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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인,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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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산에서 시작된 인간의 삶"이란 제목으로 환경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생명에 대하여 깊이 인식해 야 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장애인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말 씀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제가 '장애인의 날'이었 습니다. 그리고 우리 매년 4월 셋째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 지키면서 장애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장애인을 돌보는 일 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슨 날이라고 정 해 놓으면 그 날만 야단법석을 떨다가 그 날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 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허지부지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래서 구호는 많은데 실제는 없고, 이론은 많은데 삶은 없는 모습을 많 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 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 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 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 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45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 이 얼마나 될까요 45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이 것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장애인에 대한 것은 그 어떤 행위도 참 된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장애인이란 무엇 인가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면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 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 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 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 다. 점점 증가하는 장애인에 대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떻 게 하셨으며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살펴보면서 우리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있다면 수정하고 장애인에 대해 소홀한 점이 있다 면 회개하고 새롭게 인식을 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 는 것까지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애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 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속의 발자취를 보면 그 분과 장애인 의 접촉이 그의 생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에 게 있어서 장애인들은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본이 되는 예수님이 장애인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알고 배 워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장애인들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님에게서 배우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들의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먼저 극복하는 데서부 터 우리 장애인 선교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절에 보시 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지나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 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2절 에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 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절에 보시면 "예 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 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먼저 여기서 우 리가 언어 그 자체를 조심해서 보실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은 꼭 필요 한 경우가 아니면 일부러 소경이란 단어를 피해서 쓰시고 있다는 사실 입니다.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장애인에게 붙여진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 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 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있는데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 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성경에도 앉은뱅이, 저는 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앉은뱅이, 저는 자 대신에 지체 장애인입니다. 성경에 문둥이 란 단어가 많이 발견됩니 다. 이것은 하루빨리 성경이 다시 번역된다면 바뀌어야 할 단어인데 문둥이 대신에 "한센씨병" 환자 혹은 우리가 보통 많이 쓰는 나병환자 입니다. 귀머거리 대신에 우리가 써야 할 말이 청각장애인. 벙어리 대 신에 농아인 혹은 언어장애인. 귀신들린 자, 미친 자 대신에 정서장애 인 혹은 정신 지체자 혹은 정신 박약자. 우리가 단어 자체부터 새롭 게 바꾸어 쓰는데서부터 편견을 극복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사상적인 편견, 이데올로기의 편견, 우리 마음속에 어떤 신학적인 편 견이 있습니다. 그 편견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매우 동일하게 나타납니 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면서 이 사람 이 소경 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죄 때문이거 나 아니면 이 사람의 조상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불행과 모든 질병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이 죄라는 것 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서 이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특별히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이 사 람의 특별한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셨다는 사실입니 다.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 이 사람의 원죄에서 왔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 된 경우가 이 사람만의 혹은 이 사람의 조 상만의 특별한 어떤 범죄 때문에 기인했다고 굳이 주장해야 할 이유 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절에 보 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 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서울 백제병원 부원장인 양창순씨의 남편은 장애인들의 산행을 돕 는 자원봉사를 합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 그녀는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을 남편이 하는 자원봉사에 함께 딸려 보냈습니다. 그 때 양창순 씨는 아들에게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너도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 사 회적인 책임을 다하려면 지금부터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진짜 속마음은 "이번 기회에 네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될 거다"하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그녀는 첫마디로 물었습 니다. "그래, 그들을 보니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 비로소 깨달았지" 그러나 아들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엄마, 그들은 불행하지 않아요. 내가 그들에 비해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자신이 장애인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도 전하는 사람들은 절대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오히려 장애인이라 고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이 더 불행한 사람이지요. 제 가 만난 장애인들은 아무도 자기가 장애인이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 지 않았어요. 단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 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에요. 정말 불행한 사람들은 자기가 장 애인이라는 한을 가지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이지요. "

양창순씨는 아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반성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 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은 무 조건 불행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편견을 수정하고 인간은 도대체 얼 마나 많은 편견과 오만의 노예가 되어 많은 인생의 이면을 놓치고 있 는 것일까 오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오만에 대해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신분의 차별이 없고 만 민이 평등하다는 오늘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장애인 문제입니다. 우리 인류가 넘어야할 또 하나의 벽인 것 입니다.

현대 사회가 '효율성'을 중시하다 보니 장애인들은 사회의 경쟁의 원리에 맞지를 않으며, 기능주의 시대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횡포이며, 근시안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실제로 지나온 20세기 인류의 역사 속에 서 수많은 장애인들이 편견과 오해, 어려움과 고통의 한숨으로 숨죽이 며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조차도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이들을 외면하고 심지어 박해하기까지 했 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선진국을 따라가려고 노력은 하지만 국민의 의식이 선 진국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법은 300인 이상 사업체는 장애인을 2%이상 고용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무에 해당하는 전체 사업체의 8 2. 5%가 의무고용을 하지 않고, 특히 장애인 고용에 앞장서야 할 정부기관의 고용률이 2%가 채 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는 많은 장애인들의 장애극복담을 들 을 수 있습니다.

정부는 97년부터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제정하고 해마다 장애인 의 날에 수여했습니다. 금년에는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 송경태(宋京泰 ?·시각장애 1급) 관장이 18일 ‘올해의 장애극복상’수상자로 결 정되어 어제 상을 받았습니다.

송경태 씨는 1982년 군복무 중 수류탄 폭발로 시력을 잃었지만 그 는 98년 전주에 점자도서와 녹음도서 등 1만여권을 갖춘 전북시각장애 인도서관을 설립했고, 점자소식지인 월간 ‘온고을 하얀샘’을 창간 해 무료로 배포하고 있습니다. 또 장애인정보화교육장을 마련해 시각 장애인들에게 컴퓨터교육을 해오고 있으며 시각장애인들의 외출을 돕 기 위한 달구지 차량봉사대를 창단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송씨는 99년 월드컵 축구대회 홍보를 위해 안내견과 함께 미국 대륙을 도보 횡단하고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을 등반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캐나다 로키산맥의 거대 암벽을 등반했고 지금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기 도 했다.

이렇듯 우리는 장애인들에 대한 문화적이고 신학적인 편견을 먼 저 없애야 합니다. 이런 편견을 갖고 있는 한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 는 의무감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로 장애인에 대해 선교해야 합니다.

장애인의 선교는 예수님의 선교의 본질이었습니다. 본문의 3절에 보 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 니라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사람 의 케이스는 자기들 자신의 어떤 죄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도 하 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미 션의 계획 속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였 습니다. 그 다음에 4절을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거기서 특별히 예수님 이 "우리가" 라는 복수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볼 필 요가 있습니다. 예수인 자신이 바로 이런 사람을 위해서 장애인을 위 해서 오셨고 그의 치유를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시고 또 5절 에 보시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바로 어두 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기 위해서 오셨다 라는 사실을 주께서 선포하십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예수님만의 사명이 아니라 이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4장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 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이 말씀은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공적 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선포한 말씀이십니다. 누가복음 7장 20절 이하에 보시면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 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요한에게 사람들이 물은 것입니 다. 도대체 예수가 정말 메시야인가 아닌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이 질문이 던져졌던 것입니다.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그 다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대답하라 고. 7장22절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 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 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 파된다 하라" 그러니까 아직도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마 요한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 님은 자신의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증표를 예수님을 통해서 소경이 보 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곧 장애인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하여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어디 있는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대한 교훈 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 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청하였더니"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누가 초대되었느냐 여러분, 이것은 그 당시 소위 유태인의 관념, 그 당시 의 세계가 가지고 있었던 장애인에 대한 깊은 편견에 비추어서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주 파격적이고 거의 혁명적인 교훈이었다고 생 각을 해요. 21절을 보세요. 다같이 읽겠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 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중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 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 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우리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장애인이 있었습니 다. 삶의 소중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선교의 본질이었 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영적으 로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30절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눈을 뜬 사람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했을 때 38절에서 그는 "내가 믿나 이다 하고 절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영육 간의 회복을 통해 선교해야 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어떻게 장애인들을 접근하셨느냐는 것입니 다.

죄인 취급하려고 했던 당신의 사람들의 생각을 일축하고 성경에 등 장하는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 것을 나타내고 자 하심이라고 한 것은, 이 사람의 인생 속에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애는 결코 장애가 아닙니다. 오 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치유를 통해서 아니면 치유가 아닌 꼭 다른 방법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여호와 하나님 의 임재를 나타낼 수 있는 도구로 이 사람의 삶이 쓰임을 받을 수 있 다면 장애는 오히려 축복의 도구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장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존재가 아니 라,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애는 또 다른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애가 축 복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미국 메릴랜드주 어퍼 말버러에 사는 메티 스테파닉(12살)이란 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근수축병'이라는 매우 희귀한 질병을 앓고 있 었습니다. 이 병은 유전적 요인으로 근육세포가 수축되어 몸이 마비되 고 끝내는 호흡곤란으로 죽게 되는 불치병입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세 살 때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시집을 읽고 시의 세계에 빠져 동심 에 가득 찬 수천 편의 시를 써 왔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항상 산소 공 급장치를 매단 채 살아오면서도 말입니다. 이 소년은 이런 병마와 싸 우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세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1)시집을 발간하고, 2)지미 카트 전 대통령과 평화에 관한 얘기를 나 누며, 3)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쇼'에 그의 시집이 소개되는 것이었는데, 이 소원 세 가지를 지난해 년말에 다 이 루어졌습니다.

이 소년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 병원측에서 그의 소원 을 이루어주기 위해 카터 전 대통령과 만남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 리고 지방 출판사인 'VSP북스'에 연락하여 시집 출간을 부탁했는데 처 음에는 200권을 출간되었는데 입소문을 타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지 난 연말에 이미 50만부가 팔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책은 미국 의 유명한 CNN방송과 워싱턴포스트, 피플지 등에도 소개가 되었고 지 난해 10월 중순경에는 마지막 소원인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도 했다 고 지난해 12월 15일자에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소년이 펴낸 시집 이름인 "마음의 노래들(Hearrtsongs)"입니다.

이 소년이 여섯 살 때 쓴 "여호와 하나님의 말"이란 시를 하나 소개하겠습 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나라 말로 말을 할까요 모든 나라들의 말이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말들은 서로 달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다 아시지요…. 네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 는 교훈은 장애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되고자 해야 한다는 사 실입니다. 내가 판단한 내 방법으로 도움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 에 더러는 장애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이런 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본위입니다. 그런데 자기 본위의 관심 을 베풀고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 될 수가 없다는 사 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치유할 때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 님이 여러 가지 유형의 병자들을 만나시는데 결코 예수님의 방법이 꼭 같지가 않습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만 하셨습니 다. 어떤 사람은 손을 얹어서 안수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명령 을 하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야단을 치세요. 예수님의 방법은 다 다릅 니다. 본문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 한 번도 빛을 본 일이 없는 사 람,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침을 발랐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그랬을 때 이 사람은 뭔가를 느낄 수가 있 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 내 눈에 무슨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침을 바르시고 진흙을 바르시고 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보 라. 그래서 뭔가 자기 눈에 발라지고 물이 자기 눈을 씻기 시작했을 때 거기서 그는 어떤 여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임재와 손길을 경험하기 시작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도와주십니 다. 말씀만 하면 고칠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주님이 다가설 수가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 주변의 장 애인들을 접근할 때 그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 다. 즉 그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우리와 격리시켜놓 고 도움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 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불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레19: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 지 말고 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그런데 한국 사회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몇 년전에 서울 일원동 에 있는 삼성병원에 갔는데 그 주변에 아마 장애인 학교를 세우려고 하는데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짓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 기억 이 있습니다. 이유는 혐오시설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장애인이 어디에 발붙이겠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 어오겠습니까 지난 15일에 있었던 부산에 비행기 추락사고를 통하여 생명을 건진 자가 39명이지만 그 중에 몇 명이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건축을 앞두고 있습니다만 교회 를 건축할 때 이제는 장애인들을 충분히 배려된 설계가 되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장애인들이 제 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 이예요. 두 번째 불편은 소외감입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 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세 번째가 육체적 불 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364일은 잊고 삽니다. 비장애인과 함께 사 는, 아니 살아야 하는‘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그들’을 기억하도록 하는 단 하루 4월 20일. ‘장애인의 날’뿐입니다. 단 하 루로, 단 일주일로 ‘그들’의 삶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애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귀한 창조물이 며, 모든 사람들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존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 가장 먼저 찾아가신 이들은 온갖 장애와 병으로 고통을 당하 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고치시는 일이 바로 복음 이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장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극 복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결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또, 사 회와 교회는 그들 장애인들을 격려하고 도와야 합니다. 함께 손에 손 을 잡고 가야 할 여호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시며 구원을 주시는 분들입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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