되었다. 장애인이 교수가 되기까지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사랑하는 13살 때 그만 실명하고 말았다.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온 식구가 함께 울며불며 야단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볼 수 없는 식구 때문에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무엇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피하게 되고 싫어하게 되었다. 이때 교사인 아버지가 안타갑게 생각하고는 이런 제안을 식구들에게 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만이라도 우리 모두 눈을 가리우고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들과 동생의 고통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조금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도 눈을 가리우고 학교에 나가 가르쳤다. 온 식구들이 눈을 가리우고 살았다.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생각한 것보다 더 불편했다. 식구들은 동생을 껴안고 모두 울었다. 잘못을 뉘우치는 눈물이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눈물이었다. 그 후부터 식구들은 종말 동생을 사랑했다. 이해했다. 이런 사랑을 받은 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가 되었다.
장애인를 사랑하는 것은 장애인의 고통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장애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예수님은 장애인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다.
소경들이 외치는 소리는 무엇인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지금까지 소경들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따뜻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 그 무엇보다도 사랑에 굶주려 있다. 그들은 이제 인간의 사랑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싶어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외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는 간절한 기도이다. 참 기도는 무엇을 달라는 기도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소경들의 간절한 소원을 책망했다. 소경들의 간절한 기도를 꾸짖었다. 조용하라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막아버렸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자들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 주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린다.
장애자가 있으므로 힘든 것은 사실이다. 때론 멸시를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소경의 부르짖음을 귀찮아해서 조용하라고 책망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들은 장애자에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했다. 오히려 고통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소경의 작은 부르짖음에 귀를 기우리셨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셨다. 소경의 외치는 소리는 작게 들렀을 뿐이지 그의 외침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외침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청하는 외침이었다. 소경의 외침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강하고 더 간절하고 더 고통스러움이 있었다.
예수님은 소경의 외침을 들으셨다.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신다. 사랑하는 장애인 여러분, 장애인 가족 여러분, 우리 인간은 여러분의 신음을 듣지 못해도, 여러분의 아픔을 알지 못해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듣고 계신다.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여호와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주만 바라볼지라 장애자 되시는 형제 여러분,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나의 신음을 듣고 계신다. 주님께서 나의 아픈 마음을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 나의 눈물을 보고 계신다. 주님께서 나의 고독을 이해하고 계신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소리는 한 맺힌 소리였다. 피 맺힌 소리였다. 주님은 많은 소리 가운데 한 맺힌 소리를 들으셨다. 피 맺힌 소리를 들으셨다. 하나의 기도는 한 맺힌 기도였다. 히스기야가 벽을 향한 기도는 피 맺힌 기도였다. 가나안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는 외침은 피 맺힌 외침이었다. 이런 외침은 하늘에 상달한다. 이런 기도는 주님께서 들으신다. 주님께서 소경들의 외침을 듣고 걸음을 멈추셨다. 지금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은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에워 쌓고 따르고 있다. 그리고 한 시 바삐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소경 두 사람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바쁜 걸음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더
욱 소경들에게 조용하라고 책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바쁜 걸음을 멈추셨다.
그렇다. 교회가 소외된 자들을 위한 일보다 더 바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종종 중요하지 않는 일들을 중요한 일처럼 서두르고 정말 중요한 일은 그저 지나쳐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바쁘니까, 중요한 일을 하니까 이런 덜 중요한 일들은 지나쳐도 괜찮다는 말을 한다.
당시 제자들과 사람들 보기에는 두 소경의 외침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외침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신 것은 주위의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심에도 불구하고 멈추신 것이다. 왜냐하면 소경들에게 조용히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은 단순히 소경에게만 조용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제 너희들의 소원을 들어주실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며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다.
주님은 여리고를 들어오실 때에도 삭개오의 가정으로 걸음을 돌리셨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삭개오의 가정을 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삭개오의 가정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향해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간다"고 수군거렸다. 비웃었다.
우리가 장애인들을 보고 수군거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비웃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수군거리는 저들을 향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함이니라" 그렇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베뢰아의 길을 선택하신 것은 영광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 장애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뢰아 길을 택하셔서 가셨다.
우리가 멈추는 것은 어떤 곳인가 아름다운 곳, 깨끗한 곳, 거룩한 곳, 영광스러운 곳, 나에게 유익한 곳, 사랑 받는 곳, 칭찬 받는 곳에 멈추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이 멈추시는 곳은 바로 소외 된 자들이 눈물이 있는 것이다. 소외된 자들의 아픔이 있는 곳, 부르짖음이 있는 곳, 장애인들의 부르짖음과 기도가 있는 곳에 주님을 함께 하신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인가 우리가 장애인들과 어려움에 있는 자들을 도울 때 잘못하면 건강한 자 중심으로 하게 된다. 건강한 자 중심으로 생각하며 건강한 자 중심으로 말하며 건강한 자 중심으로 모든 일들을 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그들을 돕는다고 하지만 장애인들 편에서 볼 때 오히려 더 상처를 둘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주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저들 편에서 저들 방식으로 도와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물음에는 전적으로 소경의 입장에서 돕기를 원하셨다. 소경의 생각과 원하는 대로 돕기를 원하셨다.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저들 편에서 돕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장애인들을 돕는 방법이다.
교회가 봉사의 일을 할 때 언제나 생각해야 할 것은 교회의 방법으로 도우면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돕지 않는 것만도 못할 때가 있다. 교회는 항상 주님의 방법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주님의 방법은 바로 장애인들이 원하는 대로 돕는 것이다. 장애인들 중심으로 돕는 일이다.
어떤 양로원을 방문한 일이 있다. 한 직원이 교회에서나 단체에서 양로원 방문을 온다고 할 때 반가움 보다 두려움이 앞선다고 했다. 어떤 단체에서 성탄 때 양로원을 방문했다. 위문품을 앞에 놓고 그 추운데 나이가 많은 노인들을 나오게 하고는 사진을 찍고 야단이었다. 그리고 어떤 신문에 어느 단체 양로원을 방문하다라는 대문짝만 글자로 기사화 된 것을 읽고는 이들이 과연 양로원을 위한 봉사인가 아니면 자기를 피알 하고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인가 의심 갈 때가 많다고 한다. 자기 위주의 봉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항상 장애인 중심으로 도와 주어야 한다. 장애인 중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장애인 중심으로 봉사해야 한다. 장애인 중심으로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서울 지하철이나 공공건물에 장애인들을 위한 서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한갓 장식용이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아닌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든 것이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건강한 자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들을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다.
우리가 늘 건너 다니는 건널목도 그렇다. 건강한 사람이 뛰어가야 겨우 건널 수 있게 신호등의 시간을 설치해 놓았다. 보통 걸음으로 가면 반쯤 건널 때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만다. 여기에 장애인이나 노인들은 도저히 건널 수가 없다.
우리 건강한 자들이나 교회나 국가와 사회 단체들은 장애인들을 돕기 전에 예수님처럼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 한다.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소경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원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다. 입을 옷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어디 취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자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오직 보기를 원했다. 눈이 밝아지기를 원했다.
교회는 장애인들을 돕되 되도록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을 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에 가깝도록 해야한다. 입을 것 도와 주는 것 좋다. 먹을 것 도와 주는 것 좋다. 사는 것 도와 주는 것 좋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도와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 주셨는가
34절에 "민망히 여기사"라고 했다. 이 말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연민의 정이 흘러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돌아온 탕자를 불쌍히 여겨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을 "민망히 여기"다 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빈들 광야에서 굶주린 무리들을 "민망히 여기"사 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민망히 여기"기만 하면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다. 영어성경에는 민망히 여기다라는 말을 compassion으로 되어 있다. 이 뜻은 고통을 함께 당하고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그렇다. 주님이 걸음을 멈추신 것은 기적을 행하기에 앞서 소경이 앞을 못 보는 안타가움과 고통을 함께 당하고 함께 나누기 위해서 걸음을 멈추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할 자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장애인주일은 장애인들을 위해 예배 드리는 것보다, 장애인들을 위해 헌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장애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이 마음이 더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저들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하신 일이 저들의 고통을 함께 당하는 것이요 저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을 먼저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나사로의 무덤에 머물러 서서 먼저 눈물을 흘리셨다. 이것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나사로의 죽음을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오는 인간의 고통을 당하셨고 함께 나누셨다. 이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먼저 있어야 한다. 장애인들과 고통을 함께 당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을 하지 않고 다만 그들을 돕는 것은 그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고통을 함께 당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강단에서 천사와 같은 설교보다 저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독거 노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귀한 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과 문둥병과 귀신들린 자와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당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우리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당하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은 것은 다만 고통으로 인한 외침만이 아니라 죄인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그런 고통을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직접 당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어쩌면 십자가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영적인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우리 죄인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희 눈을 만지시니"
지금 소경들은 율법적으로 보면 부정한 자들이다. 그런데 부정한 자들을 만지는 자도 함께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자신도 부정할까 봐서 병자들을 멀리 했던 것이다. 예수님도 어렸을 때부터 레위기의 성결법에 대해 교육을 받고 그대로 실행해 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손으로 만졌을까 열 문둥이들은 만지지 않고 말씀 한마디로 그들을 다 깨끗하게 하셨다. 이 소경도 만지지 않고 말씀으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은 손으로 만져주셨다.
여기에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치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상당한 권위가 더 있어 보인다. 말씀 한마디로 고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상당한 능력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그러나 손으로 만져 고치는 것은 소경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 소경들은 예수님의 손끝을 통해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소경들은 얼마나 감각이 예민한지 모른다. 그들은 예수님의 손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까지 이 소경에게 돈을 던져주고 먹을 것을 던져주기는 했어도 따뜻한 손으로 그들을 만져준 자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한 자를 만지는 것을 율법으로 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소경들은 육체적인 자애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사람들로 소외됨이 더 컸던 것이다. 이 소경이 바라는 것은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더 원하는 것은 자기를 인간답게 따뜻하게 만져주는 것을 원했을 것이다. 부정한 자기를 부드럽게, 사랑스럽게 만져주는 손길이 더 그리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소경들의 이 마음을 아시고 따뜻한 손길로 그들의 더러운 것을 만져주셨다. 그들의 어두운 눈을 만져주셨던 것이다.
우리가 장애자들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따뜻한 이 손으로 저들의 상처를 만져주고, 씻겨 주고, 뚜드려 주고, 쓰다듬어 주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 장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이다. 그러나 사랑의 손으로 저들의 아픈 곳을, 연약한 곳을, 수치로 느끼는 그곳을 따뜻하게 만져줄 때 그것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저들의 병을 고쳐주기 앞서 가장 좋은 사랑의 선물을 먼저 주셨던 것이다.
"곧 보게 되었더라"
예수님은 소경의 눈만 치료한 것이 아니다. 상처난 마음을 치료하셨다. 이제까지 천대만 받아왔기 때문에 저들의 마음을 상할 대로 상했고 굳어 질대로 굳어졌다. 이런 마음을 고쳐주셨다. 그리고 저들의 영혼을 고쳐주셨다.
"곧 보게 되었더라"
육신의 누만 보게 된 것이 아니다. 육신의 눈과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이 다 함께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눈이 뜨자마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예수를 좇는 제자가 되었다.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소경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29절에는 군중들이 "예수를 좇더라" 34절에는 소경들이 "예수를 좇으니라" 꼭 같이 기록되었다. 군중들에게 좇으니라는 말은 수동태로 자신이 스스로 좇은 것이 아니라 주위의 분위기에 의해 생각 없이 따라간 것을 의미한 것이고 소경들이 좇으니라는 말은 능동태로 소경들은 스스로 결단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좇은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외된 두 장애인을 주님의 제자로 삼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베뢰아의 먼 길을 택하여 가셨던 것이다. 여리고 성문 입구에서 당시 죄인으로 멸시를 받고 소외를 당하는 삭개오를 구원하셨고 여리고 출구에서 소경으로 소외된 장애인을 구원하시고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장애인들을 불쌍한 차원에서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하셨다. 이들을 가장 위대한 제자로 삼으셨다. 이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 소경된 장애인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가 소경 된 것은 죄의 결과로만 보았다. 오늘날 이런 시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과 그 가족을 마치 죄인 보듯이 봄으로 인해 장애인과 가족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그가 소경으로 난 것이 그 자신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여호와 하나님의 큰 뜻이라고 하셨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은 장애인과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우리 모두 다 함께 따라 하시겠다.
"너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이번에는 우리 성도들이 우리 교회의 장애인과 그 가족을 생각하며 다 함께 하시겠다. "너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그렇다. 장애인 여러분, 그리고 장애인 가족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육적인 고통 뿐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 많았는가 내가 장애인이 된 것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나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란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바로 여러분 옆에 멈추어 서 계신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묻고 계신다 여러분을 사랑의 눈으로 보고 계신다
여러분의 고통을 함께 당하시며 아파해 하신다 여러분의 상처를 만져 주신다
여러분의 연약한 부분을 고쳐주신다 그리고 여러분을 제자로 삼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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