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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자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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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머니날이며, 어버이 주간입니다. 지난 주일이 어린이 날이면서 어린이 주일이듯이 캐나다에서는 어머니날로, 모국에서는 어버이 날로 정해 지키는 날입니다.
어느 누구인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며
어느 누구인들 부모님께 감사가 없겠습니까만,
이렇게 특별히 날을정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버이날을 정한것은
마음의 감사를 현실의 외적 표현으로 재조명하자는 뜻이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외적표현이 없는 감사는
마음의 감사가 없는 겉치래 선물처럼 공허한 것에 불과한 것이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라는 복음성가처럼
열매가 없는 빈수래처럼 소리만 요란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말로만 하는 사랑이나 존경이나 감사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그 모자람을 다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성도된 자녀들의 부모관은 어떻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고명하신 스승님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중 한 제자를 보니 늘 찌푸리고,
불평하며, 조그만 일에도 남을 탓하면서 한시도 낯 펼날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스승이 이 제자를 불러
물 한컵에 소금 한 수푼을 둠뿍 담아 휘휘저어
"마시거라!" 주었습니다.
낯을 잔뜻 찌푸리며 소금물 한컵을 마신 제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맛이 어떠냐"
"굉장히 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넓은 호숫가로 제자를 데려가
수정같이 맑은 물위에 소금 한 수픈을 듬뿍담아 뿌리고 나서
그 물을 컵에 담아 제자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맛이 어떠냐"
제자가 대답합니다. "시원하고 물맛이 좋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조용히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소금은 같은 소금이로되 소금을 품는 물의 양에 따라 그 맛이 틀리느니라"
품는 우리의 가슴의 양에 따라 모든 세상의 맛이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소금이 소금 그자체로서는 물컵에 넣던, 호수물에 넣던
소금의 맛이 똑같은 것 같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자체는, 어떤 사람에게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수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에 따라
이 세상의 일들이, 그 일 자체로서의 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넓은 마음, 깊은 마음, 큰 마음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결심이나,
우리의 능력으로는 늘 한계가 있게 마련인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우리는 이와같은 인간의 한계를 넘을수가 있기에
성경은 늘 우리에게 "주안에" 있으라, 말씀하고 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주안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할 우리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게을리 해도 책임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안에"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자녀로,
아니 승리하는 자녀로 성령님께서 보증하시며, 승리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만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서 의로울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한 자에게서 나타나며
불의한 짓을 해서 불경건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불경건 해서 불의한 짓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면 불 경건해 지는 것이요,
불 경건하기에 계속해서 불의한 짓을 하게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위시한 6장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 나타나는 새로운 성도들의 영적 투쟁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주안에서" 란
하나의 추상적이요, 마음이나 생각의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즉 매일의 현장인 가정과, 직장과, 사회 각처에서
구체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자녀들에게 말씀하시는 부모에 대한 순종 역시 그 주제는
"주 안에서"입니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원리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현실을 돌아볼때에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성령충만"이라는 귀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잘못생각하고 잘못 응용하는 경향이 없지않나 생각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드렸듯이
성령충만이란 종종 술취한는 것으로 비교되어 설명합니다.
술이 지배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성령이 지배하는 것이 성도라는 말입니다.
저하고 싶은대로, 제 마음에 좋은대로 이 세상을 사는 가정을
술취한 가정이라 비유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며 천국을 알며 회개를 알아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아는 가정을 성령충만한 가정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나, 예배나, 말씀이나, 찬양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벅차며, 감격하고 기쁨이 넘칠 때
이것을 성령충만이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성령충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우리의 성령충만이 끝나고 만다면
밥짓기 좋게, 찌개 끓이기 좋게, 고기궂기 좋게 불만 피웠다가
아무것도 하지않고 불을 꺼 버리는것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뜨거워지고 벅차고 감격스러워 진다면
이 뜨겁고, 벅찬 감격을 오직 여호와 하나님 사람으로서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며, 참고 견디며, 사랑하며, 대접하며,
섬기는 곳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와같은
성령충만함이 깊어지는 신앙의 경지로 가기위해
우리에게 부모와 자녀관계를 주시고, 부부관계를 주시고, 상사와 직원관계
즉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인 대인관계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경건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남을 누르거나, 남을 밟고 앞서가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수준이나, 세상의 방법으로 살지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순종할 뿐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순종" 이란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 하는 경외함으로만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함으로 공경하라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첫째 공경받는 부모도, 순종하는 자녀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골로세서 3장 20절에 보면
"자녀들아 모든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다시 순종함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모에게 하는 "순종"이란
아래에서 경청한다/ 우러러 본다 라는 의미에서
부모의 권위를 존중함으로서 오는 순종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모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이에 순종함으로만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와의 화합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서 오는 "자녀의 순종"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연적인 실천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진리를 지켜 행하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의 권위라는 것은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위나, 재물의 높고 낮음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내리신 권위인 것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합니다.
이는 어느 부모님에게나 평등하게 부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인도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나, 경험에서 오는 손과발이 다 닳는 인도요,
자녀들은 이와같은 부모들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동물들 조차 본능적으로 어미동물이
독립해 혼자 살아갈수 있도록 새끼를 먹이며 훈련시키면
열심히 어미동물의 훈련에 따르는 동물들의 세계를 볼수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이에 더해 "피차 복종하라" 명하시는 것을 봅니다.
부모들에게도 해당되는 원리로서의 말씀입니다.
풀어 쓴다면 "부모들이여 자녀들의 말에 순종하라" 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자녀들을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하며, 가정에 평화를 가저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자녀들의 말에 순종한다함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듯이 "주 안에서" 이며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서 라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자녀들이란 부모의 부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부모에게 맡긴 것 뿐이요
자녀들의 소속은 엄연히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순종"이란
자녀들의 말을 자녀들의 입장에서 듣고 이해하라 하는 것이요,
어떻한 환경이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이것은 십계명중의 제오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여호와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를 신약적으로 재 해석한 것이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아래 우리 성도가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도란 율법의 저주와 굴래에서 자유함을 얻은 사람들이요
의와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매일 우리의 생활현장속에 실제적으로
나타나는것이요
부모를 공경하는 최선의, 최고의 것은 "순종"이라는 뜻입니다.
더욱 육신을 좇지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성도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성도에게서 이루어지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성도인 우리에게
"부모를 존경하라는 것이요" "사랑하라는 것이요" "돌보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는 사랑의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에 순종하는 것은
유교적 전통이나 인본주의적인 뿌리에서
인간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한다는 측면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본주의적인 바탕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본주의적인 순종은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종족과 전통에 따라 변화되어 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인 신본주의적 순종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치않는 말씀으로서의 순종인 것입니다.
네 번 째로 부모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중 제5계명에서도 "네게 준 땅에서 오래 살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약속은 가나안 땅에서 유대인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증거로 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날 믿는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에게는
순종함으로 얻는 두가지 복을 주셨으니
저들이 이 땅에서 잘되며 또한 이 땅에서 장수하는 약속의 복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젊어서 죽는다고 부모에 불순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한다면
그들이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죄에서, 위협이나 위험에서 자유함과 극복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제한된 이 땅의 삶뿐아니라 영원한 삶의 약속도 함께
받았습니다
부모에 순종하는 자녀들에게는
얼마동안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던
여호와 하나님의 충만한 복을 받아 누리며,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언제나 도적같이 오며
늘 우리의 문에 엎드려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에 순종하는 것을
"반드시", 그리고 "철저하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초달치 않는 부모는 자녀들의 죄를 방관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을 가르치는 일에 소홀하는 우를 범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슬픈 현실은 이와같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의 통로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8-30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어서 합당치 못한 일에대한 목록이 계속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찬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라"
악의 대표로 열거하는 목록안에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악한 정도가 아니라 대표요, 간판격인 것이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에 순종치 않는 것" 이란 말씀입니다.
자녀들이란, 아니 모든 인간이란
이기적이요, 욕심으로 뭉처진 죄인들이기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만이, 주안에서 지속적인 순종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충만치 못한 삶을 산다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를 살것이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2-5)
주 밖에 있는자들의 특징들입니다.
줄줄히 열거되는 악한 죄 가운데 "부모를 거역"하는 죄가 거듭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주안에 있는 우리는 이에 자유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이 모든 것들을 짊어진체 주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름니까
우리는 이와같은 것들이 "경건치 않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것들이 경건치 못한 것으로 인해 맺는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인도로 매일 매일 씻는 사람들이요,
이같은 일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다워지는 그일에 앞장선 사람들이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저녀다워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십자가를 지는 삶의 현장속에서 이와 같이 되기위해
온유해지는 자들이요, 겸손해 지는 자들이요 인내의 참음과,
사랑받고자 하는 대로 사랑하며,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대로 섬기는 자가 되는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형태나 행사나 사업으로서가 아니라
믿는자의 근본으로서 우리의 실생활에서 실천하는 원리로서입니다.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는 것이
세상의 수준에서 요구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수준에서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며
세상의 수준은 혼자의 힘이나 능력으로 그 요구에 응하여야 하나
여호와 하나님의 수준은 그 요구가 우리의 손에만 맏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도와, 함께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행하는 성도의 모든 일들은
이와같이 때로는 힘들고, 지치고, 어렵고, 낙심케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훌륭한 결과로 모든 성도들을 승리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는 것 같으나 이기는 것이요, 약한 것 같으나 강한 것이요,
죽는 것 같으나 오히려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서현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사는일이 힘들고, 지치고, 어렵고, 짜증나고, 막막하십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오히려 이 어려움이 복의 씨앗이요, 종자돈이 되는것입니다.
몇 년 남았습니까 곧 졸업할것이요, 곧 제대할 것이요, 곧 끝날것입니다.
지금의 고통이나 환란이나 아픔은
장차 우리에게 임할 여호와 하나님의 그 엄청난 복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믿는자의 기쁨이요, 승리의 환성입니다.
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주안에서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잘되고 이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받는 복의 통로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우리 모두 피차 복종함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다툼과 분쟁을 조장하는 사단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전쟁에서
순종함으로서 우리 모두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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