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졸업] 고난의 학교에 입학합시다
본문
성경에 고난이 기록된 구절이 107개나 된다.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격게 되는 인생의 필수과목이다. 우리는 고난이 나에게만 있는 것 같고, 나에게 더 특별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90:10)’고 했다.
유사이래로 오늘날처럼 편리한 세상은 드물거다. 그렇다고 고난이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모양과 질만 달라졌지 동일한 고난이 여전히 있다. 옛날에는 못먹어서 고난이었지만, 요즘은 있어도 못먹는 고난이 심하다. 옛날에는 힘쓰면서 돈을 벌었지만, 요즘은 힘쓰면서 돈을 내야한다.
부러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겠지만, 필요한 고난을 거부하지 말자.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 유익을 잘 알자. 우리는 모두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고난을 배워야 한다. 고난을 모르면 않된다.
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합시다. (5)
우리 예수님은 고난의 선생님이시다. 고난받으러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중에 가장 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우리도 이렇듯 남을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짧게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당하고 싶지 않는 고난이라고 느낄지 몰라도, 이것만큰 소중하고 유익한 고난도 없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 당하는 것의 가치를 크게 여겼다.
고난에도 종류가 있다. 죄가 많아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고난이다. 그러나 애매히 당하는 고난,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는 고난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벧전2:21)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는 고난, 교회를 위하는 고난, 이웃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왜냐면 이런 고난은 그 열매가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 우리가 경건한 삶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고난을 선물로 주신다.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고난이 없을 때에 나는 배우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고난으로 인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다른사람들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고난을 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모르고 행하고, 잘못 행하였지만, 고난을 당하고 나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 봐야 부모의 소중함을 안다. 사별의 고통을 격어 봐야 배우자의 소중함을 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너무 너무 힘든 고통 중에 죽어간 사람이 있는 가정을 종종 만난다. 그 가정의 고통 앞에 나는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극한 고통을 격은 가정은 무언가 큰 힘이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가 있고 많은 사람을 배려하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 앞에 놓여있는 인생은 걱정이 없다. 이런 풍파를 견딘 사람인데 무슨 어려움인들 이겨내지 못하랴 하는 인생에 대한 능숙하고 성숙한 모습이 보인다.
고통을 격어보지 않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만 알고 공주병적 기질이 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민감하다. 고난을 격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분에 민감하다.
고통을 격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려 한다. 왜 격어 보았으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2. 고난을 견디어 냅시다(6)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고난이라도 고난 그 자체가 즐겁고 좋은 것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고난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은 아니시다. 고난은 엄밀하게 말하면 죄로인해서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많은 세상에 고난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죄가 많은 사람이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대신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내가 지은 죄로인한 고난과 다른사람이 지은 죄로인한 고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죄의 성격상 자신과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다. 거기에는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다.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야 한다.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그래서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서 고난에 대해 능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서 연단 하신다.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사48:10)
무작정 고난당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자는 아직 고난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철부지와 같다. 이런 사람은 고난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진다.
자기가 당하고 있는게 고난일줄도 모르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 당하려는 사람이 바로 고난에 대해서 바로 아는 사람이고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사람이다.
고난을 견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이러 저리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작정 고난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의 원인도 알고, 고난의 성질도 알고, 내가 얼마나 수고하며 희생해야 하는지도 알고, 내가 견디어 내지 않으면 어떤 불행이 닥치는지도 알고, 내가 견디어 냈을 때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고난을 이겨낸다.
5년전 강원도 고성에 산불이 났다. 보름 동안 산이 계속 탔는 데 군인들 몇 만명이 달려 들어도 그 불을 못 껐다. 헬리콥터 수십 대가 달려들어도 그 불을 끄지 못하였다. 불길을 잡지 못하고 계속 번져 나갔다. 동리의 집들과 임야등 수 없는 재산 피해가 났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집에서 기르던 짐승들 특히 소들이 수천 마리가 죽었다. 소가 왜 죽었는가 주인은 소를 다 풀어 주었다. 주인이 데려 가려고 끌었지만 소들이 우리안에 갇혀서 일년 동안 걸어본 경험이 없었다. 밖에 언덕도 있다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가는 도중 언덕을 내려가다 다리가 부러지고 하며 다 죽었다. 왜 그런가 걸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성도를 이길 세력이 이 세상엔 없다. 성도가 낙심할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못 넘을 장애물은 하나도 없는데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은 너무 유약한 자가 되어서 조그마한 분위기나 날씨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치우치고, 연약해 지는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주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이 생각난다.
3.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합시다. (9)
누가 고난을 이겨 내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이다. 고난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인내력 테스트가 아니다. 견딜 수 있는데까지 견디다가 한계에 도달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더 이상 못참겠다고 뛰쳐 나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그렇게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할 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이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성도에겐 없다. 성도는 고난에 능숙하다. 그래야 성도이다. 왜 성도들이 고난에 허덕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아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견뎌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고난을 요리해야 한다.
고난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 않된다. 고난은 요리해서 먹어야 한다. 고등어 한 마리 날걸로 먹으려면 어렵지만, 요리를 해서 먹으면 맛있다. 고난도 그렇다. 그냥 견디려면 어렵지만, 요령을 알면 쉽다. 이 요령이 무엇인가
성도는 특별한 무슨 능력이나 요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어려운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접목시키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는다. 나는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승리 할 수 있다. 누구 때문인가 주님 때문이다. 어떠한 고난과 역 경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일어설 것이고, 바울 이 말한 대로 승리할 줄 믿는다.
왜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고난을 이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사랑하는 방법이다. 사랑이 가장 큰 방법이다.
아무리 큰 고난도 사랑하면 너끈히 견딘다.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 고통 당하고, 같이 있어줄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빅톨 위고가 쓴 ’레 미 제라블’이란 소설이 있는데 주인공이 장발쟝입니다. 장발쟝은 배고픈 조카 때문에 빵을 훔치다가 걸려서 감옥에 들어가서 네 번 탈출하려 했으 나 실패하고 15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석방되었으나 아무도 사람 대접을 하지 않고 전과자라 하고 욕 하고 그러다 먹을 것이 없어서 또 도적질하려 할 때에 신부님 댁에 가서 대접을 받고 나오면서 은촛대를 갖고 나오다가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신부에게로 그를 데리고 가서 물건을 보이며
”이 촛대 신부님 댁 것이지요”
하니 신부가 대답하기를
”아니 그것은 내가 준 것입니다. 내가 은그릇까지 모두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하였습니다. 장발쟝이 거기에 서 마음이 돌아서서 ’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분에게 주신 위로를 이 분에게 베푼 거예요. 이 분의 마음이 변화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사업을 하고 나중에 시장까지 되고 잘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장발쟝은 사랑에서 변화받았다. 사랑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
세계적인 큰 인물이 고난을 겪 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쓴 오 헨리도 감옥에서 옥살 이를 하면서 글을 썼고 유명한 작품 을 낼 수 있었습니다. 루즈벨트는 39살까지 소아마비로 걷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을 네번이나 역임 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31살까지 피아노도 없었어요. 유치원 때부터 피아노 사준다고 음악가 되는 것이 아니예요. 남의 집에 가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역경을 잘 넘어설 줄 아는 분이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행복의 조건이 이렇게 많은데도 실질적인 행복을 누리지 있으며 성공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가져다 놓고도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90:10)’고 했다.
유사이래로 오늘날처럼 편리한 세상은 드물거다. 그렇다고 고난이 사라지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모양과 질만 달라졌지 동일한 고난이 여전히 있다. 옛날에는 못먹어서 고난이었지만, 요즘은 있어도 못먹는 고난이 심하다. 옛날에는 힘쓰면서 돈을 벌었지만, 요즘은 힘쓰면서 돈을 내야한다.
부러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겠지만, 필요한 고난을 거부하지 말자.
고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그 유익을 잘 알자. 우리는 모두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고난을 배워야 한다. 고난을 모르면 않된다.
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합시다. (5)
우리 예수님은 고난의 선생님이시다. 고난받으러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중에 가장 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우리도 이렇듯 남을 위한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짧게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당하고 싶지 않는 고난이라고 느낄지 몰라도, 이것만큰 소중하고 유익한 고난도 없다.
베드로는 애매히 고난 당하는 것의 가치를 크게 여겼다.
고난에도 종류가 있다. 죄가 많아서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고난이다. 그러나 애매히 당하는 고난,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는 고난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19-벧전2:21)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는 고난, 교회를 위하는 고난, 이웃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왜냐면 이런 고난은 그 열매가 많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 우리가 경건한 삶을 위해서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래서 고난을 선물로 주신다.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67)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고난이 없을 때에 나는 배우는 것이 없다. 그러나 고난으로 인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다른사람들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고난을 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모르고 행하고, 잘못 행하였지만, 고난을 당하고 나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부모의 품을 떠나 봐야 부모의 소중함을 안다. 사별의 고통을 격어 봐야 배우자의 소중함을 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너무 너무 힘든 고통 중에 죽어간 사람이 있는 가정을 종종 만난다. 그 가정의 고통 앞에 나는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극한 고통을 격은 가정은 무언가 큰 힘이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미가 있고 많은 사람을 배려하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 앞에 놓여있는 인생은 걱정이 없다. 이런 풍파를 견딘 사람인데 무슨 어려움인들 이겨내지 못하랴 하는 인생에 대한 능숙하고 성숙한 모습이 보인다.
고통을 격어보지 않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이기적이다. 자기만 알고 공주병적 기질이 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기분에 민감하다. 고난을 격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분에 민감하다.
고통을 격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려 한다. 왜 격어 보았으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2. 고난을 견디어 냅시다(6)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고난이라도 고난 그 자체가 즐겁고 좋은 것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고난 그 자체를 즐기시는 분은 아니시다. 고난은 엄밀하게 말하면 죄로인해서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많은 세상에 고난이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죄가 많은 사람이 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대신 당하는 고난도 고난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내가 지은 죄로인한 고난과 다른사람이 지은 죄로인한 고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죄의 성격상 자신과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다. 거기에는 눈물이 없고 고통이 없다.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야 한다.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그래서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서 고난에 대해 능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을 통해서 연단 하신다.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사48:10)
무작정 고난당하는 자는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자는 아직 고난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철부지와 같다. 이런 사람은 고난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진다.
자기가 당하고 있는게 고난일줄도 모르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 당하려는 사람이 바로 고난에 대해서 바로 아는 사람이고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사람이다.
고난을 견딘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이러 저리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작정 고난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의 원인도 알고, 고난의 성질도 알고, 내가 얼마나 수고하며 희생해야 하는지도 알고, 내가 견디어 내지 않으면 어떤 불행이 닥치는지도 알고, 내가 견디어 냈을 때 어떤 유익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고난을 이겨낸다.
5년전 강원도 고성에 산불이 났다. 보름 동안 산이 계속 탔는 데 군인들 몇 만명이 달려 들어도 그 불을 못 껐다. 헬리콥터 수십 대가 달려들어도 그 불을 끄지 못하였다. 불길을 잡지 못하고 계속 번져 나갔다. 동리의 집들과 임야등 수 없는 재산 피해가 났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집에서 기르던 짐승들 특히 소들이 수천 마리가 죽었다. 소가 왜 죽었는가 주인은 소를 다 풀어 주었다. 주인이 데려 가려고 끌었지만 소들이 우리안에 갇혀서 일년 동안 걸어본 경험이 없었다. 밖에 언덕도 있다는 경험이 전혀 없었다. 가는 도중 언덕을 내려가다 다리가 부러지고 하며 다 죽었다. 왜 그런가 걸어본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
성도를 이길 세력이 이 세상엔 없다. 성도가 낙심할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못 넘을 장애물은 하나도 없는데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은 너무 유약한 자가 되어서 조그마한 분위기나 날씨에도 마음이 흔들리고, 치우치고, 연약해 지는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주님께서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말씀이 생각난다.
3.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합시다. (9)
누가 고난을 이겨 내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이다. 고난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인내력 테스트가 아니다. 견딜 수 있는데까지 견디다가 한계에 도달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더 이상 못참겠다고 뛰쳐 나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그렇게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만 의뢰할 때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이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성도에겐 없다. 성도는 고난에 능숙하다. 그래야 성도이다. 왜 성도들이 고난에 허덕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아서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견뎌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고난을 요리해야 한다.
고난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면 않된다. 고난은 요리해서 먹어야 한다. 고등어 한 마리 날걸로 먹으려면 어렵지만, 요리를 해서 먹으면 맛있다. 고난도 그렇다. 그냥 견디려면 어렵지만, 요령을 알면 쉽다. 이 요령이 무엇인가
성도는 특별한 무슨 능력이나 요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어려운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를 접목시키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줄로 믿는다. 나는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승리 할 수 있다. 누구 때문인가 주님 때문이다. 어떠한 고난과 역 경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일어설 것이고, 바울 이 말한 대로 승리할 줄 믿는다.
왜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해야 하는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을 배울 때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운다. 고난을 이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사랑하는 방법이다. 사랑이 가장 큰 방법이다.
아무리 큰 고난도 사랑하면 너끈히 견딘다. 사랑하기 때문에 대신 고통 당하고, 같이 있어줄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빅톨 위고가 쓴 ’레 미 제라블’이란 소설이 있는데 주인공이 장발쟝입니다. 장발쟝은 배고픈 조카 때문에 빵을 훔치다가 걸려서 감옥에 들어가서 네 번 탈출하려 했으 나 실패하고 15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석방되었으나 아무도 사람 대접을 하지 않고 전과자라 하고 욕 하고 그러다 먹을 것이 없어서 또 도적질하려 할 때에 신부님 댁에 가서 대접을 받고 나오면서 은촛대를 갖고 나오다가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신부에게로 그를 데리고 가서 물건을 보이며
”이 촛대 신부님 댁 것이지요”
하니 신부가 대답하기를
”아니 그것은 내가 준 것입니다. 내가 은그릇까지 모두 주었는데 왜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하였습니다. 장발쟝이 거기에 서 마음이 돌아서서 ’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분에게 주신 위로를 이 분에게 베푼 거예요. 이 분의 마음이 변화를 받는 거예요.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사업을 하고 나중에 시장까지 되고 잘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장발쟝은 사랑에서 변화받았다. 사랑이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
세계적인 큰 인물이 고난을 겪 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쓴 오 헨리도 감옥에서 옥살 이를 하면서 글을 썼고 유명한 작품 을 낼 수 있었습니다. 루즈벨트는 39살까지 소아마비로 걷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을 네번이나 역임 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31살까지 피아노도 없었어요. 유치원 때부터 피아노 사준다고 음악가 되는 것이 아니예요. 남의 집에 가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역경을 잘 넘어설 줄 아는 분이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행복의 조건이 이렇게 많은데도 실질적인 행복을 누리지 있으며 성공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가져다 놓고도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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