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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주님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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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걸인이 톨스토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단 한 푼의 동전도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걸인의 손을 꼬옥 쥐며 속삭였습니다.
“형제여, 미안하오. 지금 내가 가진 돈이 한 푼도 없구려. 정말 미안하오”
그때 걸인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톨스토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걸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것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낍니다. 이것은 돈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관심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노여움과 불만을 녹이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나요.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까 얼굴이 잘 생긴 사람입니까 재산이 많은 부자입니까 아니면 당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관심은 무엇이며, 그 대상은 누구여야 합니까 적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곧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에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계셨기에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제물로 바치도록 하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은 과연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까요 인간 중에도 연약한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애굽기22장2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신명기10장17-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명기14자29절 말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16장14절 말씀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특히 시편68편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잠언31장8절 말씀에 보면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고 했습니다. 벙어리를 위하여 입을 열어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대변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변론하라는 것입니다.
시편103편 3절에 보면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병을 고치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약한 자만 돌보신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만 치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장애인까지도 돌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오늘 이사야35장 말씀은 장차 임할 메시야적인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때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가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즉 메시야의 도래는 모든 것이 새롭게 회복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는가 하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회복되며, 왜 그렇게 즐거워하는가 그 이유는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회복될 때 자연과 함께 인간의 연약함도 회복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3-4절에 보면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여호와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연약한 자들도 강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 연약함 속에 특히 장애인들에게도 회복은 역시 역사하십니다. 5-6절 말씀에 보면,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눈을 뜨게 된다고 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던 귀머거리가 듣게 된다고 했습니다. 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자, 지체 장애인들이 일어나 걷게 되고 사슴같이 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입이 열려 말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굳은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바로 질병으로 인한 연약한 사람과 지체장애로 부자유스럽게 지내는 자들에게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던 성자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습니까
오늘 신약의 말씀 누가복음 14장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면 우리가 세상에서 식사 초대를 할 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도로 뒤에 나를 초청해서 갚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대접을 하려면 갚을 수 없는 사람들, 즉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초청대상자 중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많습니다.
장애인이 되면 그들 자체적인 능력으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10장에 보면 맹인 바디메오의 치유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맹인이 맹인 거지 바디메오가 길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그곳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때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조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더욱 큰 소리를 질렀고 예수님을 관심을 가지시고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맹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초청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오히려 초청하는 우리에게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왜 복이 되는지 아세요. 그들은 갚을 길이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으로부터 갚음을 받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갚지 않으시지만 사람들이 갚지 못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사람들이 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으로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6장38절 말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과 주님의 고나심은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병든자, 장애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사도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봅시다. 요한1서4장11-12절 말씀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여호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어느 때나 여호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러면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0-21절에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주님이 관심을 가졌던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우리의 관심은 솔직히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관심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이웃은 곧 나에게 잘해주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장애인의 날이요, 우리교단이 지키는 장애인 주일입니다. 왜 이런 날이 생겼는가 하면, 장애인에 대한 이해와 장애인의 재활의욕을 고취하고 복지 증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런 날을 정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 국제재활협회 이사회에서 그 해를 '재활10년'으로 정하고, 각국에 재활의 날을 지정·기념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1972.4. 11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이사회에서 재활의 의미가 있는 4월중 통계적으로 비가 오지 않는 4월 20일을 선택하여 ‘재활의 날’로 지정,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그러다가 UN에서 1981년을 ‘세계 장애인의 해 ’로 지정했습니다. 따라서 1981년 4월20일 당시 보건사회부에서 이 날을 ‘제1회 장애인의 날’로 정 하고 기념해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념일을 정하여 기념식을 하고 그 날 한번 잠깐 관심을 갖는 것으로 1회용 행사로 끝난다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온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지난해 3월6일에 “장애인 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통과시켰고, 지난 4월11일에 그 법이 효력을 발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법의 내용을 간추려 소개드리면 차별은 어떤 부분에서의 차별을 말하는가를 먼저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고용에서의 차별, 2)교육에서의 차별, 3)공공시설 및 건축물 이용에 있어서의 차별, 4) 대중교통수단 이용 및 이동에 있어서의 차별, 5) 정보접근 및 의사소통의 이용에 있어서의 차별, 6) 성에 있어서의 차별 및 여성장애인에 대한 차별, 7) 생활시설에서의 차별, 8)정치적 차별, 9) 경제적 차별 등의 영역입니다.
위와 같은 차별의 내용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 4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애”를 이유로 참여나 활동에서 배제되거나 소외시키는 직접적인 차별이 있습니다.
 둘째, 건물, 교통, 각종 행사나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에 일반인을 위주로 만들었고, 장애인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애인의 참여가 방해를 받거나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경우 일어나는 간접적인 차별이 있습니다.
 셋째, 장애인이 참여함에 있어서 단순히 건물이나 교통의 이동권, 접근권 분야의 지원뿐만 아니라 수화, 점자, 장애인들을 위한 공간, 장애인들이 함께함에 있어서 적당한 편의제공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경험하게 되는 차별이 있습니다.
넷째, 폭력, 괴롭힘, 비하적인 언어사용, 따돌림이나 학대 등으로 이루어지는 차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차별이 얼마든지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도 휠체어나 전동휠체어를 준비해주어야 합니다. 교회까지 와서 이용해야 할 것을 준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애인 전용 주차장은 아무리 차가복잡해도 그 자리는 비어두어야 합니다.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 교회 성도들은 장애인들에 대하여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장애인들의 아픔을 이용하거나 아픔을 가중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레위기19장13절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옛날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동냥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이 말은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그들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쪽박을 깨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신명기27:18절 말씀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이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도록 하거나 길을 잘 못 가르쳐 주거나 그들을 제대로 안내해주지 않으면 저주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골통먹이는 사람들, 사기를 치는 사람들, 그런 장애인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장애인을 대할 때 건강한 사람들과 차별없는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이사야33:23절 “네 돛대 줄이 풀렸으니 돛대의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장애인이라고 소외시키거나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혜택을 받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불편함을 최대한 덜 느끼도록 배려하는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경 속에 장애인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입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 의 아들로서 다섯 살 때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전해져 왔을 때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가 아이가 떨어져 다리를 다쳐서 절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은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숨어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루는 신하를 불러서 사울의 집 후손이 남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동안 입었던 은혜를 갚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신하가 대답하기를 사울왕의 종 “시바”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시바를 불러서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자가 있느냐”고 물으니 시바가 대답하기를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는 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윗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어 므비보셋을 데려오라고 했고, 므비보셋은 영문도 모르고 두려운 마음으로 다윗 왕 앞에 왔습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때 므비보셋이 다윗왕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다윗 왕은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사무엘하9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마지막 1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두 발을 다 절었더라고 했습니다. 두 발 다 제대로 쓸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왕의 신분으로서 므비보셋을 자식처럼 여기고 가족처럼 여겨서 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이 다윗이 성군이라는 칭호를 받을만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나의 체면생각하지 말고 진정으로 장애인을 차별없이 대우하는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세 번째, 불편함을 최소한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히12:12-13절 말씀,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발을 저는 자들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많은 경우에 시정해야 할 요소들이 많습니다. 요즘 건축하는 교회건물들은 장애인을 위한 배려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이 가는 길이 가급적이면 짧게 만들어야 하며, 가급적이면 그들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고 쉽게 앉을 수 있고, 쉽게 모든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도 잘해야 합니다. 주차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배려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더라도 교회에 들어오면 왕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왜내하면 주님의 관심이 그런 장애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1장14절 말씀,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예수님이 성전에 게실 때 맹인이 주님께 나올 때에 주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에 나아오는 여러 장애인들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도 고쳐주어야 하고 그들의 아픔도 치료해주어야 하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겪고 있는 장애의 고통도 덜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생수의 강 란에 글을 올렸습니다만 지체장애인만 장애가 아닙니다. 정신장애도 장애요, 직접 장애인이란 판단은 받지 않았으나 장애인보다도 더 큰 장애인들이 많습니다. 웃음을 주지 못하며 웃지 않는 자, 남에게 해를 끼치며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가 진정 장애인이 아닐까요.
지체장애인들은 천국가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에서도 장애인일까요
요한계시록 21장1절 말씀에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반드시 새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장애인의 날이자 장애인 주일을 맞아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의 대상, 주님이 늘 관심을 가졌던 장애인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시인으로 신앙적인 詩(시)를 많이 쓰신 용혜원 시인의 관심이란 제목의 시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늘 지켜보며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네가 울면 같이 울고
네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었다.
깊게 보는 눈으로
넓게 보는 눈으로
널 바라보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것을 잃더라도
다 해주고 싶었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관심입니다. 사랑은 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관심을 가지면 해 주고 싶은 것도 많아집니다. 더 깊이 관심을 가지다 보면 다 보입니다. 그 사람의 실핏줄까지도 보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관심갖지 않은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약한 사람들, 장애인들이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관심을 당신의 관심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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