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내 집을 채우라 (10)
본문
우리 사람에게는 쉼터와 배움터와 일터가 있어야 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쉼터는 가정이요 배움터는 학교요 일터는 직장입니다. 사람에게 배움터와 일터가 중요하지만 쉼터가 없으면 배움도 일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쉼터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정 외에 더 중요한 쉼터가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있기 때문에 영과 육의 쉼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영육의 쉼터는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쉼터로 초청하십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죄의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와서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하라고 초청하십니다.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은 멍에는 일하는 것인데 배우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실 때 여러 가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일꾼이 되게 하시고 또 배우게 하시고 안식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한 삶의 형태를 잔치하는 삶으로 비유해 주셨습니다. 물론 배우는 것도 행복이요 일하는 것도 행복이요 쉬는 것도 행복이지만 예수님은 잔치하는 삶을 가장 큰 행복으로 말씀하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즐거운 표현을 잔치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행복의 높은 경지를 말할 때 잔치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잔칫집 같은 가정이 된다든지, 잔칫집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잔치는 아무나 하지는 못합니다. 즐거움과 부요가 있어야 합니다. 잔치는 모두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 잔치하는 종교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다"고 합니다. 대개 절에 가면 계속 향불을 피우기 때문에 초상집에 있는 기분이 납니다. 그리고 향교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잔치하는 집과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깊이 믿으면 믿을수록 허무하다고 말하며, 유교는 완고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잔치집 같은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날 교회 나와서 기쁨을 얻고 즐거움을 누리며 성도간에 따뜻한 사랑이 오가는 잔치집의 분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잔치집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먹을 것이 풍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로 붐벼야 합니다. 잔치를 배설하고는 빈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잔치집의 초청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사람'을 '임금'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잔치는 임금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잔치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생일 잔치도 있고, 회갑 잔치도 있고, 칠순 잔치도 있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잔치도 있습니다. 또 자녀들의 진학이나 승진, 성공을 기뻐하는 잔치도 있습니다.
혼인 잔치는 모두 기뻐하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가장 즐거운 잔치인데 이런 혼인 잔치에 대한 즐거움을 천국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나 신약을 보나 천국 잔치는 혼인 잔치로 비유되어 있는데 이 혼인, 곧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잔치에 대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잔치에 초청받을 때는 참석해 주는 것이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잔치는 주인이 다 준비해 놓고 초청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잔치를 다 준비해 놓은후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며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류에게 천국을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다 준비되어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물로 나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기 때문에 와서 은혜로 이 잔치에 참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잔치로 표현하고, 천국을 잔치로 표현해서 천국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초청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18절-20절을 보면 거절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변명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잔치의 초대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세 종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밭을 샀습니다. 둘재는 소 다섯 겨리를 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는 유대인들이 밭을 갈 때 소 두 마리가 함께 밭을 갈기 때문에 밭 가는 소를 말합니다. 일하는 소를 샀다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의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못가겠다"라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당시는 농경사회로서 모든 재산은 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재산증식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초청에 못가겠다"라고 거절한 것입니다. 또 소 다섯 겨리를 샀다는 말은 "나는 사업이 바빠서 못 가겠다"라는 것입니다. 또 '장가 들었으니 못 간다는 것'은 "나는 인생의 향락에 젖어 있으니 갈 시간이 없다"라는 거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의 초청을 받고 있으나 준비된 이 잔치에 거절을 표합니다. 이럴 때 주인은 참으로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여 놓고 사람들이 와 주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초청을 거절당하는 주인의 심정을 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거리와 골목은 도시를 가리킵니다. 사실 가난한 자들은 원래 연회석에 초대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밭을 사러 가거나, 장가 들러 가거나, 소를 사러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그들은 "데려오라. 골목으로, 거리로 가서 데려오라"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으나 아직도 빈 자리가 있어 이번에는 데려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길과 산울은 대개 농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말한다면 처음에 초청받고 거절했던 사람들은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며 후에 "골목으로 가서 저들을 다 데려오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 땅에 나셨음에도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천국 잔치에 원래 초청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초청받게 될 것을 이 말씀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 초청받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초청받은 사람들이 거절했을 때 집주인이 노하였습니다. 21절에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집주인을 이야기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노했다는 말은 분노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분노한 사람은 주인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종들입니다. 거절한 사람들 때문에 분을 냈는데 거절했던 사람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음성을 듣는 종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밖에 나가서 전파하여 저들에게 전해줄 사명자들이 우리 종입니다. 주인이 노했다고 하는 말은 지금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을 향하여 노한 것이지만 그 분노가 종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분노의 음성을 그대로 듣고 있습니다.
거절한 자에 대한 분노를 심판이라고 한다면 주인의 분노를 듣고 있는 종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임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음성과 분노의 심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인이 분노해서 외친 말이 있습니다. "그 종에게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그 분노한 모습 그대로 종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노한 모습이 종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분노하면서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외칠 때 그대로 데려 왔습니다. 종이 말하기를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고 했더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2-23절)고 하셨습니다. 집을 채우기까지 주인의 분노가 사그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거리와 골목은 성안의 영역이요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이야기합니다. 거리와 골목 또는 길과 산울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것은 누구나 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믿다가 낙심한 자나 초심자나 가족이나 이웃이나 다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강권하라"는 말은 강제로 폭력을 써서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라 간구하고 설득하여 그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눈물로 호소하라는 뜻입니다.
주인의 초청을 강권하기 위해서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간절한 심정과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강권해서 초청할 때 종들은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인의 분노의 심정을 종들이 함께 가질 때 강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안 가면 주인을 만나러 갈 면목이 없다. 내가 주인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없다' 주인의 분노가 나의 아픔이요, 주인의 분노가 곧 나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강권하라고 하는 주인의 명령에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집주인의 노하고 있는 모습에 종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노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초청에 거절한 자는 지옥으로 가겠지만 나에게도 진노의 심판이 내릴 것 같이 두려운 생각을 갖고, 저들을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를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큰 사랑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잔치를 다 준비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이 심정,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 그래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4)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두려움이 자기를 엄습해 오기 때문입니다. 지옥 갈 사람을 그대로 놓아두면 저들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장 17-19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악한 자에게 돌아오라는 말을 안 해서 그가 죽는다면 우리 손에서 그 책임을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노한 것 때문에 두려워서 가서 강권하여 데려온 것입니다. 주님의 노하신 음성이 들립니다. "내 집을 채우라" 이 말씀 안에는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기를 바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집을 채우라"는 말은 "내가 베푼 구원의 잔치에 한 사람도 멸망받지 않고 다 와서 구원받도록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라"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중대한 사실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데려다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고 사정해서 구원의 은총을 입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원받은 자의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도의 심정은,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지옥에 던져질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만약 지옥에 간 친척이나 이웃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전도를 했는데 제가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마디를 물을 것입니다. "그 집사가 너를 강권하더냐" "네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며 강권했는데도 거절했단 말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은 지옥 간 사람에 대하여 강권하지 않은 우리의 책임을 묻는 말씀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지체하는 이웃과 친척을 강권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무릎꿇고 강권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노의 음성도 들어야 하고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간절한 마음,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강권하여 아버지의 집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채워야 합니다. 한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쉼터로 초청하십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죄의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와서 쉬라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와서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하라고 초청하십니다.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은 멍에는 일하는 것인데 배우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실 때 여러 가지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일꾼이 되게 하시고 또 배우게 하시고 안식도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한 삶의 형태를 잔치하는 삶으로 비유해 주셨습니다. 물론 배우는 것도 행복이요 일하는 것도 행복이요 쉬는 것도 행복이지만 예수님은 잔치하는 삶을 가장 큰 행복으로 말씀하십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즐거운 표현을 잔치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행복의 높은 경지를 말할 때 잔치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잔칫집 같은 가정이 된다든지, 잔칫집 같은 교회가 되는 것은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잔치는 아무나 하지는 못합니다. 즐거움과 부요가 있어야 합니다. 잔치는 모두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 잔치하는 종교라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삿집 같고 기독교는 잔칫집 같다"고 합니다. 대개 절에 가면 계속 향불을 피우기 때문에 초상집에 있는 기분이 납니다. 그리고 향교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잔치하는 집과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깊이 믿으면 믿을수록 허무하다고 말하며, 유교는 완고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언제나 잔치집 같은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날 교회 나와서 기쁨을 얻고 즐거움을 누리며 성도간에 따뜻한 사랑이 오가는 잔치집의 분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잔치집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먹을 것이 풍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로 붐벼야 합니다. 잔치를 배설하고는 빈 자리가 없어야 합니다.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잔치집의 초청이 있습니다.
16절 말씀에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어떤 사람'을 '임금'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잔치는 임금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잔치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생일 잔치도 있고, 회갑 잔치도 있고, 칠순 잔치도 있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잔치도 있습니다. 또 자녀들의 진학이나 승진, 성공을 기뻐하는 잔치도 있습니다.
혼인 잔치는 모두 기뻐하는 잔치입니다. 그래서 가장 즐거운 잔치인데 이런 혼인 잔치에 대한 즐거움을 천국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나 신약을 보나 천국 잔치는 혼인 잔치로 비유되어 있는데 이 혼인, 곧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신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잔치에 대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잔치에 초청받을 때는 참석해 주는 것이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잔치는 주인이 다 준비해 놓고 초청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잔치를 다 준비해 놓은후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며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류에게 천국을 준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다 준비되어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다 물로 나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기 때문에 와서 은혜로 이 잔치에 참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잔치로 표현하고, 천국을 잔치로 표현해서 천국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초청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18절-20절을 보면 거절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변명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잔치의 초대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세 종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밭을 샀습니다. 둘재는 소 다섯 겨리를 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는 유대인들이 밭을 갈 때 소 두 마리가 함께 밭을 갈기 때문에 밭 가는 소를 말합니다. 일하는 소를 샀다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의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못가겠다"라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당시는 농경사회로서 모든 재산은 밭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나는 재산증식에 여념이 없다. 그러므로 초청에 못가겠다"라고 거절한 것입니다. 또 소 다섯 겨리를 샀다는 말은 "나는 사업이 바빠서 못 가겠다"라는 것입니다. 또 '장가 들었으니 못 간다는 것'은 "나는 인생의 향락에 젖어 있으니 갈 시간이 없다"라는 거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청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들에게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의 초청을 받고 있으나 준비된 이 잔치에 거절을 표합니다. 이럴 때 주인은 참으로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여 놓고 사람들이 와 주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초청을 거절당하는 주인의 심정을 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거리와 골목은 도시를 가리킵니다. 사실 가난한 자들은 원래 연회석에 초대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밭을 사러 가거나, 장가 들러 가거나, 소를 사러 갈 수 있는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에게 그들은 "데려오라. 골목으로, 거리로 가서 데려오라"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으나 아직도 빈 자리가 있어 이번에는 데려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길과 산울은 대개 농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말한다면 처음에 초청받고 거절했던 사람들은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며 후에 "골목으로 가서 저들을 다 데려오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 땅에 나셨음에도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천국 잔치에 원래 초청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초청받게 될 것을 이 말씀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 초청받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초청받은 사람들이 거절했을 때 집주인이 노하였습니다. 21절에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집주인을 이야기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노했다는 말은 분노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분노한 사람은 주인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음성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종들입니다. 거절한 사람들 때문에 분을 냈는데 거절했던 사람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음성을 듣는 종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밖에 나가서 전파하여 저들에게 전해줄 사명자들이 우리 종입니다. 주인이 노했다고 하는 말은 지금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을 향하여 노한 것이지만 그 분노가 종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분노의 음성을 그대로 듣고 있습니다.
거절한 자에 대한 분노를 심판이라고 한다면 주인의 분노를 듣고 있는 종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임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분노의 음성과 분노의 심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인이 분노해서 외친 말이 있습니다. "그 종에게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그 분노한 모습 그대로 종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노한 모습이 종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분노하면서 "골목으로 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외칠 때 그대로 데려 왔습니다. 종이 말하기를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고 했더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2-23절)고 하셨습니다. 집을 채우기까지 주인의 분노가 사그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거리와 골목은 성안의 영역이요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이야기합니다. 거리와 골목 또는 길과 산울에 있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것은 누구나 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믿다가 낙심한 자나 초심자나 가족이나 이웃이나 다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강권하라"는 말은 강제로 폭력을 써서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라 간구하고 설득하여 그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눈물로 호소하라는 뜻입니다.
주인의 초청을 강권하기 위해서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간절한 심정과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강권해서 초청할 때 종들은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인의 분노의 심정을 종들이 함께 가질 때 강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안 가면 주인을 만나러 갈 면목이 없다. 내가 주인을 향해서 얼굴을 들 수 없다' 주인의 분노가 나의 아픔이요, 주인의 분노가 곧 나의 심정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강권하라고 하는 주인의 명령에 일체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집주인의 노하고 있는 모습에 종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노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초청에 거절한 자는 지옥으로 가겠지만 나에게도 진노의 심판이 내릴 것 같이 두려운 생각을 갖고, 저들을 데려오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러한 진노를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큰 사랑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잔치를 다 준비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이 심정,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 그래서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간절한 마음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3-14)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두려움이 자기를 엄습해 오기 때문입니다. 지옥 갈 사람을 그대로 놓아두면 저들을 마땅히 돌보아야 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장 17-19절을 보겠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악한 자에게 돌아오라는 말을 안 해서 그가 죽는다면 우리 손에서 그 책임을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노한 것 때문에 두려워서 가서 강권하여 데려온 것입니다. 주님의 노하신 음성이 들립니다. "내 집을 채우라" 이 말씀 안에는 하나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기를 바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집을 채우라"는 말은 "내가 베푼 구원의 잔치에 한 사람도 멸망받지 않고 다 와서 구원받도록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라"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중대한 사실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데려다가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고 사정해서 구원의 은총을 입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구원받은 자의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전도의 심정은,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지옥에 던져질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만약 지옥에 간 친척이나 이웃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전도를 했는데 제가 안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마디를 물을 것입니다. "그 집사가 너를 강권하더냐" "네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며 강권했는데도 거절했단 말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은 지옥 간 사람에 대하여 강권하지 않은 우리의 책임을 묻는 말씀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지체하는 이웃과 친척을 강권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무릎꿇고 강권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노의 음성도 들어야 하고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간절한 마음,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강권하여 아버지의 집을 구원받은 사람으로 채워야 합니다. 한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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