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아버지 마음
본문
인터넷에 답답한 남편 스타일, 피곤한 아내 스타일 글이 실려 있습니다. 제가 남편된 사람이니 답답한 남편 스타일만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민속박문관형 - 옛날 타령이나 하며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각주를 달아놓았습니다. 민속촌에 살지 왜 나왔어.
나무꾼형 - 아내는 부모형제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신도 딸의 아버지란 사실이란 잊지 마시오.
한국은행형 - 콩나물값 얼마 목욕비 얼마 일일이 신청해서 쓰게하는 남편. 부부관계도 하청업자 대하듯 합니다. 요새 인건비나 알고 사시는지요
백화점형 - 요구조건이 많은 사람입니다. 늘 아내가 나를 위해 뭘 해 줄 것인가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 내가 아내를 위해 뭘 해 줄 것인가 좀 생각해 보시오.
성형외과형(짜집기형) - 요리는 누구처럼, 살림은 누구처럼, 자식교육은 누구처럼, 잠자리는 누구처럼. 아내를 뜯어 고쳐서 살려는 사람. 각주를 이렇게 달아놓았습니다. 너부터 고쳐!
결론은 요구가 많은 사람은 어린아이요, 내가 타인을 늘 고려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버이 같은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이겠지요. 오늘 설교의 제목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한 아이가 쓴 동시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왜 안경을 쓰실까 나를 더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쓰시겠지…"
"우리 아빠는 왜 키가 크실까 내가 어디 있나 찾으시려고 키가 크시겠지. "
한자어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목(木)에 설립(立)을 붙이고 볼견(見)을 옆에 붙이면 어버이 친(親)자가 됩니다. 자녀를 찾기 위해서, 자녀를 보살피기 위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있는 모습 - 그것이 어버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지붕위에 올라가 긴 목을 뽑아 멀리 살피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긴 비유, 가장 많이 알려진 비유, 듣는 이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회개와 전도 메시지를 위해 집나간 자식에게 초점을 맞춰볼 수는 있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기 위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의 비유라기 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이야기입니다.
잃은 돈의 비유 - 잃은 돈의 비유라기 보다 잃은 돈을 찾는 여인의 심정의 마음입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의 비유라기 보다는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에만 기록된 특수 자료입니다. 누가 신학 전체틀에서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 복음의 주제는 연약한 사함, 소외된 자, 잃은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어디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죄인을 일컬어 "탕자"라 부는 말이 없습니다. "The Lost" 잃은 자입니다. 행여 아버지가 집 떠난 아들을 보고 마음속으로라도 "탕자같은 자식" 이라고 생각한 흔적도 근거도 누가복음 아니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우리가 주인공을 알려면 그 얘기의결론을 보면 압니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소설 한 권을 읽어도, 아니 만화 한 편을 보더라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엑스트라는 칼만 지나가면 윽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총 몇 번 맞아도 다시 나물캐는 아가씨가 치료하고 다시 살아나 끝까지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이 어떠한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이 땅의 교회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와 지체들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라!"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니까 여성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누가복음의 저자가 가부장적인 선입견에 묶여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의 신학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누가만큼 여성의 권익을 부각시킨 사람도 없고, 누가만큼 당시 소외계층,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저자도 없었습니다. 누가는 오히려 누가복음 15장 세 가지 비유를 선택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를 적정하게 안배시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잃은 돈을 찾는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어서 아버지 마음이라기 보다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면 그렇게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2. 아버지 됨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일컫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족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일컬어 교장이라고 부르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를 일컬어 사장님이라 부르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드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내 삶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신관이 결정된다. "
루터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 신학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진노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하는 동안 특별히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은 세 명의 왕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왕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친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왕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기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무서운 저주가 있다면 아버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북한 공산 사회를 보십시오. 부모를 떠나 탁아소에서 총싸움하며 자란 아이,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시무시해지고 포악해 져만 가고 있습니까 그 사회가 얼마나 황폐되어져만 가고 있습니까
심리학자는 어버이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감정 가운데 거절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인간이 경험한 가장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절감정이 내 안에서 치유받지 못하면 인생을 풀어가는 모든 키가 거절 감정,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이 상해합니다. 자신이 용납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극한의 비난과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분노를 드러냅니다. 때로 애정에 굶주려 합니다. 조금만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집착증을 드러냅니다. 쉽게 이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때로 일에 몰두하여 성공하기도 하고 봉사 사업을 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이유 때문이 아니고 인정과 존경 욕구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작은 실수에도 야단과 저주를 퍼부어 댑니다. 화를 쏟아 냅니다. 쉽게 실망합니다. 또 다른 거절 감정을 자녀들에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의 신화를 가정속에 이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모두 아버지는 되었지만 아버지 마음을 배우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위기가 있다면 가정의 위기요, 가정의 위기가 있다면 곧 아버지 됨의 위기가 있습니다. 오늘 전세계 화두는 아버지를 살리자! 아버지의 마음을 새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
4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12살이 되면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15살쯤 되면 아버지는 구식이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낍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야 차라리 없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27살쯤 되면 제법 아는 것도 있고 판단이 옳을 때도 있다고 가끔은 느낍니다.
32살쯤 되면 인생의 문제를 내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참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60세이 넘어서면 내 아버지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모두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고 느끼게 된답니다.
3. 타락 : 아버지를 떠남
첫 얘기를 낳아 길러본 얘기 엄마들이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하는 말이 있지요 "엄마, 내가 애낳아 길러 보니 엄마 맘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나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자식 키우는 부모를 보십시요. 그토록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정성,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깨닫고 마냥 감사해 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식들은 부모곁을 떠나겠답니다. 여호와 하나님 곁을 떠나겠다는 인생의 몸부림, 그 자식 붙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성경에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요 인류 역사속에 흐르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에덴 동산의 풍요로움도 모자라서 선악과 먹겠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곁을 떠나서 혼자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을 피해서 나 혼자 일어서 보겠다고 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 없이 살려는 몸부림, 이것이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요. "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합니다. 처리할 권리까지 요구합니다. 이는 중동사회의 전통에 의하면 아버지 없이 사는게 낫겠다는 선언입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결국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먼나라입니다. 먼나라가 어디입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전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먼 나라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먼 나라였습니다. 신비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가족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나라였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먼나라로 가라! 아버지를 떠나 뭔가를 보여줘라. 이것이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너는 아버지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너는 여호와 하나님 처럼될 거야. 선악과 먹어. 먹지마 먹지마, 하지마 하지마, 지겹지 않니 이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어. 아버지 곁을 떠나! 이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때, 그 자식 재산 다 잃을 것 알면서도 아버지는 속아줍니다. 아니 믿어 주기로 작정합니다. 왜요 자식은 재산보다 크기 때문에. 재산을 버리고 아들을 얻겠다는 거지요.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 자식을 공부나 성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존재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의 능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들은 얘기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자수 성가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큰 빌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자식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몇 번 어머니가 안된다고 해도 빌딩이 있는 것을 아니까 막무가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사업 자금을 만들어 주었는데 사업이 잘못되어서 마침내 빌딩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이 하는 사업이 안될 것 모르셨습니까" "알았지요. " "그런데 왜 돈을 만들어 주셨습니까" "왜 빌딩 팔도록 허락해 주었습니까" "줘야지요. 안 주면 원수가 되니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준 것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보면 그 자식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은 나를 빌딩 주인으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돈 많은 과부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딩 다 팔아 치우고 나니 이제는 그 아들이 아들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 아들 나를 어머니로 받아 준 것입니다. 나는 재산 잃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하늘이 준 마음 아니겠습니까
4. 아버지 마음 : 영혼의 안식처
아버지를 떠나 많은 재산을 들고 먼 나라로 갔던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3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풋내기 정도야 유혹감,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 빼앗은 다음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사정없이 폐기처분해 버리고 맙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일에 지쳤을때, 17절 "스스로 돌이켜"
무슨 얘기입니까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미리 각본을 써 봅니다. 아들은 아버지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거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건적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처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온다. 날마다 동네 어귀에 나가 동구밖을 살핍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하여 20절에서 "측은히"여긴다고 했습니다. 측은히 영어 성경에 compassion - com 함께, passion 느낀다. 아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아버지. 아들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받아 주는 아버지. 아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는 아버지. Compassion! 그 아버지의 용서와 치유,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는 어릴때 개구장이였습니다. 소 먹이러 산에 올라갔다가 기마전을 합니다. 제가 올라서서 기마전을 하다가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팔이 뚝 부러졌지요. 울고 집에 내려왔는데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야 쑥쑥 자란다. 팔 부러지고 나면 더 튼튼해 진다. " 어머니가 얼마나 잔인하게 여겨졌는지. 그날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할머니가 내 팔 붙들고 흐느껴 웁니다. 조용히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는 벽을 향하여 나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 어머니의 마음이요 내 아버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버이라면, 공동체의 리더라면, 돌아오는 아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올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며 찾은 것은 단순히 양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본문 17절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여,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마음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버림받은 아들의 쉼터였습니다.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V. 아버지 마음으로!
아버지 가슴에 못 박고 간 자식, 아버지 말 안듣고 자기 맘대로 하다 결국 망해버린 못난 자식, 그 보라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게 인간의 심보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요. 아버지는 무조건 받아 줍니다. 무조건 용서합니다. 이놈아, 이 꼴이 뭐냐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 뭘 했냐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삶 - 묻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 한마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립니다. 용서를 빌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십시요. 세상 문제가 다 해결되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돈을 다 찾아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경기가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통일 소식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건강이 온전해져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아들이 돌아왔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온전해 졌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잃은 줄 알았던 자식, 죽은 줄 알았던 자식, 돌아왔으니 마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빌 하이블스는 교회를 섬기면서 나는 균형잡힌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로 알았다. 성도들이 균형잡힌 인격을 가지면 나는 건강한 신앙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잃은 자를 향하여 구원해야 될 그 사람들을 향하여 사탄에게 빼앗긴 그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 할 때는 오히려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가 건강한 교회임을 알았다. 울안에 99마리 양보다 한 마리 잃은 양을 향하여 오늘도 눈물 짖는 아버지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인격이요 신앙이요 건강한 교회임을 알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버지 마음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가진 리더! 아버지 마음을 가진 어버이, 아버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젊고 많이 배운 자식들이 늙어가는 내 부모를 바라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셀리더들이 셀가족을 대할 때 아버지 마음으로, 셀가족 모두 리더를 따를 때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가 성도들을 대할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성도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의 가장 작은 약점, 허물이 보이면 쉽게 비판하는 사람, 마냥 불편스러워하는 사람, 아직 아버지 마음을 얻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입니다. 읽는 이들에게 짠~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인데, 그 가운데 "아버지의 우산"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시절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글입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푸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철사조각, 유리조각 줍고 신문지나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냥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요.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우유 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하는데 물이 툭툭 튀며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받아도 더 이상 양동이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났는지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이골목 저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위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허덕대며 우산을 쓰고 그 아들을 위해서 지붕을 수리하고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비를 맞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눈물 짖는다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 주님! 이 땅에 상처난 아버지의 마음들을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안에 아버지의 마음들이 회복되어지고 넘쳐나게 하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민속박문관형 - 옛날 타령이나 하며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각주를 달아놓았습니다. 민속촌에 살지 왜 나왔어.
나무꾼형 - 아내는 부모형제도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줄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신도 딸의 아버지란 사실이란 잊지 마시오.
한국은행형 - 콩나물값 얼마 목욕비 얼마 일일이 신청해서 쓰게하는 남편. 부부관계도 하청업자 대하듯 합니다. 요새 인건비나 알고 사시는지요
백화점형 - 요구조건이 많은 사람입니다. 늘 아내가 나를 위해 뭘 해 줄 것인가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 내가 아내를 위해 뭘 해 줄 것인가 좀 생각해 보시오.
성형외과형(짜집기형) - 요리는 누구처럼, 살림은 누구처럼, 자식교육은 누구처럼, 잠자리는 누구처럼. 아내를 뜯어 고쳐서 살려는 사람. 각주를 이렇게 달아놓았습니다. 너부터 고쳐!
결론은 요구가 많은 사람은 어린아이요, 내가 타인을 늘 고려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버이 같은 아버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이겠지요. 오늘 설교의 제목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한 아이가 쓴 동시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아빠는 왜 안경을 쓰실까 나를 더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쓰시겠지…"
"우리 아빠는 왜 키가 크실까 내가 어디 있나 찾으시려고 키가 크시겠지. "
한자어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목(木)에 설립(立)을 붙이고 볼견(見)을 옆에 붙이면 어버이 친(親)자가 됩니다. 자녀를 찾기 위해서, 자녀를 보살피기 위해서, 나무 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고 있는 모습 - 그것이 어버지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의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며 지붕위에 올라가 긴 목을 뽑아 멀리 살피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긴 비유, 가장 많이 알려진 비유, 듣는 이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회개와 전도 메시지를 위해 집나간 자식에게 초점을 맞춰볼 수는 있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기 위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 잃은 양의 비유라기 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이야기입니다.
잃은 돈의 비유 - 잃은 돈의 비유라기 보다 잃은 돈을 찾는 여인의 심정의 마음입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 - 잃은 아들의 비유라기 보다는 잃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에만 기록된 특수 자료입니다. 누가 신학 전체틀에서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 복음의 주제는 연약한 사함, 소외된 자, 잃은자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어디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죄인을 일컬어 "탕자"라 부는 말이 없습니다. "The Lost" 잃은 자입니다. 행여 아버지가 집 떠난 아들을 보고 마음속으로라도 "탕자같은 자식" 이라고 생각한 흔적도 근거도 누가복음 아니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떤 이야기든지 우리가 주인공을 알려면 그 얘기의결론을 보면 압니다.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소설 한 권을 읽어도, 아니 만화 한 편을 보더라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엑스트라는 칼만 지나가면 윽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총 몇 번 맞아도 다시 나물캐는 아가씨가 치료하고 다시 살아나 끝까지 마무리를 장식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이 어떠한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이 땅의 교회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와 지체들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라!"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니까 여성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누가복음의 저자가 가부장적인 선입견에 묶여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의 신학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누가만큼 여성의 권익을 부각시킨 사람도 없고, 누가만큼 당시 소외계층,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저자도 없었습니다. 누가는 오히려 누가복음 15장 세 가지 비유를 선택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를 적정하게 안배시켜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잃은 돈을 찾는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어서 아버지 마음이라기 보다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부르는게 좋겠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면 그렇게 이해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2. 아버지 됨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일컫고 있습니다. 교회를 가족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일컬어 교장이라고 부르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는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를 일컬어 사장님이라 부르는 곳도 없습니다. 교회는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드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떠한가 내 삶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신관이 결정된다. "
루터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루터 신학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언제나 진노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하는 동안 특별히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은 세 명의 왕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세 왕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친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왕이란 것입니다. 그들의 통치 스타일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섬기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무서운 저주가 있다면 아버지 마음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북한 공산 사회를 보십시오. 부모를 떠나 탁아소에서 총싸움하며 자란 아이,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시무시해지고 포악해 져만 가고 있습니까 그 사회가 얼마나 황폐되어져만 가고 있습니까
심리학자는 어버이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감정 가운데 거절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은 인간이 경험한 가장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절감정이 내 안에서 치유받지 못하면 인생을 풀어가는 모든 키가 거절 감정,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작은 일에도 쉽게 마음이 상해합니다. 자신이 용납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극한의 비난과 적개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원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분노를 드러냅니다. 때로 애정에 굶주려 합니다. 조금만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집착증을 드러냅니다. 쉽게 이단에 빠지기도 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때로 일에 몰두하여 성공하기도 하고 봉사 사업을 크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이유 때문이 아니고 인정과 존경 욕구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작은 실수에도 야단과 저주를 퍼부어 댑니다. 화를 쏟아 냅니다. 쉽게 실망합니다. 또 다른 거절 감정을 자녀들에게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거절의 신화를 가정속에 이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 모두 아버지는 되었지만 아버지 마음을 배우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위기가 있다면 가정의 위기요, 가정의 위기가 있다면 곧 아버지 됨의 위기가 있습니다. 오늘 전세계 화두는 아버지를 살리자! 아버지의 마음을 새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
4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12살이 되면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15살쯤 되면 아버지는 구식이야,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낍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는 골동품이야 차라리 없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27살쯤 되면 제법 아는 것도 있고 판단이 옳을 때도 있다고 가끔은 느낍니다.
32살쯤 되면 인생의 문제를 내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참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60세이 넘어서면 내 아버지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모두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만 못하다고 느끼게 된답니다.
3. 타락 : 아버지를 떠남
첫 얘기를 낳아 길러본 얘기 엄마들이 친정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하는 말이 있지요 "엄마, 내가 애낳아 길러 보니 엄마 맘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요. 아버지 마음을 배우고 나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자식 키우는 부모를 보십시요. 그토록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그 많은 시간, 그 많은 정성,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이 깨닫고 마냥 감사해 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처럼 자식들은 부모곁을 떠나겠답니다. 여호와 하나님 곁을 떠나겠다는 인생의 몸부림, 그 자식 붙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 이것이 성경에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요 인류 역사속에 흐르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에덴 동산의 풍요로움도 모자라서 선악과 먹겠답니다. 이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곁을 떠나서 혼자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을 피해서 나 혼자 일어서 보겠다고 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 없이 살려는 몸부림, 이것이 타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요. " 죽기도 전에 유산을 요구합니다. 처리할 권리까지 요구합니다. 이는 중동사회의 전통에 의하면 아버지 없이 사는게 낫겠다는 선언입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결국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먼나라입니다. 먼나라가 어디입니까 무조건적인 사랑이 전혀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먼 나라였습니다. 평화가 없는 먼 나라였습니다. 신비해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가족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나라였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먼나라로 가라! 아버지를 떠나 뭔가를 보여줘라. 이것이 사탄의 목소리입니다. 너는 아버지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너는 여호와 하나님 처럼될 거야. 선악과 먹어. 먹지마 먹지마, 하지마 하지마, 지겹지 않니 이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어. 아버지 곁을 떠나! 이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그때, 그 자식 재산 다 잃을 것 알면서도 아버지는 속아줍니다. 아니 믿어 주기로 작정합니다. 왜요 자식은 재산보다 크기 때문에. 재산을 버리고 아들을 얻겠다는 거지요.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그 자식을 공부나 성적으로 만나지 않습니다. 존재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의 능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들은 얘기입니다.
이북에서 피난 나와서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 자수 성가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큰 빌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 있는 자식이 성장하면서 사업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몇 번 어머니가 안된다고 해도 빌딩이 있는 것을 아니까 막무가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사업 자금을 만들어 주었는데 사업이 잘못되어서 마침내 빌딩까지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그 자식이 하는 사업이 안될 것 모르셨습니까" "알았지요. " "그런데 왜 돈을 만들어 주셨습니까" "왜 빌딩 팔도록 허락해 주었습니까" "줘야지요. 안 주면 원수가 되니까요. 망할 것 알면서도, 준 것 망해서 어머니가 고생하는 것 보면 그 자식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은 나를 빌딩 주인으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돈 많은 과부로 밖에 안 보였습니다. 그런데 빌딩 다 팔아 치우고 나니 이제는 그 아들이 아들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 아들 나를 어머니로 받아 준 것입니다. 나는 재산 잃고 아들을 얻었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하늘이 준 마음 아니겠습니까
4. 아버지 마음 : 영혼의 안식처
아버지를 떠나 많은 재산을 들고 먼 나라로 갔던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본문 13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시골 풋내기 정도야 유혹감, 먹이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 빼앗은 다음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사정없이 폐기처분해 버리고 맙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일에 지쳤을때, 17절 "스스로 돌이켜"
무슨 얘기입니까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미리 각본을 써 봅니다. 아들은 아버지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거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건적으로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처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그날부터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온다. 날마다 동네 어귀에 나가 동구밖을 살핍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하여 20절에서 "측은히"여긴다고 했습니다. 측은히 영어 성경에 compassion - com 함께, passion 느낀다. 아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아버지. 아들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받아 주는 아버지. 아들의 연약함을 함께 아파하는 아버지. Compassion! 그 아버지의 용서와 치유, 사랑은 끝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저는 어릴때 개구장이였습니다. 소 먹이러 산에 올라갔다가 기마전을 합니다. 제가 올라서서 기마전을 하다가 땅에 굴러 떨어졌습니다. 팔이 뚝 부러졌지요. 울고 집에 내려왔는데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래야 쑥쑥 자란다. 팔 부러지고 나면 더 튼튼해 진다. " 어머니가 얼마나 잔인하게 여겨졌는지. 그날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할머니가 내 팔 붙들고 흐느껴 웁니다. 조용히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는 벽을 향하여 나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내 어머니의 마음이요 내 아버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버이라면, 공동체의 리더라면, 돌아오는 아들의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돌아올 생각을 한 것은 단순히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이 돌아오며 찾은 것은 단순히 양식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본문 17절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여, 아버지께,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마음을 찾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버림받은 아들의 쉼터였습니다.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었습니다.
V. 아버지 마음으로!
아버지 가슴에 못 박고 간 자식, 아버지 말 안듣고 자기 맘대로 하다 결국 망해버린 못난 자식, 그 보라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이게 인간의 심보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요. 아버지는 무조건 받아 줍니다. 무조건 용서합니다. 이놈아, 이 꼴이 뭐냐 나무라지 않습니다. 어디 가서 뭘 했냐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삶 - 묻지 않아도 너무나 뻔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웠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 한마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녹여 버립니다. 용서를 빌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온 아들 때문에 기쁨에 겨워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십시요. 세상 문제가 다 해결되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돈을 다 찾아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경기가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통일 소식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건강이 온전해져서 기뻐하는 것 아닙니다.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아들이 돌아왔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온전해 졌으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잃은 줄 알았던 자식, 죽은 줄 알았던 자식, 돌아왔으니 마냥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마음입니다.
빌 하이블스는 교회를 섬기면서 나는 균형잡힌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로 알았다. 성도들이 균형잡힌 인격을 가지면 나는 건강한 신앙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잃은 자를 향하여 구원해야 될 그 사람들을 향하여 사탄에게 빼앗긴 그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 할 때는 오히려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교회가 건강한 교회임을 알았다. 울안에 99마리 양보다 한 마리 잃은 양을 향하여 오늘도 눈물 짖는 아버지 마음,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인격이요 신앙이요 건강한 교회임을 알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랑하는 한소망 가족 여러분!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버지 마음을 나누며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가진 리더! 아버지 마음을 가진 어버이, 아버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젊고 많이 배운 자식들이 늙어가는 내 부모를 바라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셀리더들이 셀가족을 대할 때 아버지 마음으로, 셀가족 모두 리더를 따를 때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가 성도들을 대할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성도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도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 공동체의 가장 작은 약점, 허물이 보이면 쉽게 비판하는 사람, 마냥 불편스러워하는 사람, 아직 아버지 마음을 얻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이란 책이 있습니다.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을 묶은 책입니다. 읽는 이들에게 짠~ 하는 감동을 주는 책인데, 그 가운데 "아버지의 우산"이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시절 달동네에 살던 사람이 어른이 되어 회상하는 글입니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하며 고생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푸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철사조각, 유리조각 줍고 신문지나 모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냥 창피하게 여겨졌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돈을 조금 모아 식당을 차렸지요. 그런데 실패하고 맙니다. 어머니와 우유 배달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로 부상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습니다. 시험공부를 해야하는데 물이 툭툭 튀며 짜증스러웠습니다. 물방울을 받아도 더 이상 양동이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화가 났는지 휑하니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났는데도 아프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이골목 저골목을 찾다가 돌아오는데 지붕위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합니다. 허덕대며 우산을 쓰고 그 아들을 위해서 지붕을 수리하고 우산을 받쳐들고 있는 비를 맞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눈물 짖는다는 겁니다. 이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 주님! 이 땅에 상처난 아버지의 마음들을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안에 아버지의 마음들이 회복되어지고 넘쳐나게 하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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