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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사람을 향한 첫 계명

본문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시고 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신명기 9장 10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판의 글은 여호와 하나님이 친수로 친히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계명은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쓴 권위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적 권위로 돌판에 친히 손으로 기록하셨다는 겁니다. 제1계명, 제2계명, 이렇게 해서… 그런즉 이 계명은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또 필요에 따라서 타협되어지는 그런 덕목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이며 그의 자녀들은 반드시 거기에 순종해야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그 가운데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되는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관계되는 그러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사람에 관계되는 그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입니다. 다른 6계명에서부터 10계명까지는 나름대로 이 땅에서 우리가 죄를 짓거나 또 범죄하게 되면 회개할 기회가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자백하고 그 보혈로 정결함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은 그러나 부모님은 우리가 철이 들어서 그 부모의 공경과 사랑을 알고 깨닫고 나면 벌써 많은 경우 우리 곁을 떠나서 안 계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 계명에 대한 의무를 철저히 감당해야 된다고 봅니다.
물론 아버지 어머니라고 하여서 다 좋은 분들은 아닙니다. 부모님들도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분들입니다.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고 범죄합니다. 실수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모를 공경하고 그러한 노인들을 예를 지켜서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 요즘 어느 조직 어느 곳에 이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 권위가 살아있다고 과연 말할까 마는 그러나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하는 이 권위에 대한 영적인 진리는 아마 주님이 손으로 지으신 그 말씀이기에 영원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시험관에서 아기가 나온다 할지라도 그의 뿌리 된 부모에 대한 그 도리를 저버린다면 그때부터 인간은 파멸할 것이고 짐승의 길로 달려가지 않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 약속 있는 사람을 향한 첫 계명에서 가장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부모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두신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그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는 아주 절대적 관계인데 항상 아멘이었습니다. 노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언제나 아멘이었다고 한다면 하물며 우리들은 이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서 두말할 것도 없이 아멘하는 그런 자세가 마련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과연 믿음이 무엇이겠느냐 여러 가지 해석할 수 있겠지만은 믿음은 순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무엇이 경건의 훈련이며 무엇이 제자훈련입니까 그것이 궁극적결론은 어디에 이르러야 참된 경건이며 제자훈련이고 내가 훈련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바로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항상 예 하는 것입니다. 아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깊이 아멘할 수 있느냐 어느 정도로 깊이 아니고 넓게 아멘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경건도 또 그의 영적인 깊이도 성숙도 측량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 하나님에게 아멘하기 위하여서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아멘 예라고 하는 훈련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에게 예라는 훈련을 잘 받아야 그의 지식과 그의 따른 인격 도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이 누구냐 부모입니다. 그 부모님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그 부모에 대하여 아멘하는 훈련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보이지 않는 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서도 아멘할 수 있는 그 바탕이 마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그런 관계 이전에 그것을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권위의 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치를 따집니다. 여러 가지로 꼬박꼬박 말대꾸를 합니다. 이 젊은 며느리와 나이든 시어머니 싸움에서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치를 따져보니 분명히 어머님이 잘못되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어머니가 뭐라 그럽니까 야. 꼭 너하고 나하고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순종하려고 하느냐 내가 하는 것에 대하여 무조건 순종해라. 이게 아멘이 나올 리가 나도 기대를 안 했겠지만은 우리는 이치를 맞아야만 순종하겠다고 생각을 하냐 이거예요. 이게 바로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들에게는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부모에게 준 영적 권위를 가지고 순종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부모는 우리의 생명의 통로입니다.
내가 잘났다고 하늘에서 떨어진 줄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못났다고 해서 땅에서 어디 이렇게 시궁창에서 올라온 것이 아닙니다. 부정모유를 통해서 그들의 생명의 그릇을 통해서 내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군 다윗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보내기 이전에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새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한 아버지를 택하여서 다윗을 보내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 아프리카 흑인으로 저 유럽의 백인으로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대한민국 어느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어느 지역에 태어나게 하시기 위하여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원숭이를 동원하거나 곰을 동원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들의 아버지 어머니를 택하여서 그들의 생명의 그릇을 빌려서 저와 여러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생명의 통로가 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그릇이 이제 나이가 들어서 찌그러졌다고 우리가 발로 밟고 버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곧잘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도 업고 나는 생명 후회스러워.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다 거짓말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제가 불이야 하고 지진이야 해 가지고 막 건물이 무너지면 조금 전에 나는 괜히 태어났어. 우리 부모들 원망스러워 하는 사람들도 부리나케 여기 언제 어른들 먼저 모시고 나갈 사람 있으면 한번 손들어 봐요. 짓밟고 아우성을 지르면서 살려고 난리들 칩니다. 이게 뭡니까 생명의 중요성입니다. 자기 생명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게 실제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귀한 겁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살아있다는 그 생명 자체는 더할 수 없는 존귀한 겁니다. 그렇다면 내 생명이 그렇게 귀하다면 내 생명을 있도록 만들어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부모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 생명도 우습게 여기고 자기를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귀하게 여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귀합니까 자식이 귀합니까 그 남편이 있게 하고 자식이 있게 한 그 시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은 바로 남편을 사랑하는 길이요 아내가 사랑스럽습니까 귀합니까 그렇다면 그 장인 장모도 얼마나 존경받아야 되는 부모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명이 부모님들로 말미암아 힘들게 양육되었습니다.
그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이 부모들이 자식 양육을 위해서 수고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 키우는 것 가만히 보세요. 우리 어머니들이 또 그리고 우리 아내들이 자식들 키우는 것 보면 이건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들 같아요. 전에는 어머니 아버지 말씀에 대하여서 토를 달고 아침에 학교 가라. 밥 먹어라. 온갖 잔소리 다 들어도 꿈쩍도 안 하던 것들이 지 새끼가 아프면은 밤에 열 번도 일어납니다. 다섯 번씩 일어나서 젖 주고 또 그리고 그냥 오줌 기저귀 갈다가 오줌 세례를 그냥 받고 똥을 싸고 이렇게 나부대도 그게 들어와도 냄새 좋다 그래요. 이게 제정신이 아니죠. 어디 어머니만 그럴까요 우리들의 아버지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버지들의 수고는 얼마나 또 큽니까
한때 사회적 무리를 일으켰습니다. 잘못을 크게 해서 사회의 손가락질과 지탄을 받은 그 아들들이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 이렇게 고백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범죄 사회적 물의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것도 우리는 이해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식들이 이런 아버지를 욕할 수가 없다는 거죠. 오히려 우리 형제들은 이런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랬습니다. 왜냐 하니까 그렇게 물의를 일으켜서 그 아버지가 돈을 나름대로 어떻게 좀 착취를 했는지 모르지만은 자기를 위하여서는 한푼도 쓰지 아니하시고 오직 우리 자식들을 위하여서 다 사용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깨닫고 이만큼이라도 나름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우리 아버지가 손가락질을 받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한 그 결과인데 어떻게 우리가 그 아버지를 향하여 돌을 던질 수 있겠느냐 하는 글입니다.
나이 많은 노권사님이 운명 직전입니다. 자녀들을 손녀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옛날 일제시대 때에 아이들은 많고 집은 가난하고 먹을 것은 없고 그래서 내가 밤늦게 항상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면서 남의 집 콩나물 가게에서 콩나물을 훔쳐다가 너희들에게 죽도 쒀주고 나물도 해줬다. 내가 이제 여호와 하나님 앞에는 회개 했지만은 너희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좋은 음식을 먹이면서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키워야 되는데 남의 콩나물을 훔쳐서 너희를 먹였으니 이것이 일생 동안 얼마나 내 가슴에 아프고 죄의식이 되어서 괴로웠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운명 직전에 그 자녀들에게 그런 참 아픈 과거를 토해놓습니다. 그 자녀들이 뭐라 그럴까요 어머니 무슨 용서를 어떻게 우리가 용서를 합니까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가 잘나서 다 이렇게 건강하게 된 줄 알았는데 어머님이 남의 집에 콩나물을 훔쳐서 어린 우리의 창자를 채웠던 그것도 모르고 효도하지 못하고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 내가 참 회개한다고 자녀들이 다 부둥켜 울고 하는 가운데 귀한 권사님이 세상을 떠났다 하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부모들과 더불어 생활하시면서 또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계신 분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있기까지에는 그 부모님들이 얼마나 남모르는 여러분과 제가 모르는 아픔과 긴 한숨과 그리고 찌들린 땀을 흘렸는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때에 맞게 자주 돌아오는 그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서 얼마나 아버지는 직장에서 자기의 양심을 접어가면서 얼마의 푼돈을 모으려고 치사하게 그렇게 했느냐 이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해놓고 그런 작은 것들로 인하여 자기 마음에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었느냐 이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 부모들을 향하여 우리 자식들이 돌을 던지며 죽을 죄인이라고 지탄할 수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사실 그저 다 오늘 이렇게 남자 분들이 정장하시고 주일날만큼은 늦잠도 좀 주무시고 새벽기도 안 나왔다는 말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주일날은 푹 쉬어야 되요. 하얗습니다. 얼굴이 대단히 아주 여유가 좍좍 합니다. 그러나 직장에 가보면 어떻습니까 회사에 한번 가보면 어떻습니까 위로는 상사들이 얼마나 정년 퇴직도 전에 그저 구조조정이라는 것 들어가면서 달달 볶지요 요즘 밑에 후배들이 도대체 말을 들어먹습니까 사실 월급 봉투 하나 받는 것 얼마나 치사한지 몰라요. 여러분 그런 아픔들을 가지고 우리 부모들도 우리를 키우시고 양육하셨어요.
사실 목자는 그래도 영적인 의미와 보람을 가지고 제가 이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목자의 한달 월급을 받을 때도 피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내가 이렇다면 얼마나 초라한 인생이냐. 그러나 그보다 더한 영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감사하지요. 하물며 영적인 일도 때로 이렇게 아프고 더럽고 때로는 가슴이 아픈데 우리 남편들이요 또 우리 부모님들이 직장에서 가져오는 그 얼마의 월급에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담겨있는지 그걸 먹으면서 우리가 자랐고 그 힘들게 자란 눈물을 먹으면서 우리가 성장했는데 우리가 잘나서 내가 머리가 좋아서 출세했다고 부모님들을 외면하는 것은 기본이 양심의 문제가 아니겠냐는 겁니다.
돌이켜 봅니다. 참으로 부모 공경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떳떳한 돈을 벌어서 그 아픔을 가지고 우리를 위하여 나름대로 양심을 접어가며 수고한 그 부모님들을 노후를 잘 모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리인 것을 인정하시며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보니까 스스로 속이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말을 심는 대로 거둡니다. 생각을 심는 대로 거둡니다.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좋은 생각과 좋은 말과 축복을 심으면 그대로 됩니다. 덕을 심으면 반드시 덕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 공경을 힘들게 심게 지금 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여러분 자녀들을 통해서 그 씨앗은 여러 배로 돌아온다는 이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받지만은 이 땅의 있는 모든 것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심어야 거두는 법칙인 것을 믿으시면서 우리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는 지금 얼마나 부모를 향하여 효도를 심고 공경을 심는지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우리 부모님들을 향한 효도를 많이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자기 부모에게는 최소한의 의무도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도리도 하지 아니하면서 오늘날 그저 자기 새끼 자기 자식들만을 귀하게 여기는 이런 현실은 매우 비극이고 사실 보기가 얼마나 민망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그 자식으로부터 그런 모습으로 돌아오게 될 줄로 알아야 됩니다. 언젠가 티브이 대담에서는 대학교수가 이런 지적을 했습니다. 우리들 세대 60대는 소위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고향을 등졌고 나의 성공을 위하여 늙으신 부모를 버린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이러한 내가 효도를 논하는 이 좌담회에 과연 말할 자격이 있는지 참 두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두려운 말이지만은 사실입니다. 살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하여서 나이든 부모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나와서 사느라고 부모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자녀들은 부모 공경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그런 슬픈 세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도 심어야 되겠지만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 부모님들을 위하여서 잘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많이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씨앗을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때에 맞게 심어야 추수의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부모님들이 살아계실 때 또 저들이 침해에 걸리고 때로는 저 부모들이 병들고 연약할 때일수록 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축복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 모두가 다 늙고 죽기 직전에 축복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부모님들이 늙으시고 병들고 연약할수록 거기에는 예언자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와 권위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나이 드신 어른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계속 수를 늘려 가시는 이유는 축복하라는 겁니다. 자녀들을 향하여 그 믿음의 권세를 가지고 축복할 때 이삭이 빈 축복 야곱에게 다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빈 그대로 다 이루어진 이 믿음의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 부모님들은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우리 부모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생의 무게를 지니고 지혜를 가지고 있기에 그들을 공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재 영재 교육이 많습니다. 과학 영재 과학 천재 7살짜리가 지금 부산과학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큽니다. 그래서 수학 천재 과학 천재 이 천재들이 많아요. 음악에도 피아노 천재 바이올린의 천재가 많아 가지고 우리의 부러움도 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많은 걸 다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절대로 안 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이 뭐냐 소설 못 쓴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설이란 것은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살이의 경험과 희로애락을 다 겪은 사람이 써야 그것이 감동이 됩니다. 설사 천재 소년 10살짜리가 엄청난 자기가 노력을 해서 소설을 썼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독자들에게 감동을 울릴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예수님이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놓쳐버렸어요. 아기 예수를 잊어버렸어요. 찾고 찾아보니까 나이 많은 그 시대의 가장 쟁쟁하고도 뛰어난 학박사 율법사 서기관들과 성경을 토론하는데 저들이 답을 못하는 거예요. 저들을 이겨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바로 세상을 위하여 메시야로서 나타나시죠. 12살에 나오셔 가지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12살 나이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시고 12살 나이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승천하면 얼마나 더 좋을 텐데 왜 30세까지 그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죽음의 슬픔을 보게 하시고 그리고 가난에 찌들린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시골에서 자연 속에 바닷가에서 처박혀서 기다리게 하셨느냐 이거예요. 12살 가지고는 세상을 구원할 그러한 마음의 그릇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예수님이 어린 날에 그렇게 세상을 위하여 메시야로 일을 하셨다면은 히브리서 4장 15절에 이런 말씀은 도저히 하실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따라서 합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아멘. 우리와 한결같이 희로애락을 겪으시며 고독과 외로움과 배신과 그리고 많은 죽음의 슬픔 다 겪으셨기에 우리가 그분 앞에 가면 가만히 앉아서도 위로가 됩니다. 많은 상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 주님은 상처를 받으신 분이기에 상처를 아시는 분이기에 슬픔을 아시는 분이기에 가난을 아시는 분이기에 그래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서 모든 것을 다 내놓고도 짐을 맡길 수 있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생의 무게를 지고 지금 힘들게 고개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왜 허리가 꼬부라졌습니까 칼슘이 부족해서 골다공증이 걸려서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생의 무게를 지고 고개를 지금 힘들게 올라가는데 그분들을 향하여 내가 지식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다고 우리가 무시한다면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다윗이 아주 도망 다니는 그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 왕이 정신병자가 되가지고 이 다윗을 시기해서 잡으려고 오만 데 쫓아다닙니다. 피하다가 피하다가 드디어는 저 국경 변두리에 아둘람이라고 하는 동굴에 처박혀 숨어삽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이새와 그 형제들이 또 이 사울 왕의 핍박을 못 이겨 어떻게 갈 길을 몰라서 다윗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도 지금 목숨 하나 부지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나는 어떻게 살라고요 도망갈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아요. 성경 전후를 다 살펴보면 누구에게 찾아가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개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이방인 집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누구에게 찾아가느냐 이방 왕 모압에게 찾아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로 어떻게 하실 줄을 알기까지 내 부모를 좀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아버지의 생명을 부탁하는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몸 하나 갖추기 어려운 시점에 부모 형제까지 돌봐줘야 하는 그 힘든 순간에도 그는 부모님을 우선적으로 돌보고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필리핀 마르코스는 독재자입니다. 그가 이제 추방을 당하고 이제는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파리로 도망을 갔습니다. 가면서 많은 금괴와 돈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늙으신 어머니는 시골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전혀 모셔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늙으신 부모님은 저 필리핀 시골구석에서 그 아들 마르코스를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가 혼자서 죽어 가신 거예요. 루마니아 독재자 차후세쿠도 많은 보화는 가지고 도망가면서 늙으신 노모는 내버려둔 채 도망가다가 부하들의 총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허겁지겁 도망칠 때 부모를 모시고 다녔다는 말을 별로 듣지를 못합니다. 다윗은 그러나 달랐습니다. 그렇게 늙으신 부모님을 그 어려운 때에 모시고 다닌 거기에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이방 왕 앞에 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곧잘 그저 다윗의 위대함과 그에게 관심과 초점이 다 그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귀하게 여긴 것 이상으로 다윗의 아버지 이새도 사랑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다윗을 이 땅을 보내실 때 이스라엘의 많은 가족들 중에 이새를 선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새가 아니고는 다윗이 날 수가 없었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새를 택한 이 영적인 뜻을 다윗은 잘 알았기에 그 아버지의 영적 권위를 지키고 그 생명을 보호하는 그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온전히 이해했기에 함께 고생하며 함께 피난생활을 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고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랬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도 새치가 많이 나가지고. 그 말이 아니에요. 머리 센 사람 앞에 다 일어나라는 말이 아니라 노인을 뭐요 예절을 지켜서 대해주고 따라서 합시다.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면서 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우리의 의식에는 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건데 그게 아닙니다. 이 레위기서에는 같은 구절로 연관시켰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같은 이 절 속에 넣어 가지고 이것이 같은 비중이라는 겁니다. 무엇이 공통적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경외와 부모를 경외하는 것은 무엇이 같은 것이기에 한 구절 속에 넣었습니까 바로 그것은 권위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부모의 권위입니다. 생명의 통로가 되는 부모의 권위를 잘 인정하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도 잘 섬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효자 집에 뭐가 난다 그러지요 충신이 납니다. 임금에 대한 그 충성심은 어디서 바탕이 마련되느냐 부모의 권위를 잘 따르고 거역하지 않는 그 부모에게서 뿌리가 나온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효자 집에 충신이 나고 충신 집에 순교자가 나온다. 아멘 입니까 부모와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 동일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미친개처럼 자기를 추적해서 정말 왕답지 못한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둘람 굴에서 그리고 두 번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은 다윗은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왜요 옳고 그른 것을 따지자면 반드시 사울은 죽어야 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 부모의 권위 왕의 권위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섬기는 것과 동일한 것인 줄 알았기에 그는 피하여 숨고 여호와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시는 귀한 역사적 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누구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과 같이 영적 권위를 깊이 이해하는 자 위에 영원한 왕국을 세워주신다는 겁니다. 아멘 입니까 원래는 아브라함과 사울의 자손이 되어야 마땅한데 여호와 하나님이 사울을 피하시고 다윗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고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권위 위에 세워지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군대가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세상적인 힘이 있습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신 그 영적 권위 위에 있기 때문에 이 일을 다윗은 깊이 깨달았기에 그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고 오늘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다윗의 왕국이 되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사실 이 시대의 정치가들로부터 시작해서 출세하겠다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거역의 심사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일단은 윗사람하고 치받아야 윗사람을 뛰어넘어야 내가 이긴 것 같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더라도 권위가 제대로 지키는 데가 없습니다. 윗사람에게 대들고 반발하고 치고 기어올라야 그 사람이 똑똑하다고 인정을 받는 이런 거역의 영성의 시대에 교회라고 예외도 아니고 우리 가정이라고 예외도 아닙니다. 이런 거역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오는 이 때에 과연 다윗의 왕국처럼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또 그런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이 영적인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마땅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좋은 부모를 가지신 분들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반대로 좋지 못한 부모님들 또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받은 상처가 많다고 하면 그러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 친수로 쓰신 사람에게 준 첫 번째 계명을 잘 지키시면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대로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왜 효도해야 됩니까 자식들에게 부모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조금 더 우리가 현실적으로 늙으신 부모님 잘 공양하세요. 그들에게 가서 축복기도를 받으세요. 나이 든 노인들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들에게 별미를 해드리면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잘 살아라. 이것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노인들에게 준 영적 권위인 것입니다. 부모는 우리에게 생명의 통로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부모님들에게 힘들게 양육되어졌다는 걸 잊지 마시고 부모 공경의 또 하나의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존경을 받아야 되고 부족하지만은 우리가 효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이 친수로 쓴 약속 있는 첫 계명인 줄 믿으시면 우리 다같이 6장 2절,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건강해야 장수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먼저 윗사람의 권위에 대하여 잘 순종하시고 최선을 다해서 공경하시면 주일 십일조 그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 약속이 여러분의 가정 자자손손 다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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