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본문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한 설문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내용에 의하면 오늘날 자녀들이 생각하는 '효'의 개념과 부모들이 바라는 '효'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생각하는 효는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린다'든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린다'라든가, 혹은 홀로 된 분에게 '재혼을 권한다'는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원하는 효의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 줄 것'을 첫 번째로 꼽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요함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실추되어진 부모로서의 권위를 되찾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오늘날 부모님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일까요 무엇보다 자녀들이 나이 드신 부모님을 겉으로는 공경하는 듯 하나 매사에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진 한 글을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각색을 해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나물을 캐서 시장에 내다 파는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원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이렇게 세 식구가 살았는데 막노동을 하시던 중에 어머님이 철근더미에 깔리실 뻔 한 것을 아버지가 구하려 뛰어들었다가 아버지는 그만 철근에 깔려 숨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다쳐서 그 이후로 항상 절뚝거리며 다녔습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더구나 나물을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이 지긋 지긋했습니다. 하교 길에 시장을 거쳐서 오려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물 사 가지고 가라'고 사정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못 마땅하고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멀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먼 거리로 돌아다녔습니다. 아들은 가난이 싫어서,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이 싫어서 하루빨리 그곳을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적어도 부자라고 거들먹거리는 부자집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어머님이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학교에 찾아왔습니다. 나물 한 봉지를 들고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이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민석! 너네 엄마 병신이었어' 평소에 잘난척 하던 부자집 아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주변의 친구들이 돌아서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끽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가정의 자녀라는 사실이 창피했고, 그런 어머니가 창피했고, 그런 자신이 창피했습니다.
화가 난 아들이 그만 친구에게 주먹질을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병신되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팼습니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서 어머님이 연신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조금 전에 자기에게 두들겨 맞았던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애비없는 자식은 다 이런건가요" "못 배우고 없는 티를 내는 거예요 뭐예요" "자식 교육 제발 똑 바로 시켜요" "엄마라는 사람이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어머니는 시종일관 사과만 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다시는 학교에 오지마,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 너무 창피해 그러니까 다시는 오지마" "그래 미안하구나 엄마는 그저 민석이가 걱정이 되어서…" 아들은 한마디 더 했습니다. "차라리 난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수업료라며 아들의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너무도 꼬깃꼬깃한 돈이었습니다. 평소 어머니에게서 나던 나물냄새가 그 돈에서 났습니다. 아들은 그것도 싫었습니다. 하교길에 시장바닥에 버려져 있는 배추 씨레기를 줍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과 마주치게 될까봐 다시 먼길로 돌아갔습니다. 저녁에 예상했던대로 '배추 씨레기국'이 상에 올려졌습니다. 아들은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내가 거지야" 어머니의 가슴에 또 한번 상처를 안긴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열심히 공부한 덕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부자집 딸과 결혼을 해서 병원도 차리고 그토록 원했던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함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은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매달 생활비를 넉넉하게 붙혀 드리긴 했지만 어머니를 찾아뵌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퇴근길에 집 앞에서 한 노인과 가정부 아줌마가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 같고 가정부 아줌마는 '그런 사람없다'며 밀쳤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너무도 야윈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을 발견한 노인은 기쁜 표정을 짓고 절뚝거리며 자기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민석아!' 아들은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최영호입니다". 이 한마디를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들은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후 한달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아들은 어머니가 계신 시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나물을 사러 온 한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도 없으신 모양이죠"
"아니 우리 아들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의 의사인데 자꾸만 나더러 같이 서울에 올라와서 살자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지 그러고 보면 우리 아들 효자여 효자" 자식자랑에 열을 올리며 나물을 사러온 아주머니에게 '오늘 기분 좋다' 하시며 한 웅큼의 나물을 더 쥐어주셨습니다. 아들은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에 가보았습니다. 자기가 살 때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매달 보내드리는 돈으로 무얼 하시길래 아직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시는거야"하면서 돈 봉투를 안방에 던져놓고 나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이 지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아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달려갔을 때 선생님께서 어머니가 남긴 유물이라며 평소 어머니가 늘 가지고 다니시던 나물 보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풀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 두신 돈이란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에게 차마 들려주지 못한 얘기를 나에게 언젠가 하셨어"라면서 선생님께서 얘기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아주 어렸을 적에 쓰레기 통 옆에 버려져 있었는데 평소에 아이가 없어 애태우시던 아버지 어머니가 데리고 와서 키우게 되었고, 어린 아들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두 분이 평소에 일하시던 공사장에 데리고 나가셨다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아들을 보고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치시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리를 절룩거리며 시장에서 나물 파시던 어머니를 그토록 창피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한쪽 다리로 인해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아원에 데려주라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시고 친자식으로 기르셨던 어머니! 자기의 목숨보다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셨기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물을 팔아가며 그렇게 키우신 어머니! 그제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는 슬프고도 진한 감동을 주는 짧막한 내용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버이날 설문조사에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 달에 용돈을 얼마나 받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못 받으시는 분들도 더러 있고 주로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평균으로 따지면 10만원내외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를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분들의 용돈은 이보다 더 적을 것이다"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체면을 생각해서 부모님들이 실제로 용돈을 받는 것보다 올려서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옛말에 '부모는 열 자식을 섬길 수 있어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된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어버이주일에 다시 한번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십계명 중 사람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을 인용하시면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공경한다'는 말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부모님이 시키는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꼼짝하지 않고 시키는대로 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이 거역할 수 없는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부모님에게 어떤 성격적인 문제가 많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 때문에 자녀들에게 마음이 상처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부모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우리가 용서하고 말고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부모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우리가 공경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녀들을 부모라는 권위아래 두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권위아래 두셨듯이 자녀도 부모의 권위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본문은 이런 저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하는 부분은 '이것이 옳으니라'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 여기에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따지거나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안에서'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주로 생각하기를 '신앙적으로 일치하는 범위 안에서만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칫 예수를 믿지 않는 부모님은 순종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단순히 부모님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부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내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선 부모님을 통해 나를 제재하실 때가 많으므로 마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자세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부모님이 지시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럴 때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에도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선순위의 차이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일 때에는 불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거역하는데도 부모의 말씀이므로 순종하는 것은 부모님을 망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경우 다른 부분에 있어서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할 수 있는대로 부모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시도록 설득하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단순한 억지가 되지 않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2절과 3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약속있는 첫계명에는 유달리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줄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줄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오래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는 이 계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오면서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축복'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가나안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잘 공경하면 오래 오래 복을 받으면서 잘 살 수 있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질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질을 잘 죽여 성령께 복종하거나 진정으로 겸손한 자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할 축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세상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날마다 사모해야 합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은 완전히 헛되냐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그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까 '부모를 공경함으로서'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주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이 땅에서도 우리가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공경하고 계십니까 어버이 주일에 우리의 모습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느 책에 소개된 풍자시를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목은 '나이든 사람 지혜롭게 살기'입니다.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조심 조심 일러주고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록 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이기려 하지 마소 져 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돈,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 가졌다 해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
많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많이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말고 어디서나 늘 고마워하소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 돈을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 하오
옛 친구 만나면 술 한잔 사 주고 손주보면 용돈 한푼 줄 수 있어야 늘그막에 내 몸 돌보고 받들어 준다나…
우리끼리 말이지만 사실이라오
옛날 일들일랑 모두 잊고 잘난체 자랑일랑 하지 마소 우리의 시대는 다 지나갔으니 아무리 버티려고 애를 써봐도 이 몸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소
그대는 뜨는 해 나는 지는해 그런 마음으로 자내시구려
나의 자녀 나의 손자 그리고 이웃 누구에게든지 좋게 뵈는 늙은이로 살으시구려 멍청하면 안되오
아프면 안되어 늦었지만 바둑도 배우시구려 아무쪼록 오래 오래 살으시구려
이 글을 읽으면 많은 지혜를 주는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다 지나갔으니' '마음대로 되지를 않소'라든가 '어수록 하소' '져 주구려'라는 대목에서 인생의 서글픔 내지는 비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부모님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어버이 주일에 옳은 것을 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풍요함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실추되어진 부모로서의 권위를 되찾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오늘날 부모님들이 이런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일까요 무엇보다 자녀들이 나이 드신 부모님을 겉으로는 공경하는 듯 하나 매사에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진 한 글을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하겠습니다. 제가 조금 각색을 해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나물을 캐서 시장에 내다 파는 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원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이렇게 세 식구가 살았는데 막노동을 하시던 중에 어머님이 철근더미에 깔리실 뻔 한 것을 아버지가 구하려 뛰어들었다가 아버지는 그만 철근에 깔려 숨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다쳐서 그 이후로 항상 절뚝거리며 다녔습니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더구나 나물을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 근근히 살아가는 가난이 지긋 지긋했습니다. 하교 길에 시장을 거쳐서 오려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물 사 가지고 가라'고 사정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도 못 마땅하고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멀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먼 거리로 돌아다녔습니다. 아들은 가난이 싫어서,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이 싫어서 하루빨리 그곳을 탈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적어도 부자라고 거들먹거리는 부자집 자식들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어머님이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학교에 찾아왔습니다. 나물 한 봉지를 들고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친구들이 놀리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민석! 너네 엄마 병신이었어' 평소에 잘난척 하던 부자집 아들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주변의 친구들이 돌아서서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끽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가정의 자녀라는 사실이 창피했고, 그런 어머니가 창피했고, 그런 자신이 창피했습니다.
화가 난 아들이 그만 친구에게 주먹질을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병신되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팼습니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에서 어머님이 연신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조금 전에 자기에게 두들겨 맞았던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애비없는 자식은 다 이런건가요" "못 배우고 없는 티를 내는 거예요 뭐예요" "자식 교육 제발 똑 바로 시켜요" "엄마라는 사람이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어머니는 시종일관 사과만 하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다시는 학교에 오지마,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 너무 창피해 그러니까 다시는 오지마" "그래 미안하구나 엄마는 그저 민석이가 걱정이 되어서…" 아들은 한마디 더 했습니다. "차라리 난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어"
다음날 아침 어머니는 수업료라며 아들의 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너무도 꼬깃꼬깃한 돈이었습니다. 평소 어머니에게서 나던 나물냄새가 그 돈에서 났습니다. 아들은 그것도 싫었습니다. 하교길에 시장바닥에 버려져 있는 배추 씨레기를 줍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과 마주치게 될까봐 다시 먼길로 돌아갔습니다. 저녁에 예상했던대로 '배추 씨레기국'이 상에 올려졌습니다. 아들은 화를 내며 말합니다. "내가 거지야" 어머니의 가슴에 또 한번 상처를 안긴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들은 열심히 공부한 덕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부자집 딸과 결혼을 해서 병원도 차리고 그토록 원했던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함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은 잊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매달 생활비를 넉넉하게 붙혀 드리긴 했지만 어머니를 찾아뵌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퇴근길에 집 앞에서 한 노인과 가정부 아줌마가 다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노인은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 같고 가정부 아줌마는 '그런 사람없다'며 밀쳤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너무도 야윈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아들을 발견한 노인은 기쁜 표정을 짓고 절뚝거리며 자기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민석아!' 아들은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 사람을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최영호입니다". 이 한마디를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들은 집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후 한달 동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던 아들은 어머니가 계신 시장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곳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나물을 사러 온 한 아주머니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도 없으신 모양이죠"
"아니 우리 아들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의 의사인데 자꾸만 나더러 같이 서울에 올라와서 살자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지 그러고 보면 우리 아들 효자여 효자" 자식자랑에 열을 올리며 나물을 사러온 아주머니에게 '오늘 기분 좋다' 하시며 한 웅큼의 나물을 더 쥐어주셨습니다. 아들은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에 가보았습니다. 자기가 살 때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매달 보내드리는 돈으로 무얼 하시길래 아직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시는거야"하면서 돈 봉투를 안방에 던져놓고 나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년이 지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아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달려갔을 때 선생님께서 어머니가 남긴 유물이라며 평소 어머니가 늘 가지고 다니시던 나물 보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풀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 두신 돈이란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에게 차마 들려주지 못한 얘기를 나에게 언젠가 하셨어"라면서 선생님께서 얘기를 하셨습니다. 자기가 아주 어렸을 적에 쓰레기 통 옆에 버려져 있었는데 평소에 아이가 없어 애태우시던 아버지 어머니가 데리고 와서 키우게 되었고, 어린 아들을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두 분이 평소에 일하시던 공사장에 데리고 나가셨다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아들을 보고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시게 되었고 어머니는 다리를 다치시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리를 절룩거리며 시장에서 나물 파시던 어머니를 그토록 창피하게 생각했던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한쪽 다리로 인해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아원에 데려주라는 주위의 권유도 뿌리치시고 친자식으로 기르셨던 어머니! 자기의 목숨보다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기셨기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물을 팔아가며 그렇게 키우신 어머니! 그제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는 슬프고도 진한 감동을 주는 짧막한 내용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버이날 설문조사에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한 달에 용돈을 얼마나 받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못 받으시는 분들도 더러 있고 주로 5만원에서 10만원 정도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평균으로 따지면 10만원내외였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조사를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분들의 용돈은 이보다 더 적을 것이다"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의 체면을 생각해서 부모님들이 실제로 용돈을 받는 것보다 올려서 대답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옛말에 '부모는 열 자식을 섬길 수 있어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섬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된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어버이주일에 다시 한번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이제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십계명 중 사람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을 인용하시면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공경한다'는 말은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부모님이 시키는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꼼짝하지 않고 시키는대로 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이 거역할 수 없는 큰 권위를 가진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자녀들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부모님에게 어떤 성격적인 문제가 많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 때문에 자녀들에게 마음이 상처를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부모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우리가 용서하고 말고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부모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우리가 공경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녀들을 부모라는 권위아래 두었습니다.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권위아래 두셨듯이 자녀도 부모의 권위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본문은 이런 저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하는 부분은 '이것이 옳으니라'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 여기에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따지거나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안에서'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주로 생각하기를 '신앙적으로 일치하는 범위 안에서만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칫 예수를 믿지 않는 부모님은 순종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단순히 부모님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부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내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선 부모님을 통해 나를 제재하실 때가 많으므로 마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자세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부모님이 지시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럴 때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분명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때에도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선순위의 차이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일 때에는 불순종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거역하는데도 부모의 말씀이므로 순종하는 것은 부모님을 망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경우 다른 부분에 있어서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할 수 있는대로 부모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시도록 설득하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단순한 억지가 되지 않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2절과 3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약속있는 첫계명에는 유달리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줄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줄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얼마나 오래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부모를 공경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는 이 계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 오면서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축복'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가나안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잘 공경하면 오래 오래 복을 받으면서 잘 살 수 있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질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질을 잘 죽여 성령께 복종하거나 진정으로 겸손한 자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할 축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세상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날마다 사모해야 합니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삶은 완전히 헛되냐 그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어떻게 그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까 '부모를 공경함으로서'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주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이 땅에서도 우리가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을 공경하고 계십니까 어버이 주일에 우리의 모습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느 책에 소개된 풍자시를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목은 '나이든 사람 지혜롭게 살기'입니다.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조심 조심 일러주고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록 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이기려 하지 마소 져 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돈, 돈 욕심을 버리시구려 아무리 많은 돈 가졌다 해도 죽으면 가져갈 수 없는 것,
많은 돈 남겨 자식들 싸움하게 만들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많이 뿌려서 산더미 같은 덕을 쌓으시구려
언제나 감사함을 잊지 말고 어디서나 늘 고마워하소
그렇지만 그것은 겉 이야기 정말로 돈을 놓치지 말고 죽을 때까지 꼭 잡아야 하오
옛 친구 만나면 술 한잔 사 주고 손주보면 용돈 한푼 줄 수 있어야 늘그막에 내 몸 돌보고 받들어 준다나…
우리끼리 말이지만 사실이라오
옛날 일들일랑 모두 잊고 잘난체 자랑일랑 하지 마소 우리의 시대는 다 지나갔으니 아무리 버티려고 애를 써봐도 이 몸이 마음대로 되지를 않소
그대는 뜨는 해 나는 지는해 그런 마음으로 자내시구려
나의 자녀 나의 손자 그리고 이웃 누구에게든지 좋게 뵈는 늙은이로 살으시구려 멍청하면 안되오
아프면 안되어 늦었지만 바둑도 배우시구려 아무쪼록 오래 오래 살으시구려
이 글을 읽으면 많은 지혜를 주는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다 지나갔으니' '마음대로 되지를 않소'라든가 '어수록 하소' '져 주구려'라는 대목에서 인생의 서글픔 내지는 비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부모님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어버이 주일에 옳은 것을 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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