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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부모에게 순종하라

본문

어버이 주일이다. 어버이주일은 1913년 미국의 안나 자비스 부인이 시작한 행사이고, 그의 딸 미스나 자비스 부인의 활동으로 어머니날 주최 협회가 조직되면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어머니날에 카네이션을 달게 된 것은 필라델피아 교회의 한 어린아이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카네이션 한 아름을 교회에 가지고 와 어머니를 추모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후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주일로 정한 것이 차츰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지키게 되었고 1974년부터 ‘어버이날’로 바뀌게 되었다. 교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다.
오늘 본문은 가정생활 가운데 특히 자녀들에게 주시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이다. 자녀들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비결로 제시된 것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순종할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제사하게 설명함으로써 설득력을 주고 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주시는 말씀으로는 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해설
주 안에서 순종하라: 순종하라는 말은 ‘휘파쿠오’이다. 본래 이 말은 동사 ‘아쿠오(듣다)’에서 유래된 복합어이다. 언제나 부모의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모울은 이 말을 “주저 없는 마음으로 주의하여 듣는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니까 효도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지혜의 시작도 알고 보면 듣는 데서 시작한다.
솔로몬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구했다. 지혜는 히브리어로 ‘레브쉬메’이다. ‘레브’는 ‘마음’이고 ‘쉬메’는 ‘듣는다’라는 뜻이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hearing heart’라 번역을 했다. 즉 ‘듣고자 하는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 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서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복을 받았다. 듣고자 하는 마음만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이다. 보모 효도의 시작도 듣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라는 것은 ‘헤티스’로서 ‘바로 그것이’라는 강조의 의미가 있다. ‘옳으니라’는 것은 ‘디카이온’으로서 ‘의로운’이라는 뜻이다. 무엇에 대하여 의롭게 옳은 일인가 이에 대해서 칼빈은 “율법이나 성서에 비추어서 의로운 일”이라고 한다. 빈센트는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서 의로운 일”이라고 했다. 에디는 “자녀라는 이름 자체에 비추어서 의로운 일”이라고 했다. 인간사의 모든 의로운 일 중의 의로운 일은 바로 효도에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공동번역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번역을 했다. 자식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을 효도라는 것이다.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앞서 나온 ‘순종하라’는 것이 정신적인 면에 속한다면 ‘공경하라’는 물질적인 면에서의 효를 말씀하고 있다. 본래 ‘공경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키베트’이다. 동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무겁다’라는 의미이고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는 ‘간장’이라는 뜻이다. 결국은 같은 의미에 속하는 말이다. 사람의 몸에서 간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고 있다. 즉, 부모를 간장처럼 귀중히 여기고, 무겁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헬라어로는 ‘티마’이다. 이 말에는 ‘값을 치른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식이 보모의 은공을 생각하면서 부모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 계명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은 벌써 십계명 제 2계명에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리니”(출 20:6)이다. 이것은 제 5계명보다 앞서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전통적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의 둘째 돌판의 첫 계명이다. (2)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첫 계명이다. (3) 제 2계명은 일반적인 의미를 지닌 것에 비해 제 5계명의 약속은 실제적인 약속이 된다.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마지막 해석을 지지하나 마지막 설이 유력하다. 의미상으로나 그 중요성에서 으뜸이라는 것이다.
마치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라고 질문하였을 때에 ‘ 첫째’라는 말의 뜻은 어느 계명이 가장 중요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고린도전서 13:13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을 때에 순서상을 보면 분명 세 번째에 속하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사랑이 첫째라는 것이다.
서론
에베소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된다. 교리(1-3잘)와 실천(4-6장)이다. 실천 편에서도 교회 생활에 이어서 가정생활이 소개되고 있다. 가정 윤리 가운데 먼저는 부부 관계에 대해서 논하고, 그 뒤에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먼저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상고할 본문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며 순종한다면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를 원리적인 면에서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본론
1. 왜 순종해야 하는가(순종의 이유)
여기 ‘옳다’는 것과 ‘의롭다’는 뜻이다. ‘의’란 여호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부모와 바르게 관계를 맺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보이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요일 4:20-21). 우리는 흔히 더 큰 일을 해야 하겠기에 시간이 없다면서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는 싶지만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하겠기에,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 사람을 만나야 하겠기에, 나라와 세계를 생각해야 하겠기에 다음에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 중의 일은, 의로운 일 중의 의로운 일은 바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자식된 도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부모에게 효행하는 것이다. 표는 결코 선행도, 공로도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외국 관광이나 보내드리는 것이 마치 무슨 큰일이나 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식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결코 그럴 성질의 일이 아니다. 자식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2)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이다(2절).
여기서 ‘첫 계명’이 순서상을 의미하는 것이냐 아니면 중요성을 지적하는 말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십계명은 두 가지고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4계명은 대신(對神) 관계에 관한 계명, 즉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5-10계명은 대인(對人) 관계에 대한 계명이다. 인간과 인간의 문제이다. 대인 관계에서의 첫 계명은 바로 부모 공경이다. 그러니까 대인 관계의 가장 기초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모와의 관계라는 뜻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첫째부터 다섯째 계명까지는 ‘엘로힘’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나오지만 여섯째 계명부터는 ‘엘로힘’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효에 대한 다섯째 계명도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맥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부모 공경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언 1장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라”와 “부모를 공경하라”함이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이 말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결과와도 같다는 뉘앙스를 가진다. 부모의 권위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약속을 담고 있기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계명은 이런 확실한 약속이 있는가 하면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도 담고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죄는 그 다음에 나오는 살인이며, 간음이며, 도적질이며, 이웃 탐내는 것이며, 거짓 증거하는 죄보다도 더 무거운 죄를 짓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3)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5:4).
골로새서 3:20에서는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너의 아비와 어미를 공경하라. 그것은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나로서는 자식된 도리를 다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되었다.
4) 이것은 명령이기 때문이다(1, 2절).
본문은 부모 공경의 첫째 이유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그것은 나에게 주시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부모와 관련된 교훈은 모두 명령형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유념하라. ‘순종하라’, ‘공경하라’, ‘청종하라’, ‘기쁘게 하라’, ‘여기라’는 식이다.
부모 순종은 계명이다. 특히, 신명기 5:16에 보면 “너는 너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한 대로 공경하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는 ‘왜요’가 없다. 오로지 순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 대표가 아브라함이었다. 그는 이식을 바치라는 말씀에 ‘예’하고 순종함으로써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경우가 되었다.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말씀에 대꾸를 했다고 한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너 말끝마다 말대꾸 할거냐”하자 며느리 하는 말이 “어머님, 이것은 말대꾸가 아닌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치 따져 가면서 언제 순종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명령으로 알고 순종할 것이다.
2.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순종의 방법)
1) 주안에서(1절)
“주 안에서”라는 말에 대하여 메이어는 ‘순종의 특색’으로, 살몬드는 ‘순종의 질과 자세’문제로 보고 있다. 즉 전자는 주께 대한 순종이 선행된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하면,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인들의 순종이라는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듯ㅇ리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것이다. 가령, 믿지 않는 부모가 교회 나가는 것을 반대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 안에서’를 적용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모님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책임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갈등을 일으킬 경우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 우선권을 둘 것을 말씀하신다.
2) 공경하면서(2절)
사람들은 흔히 세 가지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긍휼’이라고 한다. 나와 대등한 입장에서 하는 사랑을 ‘우정’ 또는 ‘형제간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보다 높은 이를 사랑하는 것을 ‘공경’이라고 한다. 공경이란 ‘우러러 존경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부모는 긍휼의 대상이 아닌 존경의 대상임을 명심할 것이다. 공경 없이 순종하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사랑이다. 히브리어로 ‘공경’이란 ‘키베드’로서 ‘무겁다’라는 뜻이다. 부모를 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그분들의 삶, 인격, 경험, 지혜를 높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사람의 심리를 이렇게 분석한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를 전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나 2,30대가 되면 부모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시대와 자신의 시대가 다르고 부모는 배우지 못한 세대라는 것이다. 40대에 이르러서는 조금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 생각 중에는 더러 맞는 것도 있구나. 옳은 것도 있구나”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5, 60대가 되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이 옳구나”사람이 철들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이다. 부모를 인정하고 공경하기가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이다. 철이 들어서야 부모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고 높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모 공경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다. ‘공경’에는 ‘값을 치르다’라는 뜻이 있다. 구체적으로 때를 따라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공급해 드리는 것이다.
3. 순종에는 어떤 약속이 있는가(순종의 결과)
1) 잘 되리라(3절)
“잘 되리라”이것은 신명기적인 축복이다. 번영하고 형통하고 번성하고 평탄케 하는 축복이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다. 영육간의 복을 분명하게 약속했다. 부모께 순종해서 잘 된 대표적인 경우는 ‘룻’이라고 생각한다. 룻기 1:16, 17에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지는 곳에 나도 가도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죽음이 관계를 갈라놓기 전에는 결코 떠나지 않겠노라는 결심이다.
유대 땅으로 돌아와서도 시모에 대한 그의 효도는 감동적이다. 결국 그의 후손을 통하여 다윗이 태어나고 메시야가 태어나는 축복을 입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잘 된 사람들을 살펴보라.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
2) 장수하리라(3절)
이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보상만도 아니다. 본문에서는 ‘땅에서’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장수를 복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65:20에는 100세에 죽는 자가 아이 같겠다고 하면서 복된 날에는 모두가 장수하게 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영생에 대한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도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장수한다는 장수촌에 가 보면 거기에는 효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성경에서 효도하여 장수의 복을 받은 사람의 대표는 요나답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요나답의 명령에 따라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순종을 했다. 부모의 뜻을 받들어 순종했다.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렘 35:20).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보상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불효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 불효하고도 오래 산다는 것은 복이 아니라 욕이요, 화임을 명심하자.
결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의 길로 효도를 말씀하셨다. 축복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부모를 주셨다. 이 땅에서 잘 되고 형통하는 것도, 번영하는 것도, 그리고 장수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시끄러운 것도 알고 보면 원인이 가정 문제에 있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효가 붕괴되었기에 이 세대는 곤두박질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효를 다시 세워 성경에 약속된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굳이 오래 살겠다고 발악을 할 것이 아니라, 부모를 바로 섬길 것이다. 다른 곳에서 번영이나 장수를 찾고 구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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