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내 발에 등, 내 길에 빛
본문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우리는 성령을 하루 한 장 이상 읽는다. ’라는 첫 번째 약속을 주제로 설교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은 65억 세계 인구 가운데 0. 2% 정도인 1300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 경제, 정치, 문화, 과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상대성이론의 주창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리바이스 청바지의 창업자 레비 스트로스, 경제학자 사무엘슨, 정신분석학의 시조 시그문드 프로이드, 공산주의 이론가 칼 막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 영화감독 스필버그, 화가 마르크 샤갈 등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노벨상 수상자 중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내 상위 50대 재벌 중 36%나 차지합니다. 월가의 거물들도 유태인들입니다. 무엇이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전 세계를 떠돌며 살았던 고난의 역사를 이어온 유대인들을 세계적으로 막강한 사람들로 만들었을까요? 유대인들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교육의 민족’, ‘책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책이 없는 집은 혼이 빠진 몸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의 중심에는 책이 있고, 책의 중심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지금도 자녀가 3살 정도만 되면 구약성경을 펴놓고 꿀을 떨어 뜨려 빨아먹게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달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힘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변화의 책입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지혜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백성, 성경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66권 1,189장 31,173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절을 가진 장이 바로 시 119편으로 176절이나 됩니다. 이 시편 119편을 알파벳 시편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순서대로 8절씩 하나의 연으로 구성하여, 모두 176절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히브리어의 모든 부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것처럼 모든 언어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있는 시입니다.
시편 119편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였던 죠지 위스하르트(George Wishart)가 종교개혁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사형당하는 죄수가 죽기 전에 시편을 암송하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스하르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신이 늘 사랑하던 시편 119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시편 119편을 3분의 2쯤 암송했을 때 왕이 보낸 사면장이 도착하여 사형이 중지되고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시편 중에서 가장 짧은 2절로 이루어진 시편 117편을 암송했더라면 그는 사형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가장 긴 시인 119편을 암송하다가 목숨을 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본문 105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멘.
성경은 삶의 표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성경을 ‘캐논’(canon)이라고 하는데 ‘척도’라는 뜻입니다. 척도란 물건의 질량을 재는 기준입니다. 우리 장로교 12신조 가운데 제1조가 “신구약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입니다. 척도입니다.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이 작전도가 필요하고, 항해하는 배는 항로를 그린 해도가 필요하고, 공중을 나는 비행기도 항로 네비게이터가 필요하듯 우리 인생에게도 삶의 표준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항해도요 나침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영생의 길과 복 받는 길을 알려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횃불입니다. 등잔불입니다. 밤의 횃불이나 등잔불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가파른 언덕에서 구르는 것을 방지해 줄 뿐 아니라 위험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인생길에 등입니다. 죄악의 길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안내자로 삼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고,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예배 형식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예배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캔터’라고 불리는 예배 인도자가 예배를 인도합니다. 예배의 내용 대부분이 기도를 암송하는 것인데 인도자가 먼저 부르면 회중이 따라 부르는 식으로 예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날의 토라를 읽는 순서가 됩니다. 토라는 예배당 전면에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한 토라 안치함 안에 들어있습니다. 먼저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가 함께 앞장서서 토라를 안치함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한 바퀴 도는데 신도들이 흥겹게 그 뒤를 따르면서 함께 예배당을 순례합니다. 그러면 자리에 앉아있던 신도들은 토라에 손을 대기도 하고 멀리서 플라잉 키스를 날리기도 합니다. 이 때 부르는 노래가 바로 ‘토라 오라’라는 노래인데 ‘토라 오라’는 ‘토라는 빛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행진이 끝나고 나면 다들 자리에 앉고 두 사람 정도가 나와서 끝에 손 모양의 작은 장식이 달려있는 ‘야드’라는 막대기를 읽을 구절에 대고 큰 소리로 토라를 읽습니다. 그리고 강론이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빛입니다.
빛의 책인 성경은 변화의 책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남태평양의 핏카린 섬은 망망대해에 하나의 점과도 같은 작은 외딴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20여년 전인 1790년 바운티호라는 배에서 명령을 거역하는 항명 폭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폭동을 일으켰던 9명의 선원과 원주민 남자 6명, 그리고 원주민 여자 12명, 모두 27명이 이 핏카린 섬에 당도하였습니다. 그 중 한 선원이 한 가지 일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술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섬은 방탕함과 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났을 때에 그 섬에 살아남은 남자는 백인 한 명뿐이었고, 원주민 여자들과 혼혈아로 태어난 아이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백인이 바운티호에 실려 있던 헌 궤짝 통에서 성경책을 한 권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된 그는 섬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폭동사건이 일어난지 18년이 지난 1808년 그 섬 부근을 지나던 미국의 토파스호에 의해 발견된 핏카린 섬은 감옥, 술, 범죄가 없고 게으름이 없는 번영하는 공동사회였습니다.
영국은 원래 해적의 나라요, 도적들이 들끓는 야만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장 신사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는 “영국이 세익스피어를 만들었다면 성경은 영국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며, 변화의 책입니다. 성경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을 삼아 구원을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거룩하게 변화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본문 97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아멘.
여기서 “읊조리다”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묵상하다’, ‘전념하다’, ‘연구하다’, ‘명상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매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여야 합니다. 레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정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법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굽이 완전히 갈라진 것과 또 하나는 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정한 동물입니다. 이 정한 동물은 먹어도 괜찮은 음식물입니다.
소가 새김질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소는 마차를 끌면서도 새김질하고, 논밭을 갈면서도 새김질하고, 외양간에서도 새김질합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새김질합니다. 새김질은 실컷 먹은 풀을 반추해서 소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소는 위가 4개가 있습니다. 소는 영양 있고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 힘이 센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지 새김질해서 완전히 소화를 시키기 때문에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아 새김질하여 소화를 잘 시켜야 합니다. 읽는 말씀과 설교를 통하여 듣는 말씀을 다시 새김질하여 완전히 소화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소화할 때 영적으로 강건한 힘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소처럼 계속 되새김질하시기 바랍니다. 밥을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듯이, 말씀에서 달고 오묘한 맛이 나옵니다.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내 영혼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이 내면화됩니다. 월요일에 되새김질하고, 화요일에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말씀을 반추해야 소화가 됩니다. 설교를 듣고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묵상함으로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첫째, 매일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둘째, 성경은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합니다. 맥아더는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읽지 않은 날이 한 번도 없었다. ”고 했습니다. 셋째,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재미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읽다보면 출애굽기까지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읽기 시작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중단하는 성도들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미없어도 읽어야 합니다. 넷째, 성경은 기도하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읽어야 합니다. 다섯째, 성경은 손으로 읽어야 합니다. 손으로 읽는다는 것은 밑줄을 그어가며, 깨달은 것을 기록하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손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섯째, 성경은 머리로 읽어야 합니다. 머리로 읽는다는 것은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질하여 강건한 믿음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 100-102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멘.
앞에서 성경을 읽는 여섯 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그 방법은 ‘성경을 몸으로 읽는 것’입니다. ‘몸으로 읽는다’는 것은 읽은 것을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편 119편 기자가 깨달았던 사실은, 명철함은 오랜 인생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경험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생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 119:100절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가 많은 인생경험을 쌓은 노인보다 명철하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학교라고는 9개월밖에 다녀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매일 성경을 읽음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나이팅게일, 에디슨, 맥아더 장군도 항상 성경을 가까이 함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강한 의지적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01절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의 길을 피하고 죄악된 삶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결단할 때 사탄은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성도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부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집과 재물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고 그 집 식구들은 발을 동동 굴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멀리서 거지 아버지와 아들 부자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불구경을 하던 거지 아들이 “아버지, 저 사람들 참 안됐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거지 아버지는 “그것봐라. 우리에겐 불에 타 없어질 집이 없으니 무슨 걱정이 있니? 이게 다 에비 잘 만난 덕인줄 알아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집이 없으니 물론 불이 날 염려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탄의 유혹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지 인생입니다. 영광도 축복도 영생도 천국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광과 축복과 영생을 소유한 우리들에는 늘 시험이 있습니다. 벧전 4:12-14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 많은 유혹과 시험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유혹과 시험을 물리친 리스도인은 마지막 날 심판대에 서서 이 시편기자처럼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간직한 성도는 103절의 말씀처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각지를 순방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어느 시골 정거장에 내리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말씀을! 말씀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품속에서 책을 꺼내서 뜯더니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산상보훈이 기록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뜯어주면서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닌 힌두교인이었지만 평생 성경을 애독하며 산상보훈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주님은 계 1: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듣고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월 1일 새해 첫 날을 맞이하며 결심했던 첫 마음으로 1년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교에 입학하며 새 책을 펴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눈이 맞던 날의 첫사랑으로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취직시험에 합격하여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개업 날의 첫 손님을 맞이하던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세례를 받던 날의 감격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작심삼일이라 우리의 결심은 너무 쉽게 깨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루 한 장 이상 읽는다. ” 모두 성경책에서 성경읽기표를 꺼내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자리에서 결단합시다. 2008년 올 해 꼭 성경을 한 번 이상 읽읍시다. 1년에 성경을 한 번 읽으려면 하루 세장을 주일에는 다섯장을 읽으면 됩니다. 말씀을 읽으므로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삶의 힘을 얻고, 시험을 이기며, 위기를 극복하고, 인생을 변화시켜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은 65억 세계 인구 가운데 0. 2% 정도인 1300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세계 경제, 정치, 문화, 과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상대성이론의 주창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리바이스 청바지의 창업자 레비 스트로스, 경제학자 사무엘슨, 정신분석학의 시조 시그문드 프로이드, 공산주의 이론가 칼 막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 영화감독 스필버그, 화가 마르크 샤갈 등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노벨상 수상자 중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내 상위 50대 재벌 중 36%나 차지합니다. 월가의 거물들도 유태인들입니다. 무엇이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전 세계를 떠돌며 살았던 고난의 역사를 이어온 유대인들을 세계적으로 막강한 사람들로 만들었을까요? 유대인들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교육의 민족’, ‘책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책이 없는 집은 혼이 빠진 몸과 같다. ”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의 중심에는 책이 있고, 책의 중심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지금도 자녀가 3살 정도만 되면 구약성경을 펴놓고 꿀을 떨어 뜨려 빨아먹게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은 달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힘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변화의 책입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지혜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백성, 성경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66권 1,189장 31,173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절을 가진 장이 바로 시 119편으로 176절이나 됩니다. 이 시편 119편을 알파벳 시편이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알파벳 22개를 순서대로 8절씩 하나의 연으로 구성하여, 모두 176절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히브리어의 모든 부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것처럼 모든 언어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신앙 고백이 들어있는 시입니다.
시편 119편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였던 죠지 위스하르트(George Wishart)가 종교개혁운동을 펼치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관습에 의하면 사형당하는 죄수가 죽기 전에 시편을 암송하고 죽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스하르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자신이 늘 사랑하던 시편 119편을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시편 119편을 3분의 2쯤 암송했을 때 왕이 보낸 사면장이 도착하여 사형이 중지되고 그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시편 중에서 가장 짧은 2절로 이루어진 시편 117편을 암송했더라면 그는 사형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가장 긴 시인 119편을 암송하다가 목숨을 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
본문 105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아멘.
성경은 삶의 표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성경을 ‘캐논’(canon)이라고 하는데 ‘척도’라는 뜻입니다. 척도란 물건의 질량을 재는 기준입니다. 우리 장로교 12신조 가운데 제1조가 “신구약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입니다. 척도입니다.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이 작전도가 필요하고, 항해하는 배는 항로를 그린 해도가 필요하고, 공중을 나는 비행기도 항로 네비게이터가 필요하듯 우리 인생에게도 삶의 표준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항해도요 나침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영생의 길과 복 받는 길을 알려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는 횃불입니다. 등잔불입니다. 밤의 횃불이나 등잔불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막아주고 가파른 언덕에서 구르는 것을 방지해 줄 뿐 아니라 위험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보호해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인생길에 등입니다. 죄악의 길에서 방황하는 인생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빛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안내자로 삼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고,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예배 형식은 전체적으로 우리의 예배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의 예배는 ‘캔터’라고 불리는 예배 인도자가 예배를 인도합니다. 예배의 내용 대부분이 기도를 암송하는 것인데 인도자가 먼저 부르면 회중이 따라 부르는 식으로 예배가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날의 토라를 읽는 순서가 됩니다. 토라는 예배당 전면에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한 토라 안치함 안에 들어있습니다. 먼저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가 함께 앞장서서 토라를 안치함에서 꺼냅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한 바퀴 도는데 신도들이 흥겹게 그 뒤를 따르면서 함께 예배당을 순례합니다. 그러면 자리에 앉아있던 신도들은 토라에 손을 대기도 하고 멀리서 플라잉 키스를 날리기도 합니다. 이 때 부르는 노래가 바로 ‘토라 오라’라는 노래인데 ‘토라 오라’는 ‘토라는 빛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행진이 끝나고 나면 다들 자리에 앉고 두 사람 정도가 나와서 끝에 손 모양의 작은 장식이 달려있는 ‘야드’라는 막대기를 읽을 구절에 대고 큰 소리로 토라를 읽습니다. 그리고 강론이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빛입니다.
빛의 책인 성경은 변화의 책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남태평양의 핏카린 섬은 망망대해에 하나의 점과도 같은 작은 외딴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20여년 전인 1790년 바운티호라는 배에서 명령을 거역하는 항명 폭동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폭동을 일으켰던 9명의 선원과 원주민 남자 6명, 그리고 원주민 여자 12명, 모두 27명이 이 핏카린 섬에 당도하였습니다. 그 중 한 선원이 한 가지 일을 시작했는데 그것은 술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술을 만들어 마시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섬은 방탕함과 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10년이 지났을 때에 그 섬에 살아남은 남자는 백인 한 명뿐이었고, 원주민 여자들과 혼혈아로 태어난 아이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백인이 바운티호에 실려 있던 헌 궤짝 통에서 성경책을 한 권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된 그는 섬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폭동사건이 일어난지 18년이 지난 1808년 그 섬 부근을 지나던 미국의 토파스호에 의해 발견된 핏카린 섬은 감옥, 술, 범죄가 없고 게으름이 없는 번영하는 공동사회였습니다.
영국은 원래 해적의 나라요, 도적들이 들끓는 야만적인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장 신사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시인 빅토르 위고는 “영국이 세익스피어를 만들었다면 성경은 영국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며, 변화의 책입니다. 성경을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을 삼아 구원을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거룩하게 변화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본문 97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아멘.
여기서 “읊조리다”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묵상하다’, ‘전념하다’, ‘연구하다’, ‘명상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매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여야 합니다. 레 11장에는 먹을 수 있는 정한 짐승과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법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한 짐승을 구별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굽이 완전히 갈라진 것과 또 하나는 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정한 동물입니다. 이 정한 동물은 먹어도 괜찮은 음식물입니다.
소가 새김질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소는 마차를 끌면서도 새김질하고, 논밭을 갈면서도 새김질하고, 외양간에서도 새김질합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새김질합니다. 새김질은 실컷 먹은 풀을 반추해서 소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소는 위가 4개가 있습니다. 소는 영양 있고 좋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 힘이 센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지 새김질해서 완전히 소화를 시키기 때문에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아 새김질하여 소화를 잘 시켜야 합니다. 읽는 말씀과 설교를 통하여 듣는 말씀을 다시 새김질하여 완전히 소화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소화할 때 영적으로 강건한 힘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소처럼 계속 되새김질하시기 바랍니다. 밥을 오래 씹으면 단맛이 나듯이, 말씀에서 달고 오묘한 맛이 나옵니다.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내 영혼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이 내면화됩니다. 월요일에 되새김질하고, 화요일에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말씀을 반추해야 소화가 됩니다. 설교를 듣고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묵상함으로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첫째, 매일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방법입니다. 둘째, 성경은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합니다. 맥아더는 “내가 아무리 피곤해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을 읽지 않은 날이 한 번도 없었다. ”고 했습니다. 셋째,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재미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읽다보면 출애굽기까지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읽기 시작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중단하는 성도들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미없어도 읽어야 합니다. 넷째, 성경은 기도하며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읽어야 합니다. 다섯째, 성경은 손으로 읽어야 합니다. 손으로 읽는다는 것은 밑줄을 그어가며, 깨달은 것을 기록하며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손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섯째, 성경은 머리로 읽어야 합니다. 머리로 읽는다는 것은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질하여 강건한 믿음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본문 100-102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멘.
앞에서 성경을 읽는 여섯 가지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습니다. 그 방법은 ‘성경을 몸으로 읽는 것’입니다. ‘몸으로 읽는다’는 것은 읽은 것을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편 119편 기자가 깨달았던 사실은, 명철함은 오랜 인생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경험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인생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 119:100절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가 많은 인생경험을 쌓은 노인보다 명철하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학교라고는 9개월밖에 다녀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매일 성경을 읽음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나이팅게일, 에디슨, 맥아더 장군도 항상 성경을 가까이 함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면 강한 의지적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01절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의 길을 피하고 죄악된 삶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결단할 때 사탄은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말씀대로 살려는 성도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부자 집에 불이 났습니다. 집과 재물이 타들어 가는 것을 보고 그 집 식구들은 발을 동동 굴며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멀리서 거지 아버지와 아들 부자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불구경을 하던 거지 아들이 “아버지, 저 사람들 참 안됐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거지 아버지는 “그것봐라. 우리에겐 불에 타 없어질 집이 없으니 무슨 걱정이 있니? 이게 다 에비 잘 만난 덕인줄 알아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집이 없으니 물론 불이 날 염려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탄의 유혹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지 인생입니다. 영광도 축복도 영생도 천국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광과 축복과 영생을 소유한 우리들에는 늘 시험이 있습니다. 벧전 4:12-14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 때 많은 유혹과 시험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유혹과 시험을 물리친 리스도인은 마지막 날 심판대에 서서 이 시편기자처럼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간직한 성도는 103절의 말씀처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가 각지를 순방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어느 시골 정거장에 내리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말씀을! 말씀을!”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는 품속에서 책을 꺼내서 뜯더니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산상보훈이 기록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뜯어주면서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닌 힌두교인이었지만 평생 성경을 애독하며 산상보훈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주님은 계 1:3절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듣고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1월 1일 새해 첫 날을 맞이하며 결심했던 첫 마음으로 1년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학교에 입학하며 새 책을 펴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눈이 맞던 날의 첫사랑으로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취직시험에 합격하여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개업 날의 첫 손님을 맞이하던 마음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세례를 받던 날의 감격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작심삼일이라 우리의 결심은 너무 쉽게 깨어지고, 우리의 마음은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루 한 장 이상 읽는다. ” 모두 성경책에서 성경읽기표를 꺼내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자리에서 결단합시다. 2008년 올 해 꼭 성경을 한 번 이상 읽읍시다. 1년에 성경을 한 번 읽으려면 하루 세장을 주일에는 다섯장을 읽으면 됩니다. 말씀을 읽으므로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삶의 힘을 얻고, 시험을 이기며, 위기를 극복하고, 인생을 변화시켜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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