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이것이 옳으니라
본문
기독교는 다 좋지만 유교에 비해서 효가 약하다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기독교는 장례식이 너무 단순하다, 기독교에는 제사가 없다 그래서 부모 공경에 결정적으로 유교보다도 이 두 가지 면에 약점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역시 효도는 유교적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장례식과 제사의식에는 우리와 다른 종교관이 있습니다. 사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부모 살아생전에 자식들이 별로 효자가 없습니다.
죽고 나면 야단법석을 떱니다. 죽은 부모에 대하여 효도해 보겠다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합니다. 제가 자란 고을에는 권씨 집안 마을이 있고 이씨 집안 마을, 박씨 집안 마을이 있었습니다. 별로 크지는 않지만 이렇게 한 오륙십 호 정도 모여 사는 마을들이 이웃에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이씨들이 제일 많았는데 항상 다른 가문을 의식하고 무엇을 해도 우리가 좀더 해야 된다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가문에 대한 어떤 과시욕, 이런 것을 가지고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법도 따지고 보면 유교는 또 다른 종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죽으면 부모가 되지 않고 신이 됩니다. 그래서 지방에도 신위(神位)라고 쓰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가 신이 되어 자손들에게 액운을 베풀기도 하고 선을 베풀기도 한다는 것이 유교가 가지는 조상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조상관은 정면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종류대로 지었습니다. 죽어도 종류는 변하지 않습니다. 죽은 부모도 부모의 관계이지 죽은 부모가 나와 관계가 멸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서 소로 태어난다든지 소가 환생을 해서 또 사람이 된다든지 하는 이런 윤회사상이나 전생사상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결코 이교의 효법이 온전한 효도의 길이 아닙니다. 이 땅위에서 가르치고 있는 부모공경의 모든 효가 모두가 행위적이고 형식적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지 오늘 성경이 명하는 이런 계명과 같은 효도의 의미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효도원리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으로 계명을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과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의미가 같지만 약간의 구분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해야 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부모공경의 행위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갖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을 알아듣는 그 시기에 부모님이 토라 율법을 읽어 주시고 탈무드 교훈집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첫번째 가지는 반응이 토라와 탈무드를 읽어주는 것을 얌전히 듣고 있는 그 자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읽어주는 말씀을 듣는다는 데서 순종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순종이지만 이 순종은 행위적입니다. 어떤 행위를 통하여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를 순종한다는 것 안에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영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부모님도 믿는 자의 자리에서 세워지기를 바라는 그 기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로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불신의 자리에 있는 부모라면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일차적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부모님을 주 안에 서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믿지 않더라도 우리가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유효한 것입니다. 부모님 편에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부모가 믿어야만 내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믿든 안 믿든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보다 영적입니다. 순종은 행위적인 것이고 공경은 권위적인 것입니다. 행동이 없어도 성립이 됩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행동을 통해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경은 행동이 없어도 성립되는 권위입니다. 나의 부모되심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입니다. 내가 아무리 행위로 부인을 해도 부모는 내게 있어서 영원히 부모입니다. 내가 호적을 떠났다 할지라도 천륜에 있어서 나를 낳아준 부모와의 관계는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부모되신 그것은 공경의 권위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건이 따라 올 수 없습니다. 부모답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조건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모답지 못해도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만큼 공경은 영적이고 권위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갈등을
요즘 가정에 갈등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부부갈등도 있지만 부자와의 갈등 혹은 고부와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도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모임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나쁜 아버지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역기능으로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모임이 일어났고 그 멤버 중에는 한때 아주 나쁜 아버지였다가 회개하고 새사람 되어 그곳에 들어온 사람도 있고 여러 형태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갈등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풍자에 보면 미국사회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왜 천국인지 아느냐" "그거야 그곳에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지. " 한술 더 떠서 "시어머니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 "그거야 지옥의 마귀가 이민비자를 보냈기 때문이지. " 이런 식으로 시어머니에 대해서 풍자하는 유머가 많은데 이렇게 서양에도 가정에 자식과 부모와의 갈등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합시다. 사실 우리들 주변에 부모공경이라고 하는 이 계명보다도 어떤 기본적인 효마저 성립되지 않는 부모 자식 관계가 허다합니다. 거기에 공경이란 무거운 용어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자식으로서 해야 될 효행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런 불균형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공경이라는 말을 현실적으로 풀어서 적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과연 부모공경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데 방법론이 많이 나옵니다. 아내를 위한 남편의 십계명, 남편을 위한 아내의 십계명, 부모에 대한 십계명, 자녀 교육에 대한 십계명 등 많습니다. 여러 가지 표어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읽어보니다 뜻이 있고 좋습니다. 제가 이 시간 십계명을 제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많이 안다고 해서 부모공경이 더 잘 된다면 제가 스무 가지라도 제안을 하겠습니다만 제가 볼 때 부모공경은 항목을 많이 알아야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본적인 고리 하나만 풀리면 어떤 것도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오늘 세 가지만 제안하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부모를 공경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존재가치를 인정하라
첫번째 우리는 부모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가치를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 문제를 먼저 다루고 싶으냐 하면 이것을 많이 등한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같이 살면서 우리의 부모님들이 내가 더 살아서 뭐 하느냐. 내가 뭐 살 가치가 있느냐, 자식들한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이런 감정들을 느끼게 한다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 부모를 잘못 공경한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속에 그런 섭섭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자녀들이 잘해야 됩니다. 우리 부모님은 마땅히 이 자리에 계실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집에 반드시 계실만한 분이라는 부모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고부간의 미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고부는 극단적인 만남입니다.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촌부출신입니다. 농촌에서 농사만 짓고 고생한 우리의 전통적인 시골 어머니입니다. 손도 곱지도 않고 모습도 형편없이 쪼그라든 구리빛 피부를 가진 촌부출신의 시어머니입니다. 무식하기 그지없는 시어머니와 고등교육을 받은 며느리가 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똑똑해서 공부 많이 하고 며느리도 박사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데 함께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고부가 모범고부가 되었습니다. 주변에 알려져 기자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이 며느리 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했는지 그 사례를 이야기하는 중에 제가 한 두 가지만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적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시어머니를 모신 교수급 며느리가 어머님을 관찰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이 나보다 나은 게 무언가 이것을 관찰을 해보니 자기보다 나은 게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우선 장 담그는 솜씨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평생 시골에서 토속음식을 했던 어머니의 그 솜씨는 며느리가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나물 무치는 솜씨도 이 며느리가 도무지 못 따라가는 것입니다. 박사학위 하고 나물 맛내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찌개 맛내는 것, 토속음식 하는 것은 도저히 안되고 김치 담그는 솜씨라든지 모든 면에서 이 어머니가 자기보다 이 집에 있어야 될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게 다 나은 것입니다. 음식을 할 때에도 언제나 마지막 순서는 어머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찌개도 다 끓여 놓고도 어머님을 일부러 모시고 나옵니다. '어머니, 이 간을 좀 보세요. 저는 서툴러서 잘 안되요. 어머니가 간 맞추시면 참 맛이 나네요. ' 마지막 순서 하는 것을 어머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 자신이 찌개 끓인 것처럼 긍지를 가지게 되고 집안 일도 중요한 대목에 가서는 반드시 어머님을 참여시키고 어머님께 물어보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선물을 사올 때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든지 생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옷을 하나 사든지 무엇을 사든지 먼저 어머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자녀들 옷가지라도 자식들에게 바로 주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먼저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님, 애들을 위해서 이런 옷을 오늘 사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먼저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선물을 줄 때도 반드시 어머님에게 선물을 드려 놓고 손주를 불러 할머니가 손주한테 엄마 아빠 선물을 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 엄마가 이런 선물을 사왔어. 나보고 주라 한다. ' 할머니가 전달해 주도록 하니까 어머니가 그 집에서 기가 살아서 시골 할머니가 아니라 얼마나 의기 양양하고 자신감이 있고 그 지역 사람만 만나면 며느리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당 가서 하도 자랑해 놓으니까 기자들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은 어떤 거창한 큰 몫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존재 가치를 존경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살아 있는 동안 나도 부모 됨에 어떤 긍지를 느끼고 살아야지 부모가 좌절감을 안고 '나 같은 사람 빨리 가야지'라고 한다면 그만큼 자녀들에게 불만을 많이 안고 있는 부모들인 것입니다.
자주 찾아 뵙도록
또 한 가지 아주 일반적인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자주 찾아 뵙는 효가 필요합니다. 자녀 된 분들은 부모님들을 자주 찾아 뵈어야 합니다. 이것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인사를 해야 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화든지 무슨 선물을 보내든지 아니면 편지를 보내든지 아니면 E-mail을 보내든지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 아니면 직접 가든지 일년 가운데 부모를 몸으로 찾아가 뵈어야 할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런 타이밍을 놓치면 안됩니다. 편지를 해도 될 경우에는 편지만 해도 되고 전화로 드릴 경우에는 전화를 해도 되겠지만 반드시 가서 뵈어야 될 타이밍의 때를 함부로 놓치면 안됩니다. 이것을 지혜롭게 해야만 부모공경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렇게 잘 안합니다. 용돈 보내드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제일 쉽습니다. 그런데 제일 쉬운 것도 안 되는 가정도 있으니까 문제입니다. 사실은 온라인으로 돈 붙여 드리는 것 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했다고 해서 부모를 공경했다고 자만하면 안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찾아뵙는 자녀의 그 의미가 부자관계에서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그 타이밍을 한번 살려서 자녀의 문안을 받고 나면 부모가 완전히 기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식이 와서 부모를 뵈어야 될 그때에 자식이 안 나타나면 이 부모는 친척 앞에 이웃 앞에 기가 죽어 사는 것입니다. 그 타이밍을 우리 자녀들이 반드시 살려 드려야 됩니다. 용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놓치고 있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자기들끼리는 잘하면서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때를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자식의 존재가 귀한 줄 알면 부모의 존재도 귀한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식구끼리는 그렇게 잘하면서도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서툰 자식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집에 사는 부모님이 자식들이 머무는 방안이 궁금하고 자식들끼리 거기서 웃고 재밌게 놀면서 부모가 고독을 느낀다면 그것은 공경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근본적인 것이 있고 쉬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신부모를 전도하라
만약 불신 부모라고 한다면 예수를 영접하도록 기도하고 이끌고 그야말로 예수님을 안 믿고는 안되도록 우리 자식들이 전도의 수단으로써 효를 다하라는 그 말입니다. 불신 부모는 자식의 효도가 곧 전도가 됩니다. 자식의 효도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가서 '아버지, 우리가 믿는 예수 믿읍시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예수 믿자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얘가 예수 믿고 나서 예수 믿는 우리 아들 며느리들이 나를 이렇게 잘 공경하는구나. ' 그것만 인정되면 자식 따라 예수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효도없이 바로 하지 마십시오.
'살리는 교회, 키우는 교회,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란 표어를 부착했습니다. 여러분 전도합시다! 직접적으로 말을 한다고 해서 전도가 됩니까 내 생명이 살아 있으면 전도가 됩니다. 내가 죽어 있으면 전도가 안됩니다. 교회가 사람을 키우면 저절로 전도가 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을 무시하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건강한 교회는 전도가 됩니다. 건강이 뭡니까 건강은 균형입니다. 건강하다는 말은 균형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균형이 깨어졌기 때문에 지금 신앙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균형잡힌 신앙인들이 사는 그 삶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균형이 깨어져 있는데 내가 다니는 교회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으러 오겠느냐 그 말입니다. 균형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건강을 회복하면 저절로 생명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고 복을 받아야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내가 복을 받고 복을 받은 성도가 섬기는 그 교회에 복음이 증거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해결하면 전도를 입으로 안해도 복음이 증거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저 쉽게 부모를 공경하자는 말을 설교로 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복의 개념입니다.
며느리 사랑장
아동문학가요 유명한 설교자이신 최요석 박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가지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며느리 사랑장'이라 했는데 오늘 저는 며느리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함께 적용을 해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애교 있는 말로 부모에게 자주 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았고 내가 부모님을 다루는 비결과 심리학에 많은 지식을 알고 또 믿음이 있어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부모님을 위하여 크리스마스 카드도 보내고 생전에 용돈도 듬뿍 보낸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부모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사랑은 부모님이 심한 말을 하고 눈치를 줄지라도 온유하게 대하며 남편이 시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릴지라도 며느리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젊음을 부모 앞에서 자랑하지 아니하며 많이 배웠다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현대 여성이라는 점을 내세워 시어머니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내가 번 돈이라고 자기의 유익만 구치 아니하며 신경을 건드려도 성내지 아니하며 이젠 저 세상으로 가실 때도 되었는데 하는 따위의 악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명목적인 사랑으로 아이들의 버릇을 나쁘게 하는 따위의 일이 있을 때 어물어물 넘어가지 아니하며 항상 진리 위에 서며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모든 것을 참으며 개운치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부모 앞에서 믿으며 시종하는 일이 비록 힘겨울지라도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내가 사랑이 부족할 때는 어릴 때와 같아서 말하는 것도 유치하고 깨닫는 것도 미숙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장성한 사랑을 가질 때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났느니라. 내 사랑이 모자랄 때는 부모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온전한 사랑을 품으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 보듯이 완전하게 볼 것이며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잘 아신 것 같이 내가 부모님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맺는 말
너희들이 마땅히 순종하고 공경해야 될 이 일은 옳은 일이라는 것을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부모를 생전에 두지 아니한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부모를 둔 분도 있고 또 부모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있고 위로 부모를 모시고 있고 아래로 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우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원칙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자식들은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되지만 그러나 자녀의 공경은 우리 부모가 지혜롭게 받아들일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식의 공경을 바로 받을 줄 아는 자세가 되어야 됩니다. 복은 복 받을 자세가 되어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릇이 바로 놓여야 비가 오면 빗물이 받아지는 것입니다. 그릇이 비스듬하게 있고 엎어져 있으면 아무리 소낙비가 와도 비 한 방울 못 받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안되면 아무리 자식들이 우리를 공경해도 우리가 감당을 못하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부모라면 공경을 바로 받을 줄 아는 신앙이 있고 지혜로운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자녀 된 자리에 서 있는 분들은 오늘 제가 제안했던 이 지혜를 가지고 여러분의 효행을 하나씩 풀어 가시기 바랍니다.
죽고 나면 야단법석을 떱니다. 죽은 부모에 대하여 효도해 보겠다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합니다. 제가 자란 고을에는 권씨 집안 마을이 있고 이씨 집안 마을, 박씨 집안 마을이 있었습니다. 별로 크지는 않지만 이렇게 한 오륙십 호 정도 모여 사는 마을들이 이웃에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이씨들이 제일 많았는데 항상 다른 가문을 의식하고 무엇을 해도 우리가 좀더 해야 된다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가문에 대한 어떤 과시욕, 이런 것을 가지고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사법도 따지고 보면 유교는 또 다른 종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죽으면 부모가 되지 않고 신이 됩니다. 그래서 지방에도 신위(神位)라고 쓰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가 신이 되어 자손들에게 액운을 베풀기도 하고 선을 베풀기도 한다는 것이 유교가 가지는 조상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조상관은 정면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종류대로 지었습니다. 죽어도 종류는 변하지 않습니다. 죽은 부모도 부모의 관계이지 죽은 부모가 나와 관계가 멸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서 소로 태어난다든지 소가 환생을 해서 또 사람이 된다든지 하는 이런 윤회사상이나 전생사상은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결코 이교의 효법이 온전한 효도의 길이 아닙니다. 이 땅위에서 가르치고 있는 부모공경의 모든 효가 모두가 행위적이고 형식적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지 오늘 성경이 명하는 이런 계명과 같은 효도의 의미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효도원리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으로 계명을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과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의미가 같지만 약간의 구분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해야 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부모공경의 행위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갖는 가장 핵심적인 뜻은 듣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을 알아듣는 그 시기에 부모님이 토라 율법을 읽어 주시고 탈무드 교훈집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첫번째 가지는 반응이 토라와 탈무드를 읽어주는 것을 얌전히 듣고 있는 그 자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읽어주는 말씀을 듣는다는 데서 순종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순종이지만 이 순종은 행위적입니다. 어떤 행위를 통하여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를 순종한다는 것 안에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영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부모님도 믿는 자의 자리에서 세워지기를 바라는 그 기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우리는 예수를 믿는 자로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불신의 자리에 있는 부모라면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일차적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부모님을 주 안에 서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믿지 않더라도 우리가 주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유효한 것입니다. 부모님 편에서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부모가 믿어야만 내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믿든 안 믿든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보다 영적입니다. 순종은 행위적인 것이고 공경은 권위적인 것입니다. 행동이 없어도 성립이 됩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은 행동을 통해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경은 행동이 없어도 성립되는 권위입니다. 나의 부모되심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권위입니다. 내가 아무리 행위로 부인을 해도 부모는 내게 있어서 영원히 부모입니다. 내가 호적을 떠났다 할지라도 천륜에 있어서 나를 낳아준 부모와의 관계는 소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부모되신 그것은 공경의 권위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건이 따라 올 수 없습니다. 부모답지 못하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조건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모답지 못해도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만큼 공경은 영적이고 권위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갈등을
요즘 가정에 갈등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부부갈등도 있지만 부자와의 갈등 혹은 고부와의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도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모임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은 나쁜 아버지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역기능으로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모임이 일어났고 그 멤버 중에는 한때 아주 나쁜 아버지였다가 회개하고 새사람 되어 그곳에 들어온 사람도 있고 여러 형태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갈등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시어머니에 대한 풍자에 보면 미국사회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왜 천국인지 아느냐" "그거야 그곳에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지. " 한술 더 떠서 "시어머니가 왜 죽었는지 아느냐" "그거야 지옥의 마귀가 이민비자를 보냈기 때문이지. " 이런 식으로 시어머니에 대해서 풍자하는 유머가 많은데 이렇게 서양에도 가정에 자식과 부모와의 갈등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합시다. 사실 우리들 주변에 부모공경이라고 하는 이 계명보다도 어떤 기본적인 효마저 성립되지 않는 부모 자식 관계가 허다합니다. 거기에 공경이란 무거운 용어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자식으로서 해야 될 효행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이런 불균형이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가 공경이라는 말을 현실적으로 풀어서 적용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과연 부모공경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데 방법론이 많이 나옵니다. 아내를 위한 남편의 십계명, 남편을 위한 아내의 십계명, 부모에 대한 십계명, 자녀 교육에 대한 십계명 등 많습니다. 여러 가지 표어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읽어보니다 뜻이 있고 좋습니다. 제가 이 시간 십계명을 제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많이 안다고 해서 부모공경이 더 잘 된다면 제가 스무 가지라도 제안을 하겠습니다만 제가 볼 때 부모공경은 항목을 많이 알아야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본적인 고리 하나만 풀리면 어떤 것도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오늘 세 가지만 제안하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 부모를 공경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존재가치를 인정하라
첫번째 우리는 부모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가치를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 문제를 먼저 다루고 싶으냐 하면 이것을 많이 등한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같이 살면서 우리의 부모님들이 내가 더 살아서 뭐 하느냐. 내가 뭐 살 가치가 있느냐, 자식들한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이런 감정들을 느끼게 한다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 부모를 잘못 공경한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속에 그런 섭섭한 생각을 갖지 않도록 자녀들이 잘해야 됩니다. 우리 부모님은 마땅히 이 자리에 계실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집에 반드시 계실만한 분이라는 부모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고부간의 미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고부는 극단적인 만남입니다.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촌부출신입니다. 농촌에서 농사만 짓고 고생한 우리의 전통적인 시골 어머니입니다. 손도 곱지도 않고 모습도 형편없이 쪼그라든 구리빛 피부를 가진 촌부출신의 시어머니입니다. 무식하기 그지없는 시어머니와 고등교육을 받은 며느리가 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똑똑해서 공부 많이 하고 며느리도 박사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데 함께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고부가 모범고부가 되었습니다. 주변에 알려져 기자들이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 이 며느리 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했는지 그 사례를 이야기하는 중에 제가 한 두 가지만 소개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적용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시어머니를 모신 교수급 며느리가 어머님을 관찰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이 나보다 나은 게 무언가 이것을 관찰을 해보니 자기보다 나은 게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우선 장 담그는 솜씨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평생 시골에서 토속음식을 했던 어머니의 그 솜씨는 며느리가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나물 무치는 솜씨도 이 며느리가 도무지 못 따라가는 것입니다. 박사학위 하고 나물 맛내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찌개 맛내는 것, 토속음식 하는 것은 도저히 안되고 김치 담그는 솜씨라든지 모든 면에서 이 어머니가 자기보다 이 집에 있어야 될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게 다 나은 것입니다. 음식을 할 때에도 언제나 마지막 순서는 어머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찌개도 다 끓여 놓고도 어머님을 일부러 모시고 나옵니다. '어머니, 이 간을 좀 보세요. 저는 서툴러서 잘 안되요. 어머니가 간 맞추시면 참 맛이 나네요. ' 마지막 순서 하는 것을 어머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 자신이 찌개 끓인 것처럼 긍지를 가지게 되고 집안 일도 중요한 대목에 가서는 반드시 어머님을 참여시키고 어머님께 물어보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선물을 사올 때 자녀들에게 선물을 주든지 생일을 당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옷을 하나 사든지 무엇을 사든지 먼저 어머님께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자녀들 옷가지라도 자식들에게 바로 주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께 먼저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어머님, 애들을 위해서 이런 옷을 오늘 사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먼저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선물을 줄 때도 반드시 어머님에게 선물을 드려 놓고 손주를 불러 할머니가 손주한테 엄마 아빠 선물을 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 엄마가 이런 선물을 사왔어. 나보고 주라 한다. ' 할머니가 전달해 주도록 하니까 어머니가 그 집에서 기가 살아서 시골 할머니가 아니라 얼마나 의기 양양하고 자신감이 있고 그 지역 사람만 만나면 며느리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당 가서 하도 자랑해 놓으니까 기자들까지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은 어떤 거창한 큰 몫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존재 가치를 존경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살아 있는 동안 나도 부모 됨에 어떤 긍지를 느끼고 살아야지 부모가 좌절감을 안고 '나 같은 사람 빨리 가야지'라고 한다면 그만큼 자녀들에게 불만을 많이 안고 있는 부모들인 것입니다.
자주 찾아 뵙도록
또 한 가지 아주 일반적인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자주 찾아 뵙는 효가 필요합니다. 자녀 된 분들은 부모님들을 자주 찾아 뵈어야 합니다. 이것은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인사를 해야 될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화든지 무슨 선물을 보내든지 아니면 편지를 보내든지 아니면 E-mail을 보내든지 부모님을 찾아 뵙는 것 아니면 직접 가든지 일년 가운데 부모를 몸으로 찾아가 뵈어야 할 타이밍이 있습니다. 그런 타이밍을 놓치면 안됩니다. 편지를 해도 될 경우에는 편지만 해도 되고 전화로 드릴 경우에는 전화를 해도 되겠지만 반드시 가서 뵈어야 될 타이밍의 때를 함부로 놓치면 안됩니다. 이것을 지혜롭게 해야만 부모공경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렇게 잘 안합니다. 용돈 보내드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제일 쉽습니다. 그런데 제일 쉬운 것도 안 되는 가정도 있으니까 문제입니다. 사실은 온라인으로 돈 붙여 드리는 것 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했다고 해서 부모를 공경했다고 자만하면 안됩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찾아뵙는 자녀의 그 의미가 부자관계에서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그 타이밍을 한번 살려서 자녀의 문안을 받고 나면 부모가 완전히 기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식이 와서 부모를 뵈어야 될 그때에 자식이 안 나타나면 이 부모는 친척 앞에 이웃 앞에 기가 죽어 사는 것입니다. 그 타이밍을 우리 자녀들이 반드시 살려 드려야 됩니다. 용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를 놓치고 있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자기들끼리는 잘하면서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때를 많이 놓치고 있습니다. 자식의 존재가 귀한 줄 알면 부모의 존재도 귀한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식구끼리는 그렇게 잘하면서도 부모와의 관계에서는 서툰 자식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집에 사는 부모님이 자식들이 머무는 방안이 궁금하고 자식들끼리 거기서 웃고 재밌게 놀면서 부모가 고독을 느낀다면 그것은 공경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근본적인 것이 있고 쉬운 것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신부모를 전도하라
만약 불신 부모라고 한다면 예수를 영접하도록 기도하고 이끌고 그야말로 예수님을 안 믿고는 안되도록 우리 자식들이 전도의 수단으로써 효를 다하라는 그 말입니다. 불신 부모는 자식의 효도가 곧 전도가 됩니다. 자식의 효도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가서 '아버지, 우리가 믿는 예수 믿읍시다'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예수 믿자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얘가 예수 믿고 나서 예수 믿는 우리 아들 며느리들이 나를 이렇게 잘 공경하는구나. ' 그것만 인정되면 자식 따라 예수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효도없이 바로 하지 마십시오.
'살리는 교회, 키우는 교회,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란 표어를 부착했습니다. 여러분 전도합시다! 직접적으로 말을 한다고 해서 전도가 됩니까 내 생명이 살아 있으면 전도가 됩니다. 내가 죽어 있으면 전도가 안됩니다. 교회가 사람을 키우면 저절로 전도가 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을 무시하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건강한 교회는 전도가 됩니다. 건강이 뭡니까 건강은 균형입니다. 건강하다는 말은 균형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균형이 깨어졌기 때문에 지금 신앙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균형잡힌 신앙인들이 사는 그 삶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균형이 깨어져 있는데 내가 다니는 교회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 믿으러 오겠느냐 그 말입니다. 균형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건강을 회복하면 저절로 생명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고 복을 받아야 행복한 교회가 됩니다. 내가 복을 받고 복을 받은 성도가 섬기는 그 교회에 복음이 증거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해결하면 전도를 입으로 안해도 복음이 증거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저 쉽게 부모를 공경하자는 말을 설교로 때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부모를 공경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복의 개념입니다.
며느리 사랑장
아동문학가요 유명한 설교자이신 최요석 박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가지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며느리 사랑장'이라 했는데 오늘 저는 며느리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함께 적용을 해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애교 있는 말로 부모에게 자주 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았고 내가 부모님을 다루는 비결과 심리학에 많은 지식을 알고 또 믿음이 있어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부모님을 위하여 크리스마스 카드도 보내고 생전에 용돈도 듬뿍 보낸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부모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사랑은 부모님이 심한 말을 하고 눈치를 줄지라도 온유하게 대하며 남편이 시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릴지라도 며느리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기의 젊음을 부모 앞에서 자랑하지 아니하며 많이 배웠다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현대 여성이라는 점을 내세워 시어머니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내가 번 돈이라고 자기의 유익만 구치 아니하며 신경을 건드려도 성내지 아니하며 이젠 저 세상으로 가실 때도 되었는데 하는 따위의 악한 생각을 하지 아니하며 명목적인 사랑으로 아이들의 버릇을 나쁘게 하는 따위의 일이 있을 때 어물어물 넘어가지 아니하며 항상 진리 위에 서며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모든 것을 참으며 개운치 않은 일이 있을지라도 부모 앞에서 믿으며 시종하는 일이 비록 힘겨울지라도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내가 사랑이 부족할 때는 어릴 때와 같아서 말하는 것도 유치하고 깨닫는 것도 미숙하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장성한 사랑을 가질 때는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났느니라. 내 사랑이 모자랄 때는 부모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온전한 사랑을 품으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 보듯이 완전하게 볼 것이며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잘 아신 것 같이 내가 부모님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맺는 말
너희들이 마땅히 순종하고 공경해야 될 이 일은 옳은 일이라는 것을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는 부모를 생전에 두지 아니한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부모를 둔 분도 있고 또 부모의 입장에 있는 사람도 있고 위로 부모를 모시고 있고 아래로 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우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원칙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자식들은 당연히 부모를 공경해야 되지만 그러나 자녀의 공경은 우리 부모가 지혜롭게 받아들일 때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자식의 공경을 바로 받을 줄 아는 자세가 되어야 됩니다. 복은 복 받을 자세가 되어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릇이 바로 놓여야 비가 오면 빗물이 받아지는 것입니다. 그릇이 비스듬하게 있고 엎어져 있으면 아무리 소낙비가 와도 비 한 방울 못 받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안되면 아무리 자식들이 우리를 공경해도 우리가 감당을 못하는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부모라면 공경을 바로 받을 줄 아는 신앙이 있고 지혜로운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자녀 된 자리에 서 있는 분들은 오늘 제가 제안했던 이 지혜를 가지고 여러분의 효행을 하나씩 풀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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