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어버이] 부모를 공경하라

본문

나는 참 불효자다. 그런데 불효자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한다는 것이 참 송구하고 죄스럽다. 그래서 아마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강력하게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효자이기 때문에 변명하려는게 아니라,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효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발전시켜야 한다.
유교의 효와 기독교의 효는 같지 않다. 먼저 유교는 효를 절대화 시키지만, 기독교는 효를 절대화 시키지 않는다. 효를 절대화 시키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자녀가 항상 죄인으로 남게 된다. 아무리 효를 다해도 항상 부족하다. 부모가 천수를 누리고 죽더라도 자녀들은 죄수복을 입는다. 잘 모시지 못해서 일찍 돌아가시게 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효는 약속있는 첫 번째 계명일 뿐이다. 누구든 부모를 공경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상주신다.
다음으로 유교의 효는 부모님의 신상에 집중되어 있다. 잘 모셔야 한다. 기쁘게 해 드려야 하고, 잘 대접해 드리고, 늘 가까이 하며 지내는 것이 효도라 생각한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부모를 잘 모시는 것 가지고 다툼이 많다. 이렇게 모셔야 한다, 저렇게 모셔야 한다 하지만, 정작 부모님을 잘 모시기란 하늘에 별따기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효는 그렇지 않다. 간단하다. 부모의 신앙유산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는 것이 효도이다.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또 유교의 효는 사람을 옭아맨다. 기독교의 효는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자유를 준다. 보통 사람이 80-100년을 산다하면, 자식은 30안에 보기 때문에 장자와 함께 사는 기간은 50-70년이다. 부모는 자식을 기를 때 20-30년이 걸리는데,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기간이 30-50이다. 다행히 부모와 뜻이 잘 맞아서 사는데 갈등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서로 뜻이 맞지 않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자녀가 부모에게 억눌려 지낸다면 효는 족쇄가 된다.
놀라웁게도 어떤 설문조사에서 현재 자기의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보았더니, 70%정도의 학생들이 부모를 미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국 데이터이다. 왜 이러는가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부모와 자녀는 법적으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분가한다. 그래서 일년에 몇번씩 만나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또 헤어져서 산다.
또 유교의 효는 가장 큰 효를 입신양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효는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 받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유교적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면 효도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불효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아무튼 동양에는 효자가 많다. 왜냐면 효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서양에는 효자가 적다. 아니 그네들은 효자니, 불효자니 따지지 않는다. 왜 이토록 동양에는 효자가 많을까 효도를 강조하는 문화라서 그럴까 꼭 그런것만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육아방법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동양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를 키울 때 꼭 안아서 품안에서 기른다. 좀처럼 어린아이를 품에서 떼어놓지 않는다. 밤에 잠을 잘때도 어머니 옆에 뉘여 재운다. 막내둥이는 심지어 네살, 다섯 살때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다.
서양에서는 애초부터 아기를 재울때는 아기침대에서 재운다. 밤에 아무리 울어재껴도 부모는 아이에게 가지 않습니다. 젖도 시간에 맞추어 먹인다. 처음부터 엄격하게 자란다. 엄격해서 좋은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이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는 동양 아이가 훨씬 행복하다. 심리적으로도 동양적으로 길러진 아이가 훨씬 건강하다고 한다.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으로 키우기 때문에 아이에게 더없이 좋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동양에서는 효자가 속출하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상대적으로 많다. 왜냐면 사랑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사랑이 지나치기 때문에 손해보는 것들이 몇가지 있다.
 첫째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일인데, 남의 자식이 내 자식에게 못된짓을 하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런데 제 자식이 남에게 못된짓을 하면 그건 그럴수도 있는 일이 된다. 애들이기 때문에 치고박고 싸울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제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 귀한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식이 버릇이 점점 나빠져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부모는 자식에게 손찌검을 한다. 평상시 잘못을 뉘우칠 정도로 꾸준히 타이르면 좋지만, 버릇 잡는답시고 한꺼번에 너무 많이 혼내기 때문에 아이는 오늘은 재수가 없어서 매를 맞는다고 생각하지 자기가 무얼 잘못해서 그랬다고 생각지 않는다. 혹 자기가 잘못을 깨우쳐도 이미 잘못이 습관화 되었기 때문에 죄책감만 늘어난다. 아이가 충분히 반성하지 않았는데 또 와락 끌어 안고 사랑을 듬뿍 쏟아준다. 그러니 자연히 아이는 옳고 그름에 눈을 뜨기 보다는 부모와 어떻게 하면 관계를 정상화 하느냐에 눈을 뜨고, 어떻게하면 부모를 내가 원하는 식으로 움직일까에 눈을 뜬다.
다시 말해서 윤리 교육에서 실패한다. 아이는 객관적 가치관을 학습하지 않고, 그래서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게 한다. 초등학생이 되었는데도 또래집단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특히 이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대화가 통하지 않게 한다.
아이가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배운게 많아지고, 나름대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엄청난 사랑을 베푼 어머니는 사사건건 아이와 가치관에서 부딛히게 된다. 아이는 아이대로 제대로 윤리교육이나, 생활훈련이 되어있지 않은데다가, 학교생활이나 기타 사회생활은 그런 아이들을 호되게 다그친다. 조금만 늦어도 차를 놓치고, 시간을 놓친다. 그러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고 좌절을 경험한다.
부모는 모든 것이 용서되었지만, 학교는 그렇지 않다. 버스는 아이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회는 철저하게 약속대로 움직인다. 가정만 벗어나면 아이는 두려움에 싸이게 된다.
아이는 부모에게 밖에는 도망갈 곳이 없다. 그런데 부모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예전처럼 온화하지만은 않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아이들은 대격변을 격는다. 자기도 자기를 추스리지 못하고 열병을 앓는다. 부모는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나의 편이 되어주시기는 하지만, 나를 100% 이해하지는 못하신다. 초등학생까지는 아무런 생각없이 부모의 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아이의 생각이 커졌기 때문에 부모의 말 한마디에 가치관이 도전을 받으며 상식이 도전을 받고 자존심이 상하는가 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래서 반항하기도 하고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동양의 어머니들은 논리적으로 좀 밀린다는 느낌이 들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한탄조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이럴수가 있느냐...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자식들은 백기를 들고 다른 할 말을 잊어 버린다. 부모가 어떻게 자기를 키웠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결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 논리는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 이 순간 모든 자녀들은 불효자가 되고, 어머니는 모든 논리를 뛰어넘고 다시금 숭고한 어머니가 되어 버린다. 조심하라.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간다면 더 이상 자녀와 진지한 대화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너무 이상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함부로 해도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자식은 부모에게 조금만 잘못해도 천벌을 받을 죄인이 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 하신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식에게 부모가 받는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부모는 자식에게 입히운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양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질적으로도 사랑해야 한다.
부모가 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애를 낳고 사랑만 해 준다고 부모가 아니다. 부모가 되기 위해서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고 부모가 되면 부모와 아이 모두가 불행하다. 아이에게는 사랑만 필요한게 아니라, 양질의 양육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지나치게 부모에게 의존하게 한다. 소위 마마보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유교정신은 대를 잇는 장손을 중심으로 가정이 순위매겨진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아들사이는 강력하게 연결된다. 어머니의 품은 아들이 피할 수 있는 절대공간이다. 그 품으로만 가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아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들은 더 이상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서는 않된다. 왜냐면 그 품은 이제 학교가 되어야 하고, 친구가 되어야 하고, 지역사회가 되어야 하고, 진리가 되어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않된다. 왜냐면 어머니는 어머니이지 그 이상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친 사랑은 아이를 마마보이로 만든다.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 우리 자녀를 효자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복받고 잘되기 때문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자. 아이들이 스스로 효자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결코 그럴수 없다. 효자는 부모가 만든다. 너무 자식만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보더 더 큰 우상덩어리가 되어서는 않되지 않는가
이제부터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먼저 올바른 가정문화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 올바른 가정문화만이 가정을 살리고, 영혼을 살린다. 올바른 가정문화만이 진정한 행복과 안녕을 가정에게 제공한다.
부모공경의 뿌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에 있다. 그리고 그 계명은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경을 의미할 뿐임도 명심해야 한다. 자식사랑이나 부모사랑은 여호와 하나님 사랑보다 더 밑에 있다. 그리고 부부사랑보다 더 밑에 있다.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순서를 잊어버리는 순간 가정은 혼돈을 경험하며 불행해진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