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부모 공경의 세 가지 이유
본문
‘Mother's Day’, ‘어머니의 날’은 미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경 미국의 한 여성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서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어머니의 날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1914년 국회에서 정식으로 법령이 통과되어 윌슨 대통령이 5월 두 번째 주일을 어머니 날로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을 통하여 어머니의 날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5월 둘째 주 주일을 어머니의 날로 공포하고,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날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어머니의 날로 지켜 오다가 1974년에 ‘어버이 날’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도 함께 생각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나 관공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5월 둘째 주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정하여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부모님 공경을 다시 한번 다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뉴스는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94년 말에는 박한상이라는 못된 아들이 한약상을 경영하는 부모님을 불로 태워 죽인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경악케 만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96년 9월17일 전북 익산에서는 84세의 시어머니를 38세의 며느리 이정숙씨가 휘발유를 뿌린 후, 태워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99년 5월24일에는 24세의 대학생 이은석이라는 아들이 술을 마신 후,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 살해하고 시신을 줄과 톱으로 10여 토막을 낸 뒤, 신문지와 비닐로 싸서 서울 명동, 서울대공원, 동작대교 주변 등지에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99년 9월에는 재산문제로 다투다가 아버지를 마구 때려 갈비뼈 골절과 장파열로 숨지게 한 42세의 주모씨가 10개월 만에 범행이 밝혀져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지난 금요일 신문에 보니까 20대 딸이 술 취한 47세의 아버지의 가슴을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즈음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래서 고부간의 갈등을 비유한 재미난 유머가 시중에 나돌고 있습니다. 어느 종가 집에 첫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시어머니는 초장부터 며느리의 기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타일렀습니다. “새아가, 나는 긴 말 하는 거 싫어한다. 손가락을 이렇게 까딱하면 오라는 신호니까 그리 알고 잽싸게 오너라. ” 그러자 새 며느리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어머니. 저도 긴 말하는 거 싫어해요. 제가 이렇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못 간다는 신호니 그리 아세요. ” 이래서 요즈음은 시집살이란 말보다 며느리 살이란 말이 더 실감나는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기저기, 이곳저곳에서 가정의 질서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예언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종말의 징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1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죄악 리스트가 나옵니다. 그 중 30절을 보면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모를 거역한 결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도 해괴망칙한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다윗과 이방인 공주 마아가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불효자 중에 불효자였습니다. 그는 누이인 다말을 욕보인 이복 형 암논을 죽이고 외가가 있는 그술에서 3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 궁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악행은 이것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22절에 의하면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을 자기 아내로 취하는 악행을 범하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으로 하여금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도망하게 하는 등, 아버지의 눈에서 피눈물을 나게 했습니다. 결국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그냥 놓아두겠습니까 그는 노새를 타고 가다가 그렇게 자랑하던 아름다운 긴 머리까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상수리나무에 머리털이 걸린 압살롬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보고 심장을 찌른 다음 난도질했습니다.
비참한 예이긴 하지만, 이것은 자녀가 부모님을 거역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어떠한 비극을 맞이할 수 있는지 그 비극을 보여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인 우리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이 말씀 속에 자녀들이 부모님을 섬겨야 할 이유가 몇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1)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빌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효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보면, 소년 예수에서 청년 예수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했습니다.
원래 원어에 의하면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여 받드셨다. ”는 의미인데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의 권위 앞에 스스로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4절 이하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하셨던 말씀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정혼했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장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성경에서 일찍 사라졌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30세가 될 때까지 가족들을 부양하셨습니다. 성심성의껏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후부터 3년 동안 가정을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임종을 눈앞에 눈 순간에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양적인 개념으로 볼 때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말은 결코 가벼운 의미의 경칭이 아니라, 높고 귀한 지체의 사람을 향해 사용되던 존칭입니다. 고대 문서를 읽어보면 왕후에게 사용되던 존칭이 바로 이 단어였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한 첫 마디가 아랍어로 “구나이(Gunai)!” 다시 말하면 “여인이시여!”라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결코 부모님을 얕잡아 보며 부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 후, 또 다시 제자들을 향해 “보라. 네 어머니라. ”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의 한 제자가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살았습니다(요19:27).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효도의 본을 보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부모 공경의 모범을 보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단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은 본래 헬라어에서 나온 것이고, 끝에 붙어있는 "-ian"이라는 단어는 본래 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 “무엇 무엇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혹은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되었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 병사 하나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들은 포로로 잡혀 온 러시아 병사들의 팔에 ‘N’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자신의 팔에 ‘N’가 새겨진 것을 본 러시아 병사가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오. ” 그러자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가 “그 ‘N’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황제에게 속했다는 표시라네. ”라고 대답을 하자, 러시아 병사는 칼을 뽑아 자기의 팔을 잘라버렸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말을 내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한 주인인 있을 따름이오. 내게는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따름이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모습이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부모님을 공경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님 공경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그런데 이것이 왜 십계명 중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 중,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대신(對神)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대인(對人)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인(對人)계명의 첫 번째로 강조된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이 부모 공경의 계명은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대인계명에서도 볼 수 없는 축복이 보너스로 따라옵니다. 예를 들어 6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지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7계명의 ‘간음하지 말라’, 8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 9계명의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 10계명의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 등의 다른 대인계명에 축복이 보너스로 주어집니까 주어지지 않습니다. 5계명을 뺀 나머지 계명에서는 그저 'OO 하지 말라’는 말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5계명에서는 다릅니다.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복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은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사깃꾼이라는 이름처럼 야곱처럼 문제가 많은 조상도 드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소년 요셉은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있나 알아보라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형들을 찾아갔습니다만, 형들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잘됐다. 날 미워하는 자들, 더 이상 찾아 나설 필요가 있나”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형들을 찾을 수 없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겜 지방을 샅샅이 뒤지며 형들을 찾다가,
어느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가 형들의 행선지를 가르쳐 주어 도단까지 가서 아버지의 분부를 형들에게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철저하게 지켰던 요셉입니다. 또 창세기 47장 30절에 보면 애굽에서 나를 장사하지 말고 고향에 장사하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요셉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 이것이 평생 동안 요셉의 삶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원칙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셉의 부모님을 섬기는 이러한 삶의 자세가 그로 하여금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또한 모압 여인 롯을 보십시오. 룻은 남편을 잃고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연로한 시어머니를 뒤로 하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난 동서인 오르바와 달리,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분부를 받고 형들에게 전해 줄 떡보따리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아버지의 명을 지켰기 때문에 골리앗을 만날 수 있었고,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결국에는 사울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아버지인 모르드개의 말씀에 순종하여 교육을 잘 받고 한 나라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왕후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하는 양아버지인 모르드개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민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요셉, 룻, 다윗, 에스더는 하나같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민족을 구원하고 결국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공경을 명령하신 여호와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축복받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천국에서의 상급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잘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하신 형통한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본문 1절은 “자녀들아”라는 말로 시작되어 3절까지는 자녀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4절에서 내용이 바뀌어 집니다. “아비들아”라는 말로 시작되어 부모에게 주는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한 때는 자녀였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부모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 4장 1절은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라고 자기 자녀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장 3절로 내려가면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나도 내 어머니의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고 하면서 “나도 한 때는 아들이었다. ”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자녀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나도 부모가 되어 자녀를 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부모를 대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우리 자녀들에게 본보기로 남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부모님에게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 자녀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든 사물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 ” 예를 들어 모든 자녀들의 내심에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하는 그대로 자녀들이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좋은 것을 모방하게 되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쁜 것을 모방하게 됩니다. 부모가 게으르면 자녀들도 대체로 게으릅니다. 부모가 술을 좋아하면 자녀들도 쉽게 술을 마십니다. 부모가 도박을 좋아하면 자녀도 도박을 좋아하게 되고, 부모가 폭력을 휘두르면 그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 역시 폭력을 행사합니다. 부모가 욕을 잘하면 자녀들도 욕을 잘합니다. 부모가 남 얘기 잘하고 남의 흉을 잘 보면 자녀들도 남 얘기 잘하고 남의 흉을 잘 봅니다. 영어에 “Learn from Look(봄으로써 배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우리 자녀들의 행동이 결정됩니다.
옛날에 나이 들어 연로한 부모님을 아들이 지게에 태워 깊은 산속에 버리고 오는 고려장이라는 못된 관습이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어느 연로한 아버지를 한 아들이 산 속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함께 동행 했던 손주가 두고 온 지게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합니다. “얘야, 그 지게는 왜 지고 오니” 그러자 “아버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고 온 이 지게를 가지고, 나도 이 다음에 아버지를 지고 오려고 해요.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처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본을 보이느냐에 따라 우리 자녀들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면 오늘 당장 집으로 돌아갈 때에 꽃 한송이라도 드리면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또 이곳에 함께 계시지 않고 한국에 계신다면 부모님께 전화하셔서 안부를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오늘 말씀처럼 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의 어느 임금이 개성까지 행차를 하게 되자 길가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들어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보니 어떤 총각이 머리가 흰 늙은 어머니를 업고 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 하나를 불러 “여봐라, 저 청년이 늙은 어머니를 업고 나온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가 한번 알아보고 오너라!”고 분부했습니다. 그 사연을 알아본 신하가 임금님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상감마마, 저 노인네와 아들은 30여 리나 떨어진 어느 마을에 사는데, 어머니가 평생에 임금님이 타고 가는 가마라도 한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여,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저렇게 새벽부터 업고 와서 자세히 보려고 앞줄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 임금님은 “참 기특한지고. 여봐라, 저 젊은이에게 돈 100냥과 쌀 한 섬을 주어 노모를 봉양하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이 소문이 온 지방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한 동네에 불효자로 유명한 한 총각이 이 소문을 듣고 ‘아이고, 상 받기가 그렇게 쉬운 것 줄 몰랐네. ’하고 임금님이 오신다는 날 새벽에 늙은 어머니를 업고 임금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임금님의 가마가 지나 갈 때에 앞줄에 서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보니까 또 노모를 업고 있는 젊은이가 있어 사연을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연을 알아본 신하가 임금님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상감마마, 저 젊은이는 불효한 놈이라고 소문난 녀석인데, 지난번에 효자가 상 타는 것을 듣고 상이나 탈까하여 싫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저렇게 업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저 볼기나 몇 대 때려 보내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 그 때에 임금님은 웃으면서 “어제까지는 불효한 자식이라도 오늘은 효자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 그 또한 기특한 자가 아니냐 여봐라, 이 젊은이에게도 돈 100냥과 쌀 한 섬을 주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제까지는 부모님에게 불효했다 하더라도 오늘부터 부모님께 효행연습을 하면 기특한 일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다가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5월 둘째 주 주일을 어머니의 날로 공포하고,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날로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어머니의 날로 지켜 오다가 1974년에 ‘어버이 날’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도 함께 생각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나 관공서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5월 둘째 주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정하여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부모님 공경을 다시 한번 다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뉴스는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94년 말에는 박한상이라는 못된 아들이 한약상을 경영하는 부모님을 불로 태워 죽인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사람들을 경악케 만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96년 9월17일 전북 익산에서는 84세의 시어머니를 38세의 며느리 이정숙씨가 휘발유를 뿌린 후, 태워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99년 5월24일에는 24세의 대학생 이은석이라는 아들이 술을 마신 후, 옆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머리를 망치로 때려 살해하고 시신을 줄과 톱으로 10여 토막을 낸 뒤, 신문지와 비닐로 싸서 서울 명동, 서울대공원, 동작대교 주변 등지에 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99년 9월에는 재산문제로 다투다가 아버지를 마구 때려 갈비뼈 골절과 장파열로 숨지게 한 42세의 주모씨가 10개월 만에 범행이 밝혀져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지난 금요일 신문에 보니까 20대 딸이 술 취한 47세의 아버지의 가슴을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와 같이 요즈음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완전히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는 매우 심각합니다.
그래서 고부간의 갈등을 비유한 재미난 유머가 시중에 나돌고 있습니다. 어느 종가 집에 첫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시어머니는 초장부터 며느리의 기를 눌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타일렀습니다. “새아가, 나는 긴 말 하는 거 싫어한다. 손가락을 이렇게 까딱하면 오라는 신호니까 그리 알고 잽싸게 오너라. ” 그러자 새 며느리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어머니. 저도 긴 말하는 거 싫어해요. 제가 이렇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못 간다는 신호니 그리 아세요. ” 이래서 요즈음은 시집살이란 말보다 며느리 살이란 말이 더 실감나는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기저기, 이곳저곳에서 가정의 질서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예언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종말의 징조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1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고 있는 이방인들의 죄악 리스트가 나옵니다. 그 중 30절을 보면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모를 거역한 결과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름도 해괴망칙한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다윗과 이방인 공주 마아가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불효자 중에 불효자였습니다. 그는 누이인 다말을 욕보인 이복 형 암논을 죽이고 외가가 있는 그술에서 3년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예루살렘 궁에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악행은 이것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무엘하 16장 22절에 의하면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주에 백성들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을 자기 아내로 취하는 악행을 범하였습니다. 아버지 다윗으로 하여금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도망하게 하는 등, 아버지의 눈에서 피눈물을 나게 했습니다. 결국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그냥 놓아두겠습니까 그는 노새를 타고 가다가 그렇게 자랑하던 아름다운 긴 머리까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상수리나무에 머리털이 걸린 압살롬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보고 심장을 찌른 다음 난도질했습니다.
비참한 예이긴 하지만, 이것은 자녀가 부모님을 거역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어떠한 비극을 맞이할 수 있는지 그 비극을 보여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인 우리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이 말씀 속에 자녀들이 부모님을 섬겨야 할 이유가 몇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1)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빌2:6).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효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에 보면, 소년 예수에서 청년 예수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기록하면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했습니다.
원래 원어에 의하면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여 받드셨다. ”는 의미인데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의 권위 앞에 스스로 복종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15장 4절 이하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며 하셨던 말씀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정혼했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장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요셉의 이름이 성경에서 일찍 사라졌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30세가 될 때까지 가족들을 부양하셨습니다. 성심성의껏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한 후부터 3년 동안 가정을 돌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의무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임종을 눈앞에 눈 순간에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양적인 개념으로 볼 때 어떻게 어머니에게 “여자여”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말은 결코 가벼운 의미의 경칭이 아니라, 높고 귀한 지체의 사람을 향해 사용되던 존칭입니다. 고대 문서를 읽어보면 왕후에게 사용되던 존칭이 바로 이 단어였습니다. 유명한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한 첫 마디가 아랍어로 “구나이(Gunai)!” 다시 말하면 “여인이시여!”라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결코 부모님을 얕잡아 보며 부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 후, 또 다시 제자들을 향해 “보라. 네 어머니라. ”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의 한 제자가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살았습니다(요19:27).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효도의 본을 보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부모 공경의 모범을 보여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단어는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은 본래 헬라어에서 나온 것이고, 끝에 붙어있는 "-ian"이라는 단어는 본래 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 “무엇 무엇에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혹은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Christian)이 되었다면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러시아 병사 하나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에게 붙잡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들은 포로로 잡혀 온 러시아 병사들의 팔에 ‘N’자를 새겼다고 합니다. 영문도 모르는 채로 자신의 팔에 ‘N’가 새겨진 것을 본 러시아 병사가 물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오. ” 그러자 나폴레옹 군대의 병사가 “그 ‘N’는 네가 오늘부터 나폴레옹 황제에게 속했다는 표시라네. ”라고 대답을 하자, 러시아 병사는 칼을 뽑아 자기의 팔을 잘라버렸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기의 말을 내 던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한 주인인 있을 따름이오. 내게는 두 주인은 없소. 나는 오직 러시아 대제에게만 속해 있을 따름이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모습이 오늘 여러분들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부모님을 공경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님 공경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부모님을 공경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그런데 이것이 왜 십계명 중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말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 중,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대신(對神)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에 대한 대인(對人)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인(對人)계명의 첫 번째로 강조된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이 부모 공경의 계명은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대인계명에서도 볼 수 없는 축복이 보너스로 따라옵니다. 예를 들어 6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그러면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지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7계명의 ‘간음하지 말라’, 8계명의 ‘도적질하지 말라’ 9계명의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 ’ 10계명의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 등의 다른 대인계명에 축복이 보너스로 주어집니까 주어지지 않습니다. 5계명을 뺀 나머지 계명에서는 그저 'OO 하지 말라’는 말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5계명에서는 다릅니다.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복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은 훌륭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사깃꾼이라는 이름처럼 야곱처럼 문제가 많은 조상도 드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소년 요셉은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잘 있나 알아보라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형들을 찾아갔습니다만, 형들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잘됐다. 날 미워하는 자들, 더 이상 찾아 나설 필요가 있나”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세겜에 가보니 형들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형들을 찾을 수 없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겜 지방을 샅샅이 뒤지며 형들을 찾다가,
어느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가 형들의 행선지를 가르쳐 주어 도단까지 가서 아버지의 분부를 형들에게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은 철저하게 지켰던 요셉입니다. 또 창세기 47장 30절에 보면 애굽에서 나를 장사하지 말고 고향에 장사하라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요셉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 이것이 평생 동안 요셉의 삶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원칙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셉의 부모님을 섬기는 이러한 삶의 자세가 그로 하여금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또한 모압 여인 롯을 보십시오. 룻은 남편을 잃고 끝까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섬겼습니다. 연로한 시어머니를 뒤로 하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난 동서인 오르바와 달리,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분부를 받고 형들에게 전해 줄 떡보따리를 들고 전쟁터에 나갔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아버지의 명을 지켰기 때문에 골리앗을 만날 수 있었고,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결국에는 사울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아버지인 모르드개의 말씀에 순종하여 교육을 잘 받고 한 나라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왕후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하는 양아버지인 모르드개의 말씀에 순종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 민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요셉, 룻, 다윗, 에스더는 하나같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민족을 구원하고 결국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공경을 명령하신 여호와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축복받는 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천국에서의 상급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잘되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잘 공경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하신 형통한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본문 1절은 “자녀들아”라는 말로 시작되어 3절까지는 자녀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4절에서 내용이 바뀌어 집니다. “아비들아”라는 말로 시작되어 부모에게 주는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한 때는 자녀였던 사람들도 언젠가는 부모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 4장 1절은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라고 자기 자녀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장 3절로 내려가면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나도 내 어머니의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 ”고 하면서 “나도 한 때는 아들이었다. ”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나는 자녀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나도 부모가 되어 자녀를 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부모를 대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우리 자녀들에게 본보기로 남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부모님에게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우리 자녀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모든 사물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다. ” 예를 들어 모든 자녀들의 내심에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하는 그대로 자녀들이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좋은 것을 모방하게 되고, 나쁜 것을 보면 나쁜 것을 모방하게 됩니다. 부모가 게으르면 자녀들도 대체로 게으릅니다. 부모가 술을 좋아하면 자녀들도 쉽게 술을 마십니다. 부모가 도박을 좋아하면 자녀도 도박을 좋아하게 되고, 부모가 폭력을 휘두르면 그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 역시 폭력을 행사합니다. 부모가 욕을 잘하면 자녀들도 욕을 잘합니다. 부모가 남 얘기 잘하고 남의 흉을 잘 보면 자녀들도 남 얘기 잘하고 남의 흉을 잘 봅니다. 영어에 “Learn from Look(봄으로써 배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우리 자녀들의 행동이 결정됩니다.
옛날에 나이 들어 연로한 부모님을 아들이 지게에 태워 깊은 산속에 버리고 오는 고려장이라는 못된 관습이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어느 연로한 아버지를 한 아들이 산 속에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함께 동행 했던 손주가 두고 온 지게를 가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합니다. “얘야, 그 지게는 왜 지고 오니” 그러자 “아버지,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고 온 이 지게를 가지고, 나도 이 다음에 아버지를 지고 오려고 해요.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처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본을 보이느냐에 따라 우리 자녀들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 주님께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면 오늘 당장 집으로 돌아갈 때에 꽃 한송이라도 드리면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또 이곳에 함께 계시지 않고 한국에 계신다면 부모님께 전화하셔서 안부를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오늘 말씀처럼 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의 어느 임금이 개성까지 행차를 하게 되자 길가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들어 구경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보니 어떤 총각이 머리가 흰 늙은 어머니를 업고 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신하 하나를 불러 “여봐라, 저 청년이 늙은 어머니를 업고 나온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가 한번 알아보고 오너라!”고 분부했습니다. 그 사연을 알아본 신하가 임금님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상감마마, 저 노인네와 아들은 30여 리나 떨어진 어느 마을에 사는데, 어머니가 평생에 임금님이 타고 가는 가마라도 한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여,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저렇게 새벽부터 업고 와서 자세히 보려고 앞줄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 임금님은 “참 기특한지고. 여봐라, 저 젊은이에게 돈 100냥과 쌀 한 섬을 주어 노모를 봉양하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이 소문이 온 지방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한 동네에 불효자로 유명한 한 총각이 이 소문을 듣고 ‘아이고, 상 받기가 그렇게 쉬운 것 줄 몰랐네. ’하고 임금님이 오신다는 날 새벽에 늙은 어머니를 업고 임금님이 지나가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임금님의 가마가 지나 갈 때에 앞줄에 서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보니까 또 노모를 업고 있는 젊은이가 있어 사연을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사연을 알아본 신하가 임금님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상감마마, 저 젊은이는 불효한 놈이라고 소문난 녀석인데, 지난번에 효자가 상 타는 것을 듣고 상이나 탈까하여 싫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저렇게 업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저 볼기나 몇 대 때려 보내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 그 때에 임금님은 웃으면서 “어제까지는 불효한 자식이라도 오늘은 효자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 그 또한 기특한 자가 아니냐 여봐라, 이 젊은이에게도 돈 100냥과 쌀 한 섬을 주도록 하여라.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제까지는 부모님에게 불효했다 하더라도 오늘부터 부모님께 효행연습을 하면 기특한 일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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