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부모 공경
본문
이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위기는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입니다. 가정의 위기는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개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의 혼돈 더 나아가서는 걷잡을 수 없이 매 순간마다 달라져 가는 변혁에 대처 할 능력이 부족하여 심각한 위기 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가정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값진 최상의 선물인데 이 가정이 가지고 있는 성경 본래의 의미는 이미 변질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어지러운 사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당하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정 안에는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식이 있는데 이 가정은 철저하게 가정의 윤리와 도덕과 예의와 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루라도 지탱되어질 수 없는 파괴된 모습을 드러내고 맙니다.
요즘 어른들은 효를 받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어느 사회학자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옛날에는 모든 지식이 부모로부터 왔다. 삶의 지혜와 기술의 습득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아야 살 수 있었다. 평생을 머슴살이해도 제 힘으로는 밭 몇 뙈기 사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와 신분도 부모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양반 자식은 양반 자식으로, 상인 자식은 상인 자식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옛날에는 효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즉, 부모가 절대적인 의존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당장 생활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부모에게서 쫓겨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사회와 학교에서 자신이 노력으로 얻기 때문에 옛날처럼 부모 덕 볼 일이 없고, 그래서 효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어떻습니까 집을 떠나야만 자유로울 것 같다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부모의 체면을 보아서 당분간 같이 살아 준다는 패역 한 자식마저 생기는 세상입니다. 요즘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곧잘 하시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더라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효도를 받는다. "
"받기보다 조금씩 주면서 살아야 자식도 나를 위한다. "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그런 효도라면 받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순수한 효의 개념, 그 자체가 타락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효라고 하는 것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혹 모성애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애는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어렸을 때에 그 어미를 따릅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한 모성애가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을 압니다. 고슴도치도 자기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물은 새끼 때 사랑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호랑이도 자기 새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물어 버립니다. 새끼도 자기 필요할 때에는 에미를 따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크면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동물입니다.
사람도 덜된 사람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 때는 그 아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조금 크면 으르렁댑니다. 부자지간에 만나면 싸웁니다. 그것은 동물과 같은 모습입니다. 결국 인간의 인간 됨이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이 옳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옳다', '당연하다', "It is right. " 즉 옳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 마땅한 일을 말합니다. 효는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입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효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선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인간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 주안에서, 신앙적 차원에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우리 자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 그 속에 깊은 사랑이 있고,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계명들입니다. 이제 이것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신앙적 순종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사랑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더욱 효도해야 합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1. 부모공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이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명령은 부모의 명령도 아니고 모세의 명령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제 5 계명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으로서는 첫 번째 계명이라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2에서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죽어 마땅할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고 계시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17절 말씀을 보면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된다는 불분명한 입장이 아니라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가혹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죽이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는데
신명기21:18-21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참으로 끔찍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를 타인이 아닌 부모의 손으로 멱살을 끌듯이 잡아다가 장로들에게 보이고 아뢰면 보고 듣는 성읍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여지없이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3. 부모에게 잘 못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행한 잘못과 동일하게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24:15-16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부모를 공경치 않는 불순종은 부모만을 거스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렸다는 의미의 죄가 성립된다는 점과 또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를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는 진리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부모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요 그 권위에 불순종이나 거역으로 도전하는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죄악으로 간주한다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불순종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가 되는 것이며 부모를 공경치 않는 불효는 죽음으로 밖에 다스릴 수 없는 중벌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는 참으로 높은 권위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 앞에는 세상 모든 권위가 굴복하도록 되어 있는데도 성경은 부모의 권위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는 점에서 자녀들이 그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며 공경함으로서 부모를 섬기며 또 그 일로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를 동시에 인정해 드리기를 요구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가정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이 가정의 원리와 원칙들을 무시해 버리고 시대의 조류에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떠 맡겨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구시대 발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흘러도 이 진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지켜져야 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둘째, 자녀들에게서 공경 받을 만한 신앙과 건덕의 행위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1. 부모가 자식 앞에서 부모 공경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욱박 질러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효는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효의 가르침은 몸소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려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나이든 노인 부모를 먹을 것과 함께 생매장하기 위해 지게로 짊어지고 산에 가서 내려놓고 돌아서려 할 때에 함께 간 어린 아들이 아버지 왜 지게까지 놔두고 가나요 이젠 지게는 필요 없지 않느냐 아니예요, 아버지가 나이든 노인이 되면 나도 이 지게로 아버지를 이곳까지 지고 와야 되니까 이 지게는 가지고 가요. 라고 했다는 옛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 때문에 고려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부모가 하는 대로 자식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부모가 요구해서 또 명령해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자식 앞에서 부모가 부모에게 본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게 되는 원리를 배우게 되는 것뿐입니다.
2. 부모가 참된 신앙을 자녀에게 심어주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일은 부모인 우리가 자식인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제도의 하나로서 자녀 된 자들을 향하여 명령하시는 것임을 신앙으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도 거역해서는 안되겠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자녀가 신앙을 통해서 깨우치면 부모 공경은 신앙적 차원에서 잘 되어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가와 히스기야 왕가의 자녀를 대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믿음 좋은 히스기야가 자식을 어떤 모습으로 길렀을까요 성경에는 히스기야가 아들 므낫세를 어떻게 길렀는가하는 문제는 기록하고 있지 않았지만 히스기야의 생애를 통해서 한 두가지 정도는 실제에 가깝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42세 때에 므낫세를 낳은 히스기야가 자식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했다는 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0:5-6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사력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부르짖어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39세였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42세에 아들 므낫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신앙이 식어지고 다시 교만한 왕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사는 가운데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므낫세는 12살이 되었고 히스기야는 54세로 열조의 품으로 돌아가 아버지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아버지의 시체가 무덤 속에서 부패하는 속도보다 더 무섭게 온갖 우상을 다 섬기며 부패된 길을 걸어갔습니다. 12살은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살 시절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 부모의 곁을 떠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대면하면서 공부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소년 목동 다윗을 연상해 보십시요. 그리고 12살 난 믿음의 자녀들에게 우상 앞에 절하라고 한번 해보십시요. 믿음이 있는 자녀들이 과연 절을 할까요. 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순종을 할까요. 결코 12살은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신앙적인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32:24-25을 보면 병고침 받고 난 히스기야의 영적상태는 교만해졌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믿음이 사라져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알맞은 상태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아들 솔로몬을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 임종의 순간에도 병상 머리맡에 앉혀놓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역대상28:9-10) 그런 아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했고 부모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하였던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자녀의 마음을 노엽게 하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본문은 아니지만 에베소서 6: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마음을 부모가 노엽게 하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할 마음보다는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명령했기 때문에 막연히 부모순종과 부모공경을 자녀에게서 기대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녀의 노여움을 사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권위를 손상시켜 자녀들로부터 공경 받지 못하는 요인을 부모인 우리가 제공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는 말씀과 같이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가장 큰 부모 공경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어른들은 말합니다. 경로 우대증은 격노 우대증이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웃고 넘기지 못할 풍자입니다. 더군다나 노인들은 지혜자라고 격찬하는 욥기12:12절의 말씀이 있는데 노인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노인들이 이야기하면 아예 구시대 발상적이고 구석기 시대 유물 같은 소리라고만 일축해버리고 마는 시대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모님들은 유교의 폐쇄적인 풍습 아래서 자란 환경적 요인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도 빨리 변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오신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풍조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아직도 자식들을 향해 옛 시대의 전통적인 효도관을 따라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젊은 자녀들은 그런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며 이를 따르거나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공경에 대한 문제는 비록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7:10-14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준수한다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부모 섬기는 문제로 책망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고르반 의식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고르반 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고르반 의식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해버린 제물이나 돈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줄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의식을 악용하여 노부모가 찾아와서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 이미 고르반 의식을 행해 버렸기 때문에 도와 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부모를 외면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르반 의식을 행한 제물과 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고르반 곧 여호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 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7:11-13) 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부모를 잘못 섬기는 기류를 막을 곳은 교회 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마저도 부모 섬기는 일들에 대한 교육과 신앙지도를 포기한지 오래되어 버렸습니다.
아예 세상이 그렇거니하면서 방관만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능력하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연약하게 신뢰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기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걱정이 앞서기 전에 젊은 목사의 한사람으로서 부모의 권위를 실추시켜 버린 잘못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부모공경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요한복음 19:26-27절을 보면 주님의 효도에 대한 지극한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요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노년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일찍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0세까지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3년간은 공생애의 기간으로 보내시므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늘 기억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활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임종을 앞두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제자들 가운데 요한을 불러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합니다. "어머니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또 "보라, 네 어머니라. "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효도의 내용 즉 부모공경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 요한은 제자 중에 가장 부요한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를 물질로만 섬기려 했던 일이 아니라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에게 부담을 덜 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혈육에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영혼구원에 대한 막중한 문제를 생각하고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때 혈육의 동생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믿지 못하고 육신의 형으로만 알고 있었던 때입니다.
세 번째으로는 마음으로 가장 큰 위안을 주려는 효도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이 그 마음을 가장 잘 압니다. 요한은 3년간 제자로서 훈련을 받으면서 누구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가장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그의 옆에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 서운한 말을 한다든지 섭섭해하시면 예수님의 입장을 잘 이야기해 드리므로 가장 친근한 위로를 해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지녀야 할 자격입니다. (레19:3)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부모가 나를 낳아준 은공에 보답하기 전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 부모공경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엡6:1-3)
그러므로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치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부모를 공경하는 책임을 잃어버린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질서와 가정 윤리를 이미 파괴시키고 있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가정이요 이미 행복을 잃어 버려가고 있는 가정인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자녀들 위에 부모 공경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공경을 통해 얻게 되는 땅에서 잘되는 일과 장수의 축복이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가정이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값진 최상의 선물인데 이 가정이 가지고 있는 성경 본래의 의미는 이미 변질되어졌을 뿐만 아니라 어지러운 사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당하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정 안에는 혈연관계의 부모와 자식이 있는데 이 가정은 철저하게 가정의 윤리와 도덕과 예의와 범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루라도 지탱되어질 수 없는 파괴된 모습을 드러내고 맙니다.
요즘 어른들은 효를 받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어느 사회학자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옛날에는 모든 지식이 부모로부터 왔다. 삶의 지혜와 기술의 습득도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다. 그리고 옛날에는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아야 살 수 있었다. 평생을 머슴살이해도 제 힘으로는 밭 몇 뙈기 사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와 신분도 부모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양반 자식은 양반 자식으로, 상인 자식은 상인 자식으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으니 옛날에는 효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즉, 부모가 절대적인 의존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당장 생활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부모에게서 쫓겨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사회와 학교에서 자신이 노력으로 얻기 때문에 옛날처럼 부모 덕 볼 일이 없고, 그래서 효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어떻습니까 집을 떠나야만 자유로울 것 같다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부모의 체면을 보아서 당분간 같이 살아 준다는 패역 한 자식마저 생기는 세상입니다. 요즘 나이 많은 어른들이 곧잘 하시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더라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효도를 받는다. "
"받기보다 조금씩 주면서 살아야 자식도 나를 위한다. "
이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그런 효도라면 받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순수한 효의 개념, 그 자체가 타락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개념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효라고 하는 것이 있을 곳이 없습니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간혹 모성애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도 모성애는 있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어렸을 때에 그 어미를 따릅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한 모성애가 동물의 세계에 있는 것을 압니다. 고슴도치도 자기새끼는 사랑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물은 새끼 때 사랑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호랑이도 자기 새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물어 버립니다. 새끼도 자기 필요할 때에는 에미를 따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크면 떠나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동물입니다.
사람도 덜된 사람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 때는 그 아이를 극진히 사랑합니다. 조금 크면 으르렁댑니다. 부자지간에 만나면 싸웁니다. 그것은 동물과 같은 모습입니다. 결국 인간의 인간 됨이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모를 공경하고, 또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이 더 깊이 사랑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이 옳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옳다', '당연하다', "It is right. " 즉 옳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 마땅한 일을 말합니다. 효는 선행도 공로도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일뿐입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효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선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인간이 못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르칩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 " 주안에서, 신앙적 차원에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우리 자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 그 속에 깊은 사랑이 있고, 약속이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계명들입니다. 이제 이것을 믿고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신앙적 순종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사랑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더욱 효도해야 합니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1. 부모공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명령이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명령은 부모의 명령도 아니고 모세의 명령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제 5 계명이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계명으로서는 첫 번째 계명이라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6:2에서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는 죽어 마땅할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고 계시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1:17절 말씀을 보면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된다는 불분명한 입장이 아니라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가혹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죽이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는데
신명기21:18-21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참으로 끔찍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녀를 타인이 아닌 부모의 손으로 멱살을 끌듯이 잡아다가 장로들에게 보이고 아뢰면 보고 듣는 성읍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여지없이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3. 부모에게 잘 못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행한 잘못과 동일하게 다스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24:15-16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부모를 공경치 않는 불순종은 부모만을 거스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렸다는 의미의 죄가 성립된다는 점과 또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를 동일선상에 두고 있다는 진리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부모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요 그 권위에 불순종이나 거역으로 도전하는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죄악으로 간주한다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불순종하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가 되는 것이며 부모를 공경치 않는 불효는 죽음으로 밖에 다스릴 수 없는 중벌이 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는 참으로 높은 권위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 앞에는 세상 모든 권위가 굴복하도록 되어 있는데도 성경은 부모의 권위를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는 점에서 자녀들이 그 앞에 굴복하고 순종하며 공경함으로서 부모를 섬기며 또 그 일로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를 동시에 인정해 드리기를 요구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가정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이 가정의 원리와 원칙들을 무시해 버리고 시대의 조류에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떠 맡겨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구시대 발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흘러도 이 진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지켜져야 할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둘째, 자녀들에게서 공경 받을 만한 신앙과 건덕의 행위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1. 부모가 자식 앞에서 부모 공경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공경은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 욱박 질러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효는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효의 가르침은 몸소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려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나이든 노인 부모를 먹을 것과 함께 생매장하기 위해 지게로 짊어지고 산에 가서 내려놓고 돌아서려 할 때에 함께 간 어린 아들이 아버지 왜 지게까지 놔두고 가나요 이젠 지게는 필요 없지 않느냐 아니예요, 아버지가 나이든 노인이 되면 나도 이 지게로 아버지를 이곳까지 지고 와야 되니까 이 지게는 가지고 가요. 라고 했다는 옛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린이 때문에 고려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부모가 하는 대로 자식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부모가 요구해서 또 명령해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자식 앞에서 부모가 부모에게 본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게 되는 원리를 배우게 되는 것뿐입니다.
2. 부모가 참된 신앙을 자녀에게 심어주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일은 부모인 우리가 자식인 너희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제도의 하나로서 자녀 된 자들을 향하여 명령하시는 것임을 신앙으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도 거역해서는 안되겠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자녀가 신앙을 통해서 깨우치면 부모 공경은 신앙적 차원에서 잘 되어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가와 히스기야 왕가의 자녀를 대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믿음 좋은 히스기야가 자식을 어떤 모습으로 길렀을까요 성경에는 히스기야가 아들 므낫세를 어떻게 길렀는가하는 문제는 기록하고 있지 않았지만 히스기야의 생애를 통해서 한 두가지 정도는 실제에 가깝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42세 때에 므낫세를 낳은 히스기야가 자식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했다는 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20:5-6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사력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부르짖어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39세였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난 42세에 아들 므낫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신앙이 식어지고 다시 교만한 왕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사는 가운데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므낫세는 12살이 되었고 히스기야는 54세로 열조의 품으로 돌아가 아버지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아버지의 시체가 무덤 속에서 부패하는 속도보다 더 무섭게 온갖 우상을 다 섬기며 부패된 길을 걸어갔습니다. 12살은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살 시절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믿음을 키우기 위해 부모의 곁을 떠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대면하면서 공부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소년 목동 다윗을 연상해 보십시요. 그리고 12살 난 믿음의 자녀들에게 우상 앞에 절하라고 한번 해보십시요. 믿음이 있는 자녀들이 과연 절을 할까요. 그리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순종을 할까요. 결코 12살은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신앙적인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32:24-25을 보면 병고침 받고 난 히스기야의 영적상태는 교만해졌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믿음이 사라져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알맞은 상태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아들 솔로몬을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 임종의 순간에도 병상 머리맡에 앉혀놓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역대상28:9-10) 그런 아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했고 부모의 뜻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하였던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자녀의 마음을 노엽게 하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본문은 아니지만 에베소서 6: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자녀의 마음을 부모가 노엽게 하면 자녀는 부모를 공경할 마음보다는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명령했기 때문에 막연히 부모순종과 부모공경을 자녀에게서 기대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녀의 노여움을 사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권위를 손상시켜 자녀들로부터 공경 받지 못하는 요인을 부모인 우리가 제공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는 말씀과 같이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가장 큰 부모 공경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어른들은 말합니다. 경로 우대증은 격노 우대증이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웃고 넘기지 못할 풍자입니다. 더군다나 노인들은 지혜자라고 격찬하는 욥기12:12절의 말씀이 있는데 노인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노인들이 이야기하면 아예 구시대 발상적이고 구석기 시대 유물 같은 소리라고만 일축해버리고 마는 시대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모님들은 유교의 폐쇄적인 풍습 아래서 자란 환경적 요인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도 빨리 변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오신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풍조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아직도 자식들을 향해 옛 시대의 전통적인 효도관을 따라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젊은 자녀들은 그런 사고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며 이를 따르거나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부모공경에 대한 문제는 비록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7:10-14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준수한다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부모 섬기는 문제로 책망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고르반 의식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고르반 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고르반 의식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봉헌해버린 제물이나 돈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줄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의식을 악용하여 노부모가 찾아와서 좀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면 이미 고르반 의식을 행해 버렸기 때문에 도와 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부모를 외면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르반 의식을 행한 제물과 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은 "고르반 곧 여호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 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막7:11-13) 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부모를 잘못 섬기는 기류를 막을 곳은 교회 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마저도 부모 섬기는 일들에 대한 교육과 신앙지도를 포기한지 오래되어 버렸습니다.
아예 세상이 그렇거니하면서 방관만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능력하고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연약하게 신뢰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어떤 기적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걱정이 앞서기 전에 젊은 목사의 한사람으로서 부모의 권위를 실추시켜 버린 잘못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부모공경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요한복음 19:26-27절을 보면 주님의 효도에 대한 지극한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요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노년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일찍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0세까지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3년간은 공생애의 기간으로 보내시므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늘 기억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활동을 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임종을 앞두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제자들 가운데 요한을 불러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합니다. "어머니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또 "보라, 네 어머니라. " 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효도의 내용 즉 부모공경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자 요한은 제자 중에 가장 부요한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를 물질로만 섬기려 했던 일이 아니라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는 제자 요한과 어머니에게 부담을 덜 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혈육에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영혼구원에 대한 막중한 문제를 생각하고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 때 혈육의 동생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믿지 못하고 육신의 형으로만 알고 있었던 때입니다.
세 번째으로는 마음으로 가장 큰 위안을 주려는 효도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이 그 마음을 가장 잘 압니다. 요한은 3년간 제자로서 훈련을 받으면서 누구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가장 잘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그의 옆에서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에 대하여 서운한 말을 한다든지 섭섭해하시면 예수님의 입장을 잘 이야기해 드리므로 가장 친근한 위로를 해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거룩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지녀야 할 자격입니다. (레19:3)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부모가 나를 낳아준 은공에 보답하기 전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 부모공경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엡6:1-3)
그러므로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치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부모를 공경하는 책임을 잃어버린 가정은 여호와 하나님의 질서와 가정 윤리를 이미 파괴시키고 있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가정이요 이미 행복을 잃어 버려가고 있는 가정인 것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분의 자녀들 위에 부모 공경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공경을 통해 얻게 되는 땅에서 잘되는 일과 장수의 축복이 가정 위에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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