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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당연한 부모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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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지난주일 어린이 주일에 이어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미국 의회는 1914년 5월 두 번째 주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고, 1972년에는 6월 세 번째 주일을 ‘아버지의 날’로, 그리고 1978년에는 9월 첫 월요일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날’로, 그 후 다시 1981년에는 10월 26일을 ‘장모의 날’로 제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부모, 조부모, 처부모 등 모든 어른을 한 분으로 보고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제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어린이날이 어버이날보다 사흘 앞 서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를 ‘제 자식 예쁜 줄은 알면서도 저 자신을 예뻐한 부모 사랑을 깨닫는 데는 사흘이 걸리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한말에 조선팔도 방방곡곡을 누볐던 선교사 게일은 ‘조선은 노인 천국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노인으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눈에 한국의 노인이 그토록 부럽게 비친 것은 그들이 누리는 호의호식이 아니라, 우러러 받드는 어른 존경문화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처럼 한국은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 없는 어른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 천국이 지옥이 되어버렸습니다.
 유엔 아동 기금(유니세프)이 아시아· 태평양지역 17개국 청소년 1만 73명을 대상으로 어른 존경도에 대한 면접 조사한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어른들을 매우 존경한다’는 응답은 13%로 17개국 중 꼴찌고, 17개국 평균 72%를 크게 밑돌았습니다. 교사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숫자도 꼴찌를 기록, 온갖 권위가 무너진 한국의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존경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인 이 나라가 청소년들이 어른 공경하는 데 있어서 아세아권 나라에서 제일 꼴찌라니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62개 청소년 단체가 어른존경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어른들의 권위가 무너져가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정다운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말처럼 다정하고 위대한 말이 없습니다. 정성스러운 것, 따뜻한 것, 눈물겨운 것, 포근한 것, 사랑이 넘치는 것, 용서해 주시는 것, 흐뭇한 것, 그리운 것, 아낌없이 주는 것, 고마운 것, 아름다운 것, 너그러운 것, 이 모든 것들이 어머니라는 말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엄마’입니다. 학교에 갔다 돌아와서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부르는 말도 ‘엄마’입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때도 엄마, 몸이 아파서 신음을 할 때도 엄마, 시집간 딸이 괴로울 때도 엄마, 외로울 때도 찾는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분명히 세상에서 이보다 더 정다운 이름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을 고아라고 합니다. 양친 중에서도 어머니의 존재는 인생의 요람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측은해서 그렇지, 실은 어머니날이라고 해도 불만이 없는 이름입니다. 어머니가 없는 집은 마치 온기가 없는 냉방과도 같이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그 이야기 속에 어머니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는 탕자가 집을 나간 이유가 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비약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모성애 보다 더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어미 원숭이에게서 새끼를 떼어놓은 다음, 그 원숭이를 해부해 보면 간이 다 녹아 버리고 없다고 합니다. 자기 새끼에 대한 짐승의 애정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쏟는 사랑과 정성과 희생은 한없이 크고 한없이 깊습니다. 어떤 분은 양주동 선생이 작사하고 김성태 선생이 작곡한 ‘어머니의 노래’를 한번도 끝까지 불러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니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에 주름이 가득, 인간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머니의 정성은 가이없어라♪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이 나고 목이 메어 더 부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어느 서양 사람의 사모곡입니다. 나는 열세 살 이었고, 우리는 니스에 살고 있었다. 아침마다 나는 어머니가 점포 하나를 세 들어 있는 호텔 앞에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학교로 갔다. 어머니는 니스의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그 곳에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스카프, 벨트, 스웨터와 장신구 따위를 하나씩 팔 때마다 십 퍼센트의 구전이 떨어졌다. 나에게 밥을 차려 주기 위해 집으로 오시는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어머니는 하루 종일 그 곳에 앉아서 눈을 크게 뜨고 물건을 사 줄 손님을 기다렸다. 우리 모자의 생존이 전적으로 그 초라한 사업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러시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고국에서 추방당한 후 프랑스에 정착하셨다. 그 후로 십 년도 넘게 남편도 친구도 없이 혼자 힘으로 우리 두 식구의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오셨다. 하루하루 먹고 살 양식과 집세, 수업료, 옷값, 신발값, 그 밖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투쟁하다시피 살아온 것이다. 그러다 간혹 기적처럼 손님이 많아서 점심이 비프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번 날은, 어머니는 그것이 마치 역경을 딛고 따낸 승리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럽고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띠고 비프스테이크 앞에 앉은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면서 자신은 지금 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라 육식을 하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으셨다. 어느 날 나는 식사를 하다 말고 물을 먹기 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 의자에는 어머니가 프라이팬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방금 내 비프스테이크를 요리한 프라이팬 바닥에 고인 고기 기름을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빵조각으로 바닥을 싹싹 훑어가며 정신없이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앞치마 밑에 후닥닥 프라이팬을 감추셨다. 그러나 나는 이미 확실하게 알아버린 후였다. 어머니가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채식주의를 고수하셨던 진짜 이유를......
성경은 이처럼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어버이의 사랑을 받고 자란 자녀들에게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는데, 여기 ‘공경’이란 말은 ‘사례금’이라는 뜻입니다. 즉 공경이란 값을 지불한다는 의미입니다. 자녀는 마땅히 부모에게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푼 은혜에 대하여 자식은 그 값을 내야 합니다. 그것이 공경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식의 도리입니다. 세상에서 부모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습니다.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두고두고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옛 말에 ‘자식이 철들기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곧 살아 계실 때 부모를 공경하라. ‘티마오’ 즉 ‘값을 지불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는 공경해야 합니다. 부모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구세대라 해서 무시할 존재가 아닙니다. 부모는 무지하고 무력하다고 해서 절대로 경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옳다’고 하는 말 ‘디카이오스’는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그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간혹 신문을 보게 되면 택시 안에 놓고 내린 물건을, 운전사가 주인에게 되돌려 주었다는 기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두고 내린 가방을 열어 보니, 그 속에 돈이 수천만 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찾아 되돌려 줍니다. 그러면 신문은 그를 착한 시민이라고 해서 크게 보도를 합니다.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 분명 착하고 선량한 시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물건을 주웠으면 주인을 찾아 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즉 ‘디카이오스’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입니다. 그것이 착하게 보이는 오늘의 현실이 문제이지, 그것은 착한 일이기 이전에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내 것을 남에게 주어야 그것이 착한 일이지, 남의 것을 내가 갖지 않고 주인에게 돌려준 것은 선행이 아니고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디카이오스’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200년 전에 중국에 선교를 할 때, 중국은 그 당시 유교 문화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이제 기독교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는데 유교 문화만을 숭상하는 중국인들의 마음이 잘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만들어진 전도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가장 높은 효도의 종교입니다. ’ 그러면서 출 21:17을 인용합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출 21:15과 레 20:9의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또한 신 21:18-21의 불효자식에게 내리는 벌에 대한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 이처럼 무서운 성경구절을 전도지에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기사도 게재했는데,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이삭의 나이는 20세 전후로 여겨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너를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련다’고 할 때에 ‘아버지가 100살이 넘더니 노망했는가보다’ 충분히 그럴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절대 순종한 것, 이것이 기독교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고 하셨던 철저한 효도의 종교다고 전도하여, 마침내 중국 사람들에게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는 부모님께 효도하되 예수님을 본받아서 효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신자에게 영원한 모범이 되시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본받아서 행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효도하시는 일에서도 온전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말씀하였으며,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는,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효도 생활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효도 생활을 본받아서 부모님께 효도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충북 음성에 있는 나환자촌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한 김요석 목사님이 간증한 내용입니다. 어느 날 80이 넘은 노인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여기에 살게 좀 해주시오. ’ ‘여기는 병자들이 사는 곳이지 건강한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 ‘나는 병신 중에 병신입니다. ’ 그러면서 그 분이 과거를 회상하는 듯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40년 전에 아들 여덟과 딸 둘 10남매를 두었습니다. 그 중에 넷째 아들이 11살 때 갑자기 손이 오그라들고 눈이 비틀어져서 병원에 갔더니 문둥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나 하다가 그 아들을 격리시켜야 되니까 섬으로 데려다 주려고 차를 타는데, 그때는 교통도 불편할뿐더러 버스를 타도 그런 병이 있으면 안태워줍니다. 할 수 없이 걸어서 며칠을 가는데 저녁이 되어 쉴 곳을 찾아도 누구 하나 재워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밖에서 잠을 자면서 갔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피곤해서 쪼그리고 자는 것을 보니까 ‘이 아이가 앞으로 죽을 고생밖에 더 하겠나.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죽여서 땅에 파묻어주는 것이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돌을 들어 아이의 머리를 때렸는데 마침 돌이 빗나갔습니다. 두 번째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하니 차마 아버지로서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데리고 부둣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부두에서 환자를 실어 나르는 배를 보니까 눈이 빠진 사람, 코 떨어진 사람, 팔 다리가 떨어진 사람,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우리 아들도 앞으로 저렇게 되겠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데리고 한쪽 구석에 가서 ‘얘야, 네 팔자도 참 나쁘다. 나도 아버지로서 책임이 있으니 너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고 내가 너하고 같이 죽겠다. 우리 둘이 같이 죽자’ 하고 그 아들을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아버지는 살아야지요. 죽을 놈은 나입니다. 집에 가면 어머니도 있고, 형님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아버지까지 죽으면 됩니까 나 혼자만 죽여주세요. ’ 하고 울면서 저를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차마 죽지는 못하고 아들은 섬으로 보내고, 나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40년이 지났습니다. 일곱 아들과 두 딸을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그 많던 재산도 다 나누어주었는데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서 아들네 집에 왔다 갔다 하는데 아들들이 눈치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 이거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욕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향에 와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40년 전에 버렸던 그 아들이 생각 난 것입니다. ’ ‘내가 다른 아들들은 재산도 주고 결혼도 시켜주었는데 그 아들은 버리기만 하고 한번도 가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죽기 전에 그 아들을 만나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야 되겠다’ 하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 ”
그 분이 소록도에 와서 아들을 만났습니다. 자신은 아들이 자기를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들이 자기에게 큰 절을 하면서 자기를 잘 대접하고 손자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얘야, 나는 네가 나를 많이 원망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한테 잘하냐’ 그때 그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버리고 떠날 때는 나를 이런 몹쓸 자식으로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럽더니, 예수 믿고 나니까 왜 그렇게 아버지 어머니가 고마운지, 날 낳으시고 나를 천국가게 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때까지 40년 동안 아버지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부모님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가 저한테 온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 그때 노인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가짜 아들 일곱을 위해 살았습니다. 진짜 아들은 제가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런 병신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살려야 될 아들은 돌로 때려죽이려 했고, 없어야 될 가짜 아들들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부모님께 효도하되, 부모님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신자의 관심은 금생에만 있지 않고 영원한 내생에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내생을 믿습니다. 신자는 영생을 얻고 불신자는 영벌에 이르게 됨을 믿습니다. 이것은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힘써야 합니다. 부모님이 구원받기를 원하며 기도하고, 믿음의 본을 보여 드리고, 종종 강권하기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신앙 중에 있어서 영원히 멸망에 이르게 될 부모님이 계시면, 견딜 수 없는 심정을 가지고 전도하여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으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금생에서도, 또 영원한 내생에서도 복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만약에 이 일을 힘쓰지 아니하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남을 것입니다.
아무리 살아생전에 섬기기를 잘한다 한들, 인생 나그네 길에서 모두 백년 미만에 끝나는 것이니 허무한 존재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의 부모님이 그토록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 버리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그러므로 부모님을 생전에 예수 믿게 한 자녀는, 사실 최상 최고의 효도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노년에 편히 모신다 한들, 부모님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경홀히 여기는 효도는 참된 효도가 아닌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값진 옷으로 입혀 드리고, 열락으로 즐겁게 해 드렸다 해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은 부모가 되었다면, 이 어찌 여호와 하나님이 명하시는 효도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예수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계십니까 부모님의 영혼이 귀중하기에 눈물 뿌려 기도하고, 전도하여 참 효도를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그 고마우신 부모님의 영혼이 멸망하게 된다면 이게 될 말입니까 참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라면, 불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 눈물 없이는 이 날을 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공경하기는커녕, 부모를 홀대하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부모를 폭행하고 살해까지도 주저치 않은 이 패역하고 배은망덕한 시대에, 우리 교회 성도들은 위로 여호와 하나님 잘 섬기고, 아래로 부모님 잘 공경하며, 믿지 않은 부모님은 반드시 주님께 인도하여서 최상의 효도를 해 드리는, 지극한 효자 효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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