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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부모님께 효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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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8일이 되면 우리나라 방방곳곳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 마음에 찡한 감동이 느껴집니다.
가사의 한 구절 한 구절에 어머니의 사랑이 잘 녹아져 있는 것처럼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쉬운 것은 이 노래가 그 날 하루로 끝나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간혹 회갑 잔치나 칠순잔치에서나 불려질까
평상시에는 잘 들을 수가 없습니다. 노래야 그렇다 칩시다.
혹 자식인 우리가 부모님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을
일 년에 한 번 있는 연례행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것은 참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효도하고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나서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갑니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바로 어머니의 품속이 우리 고향의 시발점이었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여호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효도가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비극을 가져온 원인입니다.
성경은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부모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거룩한 마음이 상실된 인간 속에는
결코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장 가브리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가지고 올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은 세상에 다니면서
곳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활짝 핀 향기로운 꽃송이를 제일 먼저 뽑았고
 둘째는 활짝 웃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웃음을,
세 번째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이 세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이 세가지를 구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동안
활짝 피었던 향기로운 꽃은 시들어 버리고 말았고,
그렇게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녔던 어린 아이는
이미 늙어버린 남정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남은 어머니의 사랑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어머니의 사랑만 가져다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이야기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우리 어머니들 가슴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한 조각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비슷하게 닮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두 가지의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야 하는데
하나는 수직적인 관계요, 또 다른 하나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수직적인 관계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수평적인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수평적인 인간 관계의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바로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고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시면서 우리가 순종할 때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약속있는 첫 계명은 가정의 질서와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영어에 가장 엄숙한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Mother), 가정(Home), 하늘(Heaven)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부모와 가정입니다.
경쟁의 몸부림 속에서 피곤한 육신을 끌고 사람들은 가정을 찾아갑니다. 가정은 휴식처이고 안식처입니다.
또 용기를 주는 곳이고 안식처입니다.
인생의 배신과 패배와 쓰라림을 당했을 때 부모를 찾아갑니다.
부모님은 따뜻한 손길로 아픔을 쓰다듬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저도 힘이 들 때에 부모님이 그리워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는 우리가 낳고 자란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산물이요, 희망의 산물이요, 정성의 산물입니다.
부모님의 깊은 사랑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그 어린 생명에게 전 희망을 겁니다.
훌륭하고 좋은 자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모님은 그 어린 생명을 정성을 다해 키웁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인간사회는 이해 타산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고 받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법칙입니다.
이 원칙이 깨질 때 우정도 사제애도 부부애도 금이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을 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태양과 같고 어머니의 사랑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태양은 사방에서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샘터에서는 샘물이 철철 넘쳐 흐릅니다.
우리는 사랑의 태양 아래서 사랑의 맑은 샘물을 마셔가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키웁니다.
어머니가 쏟아 주는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받기 위해 준 것이 아니고 아깝다고 생각하는 후회가 추호도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주는 진짜 사랑입니다.
샘내지도 않고 섭섭함도 없이 그저 기쁘기 때문에 주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몸은 밥을 먹어 자랐지만
우리의 정신과 인격은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진실하고 티가 없으며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숭고하기 때문에 그 자녀가 철이 들기 전에는
도저히 부모님의 높은 사랑과 은공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우리가 철이 들 그때에는
부모님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효도를 별로 해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은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만남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한 인간의 미래를 그 어머니가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머니의 사랑이 인간의 행복과
얼마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눈동자보다 맑은 것이 없으며
아이들에게 둘러 쌓인 어머니보다 더 경애스러운 모습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랑의 우물은 마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의 우물은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어머니는 부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가난한 어머니는 하나도 없고,
보기 흉한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어머니는 아름답습니다. 그 넓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르지 않고 영원히 솟는 샘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어머니도 영원히 솟는 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포기가 없습니다.
반딧불만한 희망만 있어도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가치를 말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란 아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아이를 위한 장래의 걱정이 있고,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는 아이를 위한 희생적 준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아이에게 훌륭한 모범이 못되고 있다는 가책이 있고, 아버지의 심장 속에는 좀 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결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일터로 나가지만
그 머릿 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울고 겉으로 위로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사랑하고 겉으로 책망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엄한 얼굴을 가졌으나 부드러운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아버지는 최후까지 존재하는 아이의 고향이며,
배신하지 않는 아이의 친구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두려움과 자비,
위엄과 사랑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깊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출발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깊이란 누구를 위하여 고통을 대신 당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그 자녀를 위하여
넉넉한 고통을 지불하며 양육하기에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이나 시간 등을 쓸 수 있지만
생명을 주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깊이를 가진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연로한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혹시나 자식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이리 망설이고 저리 망설이고, 웬만하면 참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자녀든 자녀는 부모에게 빚진 자입니다.
※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으로 한 아버지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스물 아홉 살에 그는 열네 시간을 기다려서
‘출산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출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네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야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잊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일곱 살에 그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학교에 다니면서 우등상장을 처음 타왔을 때,
그 상장을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을 때,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그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는 얘기입니다.
‘쉰 세 살에 딸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사왔을 때,
쓸데없는데 돈을 썼다고 나무랐지만 밤늦은 시간에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합니다.
예순 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
짧은 글이지만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을 보며 늘 감동하고 기뻐하고 때로는 마음 아파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돌보고 먹이고 가르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적어도 20년 이상 부모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동물 가운데서 인간처럼
오랫동안 부모 밑에서 보호를 받는 동물이 없습니다.
이럼에도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것이 부모 공경의 첫 모습입니다.
또 부모를 순종해야 합니다.
1988년 유럽의 알베이니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인해서 어린 아기와 엄마가
무너진 건물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기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기운을 잃어갑니다.
결국 엄마는 손가락을 깨물어 아기에게 피를 빨아먹게 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의 핏방울이 아기의 입 속으로 떨어질 때마다
엄마의 기운은 차츰차츰 기력을 잃어갑니다.
그들이 6일만에 구조되었을 때 아기는 살았지만
많은 피를 흘린 엄마는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영국의 런던 타임지는 이 사건을 향해 ‘“
현대판 예수’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잘되고
영원한 나라에서 잘되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피 한 방울 남김없이 흘리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육신을 희생해서라도
여러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분이 또 있습니다.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비교해서 안됐지만
여러분의 부모님은 분명히 여러분이 출세하는 길이라면
자신을 발판으로 삼아서라도 출세를 시키고 싶어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죽음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장병에 걸리면 신장을 떼어서라도,
암에 걸리면 골수를 이식해서라도 여러분을 살리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오직 여러분이 건강하기만을 바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부모님이십니다.
※ 얼마 전, 교사들과의 마찰이 있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남 예산 보성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서승목교장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아프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이 잘못되었느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마음 아픈 것은
다른 것보다 그가 효심이 무척 깊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3남 3녀 중 둘째 아들이었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었기에
매일 부모를 찾아뵙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늘 아내에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답니다.
부모님 생전에 최선을 다해야지. 대신 돌아가시면 울지 않을 거야. ”
서 교장은 20년이 넘도록 어김없이
오전 3시30분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나서는 부모님 댁에 다녀온 뒤
아침을 먹고 7시 반쯤 출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스름한 새벽에 2㎞ 남짓 떨어진 본가로 달려가서는
문안인사를 드린 뒤 마당을 쓸고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일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고한 선친이 몸을 가누지 못하셨을 때에는
퇴근 후에도 본가에 들러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이 불편한 어머니 요강까지 깨끗이 비우고는
집에 돌아오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부모님께 올바르게 효도를 다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어긋나게 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한 사람은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혹독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인생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이 된 사람은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태어나 자란 곳, 그렇게도 극진히 모셨던
노모가 사는 집 뒤편 나뭇가지에서 불효를 저질러야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효도하기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핵가족 시대는 부모와 자식의 공간을 멀리 떨어뜨려 놓았습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바쁜 삶은
부모님을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겨를조차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시대가 불효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는 효심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실 전화 한 통이면 효도할 수 있는 데도
우리는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그래도 우리는 효도해야 합니다.
시대가 불효의 시대이고, 환경이 효도할 수 있는 조건들을 어렵게 할지라도
우리는 효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효도할 수 있습니다.
효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효도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자녀 된 우리 모두는
부모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생각해보며 잘못한 것도 깨닫고
효도하지 못한 것도 깨달으셔서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늘 그리해야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 분들은 이번 주간만큼은 반드시 부모님을 찾아뵙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혹시 찾아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다음 주일에 있을 교회 어른들의 효도관광에 가셔서
부모님처럼 대하시고 대신 효도하시면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축복된 한 주간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부모를 공경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와 장수의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부모의 책임까지 다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복을 모두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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