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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졸업] 물고기 신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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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아주 베스트셀러가 계속 서점을 잘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이 늘 실패하게 되는 것은 실패하는 습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같은 태도와 행동을 가지고는 그 습관을 다시 말하면 바꾸지 아니하고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별 수가 없을 것이라 그랬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 그랬습니다.
나가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고 삶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어야 하고 그런즉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짜놓은 습관의 그물망에 걸려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주 이런 유명한 말을 하나 남겼습니다. 우리가 사물을 과거와 다르게 보면 어떤 일을 사건을 또 사물을 과거와 다른 시각으로 보기만 해도 변화는 즉시 발생할 수 있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은 어떤 성공하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원칙을 알고 그 원칙을 행하고 또 마치 자연의 법칙에 있어서 자연이 잘 순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 성공하는 습관의 원칙을 이루기만 하면 우리도 거기에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랬습니다.
오늘 저는 요나서를 읽으면서 이러한 자세의 문제를 생각하고 행복도 습관이고 훈련이고 또 생각이라는 그런 점에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자세와 또 생각을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왜냐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 진리는 시간이나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고 모든 인생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근본 원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여호와 하나님이 만나시거나 선택해놓으시고는 그 사람을 인도해 가는 그 원리가 요나 시대에나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각자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형태나 모양은 또 다르겠지만은 근본 원리는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만난 여호와 하나님 또 요나에게 임하였던 그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가 서야 할 자리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가 무엇을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떤 지침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서 그 말씀 자체가 살았다 그랬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아멘으로 깊이 영접하고 또 깊이 아멘 하면 그 말씀이 살았다 그랬습니다.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서 그 말씀을 책임지신다는 뜻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겸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그랬습니다. 다이내믹한 어떤 역동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는 내 심령이 내가 연약해서 할 수 없지만은 이 말씀이 들어가면 나도 할 수 없는 것 내가 약해서 또 의지가 부족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신다. 왜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능력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줄 믿으시고 오늘도 주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권고하시는 이 사랑의 메시지를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누군가로부터 오는 사랑과 관심과 격려가 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까지 이르러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 주변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내게 대하여 어떤 기대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없고 나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도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아마 굉장히 불행하거나 아마 죽음을 자주 생각하지 아니할까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이 땅에 한시간의 수많은 38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끊어 가는 이 불행한 시대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 그 사랑과 격려와 기대와 믿음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저장소요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발전소와 내가 연합이 되어 있을 때 곧 그 연합해 있는 줄은 전깃줄은 그 밧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주시고 그 아들과 더불어 다른 모든 것을 주시마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신실한 약속 안에 우리가 연합이 되어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신령한 영적인 자산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내가 구하면 내게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대학생 두 커플이 연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총각 둘이서 거의 동시에 입대를 했습니다. 서로 약속을 하면서 우리 사랑이 변치 말자. 혹시 내가 군대 가더라도 편지를 못하고 어렵더라도 아가씨보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 마라고 손가락을 걸고 그렇게 약속을 했답니다. 그런데 석달이 못 되어서 한 아가씨는 그만 마음이 변해 가지고 다른 대학생하고 데이트를 하고 편지도 안 쓰고 그렇게 되버렸어요.
그런데 한 자매는 갈수록 더 군대 가있는 총각을 그리워하고 그래요. 이유를 알아본즉 군대 가면은 한달 동안은 아무 편지를 못 쓰게 만듭니다. 전혀 이제 단절시키면서 군대 정신을 넣기 위해서 이제 다 단절을 하는데 그 한달 동안에 편지가 없어요. 그리고 또 강한 또 그런 포병훈련이라든지 또 강한 훈련을 하면은 편지 쓸 사이가 없습니다. 너무 바쁘고 너무 힘들어 가지고 이렇게 한 서너달 동안 편지를 제대로 못 썼어요. 그러니까 이 아가씨는 점점점 마음이 끈이 느슨해져서 그만 다른 총각으로 마음을 돌리고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버렸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럼 이 한 처녀는 한 자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마음이 달아오르느냐
전혀 그 총각 군대가 청년은 편지 쓸 사이도 없고 그랬는데 누가 어떻게 했느냐 그 총각의 어머니가 혹시라도 이 딸 마음 변하면 우리 아들 군대에서 탈영할까봐. 그래가지고 이 아들의 이름으로 이 어머니가 연애편지를 써주는 거예요. 이틀에 한번 삼일에 한번. 물론 늘 똑같은 말 비슷한 말이지만은 나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끈 때문에 이 나중 아가씨는 계속 마음에 사랑이 공급이 되가지고 다른 총각이 곁눈질을 해도 싸늘하게 자를 수가 있었고 여러 가지 그런 어려움을 이기고 나갈 수 있었다 그래요. 결국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에서 넘어지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끊어지지 않았는지. 우리가 낙심하고 세상으로 방향을 돌리는 우리의 연약함도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지 못함이라 생각을 하시고 만약 오늘 여러분들이 나오지 못했다면 눈 때문에 빠지고 다음에 무슨 결혼식 때문에 빠지고.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물고기 뱃속에 있을찌라도 거기서 망하지 아니하고 거기서 죽지 아니하고 거기서 소화되어서 뒤로 배설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입으로 다시 토하여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이 메시지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심령에 와 닿을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또 주일마다 시간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이어져 가는 성도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향하여 어떤 시험 핍박이 오더라도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달려갈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이어지지 아니한다면 마치 전선이 끊어진 것처럼 공급에 수도가 끊어진 것처럼 그 심령은 메말라질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메마른 곳에 결코 거기에 어떤 행복이 있겠습니까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과 행복이 오늘 이 아침 꼭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능력으로 우리 심령에 여호와 하나님 사랑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음을 확실히 믿습니다.
오늘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선지자였지만은 그는 아직도 영을 쫓아 사는 성도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지적하고 구분하였던 것처럼 너희가 아직도 영에 속하지 아니하고 육신에 속한 자로다. 이는 너희 중에 시기와 분쟁이 있음으로 인하여 그랬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의지의 지배를 따라 삽니다. 내주 하신 성령을 쫓아 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육신에 속한 자라 성경은 말하는 것처럼 오늘 이 요나는 사명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변화되지 못하였습니다.
 개조가 필요하고 변화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뜻보다 자기의 뜻을 먼저 앞세웠던 것입니다. 니느웨 도성은 저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 나라가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도움을 입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느낀 감정에 반하여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명령받았을 때에 돌아서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귀한 비둘기라고 하는 자기 이름에 합당한 복음의 희망을 선포하고 해야 할 그가 사명을 버렸던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던 것이지요.
때로는 모든 일을 자기 기준으로 해서 교묘하게 합리화를 하려고 합니다. 도망치는 그 길 항구에 도착하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습니다. 잘 됐다. 이 배를 타고 가라는 또 여호와 하나님의 제2의 기회가 아닌가 또 배를 타고 보니까 배 밑창이 고요합니다. 여기서 잠자라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편한 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육신의 사람은 늘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온 뱃사람들이 풍랑 때문에 아우성을 지르고 자기의 신들을 부르고 살기를 위하여 몸부림 칠 때 그는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육신에 속한 자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냥 쓰실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더 귀한 일에 사용하기 편하시기 위하여서는 준비하는 학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고기 신학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그 물고기 신학교에서 새로운 관점을 배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스티븐 코비 박사가 말씀한 대로라면 따라서 우리가 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아니하면 우리는 스스로 짜놓은 습관의 그물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생각하고 내가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지만은 그 프로그램은 성공할 수 없는 승리할 수 없는 행복할 수 없는 그런 습관의 프로그램에 짜여서 내가 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과거와 다른 눈으로 보기만 하면 어제와 다르게 사물과 현재와 사람을 보기만 하면 변화는 즉시 일어날 수 있다 그랬습니다.
이런 자기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하지 못한 요나였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물고기 신학교에 입학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 어떤 역사를 이루었는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왜냐 하니까 이 물고기는 지중해 연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요나를 흔들고 요나를 집어삼켰던 거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대에도 내 삶의 현장에도 여러 가지 많은 큰 물고기들이 나를 삼키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던져 넣을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고기가 있습니까 물질의 물고기가 있습니다. 정말 돈이 떨어질 때는 그렇게 초라하게 돈이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호주머니에 동전 하나 없습니다. 아이들의 버스 차비를 줄 수 없을 정도로까지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분은 물고기 뱃속에 지금 들어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의 물고기에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박수를 치고 싶어도 손에 힘이 없어 못합니다. 찬송을 크게 부르고 싶어도 목에 소리가 나지 않아 힘이 다 빠져버립니다.
 일어나서 주의 전에 오르고 싶어도 허리가 말을 듣지 못해서 일어날 수 없는 이런 건강의 물고기에 잡혀서 탄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들로 인하여 때로는 아내와 남편으로 인하여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로 인하여 날마다 시달리는가 하면 때로는 자존심과 명예가 다 땅바닥에 떨어져버리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 주저앉아버린 그런 명예의 물고기 뱃속에 잡혀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밖에도 여러 많은 모양과 종류를 따라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물고기들이 우리 주변에 배회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서 던져 넣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교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말씀했습니다. 오늘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내 탓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져 달라는 자기 고백. 자기가 그 범죄함이요 자기의 부족이요 자기의 연약함이요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못했고 또 많이 기도하지 못해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탓입니다 라는 이 고백을 들어야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 신학교도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인생의 책임이 있고 자기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책임을 묻고 있다는 그 자기가 부서지는 이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신학교에 합격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이 신학교에 입학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들어갔다 나오신 분들 또 그리고 지금도 그런 자리에 힘들게 몸부림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경험에 의하면 첫째 답답합니다. 그리고 막막합니다. 그리고 캄캄합니다. 답답 캄캄 막막. 거의 다 비슷한 단어들이지만은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터질 것 같습니다. 뭔가 미칠 것 같습니다. 뒤집어질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들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혹시라도 이런 분들이 있다면 또 그런 기회를 만날 때 이 물고기 뱃속에서 탈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뛰어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환경적으로 그렇게 물고기 뱃속에 있지는 아니할찌라도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이렇게 시달리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결박도 자유케 하시기를 원하는 줄 믿으시고 이 아침 뛰어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토하여내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입니까 별로 나오고 싶지 않으신 모양인데 그런데 얼굴 표정은 보니까 지금 고래 속에서 한 삼일쯤 지나신 분들처럼 보일 때도 있고 오느라고 힘들어서 그렇습니까
주님 안에서 주의 능력으로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와야 되요. 요나는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았어요. 아멘. 믿음이 뭐냐 믿음은 때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역사를 기적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무리 큰 것이라도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앞으로 나와요 뒤로 나와요 뒤로 나옵니다. 왜요 뼈다귀까지 다 녹아 가지고 완전히 그냥 뒤로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 요나는 들어갔던 대로 다시 뛰쳐나왔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토하여내게 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들어갈 때는 절망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죽었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토하여 나올 때는 새사람이 되었어요. 변화되었어요. 능력이 임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선지자로 바뀌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졸업장을 받으신 줄 믿습니다. 아멘. 아멘 크게 하면 졸업장 빨리 줄 줄 믿습니다. 요즘도 조기 졸업장이 있거든요 그냥 4년 대학도 3년에 졸업도 시켜준다니까. 오래 계시기 원하시면 그냥 어먼 하시고. 주여 나도 빨리 나와야 되겠습니다. 내 심령이 답답합니다. 주님 여기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토하여내어 주시옵소서.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내어보내 주세요. 살려 주세요. 토해 주세요. 아멘. 졸고 있어요. 옆에 분. 아직도 영적 잠을 자고 있는 분들에게 형제여 자매여 나오세요. 나오십시오. 아멘. 나오셔야 되요. 거기는 오래 있을 곳이 아닙니다. 그 졸업장은 빠르게 빠르게 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나올 수가 있었을까요 이런 믿음의 역사 상식을 뛰어넘는 역사 다시 말하면 나를 변화시키려면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고 우리가 사물을 과거와 다르게 보기만 하면 변화는 즉시 일어난다는 이 말을 다르게 좀 적용을 해본다면 우리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물을 어제와 다른 시각 곧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으로 관점만 바꾸면 기적은 일어난다. 생각 관점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을 붙들면은 여호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물고기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또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많은 관점을 바꾸어서 전혀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의 사람으로 나왔던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귀한 성도 여러분 2500, 600년 전에 있는 이 요나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 요나를 인도하시고 세워 가시고 훈련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 한다는 것을 꼭 기억을 하시면서 환경을 바꾸려고 애를 쓰시지 마시고 생각을 바꾸십시다.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경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또 내게 일어나는 이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만 주어지신다면 우리도 요나처럼 뛰쳐나올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어떻게 거기서 나왔는가 크게 4가지의 그의 기도와 고백 속에 귀한 진리가 관점이 그 속에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가 그는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랬습니다.
이 부르짖음은 대단한 능력의 기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그는 감사하고 찬송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는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찬송하는 이런 귀한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아무나 노래를 하는 것이 그것이 찬송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슴 아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수용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것이 찬송의 참 뜻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다면 내가 오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도 내가 오늘 이렇게 욕을 먹는 것도 시달리는 것도 병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이유와 까닭은 모르지만 내가 주님을 찬송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꼭 이 고백을 하셔야 졸업장을 주셔요. 이것은 절대적인 그런 원리입니다. 부르짖어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서 네가 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느냐 이 고백이 떨어져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토하여내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요. 우리가 지나간 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속에 내가 버텨봅니다. 몸부림을 쳐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항복합니다. 그때서야 여호와 하나님이 풀어주십니다.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던져 넣었습니다. 물고기 입 속에. 그러나 나오는 것은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토해내게 하셔야만 나올 수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사람이 녹아져서 소화가 되어버리지 아니하고 나올 수 있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이 돕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깨닫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서 첫째는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그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라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살아 계시면이 아니라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 나와 약속하십시다.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그렇게 믿음이 적습니까 나를 좀 한번 믿어주세요.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도록 몸부림치겠습니다.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서약하고 맹세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역사를 이루는 것을 얼마든지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약속입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덤에서 나와야 됩니다.
무덤에서 나오라 이거예요. 오늘 이 요나의 사건이 하나의 어떤 픽션 꾸며낸 이야기나 소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세상의 진리의 근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요나의 물고기를 친히 언급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기적을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왔지 않느냐. 모세를 봐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지 않느냐. 네가 선지자라면 기적과 표적을 보여 달라.
그랬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내가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없나니 그랬어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내가 보일 것이 없나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인자도 십자가에 죽고 3일 만에 무덤에서 있다가 부활하리라. 다시 살아나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이 요나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요나는 예수님 때문에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맛본 사람이라 그 말이에요. 아멘 입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벌써 700, 800년 전에 그는 예수의 죽음을 실제로 살고 거기서 죽음을 경험하고 거기서 물고기 뱃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체험하고 다시 부활하여 나온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앞서간 모든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살아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제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삶을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주로 믿는 성도는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내가 죽어야 됩니다. 그리고 3일이 될는지 30년이 될는지 모르지만은 여하튼 죽어야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십자가의 죽음 곧 세례를 받는 이 영적 결단이 있어야 주님 앞에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통과해야 됩니다. 무덤을 지나가야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에 핵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십자가도 없이 그리고 죽음의 과정 없이 늘 부활의 기쁨 영광 그 어떤 행복만을 구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는 죽어야 됩니다. 예수 믿기 전 거듭나기 전에 여러 가지 것들을 십자가에 날마다 깨닫고 진리의 말씀으로 토하여 내고 죽여버려야 그 속에 주님이 내 안에 역사 하는 영의 역사를 보게 되는 줄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말했잖아요. 나는 날마다 뭐하노라 죽노라.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죽으라 그러면 내가 왜 죽어. 네가 죽어야지 합니다. 신앙생활이 뭡니까 교회생활이 뭡니까 오늘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늘의 위로와 안식과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얻을 수 있느냐 내가 붙들고 있는 것 내가 의지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만이 나의 기쁨이라는 것을 가지려면은 내가 죽어야 되요. 교회는 바로 신앙생활은 날마다 죽는 삶의 연속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가 뭐냐 잘 죽이는 영적인 지금 죽음의 현장입니다. 좌우의 날선 검을 예리하게 잘 들도록 해 가지고 양들이 목을 딸 때 그냥 시원해 가지고 히죽이 웃으면서 그냥 죽어가도록 그게 진짜 설교 잘하는 거래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서툴러 가지고 그냥 날이 덜 서 가지고 한번 자르면 이 사람도 튀고 저 놈도 튀고 날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기도 하고 뿔이 나가지고 달려들기도 하고. 얼마나 내가 더 물고기 뱃속에서 훈련을 받아야 우리 성도들 소리 없이 잘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예수의 성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을는지. 내 생전에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니까 제가 힘이 덜 들게 하시려면은 여러분이 빨리 죽어주면 되요. 날 보고 자꾸 그러지 마시고 그냥 십자가에 좀 못을 박으세요.
정욕과 아집과 고집과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자든지 깨든지 예수로 더불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옆구리 누가 푹 쑤셔도 히죽이 웃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그래 당신이 나의 선물이야.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다듬어질 수 있다면 감사해 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성숙에 이르는. 따라서 합시다. 살든지 죽든지 깨든지 자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누구와 더불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와 더불어 함께 살게 하려 하노라. 이 예수와 함께 사는건요 무덤에 들어갔다 나와야 되요. 무덤을 통과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대충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나온 것처럼 오늘 연단이나 또 여러 가지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짓눌려있는 영혼들 첫째 따라서 합시다. 부르짖어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탈출원리. 졸업장을 빨리 1학기를 마치려면은 뭘 졸업해야 된다고요 부르짖는 기도에 학점을 따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2장 1절, 2절을 같이 소리내어서 읽겠습니다.
시작.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아멘. 요나는 기도해야 할 때 잤어요. 다른 사람 부르짖을 때 그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어요. 제비를 뽑혀서야 겨우 입을 한번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부르짖는 기도를 배웠습니까 브니엘 신학교에 가 가지고 부르짖는 걸 배운 거예요. 아멘.
보세요. 이 부르짖는 기도는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보통 해 가지고는 안 나옵니다. 이게. 쉽게 부르짖는 기도가 안 나옵니다. 왜요 부르짖는 기도는 겸손의 뜻이기 때문에. 왜 부르짖으려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쪽팔려요. 내가 뭐 사람들한테 뭐 별 일 없냐 잘 있었냐 잘 있으라고 말하고 싶은데 부르짖는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거예요. 이걸 내려놓기 전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죽어도 안 나옵니다.
 체면 때문에도 안 나오고요 여호와 하나님 살아 계신 것에 대한 믿음도 부어지지 않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한 가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귀가 먹었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랬어요. 찾으라 그랬어요. 환란 날에 나를 찾으라.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그랬어요. 아멘 입니까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르짖는 것과 그냥 기도하는 것을 별개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보면 부르짖어 기도했다 그러지 다른 데는 그냥 기도했다 그랬어요.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그 법칙 가운데 왜 이렇게 부르짖는 것의 응답을 기뻐하실까 그것은 첫째로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내가 가진 지식 지혜 힘 어떤 것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항복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여 삼창은요 보통 은혜를 입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십자가에 자기가 부서지고 내가 자아가 십자가에 완전히 부수어질 때 다니엘이 주여 행하소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일어나소서.
이 삼창을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급한 사람이. 오늘도 요나가 자기의 고난으로 인하여 죽게 된 지경에 쏟아져 나오는 쓴 물 스올의 그 어두움 속에서 그는 그 두려움 속에서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며 외쳤습니다. 얼마나 외치고 얼마나 몸부림을 쳤으면 고래가 그냥 소화를 못 시키고 토하여냈겠습니까 이 무슨 뼈다귀가 이런 것이 들어왔나 해 가지고 왝 하고 토하여낼 정도였으니까.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이 밀어주실 때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겸손을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완전히 포기되어지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자백할 수 있는 이 부르짖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시편 107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107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지시는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갈 길을 모를 때 막막할 때 내 갈 길이 어디로 가야할지 그리고 내가 어디 가야 이 몸뚱이 하나 쉬어야할 직장 또 배우자 가정 이사집 여러 가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7편 4절을 같이 읽습니다. 시작.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뭐하매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아멘.
두 번째는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결박이 더 죄어옵니다. 나를 더 윽박지릅니다. 그 쇠사슬이 묶여 있을 때에 어떻게 하라 그랬느냐 107편 10절입니다. 시작.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아멘.
그리고 범죄한 결과로 주님이 이제는 징계와 고통을 당할 때 죽게 생겼을 때 107편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다같이요.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뭐하매 거기다 빨간줄 좍 그으십시오.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어떻게 말씀을 보내어서 건져내셨다 그랬습니다. 할렐루야.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에 요나처럼 또 삼손처럼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에 2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할렐루야. 아멘.
삼손이 데릴라의 그 향기에 취하여 그 무릎에서 꿈과 비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버렸습니다. 머리가 다 깎였습니다. 드디어는 쇠사슬에 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이 눈알이 다 뽑혔습니다. 노리갯감이 되었을 때 그가 외친 기도가 있습니다. 도저히 그는 자기 자신도 자기를 용납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라는 그 약속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여호와여 이번만 나로 이번만 한번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삼손이 부르짖은즉. 할렐루야.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해달라는 회개의 눈물 그리고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여호와 하나님 앞에 포기되어진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도 더 많았더라 그랬습니다.
우리 귀한 성도 여러분 어차피 신앙생활 하는 것은 체험이 따라야 됩니다. 그래도 저래도 천당은 갑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것을 왜 요리 조리 피하려고 합니까 합리화하려고 합니까 성경에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어서 골방에서 한번 부르짖어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그렇게 부르짖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말 다급한 문제가 있으면 직장에도 휴가를 내고 또 여러 가지 사업 가게문도 닫고 기도원으로 올라갑니다.
왜요 거기 가면 부르짖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우리 금요성령대망철야기도를 도심 속의 기도원으로 바꾸기를 원합니다. 아멘 입니까 그래서 목마른 자들이 갈한 자들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부르짖어서 여호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사람들이 삼손처럼 야곱처럼 씨름해야 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람들의 체면을 보지 아니하고 신앙의 판단을 받지 아니하고 감정에 정서에 메임이 없이 찬양과 말씀과 기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충만히 체험할 수 있는 도심 속의 기도원 브니엘 기도원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변에 문제가 있고 또 기도응답이 필요하신 분 또 다른 사람 합심해서 기도가 필요한 분들. 여러분 기도는 모든 문제의 열쇠인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믿으시고 더 많은 간증이 쏟아져 나와서 우리의 생애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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