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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어버이의 마음과 자식의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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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격언에 "자녀는 어려서 어머니의 젖을 빨지만 커서는 아버지의 젖을 빤다. "고 하였습니다. 이 격언에 대해서 1628년부터 1705년까지 살았던 격언 해석자인 '존 레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어려서는 어머니의 진액을 통해서 자라고 커서는 아버지의 진액을 통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자식들은 어려서 어머니의 진액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장한 후에는 아버지의 수고와 진액을 통해서 먹고 사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자식들은 부모의 희생적인 은혜의 혜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수 년전 동아대 병원에서 만성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는 28살짜리 아들 박성규에게 60여세 난 어머니 김귀남씨가 콩팥 하나를 아들에게 이식 시켜 준 사실을 보도한 바가 있습니다. 5시간이나 걸리는 수술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에 하나도 아픈 줄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수술을 담당하였던 김기현 교수는 "진한 가족애와 모정이 아들을 살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어머니는 신장 하나를 빼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성애, 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미술가였던 '벤자민 웨TM터'씨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무조건 용서가 있고, 어머니의 입술에는 무조건 자식에 대한 자랑과 찬양이 있고, 어머니의 가슴은 자식의 천국이며, 어머니의 무름은 자식의 최고의 교실이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머니 눈동자를 보면 그 어머니의 눈동자 속에는 용서가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잘못한 자식이라도 어머니는 용서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입술에는 무조건 자식에 대한 자랑과 찬양입니다. 또 어머니의 가슴은 자식의 천국입니다. 또 어머니의 무릎은 자식의 최고의 교실이지요. 그래서 벤자민 웨스터가 어릴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외출했을 때, 동생을 앉혀 놓고 초상화를 그린다고 법석을 떨다보니 동생의 옷은 물감으로 얼룩지게 하였고, 거실 바닥은 물감으로 더럽혀 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가 돌아오는 벨 소리가 났습니다. 웨스터는 어머니의 꾸지람을 걱정하고 이리저리 치운다는 것이 도리어 물감을 쏟아 더 더러워지고 말았습니다. 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는 아들이 그린 그림이 너무나 잘 그려진 것 때문에 지저분한 거실에 대해서는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고 그린 그림만 보고 감탄하며 물감으로 범벅된 아들을 껴안아 입맞춰 주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버이 심정이요, 마음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은 어버이의 마음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버이의 마음을 헤아려서 자식된 도리를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아야 될 것입니다.
 첫째로,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사무엘하 18::31-33을 보면 유다 제2대왕 다윗이 나이가 많았을 때입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은 여러 아들 중에 가장 잘 생긴 아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압살롬에게 왕위가 돌아 갈 것이라고 알고 있었고, 압살롬 자신도 자기가 왕위 계승자로 믿고 대단한 정치적 야심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위는 솔로몬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야심가였던 압살롬은 불평분자들과 야합을 하고 아버지께 반역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반역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의 군대와 전투에서 싸우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로서 반란군은 속속 체포되어 나라는 평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의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아들 압살롬! 내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 압살롬 내 아들아!" 그렇게 부르면서 대성통곡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반역한 아들이요, 아버지의 보위를 탐내어 반역한 아들이지만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어버이의 마음으로서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창세기 21장 11절에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두고 본처 사라가 자기 아들 이삭을 위해서 "집에서 내어 보내라"는 간곡한 요청에 아브라함은 그 이스마엘을 위하여 깊히 근심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 깊히 근심했다는 것은 살을 오려 내는 아픔을 말합니다. 비록 몸종의 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이라서 내어 보내려고 하니 살을 오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버이의 심정입니다. 역시 하갈도 자식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나서 브엘세바 사막에서 방황할 때 마실 물이 없어 갈증으로 아들 이스마엘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갈은 그 갈증 때문에 쓰러진 자식을 보고 방성 대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자신도 갈증에 견딜 수가 없지만은 먼저 쓰러진 자식 때문에 그 자식을 부여 앉고 눈물 흘리며 통곡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물을 얻게 하셨지만 어떻든 자식을 위한 어미의 심정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2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요셉 때문에 야곱이 근심에서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조차 애굽에 데려가려고 할 때는 기가 막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라. " 자식을 하나 잃는 것도 서러운데 또 하나 베냐민까지 데려간다고 하니 죽음보다 더 아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자식이 있을지라도 하나의 자식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어버이의 심정이 터져 나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아버지가 죽은 딸을 가져다 묻으려 하지 않고 죽은 딸을 살리려고 주님께 찾아가 간청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빨리 묻으려고 하지만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혹시나 살아 날까하여 빨리 묻지 못하고 가슴에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렇게 어버이의 심정은 자식에 대해 간절한 심정으로 나타나고 있거늘 오늘 자식들이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줄 자가 얼마나 되는가 말입니다. 얼마나 자식들이 냉정한지, 이럴 때 우리가 자식의 도리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자식의 도리입니다.
어버이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이라면 그 자식된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식들은 스스로 잘 된 것 같이 생각하고 부모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3절에 "아비가 없으면 외로운 자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식일지라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려 유신 길재 선생이 여덟 살 때, 그의 아버지 길원진(吉元進) 선생이 보성에서 말단 벼슬살이를 하기 위해 떠날 때였습니다. 미관 말직의 박봉이라 이 아들을 외가에 맡겨 놓고 떠났습니다. 길재가 하루는 시냇가에 놀다가 가재 한 마리를 잡아 놓고서 어머니를 그리워 '가재시'를 한 수 지어 부르며 그 가재를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 잃었느냐! 나도 어미 잃었노라! 너 구어 먹을 내 알건마는 어머니 이별 날 같기로 너를 놓아 보내노라" 이렇게 부모 없는 자식은 고아에 불과 하다는 것이지요. 부모가 없으면 자식은 고아입니다.
엡 6:1-3에 보면 부모에게 자식된 도리가 나와 있습니다. ① 순종의 도리입니다. 6장 1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어떤 자식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소를 지붕 위에 몰아 올리라"고 하자 오르지 못하는 소이지만 사닥다리를 놓고 "소야, 지붕으로 올라가거라. 지붕으로 올라가거라. " 하면서 소 궁둥이를 툭툭 치며 애를 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부모에 대한 자식의 순종의 덕이라고 이상재 선생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이런 순종의 덕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이상재 선생이 길을 지나다 보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람이 늙은 여인으로부터 길가에서 아랫도리에 회초리를 맞고 있었습니다. 한 참 만에야 분이 풀린 늙은 여자는 집 대문을 열고 획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회초리를 맞은 그 중년 신사는 주저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 때 이상재 선생이 옆에 가서 "어찌된 일이요"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희끗희끗한 중년의 사람은 "내가 어머님의 말씀을 어긴 것 때문에 사람들 보는데서 회초리를 맞았습니다. " 내가 어머니의 말씀을 어긴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제가 회초리를 맞았습니다. 그러자 이상재 선생이 "억울하지 않소" 물었더니 하는 말이 "억울하기는요. 이제부터 어머니의 말씀을 일 점 일 획도 어기지 않으려고 결심합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이것이 한국의 자식된 도리라고 이상재 선생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상재 선생은 기독교 청년들을 보면 "청년들이여, 여러분의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청년들이여, 여러분의 부모를 순종하십시오. 청년들이여, 여러분의 부모님을 헤아리십시오. "
청년들에게 효에 대한 교훈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은 수많은 수양의 제사보다 낳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잘해드리고, 좋은 옷을 입혀 드리고, 좋은 음식을 해드리고, 손에 손마디마다 금가락지를 끼워드린다 한들 순종하지 않는 자식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에베소서 6장 1절에 "순종은 가장 옳은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토록 옳은 도리를 오늘 우리 젊은이들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② 공경의 도리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 공경은 '높이 앉게 한다', '요구를 채워드린다'는 뜻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었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오시면 내 자리를 비워서 어머니를 앉게 하고 내 자리를 비워서 아버지를 앉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공경입니다. 솔로몬은 임금이 된 후에도 그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왜 어머니의 설움을 몰랐겠습니까 밧세바와 더불어 다윗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도 왜 솔로몬이 몰랐겠습니까 그렇지만 자신이 임금이 되고 나니 내 보위에 앉아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 구하시옵소서,
어머니여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다 해드리리이다. " 이것이 솔로몬의 효였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훌륭한 자리에 앉는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자리만큼 좋을 수 없고 높을 수 없습니다. 자식이 대통령이 된다 할지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앉은 자리보다 높을 수 없는 것이요, 자기가 총리가 된다 한들 아버지, 어머니의 자리보다 높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도 애굽의 총리에 있으면서도 아버지 야곱에게 총리처럼 모시고 그 앞에 절했던 것이 창세기 46장에 나옵니다. 자기가 애굽 제국에 총리가 되었지만 내 아버지가 앉은 자리보다 높을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총리의 자리에 내려와서 아버지를 앉게 하고 그 아버지 앞에 자기가 절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공경입니다. 부모는 작은 방으로 밀어내 버리고 자기들은 큰방에 앉아서 소리치고 앉아 있습니다. 아무리 큰방을 잘 꾸며놓고 앉아 있은들 부모가 앉아 있는 작은 방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이지요. 왜 부모를 밀쳐버립니까 황새는 어미 새가 늙어 날아다닐 수 없으면 새끼들이 고기를 물어다가 어미 새에게 바친다고 합니다. 미물에 처한 이 어미 새도 늙어지면 새끼 새들이 와서 고기를 물어다가 바치고 있거늘 양로원에 가면 자식들은 든든하게 살고 있는데 부모들은 양로원에 갖다 놓았습니다. 자식이 그리워서 양로원 방안에 쭈그려 앉아서 하므나 하므나 내 자식이 나를 데리려 올까봐 내 자식이 찾아 올까봐 기다리는 어머니들이 그 곳에서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불효 스러울 수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어버이 주일이 왜 있습니까 다시 자식의 도리를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잘못한다 할지라도 그 부모를 박대해서 되겠습니까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면 그것이 잘 되는 것이고 장수의 비결이라고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잘 되기를 바라거든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효의 도리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어버이 심정을 진정으로 알아주십시오. 내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그래서 자식된 도리로서 순종과 공경의 효도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시고,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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