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한 영혼 구원의 기쁨
본문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는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4-7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많이 모여 왔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 앞에 있으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기쁨과 능력을 얻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야가 이 땅에 찾아온 사명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선한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장은 이상적인 것은 못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책임은 더욱 크고 무거웠으며, 또한 양들을 잃어버리고 양들이 상처를 받는 일이 흔했습니다. 본문의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이 없었지므로 그 순간부터 목자의 모든 관심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집중되고, 그는 잃어버린 양만을 생각하고, 양을 찾을 때까지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 목자는 왜 이렇게까지 양을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그 잃어버린 양이 목자의 양이었기 때문이요, 또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의 본질과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자기의 보호방법이 자구책이 없는 동물이며 먹이도 구하지 못하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존하는 동물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의 잃어버린 양은 바로 우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을 싫어하시고 다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한 마리의 양을 향한 목자의 관심 속에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개인을 향한 관심을 봅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있는 아흔 아홉 양들만 아닌 밖에 있는 잃은 양 한 마리까지도 기꺼이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삭개오를 만나셨고, 도마를 만나주셨고, 수가성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개개인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개개인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제일 큰 기쁨은 한 영혼 구원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영혼구원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관심도 없이 삶이 은혜롭게 잘 엮어져나간다면 물론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한 영혼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그 삶은 위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평안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마음보다는 세상으로 더욱 더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연단으로 다져진 신앙생활이 아니면 범죄의 유혹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국내문제를 평정한 후에 한가한 중에 범죄하게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 편안해지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본래 거저 얻은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피땀 흘리는 노력이 없이 거저 얻은 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좋은 일 하기보다는 유흥비로 써버리기 쉬운 것처럼, 한 영혼 구원해 보려는 노력 없이 믿는 신앙생활은 참된 기쁨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별 탈 없이 잘 지냈다는 것, 그것이 감사할 일만은 아닙니다. 참된 감사는 한 영혼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그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모든 정성을 투자하여 얻은 기쁨이 있을 때 진정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몇 달 전 조선일보에 한 미담이 실려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만성 신부전증으로 누워있는 43세의 아버지에게 16살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자기의 신장 하나를 떼 주어 아버지를 구해냈다는 기사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가 앓아 누워 있기에 어머니가 나가 장사를 하는데, 이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지
극히 돌보아 일찍이 효행상을 타기도 한 아들이었습니다. 신문기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그렇게 신장을 내 줄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이 학생은 "내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 내 신장 하나쯤 내 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가지고 그것이 무슨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고 의아해 하더란 말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그렇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서 그렇게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상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죄악 가운데서, 죽을 자리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깊이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생각으로만 끝일 수 있겠습니까 그를 위하여 말로만 감사하다고 한다면 그처럼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로만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고, 말로만 감사하지 말고 실제적 행동에서 얼마나 또 다른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컨데, 우리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유명한 의사를 만나서 나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의사를 전해주어 죽을 병을 앓는 사람이 고침을 받게 해주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나만 고침 받고 전해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간성은 의심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나와 같은 죽을 죄인을 주님께 인도하지 않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고 믿음 생활한다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썩어질 물질만 도움 받으면 그것이 도리어 큰 은혜인줄로만 아는 크리스천들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보면, 부모로부터 받기만을 원합니다.
당연히 자기를 낳았으면 모든 것을 해 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그리고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들어서 자기 자식들을 키워 보면 그때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비로소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공기 주고, 햇빛 주고, 때를 따라 바람 주고, 비를 내려주고, 가을이면 오곡백화 무르익어 거두게 하시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어 먹은 것 소화되게 하는, 그런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는 평소에는 그것을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으레이 내가 건강해서, 으레이 내가 능력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크리스천들이라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줄 깨닫게 됩니다.
노력 없이 받기만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잘 지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전도에 힘써야 할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아야 그것이 참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있을 때 좀 전도 사역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건강이 있을 때 교회 봉사활동에도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없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은혜를 은혜인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도 주시고, 내게 단란한 가정도 주시고, 내게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는데 이제 우리는 왜 그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까
요즘 또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한 영혼을 위한 구원 운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천국에서 제일 큰 기쁨은 한 영혼 구원의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은 99마리 양과 잃은 양 1마리에 대한 얘기입니다.
어느 곳에 양 100마리를 치는 목자가 있는데, 한 마리 양을 잃었을 때 그 잃은 양을 찾아 결국 어깨에 메고 올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한 영혼의 구원 문제와 연결 지었습니다.
천국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주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니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양을 보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울 안에 들지 않은 양을 위하여서도 찾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 있는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주님의 모범을 따라 그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노력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지요 이 절실한 추적을 보십시오. 다른 무엇으로도 대치 될 수 없는 바로 그 사람, 그 형제를 찾아나서는 주님의 절실한 열망과 애정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이 추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목자는 양을 한 번만 찾다가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 계속적인 찾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전도 방법이어야 합니다. 그가 예수를 알 때까지 그가 성경을 깨달을 때까지 구원의 복음을 이해할 때까지, 예수를 영접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찾는 이 끈질긴 찾음, 이것이 양을 향한 목자의 추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찾아 나서는 종교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죄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상을 받는 것이 일반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것으로 더 기뻐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기쁨이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바로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큰 은혜는 위로의 은혜 보다 도전의 은혜요, 성취의 은혜보다 헌신의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는 기쁨!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 그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일에 분주할 때는 이것을 미처 모르고 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세상의 것들은 다 낡아지고 헤어지고 떨어져 없어집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된 것 뿐"인 것이 세상의 일이란 것입니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인생들이 살았다고 별별 교만한 말들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국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 한 영
혼이 구원 얻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4절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흡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계속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다니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낮에는 물론 밤에도 새벽에도 찾았을 것이요, 하루 이틀에 찾지 못하면 한 주간, 아니 할 달도 찾았을 것입니다. 아니 평생 찾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한 번 전도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양을 추적하여 마침내 찾았습니다. 목자의 집념이 성공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집념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인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만일 이 말씀 앞에 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아직도 성령께서 나를 사랑하는 증거인줄 알고, 이제 한 영혼을 찾도록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한 분은 누구입니까 목자입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해 보면 비로소 이것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돌아오면 그 자신보다 내가 더 기쁩니다. 사실, 양은 자기의 위험을 잘 모르지만 목자는
압니다. 그는 광야를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그래서 한 영혼을 구원할 때, 기뻐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전도는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많이 모여 왔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 앞에 있으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기쁨과 능력을 얻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야가 이 땅에 찾아온 사명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선한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장은 이상적인 것은 못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책임은 더욱 크고 무거웠으며, 또한 양들을 잃어버리고 양들이 상처를 받는 일이 흔했습니다. 본문의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이 없었지므로 그 순간부터 목자의 모든 관심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집중되고, 그는 잃어버린 양만을 생각하고, 양을 찾을 때까지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 목자는 왜 이렇게까지 양을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그 잃어버린 양이 목자의 양이었기 때문이요, 또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의 본질과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자기의 보호방법이 자구책이 없는 동물이며 먹이도 구하지 못하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존하는 동물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의 잃어버린 양은 바로 우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을 싫어하시고 다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한 마리의 양을 향한 목자의 관심 속에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개인을 향한 관심을 봅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있는 아흔 아홉 양들만 아닌 밖에 있는 잃은 양 한 마리까지도 기꺼이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삭개오를 만나셨고, 도마를 만나주셨고, 수가성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개개인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개개인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제일 큰 기쁨은 한 영혼 구원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면 영혼구원에 대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관심도 없이 삶이 은혜롭게 잘 엮어져나간다면 물론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한 영혼 구원의 기쁨이 없다면 그 삶은 위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평안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마음보다는 세상으로 더욱 더 기울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긴장과 적당한 연단으로 다져진 신앙생활이 아니면 범죄의 유혹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 국내문제를 평정한 후에 한가한 중에 범죄하게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 편안해지면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본래 거저 얻은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피땀 흘리는 노력이 없이 거저 얻은 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좋은 일 하기보다는 유흥비로 써버리기 쉬운 것처럼, 한 영혼 구원해 보려는 노력 없이 믿는 신앙생활은 참된 기쁨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별 탈 없이 잘 지냈다는 것, 그것이 감사할 일만은 아닙니다. 참된 감사는 한 영혼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그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모든 정성을 투자하여 얻은 기쁨이 있을 때 진정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몇 달 전 조선일보에 한 미담이 실려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만성 신부전증으로 누워있는 43세의 아버지에게 16살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자기의 신장 하나를 떼 주어 아버지를 구해냈다는 기사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가 앓아 누워 있기에 어머니가 나가 장사를 하는데, 이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지
극히 돌보아 일찍이 효행상을 타기도 한 아들이었습니다. 신문기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그렇게 신장을 내 줄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이 학생은 "내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 내 신장 하나쯤 내 준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을 가지고 그것이 무슨 잘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고 의아해 하더란 말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그렇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서 그렇게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상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죄악 가운데서, 죽을 자리에서 구원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가 그렇게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그 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깊이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면 그저 생각으로만 끝일 수 있겠습니까 그를 위하여 말로만 감사하다고 한다면 그처럼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로만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고, 말로만 감사하지 말고 실제적 행동에서 얼마나 또 다른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컨데, 우리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유명한 의사를 만나서 나았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의사를 전해주어 죽을 병을 앓는 사람이 고침을 받게 해주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나만 고침 받고 전해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인간성은 의심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나와 같은 죽을 죄인을 주님께 인도하지 않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고 믿음 생활한다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썩어질 물질만 도움 받으면 그것이 도리어 큰 은혜인줄로만 아는 크리스천들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보면, 부모로부터 받기만을 원합니다.
당연히 자기를 낳았으면 모든 것을 해 주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 그리고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들어서 자기 자식들을 키워 보면 그때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비로소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공기 주고, 햇빛 주고, 때를 따라 바람 주고, 비를 내려주고, 가을이면 오곡백화 무르익어 거두게 하시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어 먹은 것 소화되게 하는, 그런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는 평소에는 그것을 은혜로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으레이 내가 건강해서, 으레이 내가 능력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크리스천들이라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인줄 깨닫게 됩니다.
노력 없이 받기만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잘 지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전도에 힘써야 할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아야 그것이 참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있을 때 좀 전도 사역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건강이 있을 때 교회 봉사활동에도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없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후회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은혜를 은혜인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도 주시고, 내게 단란한 가정도 주시고, 내게 일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는데 이제 우리는 왜 그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까
요즘 또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한 영혼을 위한 구원 운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 천국에서 제일 큰 기쁨은 한 영혼 구원의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은 99마리 양과 잃은 양 1마리에 대한 얘기입니다.
어느 곳에 양 100마리를 치는 목자가 있는데, 한 마리 양을 잃었을 때 그 잃은 양을 찾아 결국 어깨에 메고 올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한 영혼의 구원 문제와 연결 지었습니다.
천국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주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니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양을 보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울 안에 들지 않은 양을 위하여서도 찾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 있는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주님의 모범을 따라 그 이름을 불러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노력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지요 이 절실한 추적을 보십시오. 다른 무엇으로도 대치 될 수 없는 바로 그 사람, 그 형제를 찾아나서는 주님의 절실한 열망과 애정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자는 이 추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목자는 양을 한 번만 찾다가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이 계속적인 찾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전도 방법이어야 합니다. 그가 예수를 알 때까지 그가 성경을 깨달을 때까지 구원의 복음을 이해할 때까지, 예수를 영접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찾는 이 끈질긴 찾음, 이것이 양을 향한 목자의 추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찾아 나서는 종교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죄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상을 받는 것이 일반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것으로 더 기뻐하는 종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기쁨이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바로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큰 은혜는 위로의 은혜 보다 도전의 은혜요, 성취의 은혜보다 헌신의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는 기쁨!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 그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일에 분주할 때는 이것을 미처 모르고 지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 세상의 것들은 다 낡아지고 헤어지고 떨어져 없어집니다.
전도자의 말처럼 "헛되고 헛된 것 뿐"인 것이 세상의 일이란 것입니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인생들이 살았다고 별별 교만한 말들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사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천국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인한 기쁨보다 한 영
혼이 구원 얻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4절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흡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계속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다니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낮에는 물론 밤에도 새벽에도 찾았을 것이요, 하루 이틀에 찾지 못하면 한 주간, 아니 할 달도 찾았을 것입니다. 아니 평생 찾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한 번 전도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양을 추적하여 마침내 찾았습니다. 목자의 집념이 성공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집념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인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만일 이 말씀 앞에 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아직도 성령께서 나를 사랑하는 증거인줄 알고, 이제 한 영혼을 찾도록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한 분은 누구입니까 목자입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해 보면 비로소 이것을 실감하실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돌아오면 그 자신보다 내가 더 기쁩니다. 사실, 양은 자기의 위험을 잘 모르지만 목자는
압니다. 그는 광야를 압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그래서 한 영혼을 구원할 때, 기뻐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전도는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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