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본문
성경에는 명령문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양을 치라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말씀들이 전부 명령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명령문이 많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모든 명령에 어느 만큼 복종하느냐 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신앙에 대해서 눈 높이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의 책임은 회당에 모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당 출석은 꼭 해야 한다. ”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교회 나가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말씀입니다만 실제로 저는 “교회 잘 다닌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교회 잘 다닌다”는 얘기는 “잘 다니지는 않지만 보통 수준으로는 다닌다”는 말도 성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학생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있고 잘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교회 잘 다니는 사람과 잘 다니지는 않지만 보통 수준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출석하는 사람과 정상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에서 배운 내용을 어느 만큼 자기 생활에 적용시키느냐로 따지는 것이지, 교회 나오면 백 점이고 안 나오면 빵 점으로 채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1년 내내 교회 예배를 안 빼먹은 것은 신앙 생활 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출석을 정상적으로 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는 다시 따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단 교회 출석으로만 신앙을 따집니다.
거기서 더 열심을 부리면 그 다음에는 어느 만큼 열심히 기도하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성경 읽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봉사하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전도하는지 등등 주로 종교적인 형태로 신앙을 따집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수두룩한 명령문들은 꼭 그렇게 종교적인 형태로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신앙 생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금이야 꼬박꼬박 내건 말건 교회 출석만 정상적으로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비방하지 말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어른을 공경하라, 남편에게 복종하라, 아내를 사랑하라는 얘기는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이라기보다 오히려 바른 생활 교육 같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시킬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상한 일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종교 행위로 나타나지 않고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은근히 부담감을 갖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책임이 교회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것이라고 해도 버거운데, 그것만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멀었다는 뜻으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일석이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으로 어른을 공경하고, 정성껏 불쌍한 사람을 돌보고, 말할 때마다 주의하여 선한 말만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으로 인정은 받을지언정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신앙 생활로까지 인정받습니다.
어떤 고아가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백 점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백 점을 맞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성적표에도 백 점으로 기록될 것이고, 나중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효도는 아닙니다.
단지 자기만 열심히 한 것이고, 자기만 기분 좋은 것으로 끝납니다.
부모가 있는 학생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있는 학생도 백 점을 맞으면 물론 기분 좋습니다.
자기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도 같이 기분이 좋습니다.
효도로 치면 단연 으뜸입니다. 효도 중에 그만한 효도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신앙 생활까지 인정받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사업, 살림살이, 연애, 공부 등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단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 점수를 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은 종교 행위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부담이 되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신바람 나는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효심으로만 따집니다만 교회에서는 신앙의 한 척도로 부모 공경을 얘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효성이 없는 것 이전에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제대로 공경하면 효도도 물론 효도입니다만 신앙 생활도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는 세속적인 일보다 신앙적인 일이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잘못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변두리 과목’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신성적이라는 말은 없었고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있을 때였는데, 본고사 과목인 국, 영, 수는 주요 과목이고, 나머지 국사, 세계사, 정치경제, 지리, 사회문화, 생물, 기술 등은 일반 과목입니다.
그리고 예비고사 과목에 들어가지 않는 과목들 - 음악, 미술, 불어, 교련 등을 가리켜서 변두리 과목이라고 했습니다.
음악, 미술은 못해도 대학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또 국사나 세계사를 잘하는 것보다는 국, 영, 수를 잘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마치 변두리 과목보다는 일반 과목이 중요하고 일반 과목보다는 국, 영, 수가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청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 “목사님, 저는 아직도 예수님보다 제 여자 친구가 좋습니다. 예수님과 여자 친구 중에 택하라고 하면 목사님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제 여자 친구를 택하겠습니다. ”
그 청년 얘기가 왜 잘못 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자기 여자 친구를 감히 예수님보다 앞세우느냐 당연히 예수님이 우선이고 여자 친구는 그 다음이라야 한다. ”가 아닙니다.
신앙을 잘못 적용해서 틀렸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그렇게 옹색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에게는 미술이나 음악보다 국사나 세계사가 중요하고 국사나 세계사보다 영어나 수학이 중요합니다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여자 친구가 중요하냐 예수가 중요하냐”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택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의 경우에 “교제를 하되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교제를 하고 있느냐”를 따져야지, “여자 친구가 중요하냐, 예수가 중요하냐” 하고 따지는 것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집안 일보다는 교회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모시고 있는 시어머니 식사를 챙겨드릴 틈도 없이 교회 봉사를 하면 효도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잘한 일이 아니라 부모님을 모시는 방법이 성경적이 아니어서 틀린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교회 봉사가 먼저냐, 시어머니 식사가 먼저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방법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가”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에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이 있으면 “네 자식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있을 법한데,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굳이 계명으로 정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있는 본성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다릅니다.
계명으로 정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어려운지를 물어보면 아마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 본문이 가장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계명들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십시오.
다른 아홉 가지 계명에는 “이 계명을 지키면 어떻게 하겠다”라는 반대 급부가 없는데 유독 오늘 본문에만 반대 급부가 있습니다.
다른 계명들에는 단지 우리가 지켜야 할 내용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너희가 살인하지 않으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 기름진 땅을 나눠주겠다. ”,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않으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 ”, “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않으면 내가 돈으로 보상해 주겠다. ”가 아닙니다.
그냥 “살인하지 말찌니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도적질하지 말찌니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 본문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여호와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부모를 공경하면 어떤 보상이 있는지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집에서 어린애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만 얘기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라, 이번에 성적이 오르면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주마.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것 같은데 그것이 제대로 안 된다는 명백한 반증입니다.
애들이 집에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에게 야단맞았다고 하면서 시무룩하게 지냅니다.
애들이 야단맞을 일을 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애들은 야단맞으면서 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고등학생쯤 되면 엄마에게 야단맞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는 “엄마에게 야단 맞았다”고 하지 않고 “엄마와 싸웠다”고 합니다.
“엄마와 싸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엄마에게 야단맞을 일을 한 주제에 부모의 권위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패륜아라는 뜻입니다.
감히 부모를 상대로 싸웠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 철이 없을 때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까지도 굴복시켜서 자기 고집을 세우는 것이 잘하는 일인 줄 압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3개월 동안 아버지 병 수발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조금씩조금씩 돌아가시는 것을 3개월 동안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3개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고2가 되면 수학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고1만 마치면 모든 학생들의 관심이 수학여행에 집중됩니다.
제 딸이 마침 고1인데, 제 딸에게 물어보니까 일주일에 수업이 36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1 때는 55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만 다섯 시간이었고 월, 화, 수, 목, 금요일은 전부 열 시간씩이었습니다.
교실 한쪽에 시간표가 붙어 있는데 그 시간표를 보면 점심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습니다.
정말 아찔합니다.
게다가 월요일마다 주초고사를 보았고 토요일마다 주말고사를 보았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꼬박 1년간 그렇게 생활하다가 2학년이 되면 유일한 탈출구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수학여행입니다.
수학여행을 가면 그 기간 동안에는 공부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그 사실만으로 모두에게 커다란 매력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간다는 가정통지문을 나눠주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갖다 드렸습니다.
간혹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은 경제 사정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수학여행을 안 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좋다. 수학여행을 보내줄 테니 그 대신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해라. ”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갔다오면 되는데 공연한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제 형이 저보다 4살 많은데 형이 수학여행을 갈 때도 아버지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때 형은 선선히 약속을 하고는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건수만 있으면 “수학 여행만 보내주면 공부 열심히 한다고 약속해 놓고 뭐 하느냐”는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형이 남보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법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수학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는 걸핏하면 잔소리를 듣는 것을 제가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알겠습니다. 수학여행 보내주면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고분고분 말씀드리는 대신 “알았습니다. 그러면 수학여행 안 가겠습니다. ” 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는 애가 타셨습니다.
그 날부터 날이면 날마다 제 방에 오셔서 저를 채근하셨습니다.
“남들은 다 가는데 혼자만 안 가면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께 갔다 와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말씀드리고 다녀와라. ”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는 수학 여행 안 가고 대신 공부 안 하겠다는데 왜 그러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수학여행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습니다.
내일이면 출발입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완강했습니다.
어머니만 홀로 애를 태우시면서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제 방을 드나드셨습니다.
출발 당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속상함을 감추면서 억지로 이불 뒤집어쓰고 늦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미리 챙겨 둔 여행 가방을 내미셨습니다.
어제 아버지께서 학교에 가서 돈을 내고 왔으니까 얼른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내심 바라던 대로 일이 진행된 것입니다만 “안 간다는데 왜 그러느냐”고 마지막으로 심통을 부리고는 못 이기는 척하고 가방을 받아 들고 수학여행을 가 줬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통쾌하게()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자식이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저도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가장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철이 없던 그 당시에는 아버지한테 본때를 보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났습니다.
“나도 고집이 있는 사람인데 날 뭘로 알고……” 하는 패륜적인 발상으로 너무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이 되었습니다.
철이 없던 시절에는 제가 잘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자식은 자기 스스로 자기편이 되어서 부모와 싸웁니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편이 되어서 자식과 싸웁니다.
부모 생각에는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편이고 자식도 자식편이니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늘 자식이 이깁니다.
그리고 자식은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압니다.
적어도 철이 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압니다.
어떤 집 애가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는, 그 집 부모가 전에는 애를 사랑하지 않다가 그때부터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집 애가 전에는 철이 없었는데 이제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바른생활 교과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시려는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거라” 하는 한가한 타령()을 늘어놓을 틈이 없는 책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왜 한가한 타령이겠습니까만, 한가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성경은 진지하고 시급하고 심각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이 땅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까마귀를 가리켜서 반포조(反哺鳥)라고 합니다.
어미가 늙으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효도를 미덕으로 알고 있는 인간이 보기에는 상당히 훈훈한 모습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까마귀에게 효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단지 본능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효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고급스러운 감정입니다.
효성이 깊은 사람은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나라에서 표창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땅에 속한 일에 불과합니다.
고작해야 부모 없는 천애 고아가 열심히 노력해서 백 점 맞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효도하는 것은 효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향기로운 예배로 열납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효도도 우리에게만 있는 특권인 셈입니다.
여러분은 이 특권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양을 치라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말씀들이 전부 명령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명령문이 많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모든 명령에 어느 만큼 복종하느냐 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신앙에 대해서 눈 높이를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너희의 책임은 회당에 모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당 출석은 꼭 해야 한다. ”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교회 나가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말씀입니다만 실제로 저는 “교회 잘 다닌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교회 잘 다닌다”는 얘기는 “잘 다니지는 않지만 보통 수준으로는 다닌다”는 말도 성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학생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있고 잘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교회 잘 다니는 사람과 잘 다니지는 않지만 보통 수준으로는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출석하는 사람과 정상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 생활은 교회에서 배운 내용을 어느 만큼 자기 생활에 적용시키느냐로 따지는 것이지, 교회 나오면 백 점이고 안 나오면 빵 점으로 채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1년 내내 교회 예배를 안 빼먹은 것은 신앙 생활 잘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출석을 정상적으로 한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는 다시 따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일단 교회 출석으로만 신앙을 따집니다.
거기서 더 열심을 부리면 그 다음에는 어느 만큼 열심히 기도하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성경 읽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봉사하는지, 어느 만큼 열심히 전도하는지 등등 주로 종교적인 형태로 신앙을 따집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수두룩한 명령문들은 꼭 그렇게 종교적인 형태로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세금을 꼬박꼬박 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신앙 생활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금이야 꼬박꼬박 내건 말건 교회 출석만 정상적으로 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비방하지 말라,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어른을 공경하라, 남편에게 복종하라, 아내를 사랑하라는 얘기는 어떻습니까
신앙 생활이라기보다 오히려 바른 생활 교육 같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시킬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상한 일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 모여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종교 행위로 나타나지 않고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은근히 부담감을 갖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책임이 교회 출석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것이라고 해도 버거운데, 그것만 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멀었다는 뜻으로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일석이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으로 어른을 공경하고, 정성껏 불쌍한 사람을 돌보고, 말할 때마다 주의하여 선한 말만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착한 사람으로 인정은 받을지언정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신앙 생활로까지 인정받습니다.
어떤 고아가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백 점을 맞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백 점을 맞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성적표에도 백 점으로 기록될 것이고, 나중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효도는 아닙니다.
단지 자기만 열심히 한 것이고, 자기만 기분 좋은 것으로 끝납니다.
부모가 있는 학생은 어떻습니까
부모가 있는 학생도 백 점을 맞으면 물론 기분 좋습니다.
자기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부모도 같이 기분이 좋습니다.
효도로 치면 단연 으뜸입니다. 효도 중에 그만한 효도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것을 신앙 생활까지 인정받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 사업, 살림살이, 연애, 공부 등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단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 점수를 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은 종교 행위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부담이 되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신바람 나는 이야기입니다.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효심으로만 따집니다만 교회에서는 신앙의 한 척도로 부모 공경을 얘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효성이 없는 것 이전에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제대로 공경하면 효도도 물론 효도입니다만 신앙 생활도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는 세속적인 일보다 신앙적인 일이 상대적으로 우선 순위를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잘못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변두리 과목’이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신성적이라는 말은 없었고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있을 때였는데, 본고사 과목인 국, 영, 수는 주요 과목이고, 나머지 국사, 세계사, 정치경제, 지리, 사회문화, 생물, 기술 등은 일반 과목입니다.
그리고 예비고사 과목에 들어가지 않는 과목들 - 음악, 미술, 불어, 교련 등을 가리켜서 변두리 과목이라고 했습니다.
음악, 미술은 못해도 대학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또 국사나 세계사를 잘하는 것보다는 국, 영, 수를 잘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마치 변두리 과목보다는 일반 과목이 중요하고 일반 과목보다는 국, 영, 수가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청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 “목사님, 저는 아직도 예수님보다 제 여자 친구가 좋습니다. 예수님과 여자 친구 중에 택하라고 하면 목사님께는 죄송합니다만 저는 제 여자 친구를 택하겠습니다. ”
그 청년 얘기가 왜 잘못 되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자기 여자 친구를 감히 예수님보다 앞세우느냐 당연히 예수님이 우선이고 여자 친구는 그 다음이라야 한다. ”가 아닙니다.
신앙을 잘못 적용해서 틀렸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그렇게 옹색한 것이 아닙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에게는 미술이나 음악보다 국사나 세계사가 중요하고 국사나 세계사보다 영어나 수학이 중요합니다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여자 친구가 중요하냐 예수가 중요하냐”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다른 것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택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의 경우에 “교제를 하되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교제를 하고 있느냐”를 따져야지, “여자 친구가 중요하냐, 예수가 중요하냐” 하고 따지는 것은 신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집안 일보다는 교회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모시고 있는 시어머니 식사를 챙겨드릴 틈도 없이 교회 봉사를 하면 효도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잘한 일이 아니라 부모님을 모시는 방법이 성경적이 아니어서 틀린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도 “교회 봉사가 먼저냐, 시어머니 식사가 먼저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방법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가”가 기준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계명 중에 다섯 번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이 있으면 “네 자식을 사랑하라”라는 말도 있을 법한데,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굳이 계명으로 정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적으로 있는 본성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다릅니다.
계명으로 정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어려운지를 물어보면 아마 사람마다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 본문이 가장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른 계명들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십시오.
다른 아홉 가지 계명에는 “이 계명을 지키면 어떻게 하겠다”라는 반대 급부가 없는데 유독 오늘 본문에만 반대 급부가 있습니다.
다른 계명들에는 단지 우리가 지켜야 할 내용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너희가 살인하지 않으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 기름진 땅을 나눠주겠다. ”,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않으면 내가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게 해주겠다. ”, “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않으면 내가 돈으로 보상해 주겠다. ”가 아닙니다.
그냥 “살인하지 말찌니라”, “간음하지 말찌니라”, “도적질하지 말찌니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유독 오늘 본문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여호와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부모를 공경하면 어떤 보상이 있는지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집에서 어린애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만 얘기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해라, 이번에 성적이 오르면 인라인스케이트를 사주마.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것 같은데 그것이 제대로 안 된다는 명백한 반증입니다.
애들이 집에서 엄마에게 야단을 맞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에게 야단맞았다고 하면서 시무룩하게 지냅니다.
애들이 야단맞을 일을 하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애들은 야단맞으면서 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고등학생쯤 되면 엄마에게 야단맞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는 “엄마에게 야단 맞았다”고 하지 않고 “엄마와 싸웠다”고 합니다.
“엄마와 싸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엄마에게 야단맞을 일을 한 주제에 부모의 권위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패륜아라는 뜻입니다.
감히 부모를 상대로 싸웠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인간의 탈을 쓰고는 차마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 철이 없을 때는 그것을 모릅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까지도 굴복시켜서 자기 고집을 세우는 것이 잘하는 일인 줄 압니다.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3개월 동안 아버지 병 수발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조금씩조금씩 돌아가시는 것을 3개월 동안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 3개월 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고2가 되면 수학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고1만 마치면 모든 학생들의 관심이 수학여행에 집중됩니다.
제 딸이 마침 고1인데, 제 딸에게 물어보니까 일주일에 수업이 36시간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고1 때는 55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만 다섯 시간이었고 월, 화, 수, 목, 금요일은 전부 열 시간씩이었습니다.
교실 한쪽에 시간표가 붙어 있는데 그 시간표를 보면 점심 시간이 지나도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아 있습니다.
정말 아찔합니다.
게다가 월요일마다 주초고사를 보았고 토요일마다 주말고사를 보았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꼬박 1년간 그렇게 생활하다가 2학년이 되면 유일한 탈출구가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수학여행입니다.
수학여행을 가면 그 기간 동안에는 공부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그 사실만으로 모두에게 커다란 매력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간다는 가정통지문을 나눠주기에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갖다 드렸습니다.
간혹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은 경제 사정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수학여행을 안 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좋다. 수학여행을 보내줄 테니 그 대신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해라. ”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갔다오면 되는데 공연한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제 형이 저보다 4살 많은데 형이 수학여행을 갈 때도 아버지께서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 때 형은 선선히 약속을 하고는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고두고 잔소리를 들었습니다.
건수만 있으면 “수학 여행만 보내주면 공부 열심히 한다고 약속해 놓고 뭐 하느냐”는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형이 남보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법 잘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수학 여행을 갔다 오고 나서는 걸핏하면 잔소리를 듣는 것을 제가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 알겠습니다. 수학여행 보내주면 갔다 와서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고분고분 말씀드리는 대신 “알았습니다. 그러면 수학여행 안 가겠습니다. ” 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옆에 있던 어머니는 애가 타셨습니다.
그 날부터 날이면 날마다 제 방에 오셔서 저를 채근하셨습니다.
“남들은 다 가는데 혼자만 안 가면 어떻게 하느냐 아버지께 갔다 와서 열심히 공부한다고 말씀드리고 다녀와라. ”
아무리 말씀하셔도 저는 수학 여행 안 가고 대신 공부 안 하겠다는데 왜 그러냐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수학여행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습니다.
내일이면 출발입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완강했습니다.
어머니만 홀로 애를 태우시면서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제 방을 드나드셨습니다.
출발 당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안 가도 되는 속상함을 감추면서 억지로 이불 뒤집어쓰고 늦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미리 챙겨 둔 여행 가방을 내미셨습니다.
어제 아버지께서 학교에 가서 돈을 내고 왔으니까 얼른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내심 바라던 대로 일이 진행된 것입니다만 “안 간다는데 왜 그러느냐”고 마지막으로 심통을 부리고는 못 이기는 척하고 가방을 받아 들고 수학여행을 가 줬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통쾌하게() 이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자식이 있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저도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있는 가장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물론 철이 없던 그 당시에는 아버지한테 본때를 보였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났습니다.
“나도 고집이 있는 사람인데 날 뭘로 알고……” 하는 패륜적인 발상으로 너무도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슴 아픈 기억이 되었습니다.
철이 없던 시절에는 제가 잘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자식은 자기 스스로 자기편이 되어서 부모와 싸웁니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편이 되어서 자식과 싸웁니다.
부모 생각에는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자식편이고 자식도 자식편이니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면 늘 자식이 이깁니다.
그리고 자식은 그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압니다.
적어도 철이 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압니다.
어떤 집 애가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는, 그 집 부모가 전에는 애를 사랑하지 않다가 그때부터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집 애가 전에는 철이 없었는데 이제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바른생활 교과서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시려는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거라” 하는 한가한 타령()을 늘어놓을 틈이 없는 책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왜 한가한 타령이겠습니까만, 한가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만큼 성경은 진지하고 시급하고 심각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이 땅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까마귀를 가리켜서 반포조(反哺鳥)라고 합니다.
어미가 늙으면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주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효도를 미덕으로 알고 있는 인간이 보기에는 상당히 훈훈한 모습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까마귀에게 효성에 대한 감각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단지 본능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효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고급스러운 감정입니다.
효성이 깊은 사람은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심지어는 나라에서 표창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땅에 속한 일에 불과합니다.
고작해야 부모 없는 천애 고아가 열심히 노력해서 백 점 맞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효도하는 것은 효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향기로운 예배로 열납하십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효도도 우리에게만 있는 특권인 셈입니다.
여러분은 이 특권을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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