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겨자씨를 심듯이 전도를 심읍시다
본문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본문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이야기를 계속하여 이야기 하셨으므로 예수님은 두 가지 상황을 우리들에게 시사하시고 계십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들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므로 교회 외적인 성장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누룩은 가루 속에 번져 나가서 떡이 되는 과정을 통하여 집안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의 성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를 함께 하신 것은 예수 안에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통하여 어떻게 개개인의 신앙과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 가야 하는 가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비유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설교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통하여 그 의도를 풀어나가는 설교의 한 방법입니다.
그 모습을 본문 35절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5)
따라서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찾을수 있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11월 셋째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무성교회에서는 영적인 추수감사절로 선포하며 영과 육의 추수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서 진정한 감사가 있는 축제의 감사절기로 지키려고 합니다.
지난주부터 하루에 한번 이상씩 전도대상자를 위해 기도하며 전도하여 추수감사절에는 전도 대상자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번 영적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신앙과 우리 교회가 성장하는 귀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함께 찾아보고 우리도 겨자씨를 심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를 심는다는 것은 곧 전도하는 일입니다.
은혜의 성령께서 말씀 듣는 여러분에게 아름답게 임하여 깨닫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겨자씨를 심어야 합니까
1. 작은 것의 가치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세상에 있는 씨앗 중에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설명할 때에 언제나 겨자씨만큼 작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를 비유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고 아울러 우리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기워 바다에 빠트릴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작은 것이 귀하다는 말씀을 우리들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은 큰 것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고 우습게 여기다가 커다란 사고를 만나게 되는 것을 많이 바라보게 봅니다.
아주 작은 부실공사로 말미암아 아주 큰 재앙을 부르는 결과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수도 없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엽전 두닢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참 신앙을 찾아 칭찬하신 주님의 마음이 바로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가는 목자의 마음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한 마리의 양, 아주 작은 것을 귀중히 여기시는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의 한 조각 빵,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너무도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3년의 기근을 세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적을 만들게 하신 것도 같은 뜻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어린아이가 드린 작은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도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도시락이 오 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만들어 내어 작은 것의 소중함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영국의 한 목사관에서 불이 났습니다.
자녀들이 많은 이 가정은 불로 인하여 당황한 중에도 온 식구들을 이끌고 무사히 대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열 명이 넘는 자녀들을 점검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내외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요한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불타는 건물 이층의 창문에서 요한이 울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급히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그 어린 것을 품에 안아 무사히 내려와서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불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대여섯살난 그 어린아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가 바로 요한 웨슬리 목사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4집중에 한집이 술집인 영국을 회개시키며 미국과 세계교회를 성령의 충만으로 이끈 주인공은 이 불속에서 살아난 아주 작은 어린아이를 통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 10살난 어린 소년이 1페니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신약성서를 한권 사서 인도에 보내달라고 헌금 봉투에 썼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돈을 조금 더 보태어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도 아이도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20년 후에 그 목사님이 인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마을에 갔더니 그 동네가 모두 선교되어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중에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시작되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선교사가 와서 신약성경을 전해준 것이 복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면서 다 떨어진 성경책 한권을 가져와 보여 주었습니다.
그 성경 표지 바로 다음 장에서 20년 전에 10살 짜리 아이가 서명한 사인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팡파레를 울리는 거창한 기념식으로부터 시작되지 아니합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같은 것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영적 추수감사절에 인도하는 이들 중에 그들이나 그들 자녀 중에서 요한 웨슬레 같은 훌륭한 목사님이 나오지 않는 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 주일학교 학생들 중에서 세계를 뒤흔들 여호와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 모두 정성된 마음으로 겨자씨를 심읍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무성교회와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니다.
2. 놀라운 성장의 능력이 겨자씨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물이 되고 그것이 더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갈릴 호수가에는 4 미터나 된 겨자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겨자씨는 작으니 그것이 성장하면 무한대로 성장할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작은 겨자씨라도 반드시 심어야 할 우리의 사명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실 때에 동방박사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그것도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순종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의 증거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작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분으로 바뀐 존재가 되셨습니까
전 세계에서 쓰여진 책의 절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음악사의 절반 정도는 예수님의 영향 속에 있습니다.
전 세계 문화가, 전 세계의 언어가, 전 세계의 철학이 바로 예수님을 배제 할 수가 없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의 산 증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고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미국의 이사벨이라는 여인은 해산을 하다가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을 고칠려고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전쟁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들에게 써 달라고 보냈습니다. 이 돈을 기금으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로부터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어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로 인해서 그 학교가 세워진지 창립 2주년이 되던 날 이사벨 부인의 남편인 데이비드씨가 이 학교의 초청을 받아 창립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본 데이비드씨는 매우 감격했습니다. 그때 학교의 건물을 증축하고 있었는데 재정이 부족하여 매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데이비드씨는 돌아가 자신의 집과 땅을 저당잡혀 약 6만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교육받고 있는 이사벨 여자 중 고등학교입니다.
불구의 한 여인이 이 땅에 심은 한 작은 겨자씨 같은 사랑이 얼마나 크게 성장하여 열매맺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거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겨자씨를 심읍시다!!
우리가 심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할 것을 믿고 소망하며 열심히 겨자씨를 심읍시다.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기도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오기 싫다는 우리들의 전도 대상자를 정중히 초대하여 교회로 모셔 오는 것이 겨자씨를 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놀랍도록 성장시켜 주시는 나무처럼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무성교회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또 다른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물이 되고 나중에 나무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 나무에서 양질의 겨자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말씀을결론 맺지 않으셨습니다.
그 나무에 많은 새가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열매 맺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른 것에까지 즉 겨자나무와 무관한 새들까지 깃들이는 도움을 주어 또 다른 선을 완성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겨자씨를 심어야 할 이유입니다.
또 다른 선의 완성을 묘사하는 말씀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의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으리라"(단4:10-12)
다니엘이 환상 중에 큰 나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열매맺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만민의 식물이 되고 들짐승의 그늘이 되고 새는 깃들이고 혈기있는 자들은 식물을 얻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겨자씨를 심는 전도의 열매를 이루면 그저 한 영혼만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통하여 또 다른 폭팔적인 열매와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 모드 겨자씨를 심읍시다!!
이 한 주간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을 찾아 권면하고 초청하여 열매맺기에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가 한사람 전도하는 것이 작지만 작은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성장을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선도 이루어 새들이 깃들일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겨자씨를 심은 교회 성도들이 되어 추수감사절에 육적 영적 감사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 중에 본문의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이야기를 계속하여 이야기 하셨으므로 예수님은 두 가지 상황을 우리들에게 시사하시고 계십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들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므로 교회 외적인 성장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누룩은 가루 속에 번져 나가서 떡이 되는 과정을 통하여 집안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의 성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를 함께 하신 것은 예수 안에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통하여 어떻게 개개인의 신앙과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 가야 하는 가를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비유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설교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통하여 그 의도를 풀어나가는 설교의 한 방법입니다.
그 모습을 본문 35절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5)
따라서 우리가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찾을수 있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11월 셋째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무성교회에서는 영적인 추수감사절로 선포하며 영과 육의 추수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서 진정한 감사가 있는 축제의 감사절기로 지키려고 합니다.
지난주부터 하루에 한번 이상씩 전도대상자를 위해 기도하며 전도하여 추수감사절에는 전도 대상자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 안에 들어오게 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번 영적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신앙과 우리 교회가 성장하는 귀한 기회로 삼아야 할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함께 찾아보고 우리도 겨자씨를 심어야 하겠습니다.
겨자씨를 심는다는 것은 곧 전도하는 일입니다.
은혜의 성령께서 말씀 듣는 여러분에게 아름답게 임하여 깨닫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겨자씨를 심어야 합니까
1. 작은 것의 가치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세상에 있는 씨앗 중에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앗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설명할 때에 언제나 겨자씨만큼 작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를 비유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고 아울러 우리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기워 바다에 빠트릴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작은 것이 귀하다는 말씀을 우리들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은 큰 것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고 우습게 여기다가 커다란 사고를 만나게 되는 것을 많이 바라보게 봅니다.
아주 작은 부실공사로 말미암아 아주 큰 재앙을 부르는 결과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수도 없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보잘것없는 엽전 두닢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참 신앙을 찾아 칭찬하신 주님의 마음이 바로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나가는 목자의 마음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한 마리의 양, 아주 작은 것을 귀중히 여기시는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의 한 조각 빵,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너무도 작은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3년의 기근을 세 식구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적을 만들게 하신 것도 같은 뜻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어린아이가 드린 작은 도시락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도 보잘 것 없고 작은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며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도시락이 오 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역사를 만들어 내어 작은 것의 소중함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영국의 한 목사관에서 불이 났습니다.
자녀들이 많은 이 가정은 불로 인하여 당황한 중에도 온 식구들을 이끌고 무사히 대피하였습니다. 그리고 열 명이 넘는 자녀들을 점검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내외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요한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불타는 건물 이층의 창문에서 요한이 울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급히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그 어린 것을 품에 안아 무사히 내려와서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불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대여섯살난 그 어린아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가 바로 요한 웨슬리 목사입니다. 18세기 영국의 사회를 변화시키고 4집중에 한집이 술집인 영국을 회개시키며 미국과 세계교회를 성령의 충만으로 이끈 주인공은 이 불속에서 살아난 아주 작은 어린아이를 통하여 시작된 것입니다.
영국의 어느 교회에 10살난 어린 소년이 1페니의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신약성서를 한권 사서 인도에 보내달라고 헌금 봉투에 썼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돈을 조금 더 보태어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도 아이도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20년 후에 그 목사님이 인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마을에 갔더니 그 동네가 모두 선교되어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 중에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시작되었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선교사가 와서 신약성경을 전해준 것이 복음의 시초가 되었다고 하면서 다 떨어진 성경책 한권을 가져와 보여 주었습니다.
그 성경 표지 바로 다음 장에서 20년 전에 10살 짜리 아이가 서명한 사인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팡파레를 울리는 거창한 기념식으로부터 시작되지 아니합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같은 것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영적 추수감사절에 인도하는 이들 중에 그들이나 그들 자녀 중에서 요한 웨슬레 같은 훌륭한 목사님이 나오지 않는 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 주일학교 학생들 중에서 세계를 뒤흔들 여호와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번 주간에 우리 모두 정성된 마음으로 겨자씨를 심읍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무성교회와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니다.
2. 놀라운 성장의 능력이 겨자씨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2)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물이 되고 그것이 더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갈릴 호수가에는 4 미터나 된 겨자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서 겨자씨는 작으니 그것이 성장하면 무한대로 성장할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작은 겨자씨라도 반드시 심어야 할 우리의 사명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실 때에 동방박사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나셨습니다.
그것도 방이 없어서 마구간 말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순종과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의 증거를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작은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어떤 분으로 바뀐 존재가 되셨습니까
전 세계에서 쓰여진 책의 절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간접으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음악사의 절반 정도는 예수님의 영향 속에 있습니다.
전 세계 문화가, 전 세계의 언어가, 전 세계의 철학이 바로 예수님을 배제 할 수가 없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의 산 증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고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미국의 이사벨이라는 여인은 해산을 하다가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을 고칠려고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전쟁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들에게 써 달라고 보냈습니다. 이 돈을 기금으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로부터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어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로 인해서 그 학교가 세워진지 창립 2주년이 되던 날 이사벨 부인의 남편인 데이비드씨가 이 학교의 초청을 받아 창립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본 데이비드씨는 매우 감격했습니다. 그때 학교의 건물을 증축하고 있었는데 재정이 부족하여 매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데이비드씨는 돌아가 자신의 집과 땅을 저당잡혀 약 6만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교육받고 있는 이사벨 여자 중 고등학교입니다.
불구의 한 여인이 이 땅에 심은 한 작은 겨자씨 같은 사랑이 얼마나 크게 성장하여 열매맺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거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겨자씨를 심읍시다!!
우리가 심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할 것을 믿고 소망하며 열심히 겨자씨를 심읍시다.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의 기도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오기 싫다는 우리들의 전도 대상자를 정중히 초대하여 교회로 모셔 오는 것이 겨자씨를 심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놀랍도록 성장시켜 주시는 나무처럼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무성교회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또 다른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물이 되고 나중에 나무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 나무에서 양질의 겨자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말씀을결론 맺지 않으셨습니다.
그 나무에 많은 새가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의 열매 맺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른 것에까지 즉 겨자나무와 무관한 새들까지 깃들이는 도움을 주어 또 다른 선을 완성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겨자씨를 심어야 할 이유입니다.
또 다른 선의 완성을 묘사하는 말씀이 다니엘서에 있습니다.
"내가 침상에서 나의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데 고가 높더니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고는 하늘에 닿았으니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의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으리라"(단4:10-12)
다니엘이 환상 중에 큰 나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열매맺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만민의 식물이 되고 들짐승의 그늘이 되고 새는 깃들이고 혈기있는 자들은 식물을 얻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겨자씨를 심는 전도의 열매를 이루면 그저 한 영혼만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통하여 또 다른 폭팔적인 열매와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 모드 겨자씨를 심읍시다!!
이 한 주간 우리의 전도대상자들을 찾아 권면하고 초청하여 열매맺기에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가 한사람 전도하는 것이 작지만 작은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성장을 여호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선도 이루어 새들이 깃들일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겨자씨를 심은 교회 성도들이 되어 추수감사절에 육적 영적 감사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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