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당연하게 받아야 할 복
본문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잘 깨달아 그 마음으로 산다는 것인데,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님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만드셨다. 즉 부모라는 신분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을 심어 두신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녀를 바라보며 느끼는 그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19:3)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 경외"와 "부모 공경"은 언제나 같은 맥락 안에서 등장한다. (레19:3)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철저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훈련하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부모를 섬겨야함을 말한다.
무엇이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하는 대상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가정을 사랑한다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가정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하는 증거이다. 게으르고 일하지 않으면서 가정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대상의 기쁨을 위해 노력할 때 사랑이 증명된다. 부부가 서로의 기쁨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끊어진 것이다. 싸움도 그 노력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하는 부부보다는 무관심한 부부가 더 심각한 것이다. 사람은 뭔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싸움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언제나 더 깊은 사랑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노력과 성실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다. 사랑엔 일해도 땀흘려도 애써도 아무렇지 않은 힘이 있는 것이다. 밤을 새워도, 죽도록 일을 해도 끄덕 없는 힘이 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놀라운 엔돌핀을 만드는 것이다.
부모의 소망과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될텐데, 그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부모의 뜻은 어디에 가장 잘 나타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이름이었다.
우린 모두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부모에게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 이름들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뜻하는 것이 부모의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이 뜻하는 삶을 최대한 노력하며 사는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름이 "강부자"인데, 부자로 살려고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고 되는 대로 게으르게 거지같이 살고 있으면서 열심히 부모를 섬긴다고 해서 효도한다고 할 수 없다. 가난하게 살아서 자식만큼은 부자로 살기를 원해 부자라고 지었으면 성실하게 일해서 어떤 형태로든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효도이다.
성목이라는 이름은 거룩한 나무라는 뜻이다. 다솜이라는 뜻은 사랑이다. 그 뜻에 맞게 커야 효도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이름에 맞게 살고 있는가 그것은 부모의 뜻에 맞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언제나 부모의 꿈이고 소망이다. 그것은 애써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이다. 여러분의 좋은 이름에 이름 값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일년에 부모를 몇 번 찾아가지 못하고 특별하게 해드리는 것도 없다. 명절이나 생신에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늘 내 이름에 맞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다. 비록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해도 열심히 목회하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나름대로 효도하는 방법이고 부모의 자랑이 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름이 이루어지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는 것은 부모의 자랑이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랑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 때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삶이 된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통해서 복을 주시는 것을 본다. 자식이 없던 아브람에게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사래의 이름도 "왕비"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어주시면서 "열국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꿈을 주셨다.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웃을 일이었으나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꿈은 성취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아브라함과 사라의 순종이 있었던 것이다. 꿈을 주신 아버지, 소망을 주신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것을 통해 아버지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름이 주는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름에 합당하게 순종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이름은 박성실인데, 매일 백수건달로 지내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이름에는 성경에서 따온 이름도 많다. 성경의 인물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요한처럼 살라고 해서 요한이나 에스더 같은 이름을 주었는데, 술집에서 요한아 에스더야 요셉아 하면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긴급수배 폭력전과 3범 김 여호수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름대로 사는 것이 효도이고, 축복이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면 복 받는다고 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모공경과 효도는 한 가지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올바로 전수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서 서로 누려야 할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도록 하신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만 잘하면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대변되었고, 그것은 나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공부만 잘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학생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는 군 생활 잘하면 되었다. 뭘 특별하게 잘 하는 것 없어도 시키는 대로 일어나고 일하고 훈련받고 보초서면 되었다. 특별하게 생각해서 할 일도 없었고, 못하는 일을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저 명령에 복종해서 사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좋고 뛰어난데 매일 밖에 나가겠다고 탈영을 일삼으면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군대에서는 필요 없는 존재이다. 사격에 한발밖에 못 맞추었어도 돌아오는 구보에는 끝까지 참석해야지, 차 타고 가겠다고 우기면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다.
믿음의 가문에 유산은 믿음밖에는 없다. 그 믿음만 올바로 전수가 되면 그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가문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가문이 믿음이 올바로 서지 않고 전수되지 않으면 그 가문이 아무리 재물이 많고 똑똑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키는 가문이 될 수는 없다. 믿음의 가문이 믿음을 전수시키려고 하지 않고, 사라질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똑똑한 척은 다하지만 천국과는 관계없는, 구원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 믿음을 유산으로 내려주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수석 졸업한 친구가 책을 하나 냈다. "다니엘 학습법"이라고 하는 책인데,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할 이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를 이유를 깨닫게 되면, 바른 은혜를 받고 나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심어주면 그 믿음이 인생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자식이 할 일과 아비가 할 일에 대한 것을 함께 말하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고,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특이하다. 부모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이해되지만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흔하게 쓰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녀가 부모를 노엽게 한다고 생각하지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모와 자식이 해야 하는 일에는 둘 다 전제가 하나 붙어있는데, 그것이 주안에서 하라는 것이다. 주안에서 순종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것인데,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부모의 욕심대로 자녀를 다그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에 힘쓰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자녀도 무조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맺어지는 관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부모와 자식이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한 가문이 믿음으로 한 가계를 이루는 것이 복이다. 그래서 믿음 안에 갖게된 이름이 각 자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가문의 복인 것이다. 우리에겐 믿음의 가문을 통해서 갖게된 이름들이 있다. 그것이 "성도", "신자", "사명자"라는 이름들이다. 그 이름들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살 때 참된 인생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갖게된 이름에 부끄러우면 그 이름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이름에 충실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녀이면서 부모이다. 그리고 곧 아직 부모가 아니더라도 길지 않은 장래에 그렇게 될 사람들이다. 지금 설교를 자녀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고 부모의 입장에서 들을 수도 있는데, 자녀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어야 복이다.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고 공경이고 효인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복이다. 언제나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충실한 것은 가장만의 몫은 아니다. 아내도 자녀도 다같이 충실해야 한다. 자기 일에 충실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충실하지 못한 것을 통해서 마땅히 누릴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그것을 하지 못해 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가 받는 복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이 받는 복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약속의 복을 당연하게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부모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인자하심과 자비가 넘치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괴팍한 성격이 있고, 또한 병으로 인해 심한 병치레를 해야하는, 그 여생을 너무 힘들고 어렵게 봉양해야 하는 부모도 있다. 때로는 치매와 같은 기억력에 대한 문제가 있어서 가족 간에 심한 불화와 근심을 유발할 수 있는 상태에도 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한다는 것은 그들이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분들이 나의 부모,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지, 돈이 많거나 건강하다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자식인 것이다.
어느 수필가의 글에서 우리 엄마는 한번도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빨래하면서 우는 엄마를 보며 왜 우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해서 놀랬다고 한다. 엄마가 엄마를 기억하며 우는 것이고 우리는 그 엄마를 기억하고, 우리 아이들은 우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나를 싫어한다. 기회만 있으면 안고 뽀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그 녀석을 껴안고 뽀뽀하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안에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아무리 귀찮고 힘들고 어려워도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에는 때가 있다. 아무리 수 십 년을 부모를 수발하면 산다고 해도,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약속된 영원한 삶을 생각하면 몇 십 년이 아니라, 평생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곧 하고 싶어도 공경하고 싶어도 사랑하고 싶어도 그 분들은 없어지는 존재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생을 때를 잘 보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다. 마음껏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여러분 모두가 땅에서 부모를 공경함으로 잘되고 장수하기를 바란다. 부모님들의 깨끗하고 행복한 여생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하고, 부모들은 자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는 것을 위해 애써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를 보고 싶어하시는 것이고, 그 관계를 보실 때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장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님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만드셨다. 즉 부모라는 신분에 여호와 하나님의 신성을 심어 두신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녀를 바라보며 느끼는 그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19:3)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 경외"와 "부모 공경"은 언제나 같은 맥락 안에서 등장한다. (레19:3)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철저한 명령이기도 하지만, 하늘의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훈련하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부모를 섬겨야함을 말한다.
무엇이든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하는 대상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가정을 사랑한다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가정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하는 증거이다. 게으르고 일하지 않으면서 가정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대상의 기쁨을 위해 노력할 때 사랑이 증명된다. 부부가 서로의 기쁨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끊어진 것이다. 싸움도 그 노력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하는 부부보다는 무관심한 부부가 더 심각한 것이다. 사람은 뭔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싸움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언제나 더 깊은 사랑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노력과 성실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다. 사랑엔 일해도 땀흘려도 애써도 아무렇지 않은 힘이 있는 것이다. 밤을 새워도, 죽도록 일을 해도 끄덕 없는 힘이 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놀라운 엔돌핀을 만드는 것이다.
부모의 소망과 뜻대로 사는 것이 최고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될텐데, 그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부모의 뜻은 어디에 가장 잘 나타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이름이었다.
우린 모두가 이름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부모에게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 이름들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뜻하는 것이 부모의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이 뜻하는 삶을 최대한 노력하며 사는 것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름이 "강부자"인데, 부자로 살려고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고 되는 대로 게으르게 거지같이 살고 있으면서 열심히 부모를 섬긴다고 해서 효도한다고 할 수 없다. 가난하게 살아서 자식만큼은 부자로 살기를 원해 부자라고 지었으면 성실하게 일해서 어떤 형태로든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효도이다.
성목이라는 이름은 거룩한 나무라는 뜻이다. 다솜이라는 뜻은 사랑이다. 그 뜻에 맞게 커야 효도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이름에 맞게 살고 있는가 그것은 부모의 뜻에 맞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은 언제나 부모의 꿈이고 소망이다. 그것은 애써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이다. 여러분의 좋은 이름에 이름 값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일년에 부모를 몇 번 찾아가지 못하고 특별하게 해드리는 것도 없다. 명절이나 생신에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늘 내 이름에 맞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있다. 비록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해도 열심히 목회하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나름대로 효도하는 방법이고 부모의 자랑이 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름이 이루어지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는 것은 부모의 자랑이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랑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 때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삶이 된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통해서 복을 주시는 것을 본다. 자식이 없던 아브람에게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사래의 이름도 "왕비"라는 뜻의 "사라"로 바꾸어주시면서 "열국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꿈을 주셨다.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비웃을 일이었으나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꿈은 성취되었다. 그리고 거기엔 아브라함과 사라의 순종이 있었던 것이다. 꿈을 주신 아버지, 소망을 주신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따르는 것을 통해 아버지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름이 주는 원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름에 합당하게 순종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이름은 박성실인데, 매일 백수건달로 지내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이름에는 성경에서 따온 이름도 많다. 성경의 인물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요한처럼 살라고 해서 요한이나 에스더 같은 이름을 주었는데, 술집에서 요한아 에스더야 요셉아 하면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긴급수배 폭력전과 3범 김 여호수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름대로 사는 것이 효도이고, 축복이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면 복 받는다고 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모공경과 효도는 한 가지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올바로 전수되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서 서로 누려야 할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도록 하신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만 잘하면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대변되었고, 그것은 나를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 공부만 잘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학생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는 군 생활 잘하면 되었다. 뭘 특별하게 잘 하는 것 없어도 시키는 대로 일어나고 일하고 훈련받고 보초서면 되었다. 특별하게 생각해서 할 일도 없었고, 못하는 일을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저 명령에 복종해서 사는 것이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좋고 뛰어난데 매일 밖에 나가겠다고 탈영을 일삼으면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해도 군대에서는 필요 없는 존재이다. 사격에 한발밖에 못 맞추었어도 돌아오는 구보에는 끝까지 참석해야지, 차 타고 가겠다고 우기면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다.
믿음의 가문에 유산은 믿음밖에는 없다. 그 믿음만 올바로 전수가 되면 그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가문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가문이 믿음이 올바로 서지 않고 전수되지 않으면 그 가문이 아무리 재물이 많고 똑똑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키는 가문이 될 수는 없다. 믿음의 가문이 믿음을 전수시키려고 하지 않고, 사라질 것에 마음을 두는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똑똑한 척은 다하지만 천국과는 관계없는, 구원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 믿음을 유산으로 내려주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수석 졸업한 친구가 책을 하나 냈다. "다니엘 학습법"이라고 하는 책인데, 공부하라고 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부할 이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존재를 이유를 깨닫게 되면, 바른 은혜를 받고 나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심어주면 그 믿음이 인생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자식이 할 일과 아비가 할 일에 대한 것을 함께 말하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고,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 특이하다. 부모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이해되지만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흔하게 쓰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녀가 부모를 노엽게 한다고 생각하지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부모와 자식이 해야 하는 일에는 둘 다 전제가 하나 붙어있는데, 그것이 주안에서 하라는 것이다. 주안에서 순종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것인데,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부모의 욕심대로 자녀를 다그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에 힘쓰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자녀도 무조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주의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맺어지는 관계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부모와 자식이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한 가문이 믿음으로 한 가계를 이루는 것이 복이다. 그래서 믿음 안에 갖게된 이름이 각 자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가문의 복인 것이다. 우리에겐 믿음의 가문을 통해서 갖게된 이름들이 있다. 그것이 "성도", "신자", "사명자"라는 이름들이다. 그 이름들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살 때 참된 인생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갖게된 이름에 부끄러우면 그 이름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이름에 충실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자녀이면서 부모이다. 그리고 곧 아직 부모가 아니더라도 길지 않은 장래에 그렇게 될 사람들이다. 지금 설교를 자녀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고 부모의 입장에서 들을 수도 있는데, 자녀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어야 복이다.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 이루어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고 공경이고 효인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것이 복이다. 언제나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충실한 것은 가장만의 몫은 아니다. 아내도 자녀도 다같이 충실해야 한다. 자기 일에 충실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충실하지 못한 것을 통해서 마땅히 누릴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그것을 하지 못해 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가 받는 복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이 받는 복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약속의 복을 당연하게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부모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인자하심과 자비가 넘치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괴팍한 성격이 있고, 또한 병으로 인해 심한 병치레를 해야하는, 그 여생을 너무 힘들고 어렵게 봉양해야 하는 부모도 있다. 때로는 치매와 같은 기억력에 대한 문제가 있어서 가족 간에 심한 불화와 근심을 유발할 수 있는 상태에도 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한다는 것은 그들이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분들이 나의 부모,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라는 이유 때문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지, 돈이 많거나 건강하다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자식인 것이다.
어느 수필가의 글에서 우리 엄마는 한번도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빨래하면서 우는 엄마를 보며 왜 우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해서 놀랬다고 한다. 엄마가 엄마를 기억하며 우는 것이고 우리는 그 엄마를 기억하고, 우리 아이들은 우리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나를 싫어한다. 기회만 있으면 안고 뽀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그 녀석을 껴안고 뽀뽀하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안에 나는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아무리 귀찮고 힘들고 어려워도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에는 때가 있다. 아무리 수 십 년을 부모를 수발하면 산다고 해도,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약속된 영원한 삶을 생각하면 몇 십 년이 아니라, 평생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곧 하고 싶어도 공경하고 싶어도 사랑하고 싶어도 그 분들은 없어지는 존재들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생을 때를 잘 보는 것이 복이라고 하셨다. 마음껏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여러분 모두가 땅에서 부모를 공경함으로 잘되고 장수하기를 바란다. 부모님들의 깨끗하고 행복한 여생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하고, 부모들은 자손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는 것을 위해 애써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와의 관계를 보고 싶어하시는 것이고, 그 관계를 보실 때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장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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