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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자녀들아 이것이 옳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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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이 지난 주 중에 있었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자녀들이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꽃을 달아드리거나 선물을 드리는 등 마음의 표시를 했을 것입니다. 추석 한가위에 쓰는 말이지만,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입장에서 보면, "모든 가정들이 어버이날만 같아라" 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참 좋겠어요. 자식도 늘 그 모습으로, 부모님도 언제나 그 모습이라면 가정이 곧 천국이 될 줄 믿습니다.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이 미국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져서 이젠 전 세계적으로 어버이날 하면 꽃을 달아드리는 것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느 교수님이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어버이날에 찾아뵙지를 못하니까 택배로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택배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비싼 꽃바구니는 왜 보냈느냐며 받기를 거절하여 전달을 하지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왜 꽃바구니를 안받으셨습니까"했더니 "쓸데없는 일에 헤푸게 돈쓰지 말라"며 오히려 책망이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전해 내려오는 홍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시를 좋아하는 어머니가 시장에서 가족 수 대로 홍시를 사가지고 와서 두개씩 나누어 주면 아이들이 게눈 감추듯 자기들에게 분배된 홍시를 먹어치우고서는 엄마의 홍시를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으면, 어머니는 "너희들 더 먹고 싶으냐"면서 그래. 이것 더 먹어라"하며 어머니의 몫까지 다시 나누어주면 겸연쩍게 "어머니는요"하고 물어보지요. "나는 원래 홍시를 안 좋아해..... "
때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나이가 들어서 할머니가 된 뒤에는 정말 홍시를 먹고 싶은데도 자식들끼리 둘러앉아 홍시를 먹으면서도 잡숴보시라는 말한마디 없는 것이 야속해서 "야, 나도 좀 다오" 용기를 내서 한마디 했더니 "어머니는 원래 홍시를 안좋아하셨잖아요"하더랍니다.
남편들이 선물을 사가지고 와서 제일 짜증날 때가 언제인줄 아십니까 아내가 선물을 받자마자 "이거 얼마짜리예요" 할때입니다. 그냥 고맙게 받으면 되는데 "비싸게 샀다면서, 어디가면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 이래서 분위기 다 망치는 거예요. 그래서 남편들은 선물을 잘 안사는 거예요. 기념일 마다 선물 사주지 않는다고 남편을 원망하기 이전에 선물할 때 기쁘게 받는 연습이 필요한줄로 생각됩니다.
"여보 ! 내가 지금까지 받은 선물 중에 오늘이 최고였다"라든지, "당신이 사다주는 선물은 언제나 내 맘에 꼭 든다든지.... " 늘 하는 얘기지만 이러한 표현은 부부의 삶에 윤기가 넘치게 해주는 윤활류 역할을 해 준답니다.
특별히 어버이날을 보내면서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경할 때는 공경도 받으시고 또 효도할 때는 효도도 기꺼이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시고 있는 내용입니다. 첫째는 자녀된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둘째는 부모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입니다.
먼저 우리는 1-3절까지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절에서는"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하였고, 2절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들이예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원했습니다.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너무나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잘 알려진 일이지만 실제적으로 이렇게 산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복잡하게 말씀드릴 것 없이 공경이라고 하는 것,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아버지 뜻대로, 아버지 원대로 하는 거예요.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 중에 굉장히 피곤한 가정이 많지요. 그것은 부모님 입장에서나 모시고 있는 자녀의 입장에서나 같은 이유입니다. 한 임상결과에 의하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젊은 부부들의 공통점이 대부분 두통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골치 아프다 는 말이예요.
추석이나 설날처럼 명절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다가오는 한 증세가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명절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건강하던 며느리가 명절만 다가오면 가슴이 뛰고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그 병은 명절만 지나면 깨끗하게 낫는 병입니다.
왜 그럴까 결국은 젊은 부부의 뜻대로 살면 부모의 머리가 아프고, 늙은 부모의 뜻대로 살면 젊은이들의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우리가 새롭게 적용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부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모시고 산다는 말이 거주지가 같아야 한다는 의미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합니다. 어느 가정들은 명절에만 겨우 부모님을 찾아뵙게 되니 그 마음이 참으로 괴로울 거예요.
부천에 계시니까 일주일에 한번은 해수탕에도 모시고 가고, 또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어머님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계신 모양입니다.
"나는 아들을 뒀는지 잘 모르겠어" 어머니가 가끔 그러시면 아버님께서 "당신은 40년이 넘도록 목회자의 아내로 있어 봤으면서도 목회하는 아들을 그렇게 찾아 아들 목사가 얼마나 바쁜지 알기나 하느냐"고 위로하신답니다.
요즘 들어서 한가지 깨닫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에는 부모님을 위해서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할 때, "어디에 추어탕 잘하는 집이 있으니까 거기서 잡수시지요"하면 "나는 오늘은 삼계탕 먹으면 좋겠다"고 하시지요. 그럴때면 으레 "아니, 추어탕이 좋다니까요" 하면서 그리로 모시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무 말씀 안하시고 잡수신 후, "야, 맛있게 먹었다" 하십니다. 결국 내 뜻대로 효도를 강요하는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깨닫기를 "아, 내가 너무 잘못하고 있었구나. 내 입장에서 효도를 강요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목욕탕을 가든지 식당을 가든지 철저하게 부모님 뜻대로 결정하기 시작했답니다.
부모님을 위해 시간을 내고, 돈을 쓰고, 정성을 쏟았지만 사실은 내 뜻대로였던 것이 이제야 철이 좀 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당신 뜻대로 하시기 원합니다" 공경의 첫 출발점은 바로 그거예요. 부모님 뜻대로,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녀들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는 순종의 원리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부모가 된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하라" 부모가 된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골로새서에 보면 "너희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라"고 했어요. 본문이 주는 헬라적 의미는 곧 일관성 없는 교육으로 자녀들을 분노하게 하지말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셨습니까 어릴 때 양육하는 기준이 다르고, 청소년 때 다르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말해놓고 실제로 상황이 바뀌어지면 저렇게 사는 모습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까 일관성 없는 부모님의 양육 태도 때문에 자녀들은 큰 고통을 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심리학자'매슬로'는 동물 실험을 통해서 일관성 없는 태도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흰 쥐를 큰 상자속에 넣어두고 오른쪽에서 먹이를 주다가 어느정도 시일이 경과한 다음에는 왼쪽에서 먹이를 주면서 반대편으로 가서 먹는 쥐는 때렸습니다. 혼비백산한 쥐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릴 즈음이면 또 먹이주는 방향을 바꾸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들로 부터 털이 빠지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은 죽어가는 쥐들이 생기기 까지 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일관성 없는 태도가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 앞에서 일관성 없는 삶의 기준을 가질 때, 자녀들이 말없이 따라온다고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심각한 병을 주는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양육한다면서, 실은 노엽게 하거나, 격노케 하는 일들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환경 따라, 형편 따라 우리의 기준이 너무나도 쉽게 바뀌지는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우리의 자녀들이 주 안에서 영육간에 건강하게 자라도록 기대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아비된 자들에게 기준을 주시기를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천지는 변하겠거니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자녀들을 양육하라"고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두 아들을 가진 아비의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주기를 요구하자 마음은 아프지만 강권하는 아들의 요구에 못이겨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먼 나라로 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근처에 있기 싫은 것이지요. 아버지의 영향력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허랑방탕 했다고 했어요. 많은 친구들이 생겼겠지만 그것은 진정한 친구일 수 없습니다.
돈이 떨어질 때 쯤 흉년까지 겹치자 어려움이 갑자기 커졌습니다. 가까이 했던 친구들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려울 때 찾아오라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찾아갔을땐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서 결국 선택된 나실인들이 가서는 안될 돼지 치는 곳까지 찾아갔지만 배를 채우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스로 둘째 아들이 뉘우치기를... " 그는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는 "내 아버지 집의 품꾼들은 풍족다"는 것과 둘째는 "내가 여호와 하나님 앞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받는 첫 걸음은 언제나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는 순간부터 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의 교훈만 듣고도 깨달았으면 참 좋겠는데 자식들은 빙빙 돌아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많은 돈을 없앤뒤에야 "이제야 내가 알았습니다" 하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목회를 하다보면, 말씀으로 가르칠 때 얼른 깨달으면 좋은데 빙빙 돌아서 불순종하며 많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눈물 콧물 흘리면서 두 손 들고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돌아오는 것만 해도 고맙지만 사실은 얼마나 속상한 일입니까
아들은 결심을 합니다. "아버지 집에 종으로 가야지.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풍족한데.. " 그러나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너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느냐 어디에 있었느냐 누구하고 있었느냐" 판사나 검사의 입장에서 아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으로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너는 여전히 내 아들임을 변함없이 확인하여 주신 거예요.
제일 좋은 옷으로 입혔습니다. 마치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듯이 말입니다. 손에 가락지도 끼워주었습니다. 너는 내게 있어서 이 전 재산을 상속받을 상속자라고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당시 종이나 노예들은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신을 신김으로서 "너는 여전히 종이 아니라 내 아들이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논리입니다. 이것만이 아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우리 부모님들이 자주하는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들을 평가하고 재단하고 심판하려고 그래요. 왜 자녀들이 내게서 멀어지는가 하는 원인을 생각하기 이전에, 멀어진 자녀들만 탓하니 더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실 자녀의 문제는 부모로 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의 모습은 또한 잘 위임해 줄줄 아는 부모인 줄로 믿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부모님 뜻대로... " 이런 자녀가 되어야 되겠고, 자녀로부터 전폭적인 순종을 받았을 때 지혜로운 부모같으면 그것을 자녀에게 돌려줄 줄 알아야 돼요. "너희들이 우리보다 잘하니 너희들 이 책임지고 하번 해보아라" 위임하는 것입니다.
김치 하나를 담궈도 "배추는 어느 시장에서 사와야 맛이 있다더라. 파는 어느 시장것이 좋고, 고춧가루는 어느 지방것이 좋고, 젓갈은 어느 수산시장이 싸다드라 등등.... " 이러면 어느 며느리인들 남아나겠습니까 머리가 터지잖아요. 오히려 "김치 어떻게 담글까요"하면 "네가 알아서 한번 담궈봐라. 난 나중에 간이나 볼게"
나중에 간 한번 보신것으로 시어머님은 당신이 김치 담그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뿌듯하시고, 며느리는 소신대로 김치를 담갔으니 보람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노인 시대입니다. 'K. D. I' 한국 개발원에서 발표한 것을 보면 65세 이상 되신 분들이 이제는 대단히 많아져서 이 사회를 고령화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의료나 보건 기술이 발달함으로서 점점 노인 인구가 증가한다는 분석입니다.
통계를 본면, 1960년도의 우리 나라의 평균 수명은 52. 4세였는데 약 40년이 지난 98년도의 평균 수명은 남자가 71. 3세, 여자가 77. 4세였습니다.
40년 만에 무려 20여년 정도의 수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K. D. I의 예측으로는 앞으로 10년 후인 2010년에는 인구의 13%인 약 600만명의 노인들이 살게된디고 말힙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칠순 잔치하는 분들이 적어지고 팔순 잔치 하는분들이 주류를 이룰것으로 예측됩니다. 맞는가 안맞는가는 10년만 더 살아보시면 될줄 믿습니다.
3000년을 이어 온 농경사회가 산업사회 되는데 300년이 걸렸고, 산업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바뀌는데 30년이 걸렸다면, 정보사회가 노인사회로, 미래 사회로 바뀌는데 10년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래쇼크"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이미 예견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회가 고령화 되고 노인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120년의 삶을 살도록 연한을 정해주셨는데, 이제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약속하신 것을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앞으로는 더 많은 시간을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자녀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면, 그 주어진 많은 시간을 어떻게 지혜로서 살아야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결론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자녀의 본을 보여 주셨듯이,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십자가 사건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부모님을 순종하면서 그분의 뜻대로 우리의 모든 삶을 맞추어갈 때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은 너무나도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어요. 부모 공경은 마땅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너무나 귀한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을 받은 우리 성도들마다, 가정마다 주의 뜻을 이루어 천국의 기쁨을 회복하는 화목한 계절을 이루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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