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졸업] 두 사람의 건축자
본문
오늘은 우리 교회가 졸업하는 학생들을 축하하며 드리는 졸업 축하예배입니다.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고로 우선, 먼저 졸업생 여러분의 머리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일생동안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에서 봉독해드린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 설교 가운데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여기 두 사람의 건축자에 대한 비유는 학자가 서재에서 생각해낸 것도 아니고 멀리서 끌어온 설명도 아니며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보고 느낄 수 있는 사실을 소재로 하여 주신 보배로운 교훈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두 사람의 건축자를 비교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복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설교는 지식적으로 머리에서 깨달아 알고, 감정적으로 가슴 속에서 크게 감동을 받아 의지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될 때에야 잘한 설교요, 바로 들은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은혜로운 사람 같으며,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올 때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은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나 모래 위에 세운 사람의 집은 그 무너짐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에게는 서로 닮은 공통점과 서로 다른 상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반석 위에다 집을 짓든지, 혹은 모래 위에다 집을 짓든지 두 사람은 다같이 집을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위에 보내심을 받은 인간은 누구나 집을 짓는 건축자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상 졸업생 여러분들은 집을 지을 기초를 닦는 사람들이요, 집을 지을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어른들은 지금 제각기 집을 짓고 있는 시공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건축자에 대한 비유가 본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 이하에서는 집을 짓는 자의 공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구약 성경 에스겔 3장 10절 이하에는 사람들이 담을 쌓을 때, 기초는 무시하고 외부에다가 회칠만 하고 있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계십니다.
옳습니다. 인간의 삶이 집을짓고 있는 건축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집을 잘 짓든지 아니면 수년 전에 무너진 삼풍백화점처럼 잘못 짓든지 말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풀어 말하자면 두 사람이 다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교회에도 함께 나왔습니다. 말씀을 듣는데 귀를 기울이였으며 둘 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도 하였습니다.
누렇게 빛이 난다고 해서 다 金은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참 교인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 졸업생 여러분들이 한 자리에 같이 앉아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함께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집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같이 듣고 행하는 자기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우는 사람처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다같이 다니고 있으나 행하는 것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세운 집터의 기초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세웠고 다른 한사람은 모래 위에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마태복음에는 단순하게 반석 위에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48절에 가보면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모래 위에 세우고 있음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모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참 터전이며(고전 3:11), 우리들의 삶을 마음 놓고 세울 수 있는 견고하고 완전한 반석이 되십니다(고전 10:4).
우리들은 오직 반석과 같인 강하고 부동적인 그리스도 위에만 설계한 소망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초공사는 맨먼저 하는 일이며 가장 잘하어야 할 중대 공사입니다.
누구든지 생의 시작을 그리스도로부터 하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 생활인 동시에 아무리 고르게 각을 세워도 기초가 잘못되면 붕괴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아닌 곳에 삶을 세우고 자랑한다면 어제인가는 무너짐이 심한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초 공사란 분명히 숨겨져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어디까지나 내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부분이며 심적인 영역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기초로하고 살아가는 삶은 외부에 대한 치중이 아니요, 회칠을 하는 표면적 채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의 벽에 금이 가고 집에 기울어지는 위험은 기초 공사가 잘못된 데서 오는 직접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금이 가고 위험스럽게 기울어져 가고 있음은 분명히 그 사람의 삶이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지 않는 까닭인 것입니다. 두 사람의 건축자에게 있어서 무서운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 ”기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이며,돈도 믿을 수없는 기초인 것입니다.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삶을 마음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며 천하의 다른 이의 이름으로서는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 4:11-12).
그리스도는 확고하고 유일한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지어야 할 것입니다. 깊이 판다고 하는 말은 곧 철저한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경하게 취급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땅을 파지 않고 주초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집을 잘 지으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큰 빌딩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일 수록 지하로 깊이 파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 의인을 흔드는 사단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좋은 기초가 마련된 곳에서는 외부의 시련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세움 받은 건전한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불신이나 유혹과 이단 사상같은 강물 속에 들어가도 그 물속에 빠져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자기의 내적 본질 속으로 받아들이도 아니하며 넘어지지도 아니하게 됩니다.
그러나 건전치 못한 신자는 스폰지와 같아서 세속의 물결들을 신속하게 빨아들이게 되며 밀려오는 물결에 보잘것없이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 결과가 달랐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무너짐이 심하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무너지지 아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움이 달랐으니 물론 결과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잠언에는 ”회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가 같으니라”(잠 10:25)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가 매우 많이 계속적으로 쏟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반석 위에 집을 굳건히 잘지은 사람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집안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며 창 밖에서 세찬 비바람이 부딪혀와도 이렇게 좋은 집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창수가 나도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요동함이 없음으로 불안함이 없이 먹고 자고 살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천재지변이나 세상에서 몰려오는 시험의 물결이 아무리 흉용하여도 소망의 지붕을 견고하게 덮고 믿음의 창문을 잘 닫고 사랑의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가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이까 악한 자들이 나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다가 실족하여 엎드러지리이다. 군대가 진을 치고 달려 들어도 내 마음은 두려워 하지 아니하며 난리가 나서 나를 몰아쳐도 내 마음이 든든하리로다. 고난이 임할 때에 나를 당신의 초막 속에 숨기시고 나를 들어 반석 위에 세우시리도 (시 27편).
세상의 모든 것을 흔들고 옮기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종말이 올 때에도 지혜로운 건축자의 소망은 요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하는 내용의 성경에는 ”그리고”(Kzj)라는 접속사가 4회나 거듭 나타나서 아주 숨가쁜 연속적인 연타의 시험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련은 참된 신앙을 가진 자나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나 구별 없이 임하게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참 신자와 거짓 신자는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건축자와 같은 참 성도 앞에서는 병들게 되고 노쇠하게 되며, 가정에 어려운 일을 만나고, 가족 중에 먼저 사별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는 자가 생기고, 박해, 조롱, 중상, 모략, 사업의 실패로 인한 가난이 몰아 닥쳐와도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건축자가 그 집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 집이 자신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기를 기대할 때 태풍과 창수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때에는 다시 또 다른 집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은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와 손해와 실망만이 그의 것으로 안겨질 뿐입니다.
지식은 행동화되지 아니하면 무용합니다. 이론은 실천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해야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실천을 동반하지 아니하고 고백으로 그칠 때 허위의 신앙이며 이와 같은 신앙은 유사시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는 무너짐이 심한 무서운 경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 씨는 예수께 대한 복종이 곧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생활이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센 바다에서 대형의 배를 끌고 가는 소형 증기선이 있었는데 두 배는 쇠밧줄로 매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선장은 선원들을 향하여 ”엎드려”하고 명령을 하였으며 선원들은 기계와 같이 날쌔게 엎드렸습니다. 그순간 배를 끄는 쇠밧줄이 끊어지면서 발광하는 쇠뱀처럼 내려쳤습니다.
그때에 얻어 맞았다면 어느 누구라도 여지없이 즉사를 하였을 것이나 전 승무원이 복종하였으며 아무도 상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왜 엎드라고 하느냐고 이유를 물으려고 서 있었다면 이미 죽은 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종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요구하는 복종은 바로 이러한 복종입니다. 예수께 대한 복종만 이 새 영을 얻는데 유일한 기반이 됩니다. 어떠한 푹풍이 몰아쳐 와도 그에 대한 복종에 근거하고 있는 삶은 안전하리라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요, 성경의 보장입니다. 할렐루야!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고로 우선, 먼저 졸업생 여러분의 머리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일생동안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에서 봉독해드린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 설교 가운데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여기 두 사람의 건축자에 대한 비유는 학자가 서재에서 생각해낸 것도 아니고 멀리서 끌어온 설명도 아니며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보고 느낄 수 있는 사실을 소재로 하여 주신 보배로운 교훈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두 사람의 건축자를 비교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복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설교는 지식적으로 머리에서 깨달아 알고, 감정적으로 가슴 속에서 크게 감동을 받아 의지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될 때에야 잘한 설교요, 바로 들은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은혜로운 사람 같으며,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올 때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은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나 모래 위에 세운 사람의 집은 그 무너짐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에게는 서로 닮은 공통점과 서로 다른 상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두 사람이 서로 같은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반석 위에다 집을 짓든지, 혹은 모래 위에다 집을 짓든지 두 사람은 다같이 집을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위에 보내심을 받은 인간은 누구나 집을 짓는 건축자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상 졸업생 여러분들은 집을 지을 기초를 닦는 사람들이요, 집을 지을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어른들은 지금 제각기 집을 짓고 있는 시공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건축자에 대한 비유가 본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절 이하에서는 집을 짓는 자의 공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구약 성경 에스겔 3장 10절 이하에는 사람들이 담을 쌓을 때, 기초는 무시하고 외부에다가 회칠만 하고 있음에 대하여 지적하고 계십니다.
옳습니다. 인간의 삶이 집을짓고 있는 건축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집을 잘 짓든지 아니면 수년 전에 무너진 삼풍백화점처럼 잘못 짓든지 말입니다.
비유의 말씀을 풀어 말하자면 두 사람이 다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함께 들었습니다. 교회에도 함께 나왔습니다. 말씀을 듣는데 귀를 기울이였으며 둘 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도 하였습니다.
누렇게 빛이 난다고 해서 다 金은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참 교인은 아닌 것입니다. 여기 졸업생 여러분들이 한 자리에 같이 앉아 있습니다. 같은 시간에 함께 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집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같이 듣고 행하는 자기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모래 위에 세우는 사람처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다같이 다니고 있으나 행하는 것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세운 집터의 기초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세웠고 다른 한사람은 모래 위에 세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마태복음에는 단순하게 반석 위에 지었다고 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48절에 가보면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망을 모래 위에 세우고 있음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모래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참 터전이며(고전 3:11), 우리들의 삶을 마음 놓고 세울 수 있는 견고하고 완전한 반석이 되십니다(고전 10:4).
우리들은 오직 반석과 같인 강하고 부동적인 그리스도 위에만 설계한 소망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초공사는 맨먼저 하는 일이며 가장 잘하어야 할 중대 공사입니다.
누구든지 생의 시작을 그리스도로부터 하지 아니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 생활인 동시에 아무리 고르게 각을 세워도 기초가 잘못되면 붕괴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아닌 곳에 삶을 세우고 자랑한다면 어제인가는 무너짐이 심한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기초 공사란 분명히 숨겨져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어디까지나 내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부분이며 심적인 영역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기초로하고 살아가는 삶은 외부에 대한 치중이 아니요, 회칠을 하는 표면적 채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의 벽에 금이 가고 집에 기울어지는 위험은 기초 공사가 잘못된 데서 오는 직접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금이 가고 위험스럽게 기울어져 가고 있음은 분명히 그 사람의 삶이 반석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 있지 않는 까닭인 것입니다. 두 사람의 건축자에게 있어서 무서운 차이점은 보이지 않는 ”기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이며,돈도 믿을 수없는 기초인 것입니다.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삶을 마음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며 천하의 다른 이의 이름으로서는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행 4:11-12).
그리스도는 확고하고 유일한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지어야 할 것입니다. 깊이 판다고 하는 말은 곧 철저한 회개를 뜻하는 것입니다. 죄를 경하게 취급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땅을 파지 않고 주초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집을 잘 지으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큰 빌딩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일 수록 지하로 깊이 파고 공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 의인을 흔드는 사단의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철저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 안에 바로 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좋은 기초가 마련된 곳에서는 외부의 시련은 별로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세움 받은 건전한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불신이나 유혹과 이단 사상같은 강물 속에 들어가도 그 물속에 빠져 있을 수는 있으나 그것들을 자기의 내적 본질 속으로 받아들이도 아니하며 넘어지지도 아니하게 됩니다.
그러나 건전치 못한 신자는 스폰지와 같아서 세속의 물결들을 신속하게 빨아들이게 되며 밀려오는 물결에 보잘것없이 넘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2)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 결과가 달랐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무너짐이 심하나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무너지지 아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세움이 달랐으니 물론 결과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잠언에는 ”회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가 같으니라”(잠 10:25)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가 매우 많이 계속적으로 쏟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반석 위에 집을 굳건히 잘지은 사람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집안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며 창 밖에서 세찬 비바람이 부딪혀와도 이렇게 좋은 집을 갖게 된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창수가 나도 반석 위에 세운 집은 요동함이 없음으로 불안함이 없이 먹고 자고 살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천재지변이나 세상에서 몰려오는 시험의 물결이 아무리 흉용하여도 소망의 지붕을 견고하게 덮고 믿음의 창문을 잘 닫고 사랑의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가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이까 악한 자들이 나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다가 실족하여 엎드러지리이다. 군대가 진을 치고 달려 들어도 내 마음은 두려워 하지 아니하며 난리가 나서 나를 몰아쳐도 내 마음이 든든하리로다. 고난이 임할 때에 나를 당신의 초막 속에 숨기시고 나를 들어 반석 위에 세우시리도 (시 27편).
세상의 모든 것을 흔들고 옮기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종말이 올 때에도 지혜로운 건축자의 소망은 요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하는 내용의 성경에는 ”그리고”(Kzj)라는 접속사가 4회나 거듭 나타나서 아주 숨가쁜 연속적인 연타의 시험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련은 참된 신앙을 가진 자나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나 구별 없이 임하게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참 신자와 거짓 신자는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건축자와 같은 참 성도 앞에서는 병들게 되고 노쇠하게 되며, 가정에 어려운 일을 만나고, 가족 중에 먼저 사별하여 이 세상을 떠나가는 자가 생기고, 박해, 조롱, 중상, 모략, 사업의 실패로 인한 가난이 몰아 닥쳐와도 이 모든 것들이 아무런 효력을 발하지 못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건축자가 그 집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 집이 자신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기를 기대할 때 태풍과 창수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때에는 다시 또 다른 집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은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수치와 손해와 실망만이 그의 것으로 안겨질 뿐입니다.
지식은 행동화되지 아니하면 무용합니다. 이론은 실천되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은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일치해야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실천을 동반하지 아니하고 고백으로 그칠 때 허위의 신앙이며 이와 같은 신앙은 유사시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산상 설교는 무너짐이 심한 무서운 경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 씨는 예수께 대한 복종이 곧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생활이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센 바다에서 대형의 배를 끌고 가는 소형 증기선이 있었는데 두 배는 쇠밧줄로 매어 있었습니다. 갑자기 선장은 선원들을 향하여 ”엎드려”하고 명령을 하였으며 선원들은 기계와 같이 날쌔게 엎드렸습니다. 그순간 배를 끄는 쇠밧줄이 끊어지면서 발광하는 쇠뱀처럼 내려쳤습니다.
그때에 얻어 맞았다면 어느 누구라도 여지없이 즉사를 하였을 것이나 전 승무원이 복종하였으며 아무도 상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왜 엎드라고 하느냐고 이유를 물으려고 서 있었다면 이미 죽은 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종은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요구하는 복종은 바로 이러한 복종입니다. 예수께 대한 복종만 이 새 영을 얻는데 유일한 기반이 됩니다. 어떠한 푹풍이 몰아쳐 와도 그에 대한 복종에 근거하고 있는 삶은 안전하리라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요, 성경의 보장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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