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본문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조상들 가운데 특별히 여자들의 이름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유다의 며느리면서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다말과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여리고성이 멸망할 때 구원받은 라합과 본문에 등장하는 모압 여인 룻과 아기 예수를 낳은 마리아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믿음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남편이 일찍 죽고 그의 동생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언약의 가문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라합은 이방인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여리고에 기거하는 사람이나 짐승들은 다 죽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모두가 멸망하는데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것입니다. 룻은 남편이 죽고 희망 없는 시어머니를 따르며 결국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았던 것입니다. 마리아 역시 그는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것을 말하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순종하고 오히려 감사 찬양을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가운데 첫 번째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그를 지극히 섬겼던 룻의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열악한 환경에서 만난 여호와 하나님
우리나라의 환경으로 외국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이미지보다 나쁜 이미지가 강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국 슈퍼볼의 최고 선수였던 하인스 워드의 아버지도 당시 우리나라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흑인이었습니다. 국제결혼의 대부분은 한국 여인들이며 대상은 흑인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농촌 총각들과 결혼하는 동남아 여인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축복된 결혼이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룻도 당시 모압 여인으로 그곳에 이민 온 이스라엘 총각인 말론과 결혼한 것입니다. 룻의 가정 환경에 대해서는 잘 알 수는 없으나 말론의 가정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버지가 이곳에 와서 돌아가셨습니다. 말론의 가정이 베들레헴에서 이곳으로 온 것은 양식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가장이 없으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룻은 10년의 세월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인 말론과 그의 동생 기룐 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남자 없이 과부 세 명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열악한 환경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두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두 남자마저 죽어버리자 이들에게 이것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룻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행의 불행뿐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의 남자들의 죽음은 절망에 절망이었습니다. 아들이라도 있으면 희망을 가질 수 있겠지만 아들도 없고, 남편대신 대를 이어줄 동생마저도 죽었기 때문에 룻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면서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룻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친정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대해 소극적이며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들이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으로는 남자는 할례를 행해야 했습니다. 철저한 신앙고백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룻은 여인으로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신앙과 문화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달라도 극복할 수 있지만 신앙이 다르면 많은 어려움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철저하게 유일신의 신앙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졌던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환경 앞에도 시어머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동서였던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고향과 예전의 신앙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신앙은 환경을 초월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룻의 위대한 신앙에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룻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오미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룻과 오르바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지식적인 교육과 실천적인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큰 기적과 능력으로 가나안으로 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졌던 여리고의 기생 라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더니 더 좋아졌더라는 환경적인 변화를 체험하지도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열악한 환경에서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가나안 여인이 그랬습니다.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신앙입니다. 룻과 같이 우리도 어떤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열악한 환경에서 실천적인 신앙
룻과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잘 섬겼던 며느리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전해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환경에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변질로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를 따른다는 것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면 그들은 이방인입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늙은 시어머니만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고 싶고, 시어머니에 함께 하고 싶은데 자신의 미래가 없었기 때문에 오르바는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주시고 물질적인 이익을 안겨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는 인생은 지금 어떤 최고의 환경이 주어저도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에게 생명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때 주어집니다. 지금 우리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룻의 선택은 환경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가 좋은 환경을 원했다면 결코 실패한 나오미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만류하는 나오미를 향해 “어머니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미지의 땅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황금빛 청사진도 없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으로 가면 시어머니를 공양해야하는 무거운 짐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선택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고 할 때 거역할 수도 있었지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부탁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신의 의의 기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육신의 부모를 통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최고의 사랑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이 없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식에게 제한된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사랑은 제한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룻에게 나오미를 떠난다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듯이 부모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통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룻을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는 도구가 되는 복을 주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룻이 상상도 못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았던 오르바의 삶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신분으로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룻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오미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나오미를 통해 만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 땅에서 최고의 실천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육신의 부모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신앙이 실천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믿음의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남편이 일찍 죽고 그의 동생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언약의 가문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라합은 이방인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여리고에 기거하는 사람이나 짐승들은 다 죽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모두가 멸망하는데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것입니다. 룻은 남편이 죽고 희망 없는 시어머니를 따르며 결국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았던 것입니다. 마리아 역시 그는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것을 말하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순종하고 오히려 감사 찬양을 드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가운데 첫 번째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공경하며 그를 지극히 섬겼던 룻의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열악한 환경에서 만난 여호와 하나님
우리나라의 환경으로 외국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이미지보다 나쁜 이미지가 강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국 슈퍼볼의 최고 선수였던 하인스 워드의 아버지도 당시 우리나라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흑인이었습니다. 국제결혼의 대부분은 한국 여인들이며 대상은 흑인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농촌 총각들과 결혼하는 동남아 여인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축복된 결혼이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룻도 당시 모압 여인으로 그곳에 이민 온 이스라엘 총각인 말론과 결혼한 것입니다. 룻의 가정 환경에 대해서는 잘 알 수는 없으나 말론의 가정환경은 열악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며 아버지가 이곳에 와서 돌아가셨습니다. 말론의 가정이 베들레헴에서 이곳으로 온 것은 양식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가장이 없으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룻은 10년의 세월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편인 말론과 그의 동생 기룐 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남자 없이 과부 세 명만 남았습니다. 그나마 열악한 환경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두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두 남자마저 죽어버리자 이들에게 이것보다 더 열악한 환경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룻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불행의 불행뿐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에서부터 시아버지, 남편, 시동생의 남자들의 죽음은 절망에 절망이었습니다. 아들이라도 있으면 희망을 가질 수 있겠지만 아들도 없고, 남편대신 대를 이어줄 동생마저도 죽었기 때문에 룻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말하면서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룻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친정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대해 소극적이며 폐쇄적이었습니다. 이들이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으로는 남자는 할례를 행해야 했습니다. 철저한 신앙고백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룻은 여인으로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습니다.
신앙과 문화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달라도 극복할 수 있지만 신앙이 다르면 많은 어려움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철저하게 유일신의 신앙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졌던 신앙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극단적인 환경 앞에도 시어머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동서였던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고향과 예전의 신앙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신앙은 환경을 초월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룻의 위대한 신앙에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룻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오미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룻과 오르바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지식적인 교육과 실천적인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큰 기적과 능력으로 가나안으로 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가졌던 여리고의 기생 라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더니 더 좋아졌더라는 환경적인 변화를 체험하지도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신앙은 열악한 환경에서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가나안 여인이 그랬습니다.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바로 신앙입니다. 룻과 같이 우리도 어떤 환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열악한 환경에서 실천적인 신앙
룻과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잘 섬겼던 며느리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전해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환경에서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변질로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를 따른다는 것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면 그들은 이방인입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늙은 시어머니만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고 싶고, 시어머니에 함께 하고 싶은데 자신의 미래가 없었기 때문에 오르바는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켜주시고 물질적인 이익을 안겨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원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없는 인생은 지금 어떤 최고의 환경이 주어저도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에게 생명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때 주어집니다. 지금 우리의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룻의 선택은 환경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가 좋은 환경을 원했다면 결코 실패한 나오미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만류하는 나오미를 향해 “어머니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미지의 땅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미래는 황금빛 청사진도 없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으로 가면 시어머니를 공양해야하는 무거운 짐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선택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고 할 때 거역할 수도 있었지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가운데 죽어가면서도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부탁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자신의 의의 기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육신의 부모를 통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최고의 사랑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이 없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식에게 제한된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부모는 우리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사랑은 제한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룻에게 나오미를 떠난다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듯이 부모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통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룻을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는 도구가 되는 복을 주었습니다. 베들레헴에는 룻이 상상도 못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았던 오르바의 삶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신분으로 나오미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룻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나오미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나오미를 통해 만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 땅에서 최고의 실천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육신의 부모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신앙이 실천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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