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본문
목회하면서 느끼는 사실은 힘든 것만큼 기쁨도 크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큰 기쁨은 좋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의 소리를 누군가에서 듣는 것이 감사하기만 합니다. 믿음의 소리, 기쁨의 소리, 좋은 소식은 Good News입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입니다. 지난주 예배시간에 함께 통성으로 기도했던 정인희 권사님, 병원 중환자실에 계신 그분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저에게 그분의 안부를 물어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분이 누군가는 말하지 않겠지만 목사 마음속에 고마움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권사님을 쓱 한번만 만져주시면 될텐데요. " 참으로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복음(Good News)의 소식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분은 한번도 뵙지를 못했던 정권사님을 염려하는 사랑과 기도에 성도들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분과 전화를 마치고 계속 저의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대목이 이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만 만져 준다면". 그리고 이 말은 이번주 기도때 마다 저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한번만 만져준다면, 고민하고 애태워 하는 것, 간절히 기도하는 가정, 사업, 믿음생활 모든 것을 한번만 만져준다면". 특별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교회에 나오는 청년들을 한번만 만져 준다면. " "예수님이 우리 주일학교와 청소년을 한번만 만져준다면. "
만진다는 것은 접촉하는 것입니다. Touch입니다. 접촉이라는 것은 만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악수하면서 접촉을 하잖아요! 만남이 접촉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접촉(Touch)이라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은 접촉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을 접촉(Touch)을 사용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 1:40-41). 병자를 고치실 때 만져 주셨습니다. 접촉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손으로 안수하시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바로 안수한다는 것, 그것은 접촉을 통해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진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 그것은 만남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함부로 접촉할 수 없고 잘못 접촉하며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여러분, 미국아이든, 한국아이든 함부로 만지면 안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세상이라는 것 잘 알지요. 접촉하면 무조건 성적인 접촉으로만 생각하는 것, 이러한 현상은 타락한 시대가 가져다 준 한 현상입니다. 어머니와의 따뜻한 접촉, 가족간의 순결한 접촉, 연인사이의 사랑의 접촉, 부부사이의 부드러운 접촉 이 모든 것은 친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피츠 박사란 분이 어린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관찰한 후 이런결론을 내렸습니다. "접촉을 한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유모차에서 피부 접촉 없이 자란 아이들은 점점 기력이 약해졌고 접촉 결핍증 때문에 세포들이 죽어갔다. " 어린 아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 시대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접촉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접촉 결핍이 불러온 병들에 걸려 있습니다. 사랑이 결핍된 사회,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문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인간과 컴퓨터 기계와의 접촉이 될 것입니다. 생활들이 접촉 결핍증을 보여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접촉 결핍증은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진실한 접촉이 없습니다. 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들어내지 않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져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 놓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여호와 하나님과 접촉이 없으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사랑의 접촉을 갖지 않으면 영혼이 죽게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접촉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접촉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진실한 접촉을 가져야 합니다. 접촉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접촉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부드러운 접촉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십시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여호와 하나님과의 접촉을 매일 매일 가지려고 해야 합니다. 나의 가정, 나의 교회 그리고 나의 이웃까지 이 부드러운 접촉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1초 동안에 발하는 에너지만으로 이 땅 60억 인구가 얼마를 쓸 것 같습니까 과학자들은 100만년을 쓰고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로 그 엄청난 태양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빛과 진리되신 그 빛을 내가 1초만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너무나 강력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능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폭발적인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온 천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도 해결되지 않는 한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1초만 도와주시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나의 인생의 문제, 해결되지 못하고 끙끙거리면 살아가는 인생의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이 한번만 도와 주시면 능력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빛이 우리 안에 비쳐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이 살아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시퍼렇게 살아 계시고 역사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죽어도 복음대로 살다가 죽겠다. 내 인생의 목표를 뚜렷이 복음에 두고 살아가야 겠다"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복음의 빛이 가장 강렬하게 우리 안에 비쳐져야 합니다. 강하게 접촉되어야 합니다.
짐승들은 상처를 입으면 굴속에 숨어있지 않고 햇빛에 상처를 노출시킨다고 합니다. 바로 햇빛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성경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치료하는 광선이 무엇입니까 치료하는 광선이 있다고! 동물만이 햇빛에 노출되어 치료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치료받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우리 안에 누군가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지요. 자신만에 상처가 있지요. 개척목사이면서 남에게 이야기 못할 아픔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고 치료받는 것 아닙니다. 친구에게, 친척에게,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 이야기한다고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여호와 하나님의 치료하는 광선 앞에 들어내야 합니다. 치료하는 광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고 운동력 있습니다. 굴속에 숨지 말고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들어내야 합니다. 그런 결단을 해야만 치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치료하는 광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복음송 찬양중 저의 심금을 울렸던 찬양이 있습니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그는 나를 구했네 내 영혼을" "He touched me" 여호와 하나님께 노출하십시오. 그분이 도와 주십니다. 복음에 노출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강력해 질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데 동네분중 한 분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예수를 안 믿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예수를 믿으면 비용이 들기 때문에 비용 아까워서 교회를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말합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려고 하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장난기 섞인 말로 "담뱃값 정도 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거 비용 얼마 안 드네요"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담배를 뚝 끊고 담배 값을 주일마다 헌금하더랍니다. 조금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님이 세례를 받으라고 하니 세례를 안 받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세례 받으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비용이 갑자기 비싸져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을 다시 찾아 와서 묻더랍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하는데 농사비용을 빼고 십일조를 합니까 아니면 수확의 십일조를 합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믿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농사비용을 빼고 하거나 그냥 수확의 십일조를 하거나 둘 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입니다. " 그러면서 "그 비용 빼고 나면 얼마 안 남는데요. "하더니 나중에 쌀 한가마디 십일조하고 그 다음에 세례 받더랍니다. 그 다음 해가 되어 그분이 농사지은 십일조로 쌀 일곱 가마를 갖고 왔더랍니다. "아니 왜 이렇게 많이 교회에 가지고 왔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믿고 보니 한가지 깨닫은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깨닫았습니다. 나 이제 싸구려로 예수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저는 돈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복음이 값없이 모든 자들에게 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값없이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Priceless (값없이, 공짜로, 거저). 값없이 사랑했다고 해서 이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값없이 사랑했다는 말은 돈의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빌딩을 지었습니다. 돈이 들었지요. 돈을 가지고 빌딩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빌딩 속에 들어가는 공기는 돈주고 살수가 없습니다. 빌딩도 귀하고 공기도 귀합니다. 공기는 돈주고 살수 없기 때문에 "거저, 값없이, 공짜로"로 주셨습니다. 금반지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물 한 컵은 돈주고 살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짜입니다. 어떤 분이 물을 것입니다. 물값 냈다고요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물을 운반한 운반비일 뿐입니다. 물 값은 물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 내야 합니다. 생명, 영생, 천국 모든 것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Priceless, 값없이, 공짜로, 거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사랑은 공짜이면서 이것은 절대로 싸구려가 아닙니다. 돈이나 공로나 자격이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살수 없는 것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공짜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복음과 귀한 접촉이 있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과 대화함(Response the Word)
저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비유 셋이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허랑 방탕하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돈을 다 쓰게 되고 급기야 돼지들이 먹는 주염열매를 먹고삽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려니 차마 아들로서는 갈 수 없고 종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종이 아니라 살아 돌아온 귀한 아들로 맞이하여서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하는 말 중에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에 박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랑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래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바로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첫 번째 비유 잃은 양의 비유를 보십시오. 주인이 잃은 양을 찾고서 얼마 기쁘던지요. 모든 동리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팔레스타인이 잔치를 벌이면 꼭 양을 잡는데 바보 같은 양 한 마리 찾아다 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는 죽였습니다. 이런 손해 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만인가요 동전하나 찾아다 놓고 벗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렸습니다. 동전 한닢 때문에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겁니다. 호랑방탕한 자식, 아버지의 돈을 가져다가 세상에 마구 써대었던 자식을 다시 사랑하고 반갑게 맞이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손해보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했을까요 도대체 오늘 말씀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바로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생활 하는 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 사업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전도하는데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저는 교회 사역 중에서 제일 안타깝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사역은 장년사역보다는 청년사역, 중고등부 사역, 주일학교 사역이라고 담대히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까짓것 돈도 안되고 힘만 드는 사역을 왜 하려고 하십니까. " 그러면 제가 묻지요 당신은 돈보고 사역하냐고! 저도 세상물정 모르는 목사가 아닙니다. 돈도 안된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현대 한국 교회 사역과 교회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눈에 보이는 것, 표시나는 것은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 표시 나지도 않는 것은 하지를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안 합니다. 교회가 노인들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청년들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장년부를 다루는 만큼 심각하게 다루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솔직히 이야기해볼까요 두가지입니다. 관심이 없기에 아니며 물질적인 헌신 욕심 때문에!
교회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자랑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잃은 양 한 마리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잃은 동전 한 닢을 찾으려 가는 것입니다. 잃은 아들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왜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들, 집사님들이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천국에 갔더니 수문장 베드로가 나와서 마중을 하는데 집사님들 자리가 있고 장로 자리가 있고 목사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랍니다. 베드로가 먼저 집사님들을 데리고 갔는데 중국요리가 푸짐한 귀빈석으로 모시더랍니다. 그것을 본 장로님들이 "야 집사들이 저 정도인데 우리 장로들은 대단할꺼야"하면서 기대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보니까 짜장면 보통을 주더랍니다. 장로님들이 화가나서 말합니다. "아니 우릴 누구로 보십니까 명색이 장로인데 내가 일을 해도 저 집사보다 더 큰일도 많이 했는데" 하면서 푸념합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들을 많이 했는지 우리를 증명할 우리 목사님 데리고 오시오. 우리 목사님이 너무 잘 아시니 빨리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하는 말 "응 너의 목사님, 지금 짜장면 배달 갔어. "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 어려운 것 따져서 하는 것, 돈 되는 것, 안 되는 것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익계산을 따져서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사역, 특별히 영혼 살리는 일은 천사도 흠모한다고 하였습니다. 찬송가의 곡" 천사도 흠모하겠네" 여러분, 천사도 흠모하는 것이 바로 영혼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병원 응급차가 앵앵거리고 달려가면 모든 차들이 길을 비켜줍니다. 왜 병원차를 모두가 비켜줍니까 그 이유는 한 사람을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똑 같습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 전도하는 일은 교회에서 모든 것을 제쳐놓고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이라면 모두가 다 앞장서야 합니다.
복음을 제쳐놓은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복음 제쳐놓고 교회 프로그램 100개 해도 소용없습니다.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 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초점이 맞혀져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교회가 있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교회였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 교회를 굉장히 크게 책망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5).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너무나도 무서운 말입니다.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는 말씀, 정말로 성도가 교회가 딴짓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딴짓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딴짓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을 하지 못하는 그런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한 영혼을 향한 복음증거 사역임을 절실히 깨닫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응답함(Response the Word)
오늘 우리가 읽은 탕자의 비유는 실제 둘째아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그런 스토리가 아닙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주님이 꺼내셨는지를 알아야 중심 초점을 알게 됩니다. 바로 복음을 희석시키는 바리새인을 책망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안다고 하는 큰아들에 대한 책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잃은 동전 한 닢을 우습게 아는,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아니하는 큰아들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나오신 모든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가 어느 한 사람을 지목해서 치는 설교가 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부터가 다시 한번 복음이 무엇인가를 재확인하고 싶고 복음 위에 서있고 싶어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귀한 심령 속에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준비한 것입니다. 목사인 내 자신부터 회개하면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동생이 세상에 나갔다고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여전히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큰아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사랑을, 개척초기부터 가졌던 그 귀한 영혼사랑이 목사 자신이 식지나 않았는지 마음속에 회개하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우리 연합교회는, 우리 교회의 성도가 되지만 예수님이 멸시하는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함을 증거하고 싶어서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서 복음이 아닌 것에 목숨걸고 뛰면 무엇합니까 교회가 복음 안닌것에 정신 팔면 뭐합니까 우리가 목숨걸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복음,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2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바로 바리새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큰아들에게 담겨져 있습니다. 큰아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큰아들이 무엇을 잊어버렸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큰아들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읽었습니다. 다시 읽습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보면 노했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동생과 형이 만나 "형님" "동생" 이렇게 손을 잡고 기뻐해야 하는데 형이 된 자가 아주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나요 동생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영어에 보시면 동생이라는 말도 붙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말하길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My brother가 아니라 Your son이라고 대 듭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도 작은 아들이 세상에 나가서 창기와 허랑 방탕했다고 알고 있지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동생이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동생이 세상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누가 꺼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 내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아버지가 말했나요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종들이 그랬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유일하게 맏아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옵니다. 자기 동생을 아주 비하하면서 어두운 면을 과장합니다.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날린 이 아들"이라고 혹평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혹여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어찌 그 어두운 면만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가지고 여러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염소새끼하나 준적 없다고 불평하는 모습에서 교회에 봉사한 유일한 이유는 염소새끼가 아니라, 유치한 보상심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는 모습이 거짓이라는 말씀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왜 맛난 반찬을 드시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시는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왜 추워하시는지 왜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외면하고 살았던 못난 자식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요! 거짓말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고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기쁨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잔칫집 분위기를 망가뜨린, 가정의 행복을 꺽어버린 자식이 맏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모두를 어긴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모두 어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가 동일하게 준비한 것은 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게 오게 되어 일들이 발생됩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열 처녀의 비유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50%는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형식도, 예식도, 직분도, 헌신도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하지만 겉모양은 있지만 복음의 핵심이 없는, 복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그리스도인, 그저 Church man은 있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을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없는 것은 다 껍데기일 뿐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다 복음을 영접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목사의 열정은 한가지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이것저것 다른 교회에서 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없어도 좋아요! 교회가 부족해서 교제 시간에 풍성히 음식을 먹지 못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헌금이 적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부르짖는 기도는 "저희 교회가 복음을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저희 교회에 왔다가 그냥 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 주세요. 우리 교회는 원초적인 복음, 꾸밈이 없는 복음을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복음, 복음, 복음"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이 없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만삭이 된 여인이 크리스마스 전 날밤 선교사 마을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영하 16도의 혹산 속에서 미끄러지고 또 올라가고 미끄러지고 또 올라가고 하다 깊은 산 속에서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신작로 바닥에 솔잎가지를 꺾어 덮어놓고 치마를 벗어서 그 위에 깔고 출산을 했습니다. 아기가 얼굴을 내밀자 여인은 웃옷까지 벗어서 아기의 얼굴을 감쌉니다. 이른 새벽 선교사가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지프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는데 벌거벗은 여인이 불빛에 비춰지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여인은 아기에게 한 겨울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새우등처럼 몸을 꼬부린 자세로 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온 산등성이에 피가 뿌려져 있었던 걸로 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없애기 위해 그 주위를 뒹굴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과 함께 이 여인의 정체를 수소문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고 선교사는 그 여자의 아이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선교사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불러다 놓고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양아버지인 나를 따라서 가겠니 아니면 너의 어머니 나라인 여기에 남겠니 네가 선택해야 될 시간이 되었다. " 충격을 받은 아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추운 겨울 맨발로 밖을 뛰쳐나갔습니다. 달리고 뛰던 이 아이는 동구 밖을 빠져나가 하늘을 향하여 오열하고 절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님의 무덤에 달려가 무덤 주위에 나있는 가시나무를 꺾고 갈대 잎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쌓인 눈을 다 쓸어 내렸습니다. 한 자락 한 자락 자신의 옷을 벗더니 어머니의 무덤을 감쌌습니다. 쌓인 눈 위에 발가벗은 채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만큼 추우셨습니까 핏덩어리 같은 날 살리기 위하여 어머니께서 죽으셨다죠. 날 살리기 위해 벗으셨다죠.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뒤쫓아 온 선교사 부부는 너무나도 장엄하고 엄숙한 이 상황에서 만류 할 수 없었고 그저 큰 소나무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선교사의 스토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로마의 채찍은 20cm의 길이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가죽 끈 마디마디에다 짐승의 뼈를 쪼개어 꽂고 그 다음에 납덩어리를 달고 이것을 돌리면 소름끼치는 소리가 납니다. 태형은 이것으로 한번에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는 것이 기본인데 40대를 때리면 죽기 때문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때리는 게 로마의 태형입니다. 이탈리라 트리노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수의의 신비"에 보면 예수께서 태형을 두 번, 80대 맞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병정 망나니들은 유대인들을 만나면 가끔 옆구리 쪽으로 채찍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옆구리가 터져 창자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형으로 인해 목 밑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살이 흐물흐물 다 떨어져 나갔고 뼈가 밖으로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 상처가 죽을 만큼 쓰리라고 그 살갗에서 나는 열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입고 계시던 수의에 사진이 찍혔다고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장 5절).
미국의 톰슨이란 고고학자가 예수님의 몸에 박힌 못을 연구했는데 그것은 육각형으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못이었다고 합니다. 들면 묵직하고 박으면 뼈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강력한 못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손과 발에 이 못이 박혔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사 53장 5절)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한 그림에 보면 예수께서 하반신에 천을 두르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의 십자가형은 창피와 수치를 주는 형이기에 천으로 가릴 수 없고 완전히 발가벗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인들이 바라 보고있고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고 로마 군인들이 조롱하고 있습니다. 만유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발가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발가벗겨 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가 나를 위해서 채찍에 맞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아버지에게 대드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합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을, 잃어버린 것이 찾아진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하는 것은 오늘 아버지의 대답과 말씀으로 말씀기록이 마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그 다음에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33절은 성경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록할 뿐인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버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로 먼길을 떠나는 33절이 가능합니다.
제가여러분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성경게 기록하는 오늘 말씀 33절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위해 살기로 다짐을 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예수님 한분 때문에 행복하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분과 더불어 살다가 그분과 함께 죽기로 각오하십니까"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복음에 살기를 진심을 축원합니다. 복음에 살고 복음에 죽는 그런 신실한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병원에 가면 호스피스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마지막 임종을 하는 사람을 돌보는 직업입니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에 산다고 하면 그들에게 가서 자신있게 말해야 합니다. "조그만 힘내세요. 우리의 복음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십니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평안히 주님의 나라에 거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누군가 나의 옆에서 죽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옆에 영혼이 죽고 있을 때 여러분은 진정 복음의 호스피스가 될 수 있습니까 혹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여러분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복음이 자랑스러운 사람이 됩시다. 예수가 자랑스러운 자가 됩시다. 복음에 살고 복음에 죽는, 예수에 살고 예수에 죽는 귀한 성도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만진다는 것은 접촉하는 것입니다. Touch입니다. 접촉이라는 것은 만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악수하면서 접촉을 하잖아요! 만남이 접촉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접촉(Touch)이라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은 접촉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실 때 예수님을 접촉(Touch)을 사용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막 1:40-41). 병자를 고치실 때 만져 주셨습니다. 접촉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손으로 안수하시며 기도해 주셨습니다. 바로 안수한다는 것, 그것은 접촉을 통해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진다는 것, 접촉한다는 것 그것은 만남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함부로 접촉할 수 없고 잘못 접촉하며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시대 속에 살아갑니다. 여러분, 미국아이든, 한국아이든 함부로 만지면 안되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세상이라는 것 잘 알지요. 접촉하면 무조건 성적인 접촉으로만 생각하는 것, 이러한 현상은 타락한 시대가 가져다 준 한 현상입니다. 어머니와의 따뜻한 접촉, 가족간의 순결한 접촉, 연인사이의 사랑의 접촉, 부부사이의 부드러운 접촉 이 모든 것은 친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피츠 박사란 분이 어린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관찰한 후 이런결론을 내렸습니다. "접촉을 한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유모차에서 피부 접촉 없이 자란 아이들은 점점 기력이 약해졌고 접촉 결핍증 때문에 세포들이 죽어갔다. " 어린 아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현대 시대의 문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접촉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접촉 결핍이 불러온 병들에 걸려 있습니다. 사랑이 결핍된 사회,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문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는 인간과 컴퓨터 기계와의 접촉이 될 것입니다. 생활들이 접촉 결핍증을 보여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접촉 결핍증은 교회에도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나와의 진실한 접촉이 없습니다. 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들어내지 않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져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 놓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여호와 하나님과 접촉이 없으면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사랑의 고백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의 사랑의 접촉을 갖지 않으면 영혼이 죽게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접촉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접촉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고백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진실한 접촉을 가져야 합니다. 접촉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접촉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부드러운 접촉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십시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여호와 하나님과의 접촉을 매일 매일 가지려고 해야 합니다. 나의 가정, 나의 교회 그리고 나의 이웃까지 이 부드러운 접촉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1초 동안에 발하는 에너지만으로 이 땅 60억 인구가 얼마를 쓸 것 같습니까 과학자들은 100만년을 쓰고도 남는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로 그 엄청난 태양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 빛과 진리되신 그 빛을 내가 1초만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너무나 강력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능력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폭발적인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온 천하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도 해결되지 않는 한 문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1초만 도와주시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나의 인생의 문제, 해결되지 못하고 끙끙거리면 살아가는 인생의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이 한번만 도와 주시면 능력의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의 빛이 우리 안에 비쳐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이 살아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시퍼렇게 살아 계시고 역사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죽어도 복음대로 살다가 죽겠다. 내 인생의 목표를 뚜렷이 복음에 두고 살아가야 겠다"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복음의 빛이 가장 강렬하게 우리 안에 비쳐져야 합니다. 강하게 접촉되어야 합니다.
짐승들은 상처를 입으면 굴속에 숨어있지 않고 햇빛에 상처를 노출시킨다고 합니다. 바로 햇빛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성경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치료하는 광선이 무엇입니까 치료하는 광선이 있다고! 동물만이 햇빛에 노출되어 치료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치료받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우리 안에 누군가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지요. 자신만에 상처가 있지요. 개척목사이면서 남에게 이야기 못할 아픔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다고 치료받는 것 아닙니다. 친구에게, 친척에게,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 이야기한다고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여호와 하나님의 치료하는 광선 앞에 들어내야 합니다. 치료하는 광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고 운동력 있습니다. 굴속에 숨지 말고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들어내야 합니다. 그런 결단을 해야만 치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치료하는 광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복음송 찬양중 저의 심금을 울렸던 찬양이 있습니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그는 나를 구했네 내 영혼을" "He touched me" 여호와 하나님께 노출하십시오. 그분이 도와 주십니다. 복음에 노출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강력해 질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데 동네분중 한 분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예수를 안 믿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예수를 믿으면 비용이 들기 때문에 비용 아까워서 교회를 안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말합니다. "목사님, 예수 믿으려고 하면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장난기 섞인 말로 "담뱃값 정도 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분이 "거 비용 얼마 안 드네요"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담배를 뚝 끊고 담배 값을 주일마다 헌금하더랍니다. 조금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사님이 세례를 받으라고 하니 세례를 안 받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세례 받으면 십일조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비용이 갑자기 비싸져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을 다시 찾아 와서 묻더랍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하는데 농사비용을 빼고 십일조를 합니까 아니면 수확의 십일조를 합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믿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농사비용을 빼고 하거나 그냥 수확의 십일조를 하거나 둘 다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입니다. " 그러면서 "그 비용 빼고 나면 얼마 안 남는데요. "하더니 나중에 쌀 한가마디 십일조하고 그 다음에 세례 받더랍니다. 그 다음 해가 되어 그분이 농사지은 십일조로 쌀 일곱 가마를 갖고 왔더랍니다. "아니 왜 이렇게 많이 교회에 가지고 왔습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믿고 보니 한가지 깨닫은 것이 있습니다.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을 깨닫았습니다. 나 이제 싸구려로 예수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비싸게 믿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저는 돈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우리의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내가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복음이 값없이 모든 자들에게 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값없이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Priceless (값없이, 공짜로, 거저). 값없이 사랑했다고 해서 이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값없이 사랑했다는 말은 돈의 가치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빌딩을 지었습니다. 돈이 들었지요. 돈을 가지고 빌딩을 살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빌딩 속에 들어가는 공기는 돈주고 살수가 없습니다. 빌딩도 귀하고 공기도 귀합니다. 공기는 돈주고 살수 없기 때문에 "거저, 값없이, 공짜로"로 주셨습니다. 금반지는 돈으로 살수 있지만 물 한 컵은 돈주고 살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짜입니다. 어떤 분이 물을 것입니다. 물값 냈다고요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물을 운반한 운반비일 뿐입니다. 물 값은 물을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께 내야 합니다. 생명, 영생, 천국 모든 것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Priceless, 값없이, 공짜로, 거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그 사랑은 공짜이면서 이것은 절대로 싸구려가 아닙니다. 돈이나 공로나 자격이나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살수 없는 것이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짜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공짜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복음과 귀한 접촉이 있기를 원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말씀과 대화함(Response the Word)
저는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비유 셋이 나옵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허랑 방탕하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돈을 다 쓰게 되고 급기야 돼지들이 먹는 주염열매를 먹고삽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려니 차마 아들로서는 갈 수 없고 종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종이 아니라 살아 돌아온 귀한 아들로 맞이하여서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하는 말 중에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에 박혀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랑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래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바로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첫 번째 비유 잃은 양의 비유를 보십시오. 주인이 잃은 양을 찾고서 얼마 기쁘던지요. 모든 동리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팔레스타인이 잔치를 벌이면 꼭 양을 잡는데 바보 같은 양 한 마리 찾아다 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는 죽였습니다. 이런 손해 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만인가요 동전하나 찾아다 놓고 벗들을 불러모아 잔치를 벌렸습니다. 동전 한닢 때문에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겁니다. 호랑방탕한 자식, 아버지의 돈을 가져다가 세상에 마구 써대었던 자식을 다시 사랑하고 반갑게 맞이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손해보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했을까요 도대체 오늘 말씀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바로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생활 하는 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 사업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전도하는데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저는 교회 사역 중에서 제일 안타깝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사역은 장년사역보다는 청년사역, 중고등부 사역, 주일학교 사역이라고 담대히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까짓것 돈도 안되고 힘만 드는 사역을 왜 하려고 하십니까. " 그러면 제가 묻지요 당신은 돈보고 사역하냐고! 저도 세상물정 모르는 목사가 아닙니다. 돈도 안된다는 사실이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현대 한국 교회 사역과 교회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눈에 보이는 것, 표시나는 것은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 표시 나지도 않는 것은 하지를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안 합니다. 교회가 노인들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청년들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의 문제를 외면합니다. 장년부를 다루는 만큼 심각하게 다루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솔직히 이야기해볼까요 두가지입니다. 관심이 없기에 아니며 물질적인 헌신 욕심 때문에!
교회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자랑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복음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잃은 양 한 마리를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잃은 동전 한 닢을 찾으려 가는 것입니다. 잃은 아들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왜요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의 목사님, 장로님들, 집사님들이 천국에 갔다고 합니다. 천국에 갔더니 수문장 베드로가 나와서 마중을 하는데 집사님들 자리가 있고 장로 자리가 있고 목사자리를 만들어 놓았더랍니다. 베드로가 먼저 집사님들을 데리고 갔는데 중국요리가 푸짐한 귀빈석으로 모시더랍니다. 그것을 본 장로님들이 "야 집사들이 저 정도인데 우리 장로들은 대단할꺼야"하면서 기대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 보니까 짜장면 보통을 주더랍니다. 장로님들이 화가나서 말합니다. "아니 우릴 누구로 보십니까 명색이 장로인데 내가 일을 해도 저 집사보다 더 큰일도 많이 했는데" 하면서 푸념합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들을 많이 했는지 우리를 증명할 우리 목사님 데리고 오시오. 우리 목사님이 너무 잘 아시니 빨리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하는 말 "응 너의 목사님, 지금 짜장면 배달 갔어. "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 어려운 것 따져서 하는 것, 돈 되는 것, 안 되는 것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손익계산을 따져서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사역, 특별히 영혼 살리는 일은 천사도 흠모한다고 하였습니다. 찬송가의 곡" 천사도 흠모하겠네" 여러분, 천사도 흠모하는 것이 바로 영혼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병원 응급차가 앵앵거리고 달려가면 모든 차들이 길을 비켜줍니다. 왜 병원차를 모두가 비켜줍니까 그 이유는 한 사람을 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똑 같습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 전도하는 일은 교회에서 모든 것을 제쳐놓고 가장 중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영혼 구원하는 일이라면 모두가 다 앞장서야 합니다.
복음을 제쳐놓은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복음 제쳐놓고 교회 프로그램 100개 해도 소용없습니다.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 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초점이 맞혀져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교회가 있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교회였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이 교회를 굉장히 크게 책망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5).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너무나도 무서운 말입니다.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는 말씀, 정말로 성도가 교회가 딴짓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옮겨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딴짓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딴짓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사역을 하지 못하는 그런 교회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명은 한 영혼을 향한 복음증거 사역임을 절실히 깨닫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응답함(Response the Word)
오늘 우리가 읽은 탕자의 비유는 실제 둘째아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그런 스토리가 아닙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주님이 꺼내셨는지를 알아야 중심 초점을 알게 됩니다. 바로 복음을 희석시키는 바리새인을 책망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안다고 하는 큰아들에 대한 책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잃은 동전 한 닢을 우습게 아는,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아니하는 큰아들의 모습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나오신 모든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오늘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가 어느 한 사람을 지목해서 치는 설교가 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목사인 저 자신부터가 다시 한번 복음이 무엇인가를 재확인하고 싶고 복음 위에 서있고 싶어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귀한 심령 속에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준비한 것입니다. 목사인 내 자신부터 회개하면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동생이 세상에 나갔다고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여전히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큰아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사랑을, 개척초기부터 가졌던 그 귀한 영혼사랑이 목사 자신이 식지나 않았는지 마음속에 회개하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우리 연합교회는, 우리 교회의 성도가 되지만 예수님이 멸시하는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함을 증거하고 싶어서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서 복음이 아닌 것에 목숨걸고 뛰면 무엇합니까 교회가 복음 안닌것에 정신 팔면 뭐합니까 우리가 목숨걸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복음,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2절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바로 바리새인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큰아들에게 담겨져 있습니다. 큰아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큰아들이 무엇을 잊어버렸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잊어버렸는가 아버지에게 대드는 큰아들의 모습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읽었습니다. 다시 읽습니다.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 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에게 하는 말을 보면 노했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동생과 형이 만나 "형님" "동생" 이렇게 손을 잡고 기뻐해야 하는데 형이 된 자가 아주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나요 동생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영어에 보시면 동생이라는 말도 붙이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말하길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My brother가 아니라 Your son이라고 대 듭니다. 그리고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도 작은 아들이 세상에 나가서 창기와 허랑 방탕했다고 알고 있지요.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동생이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동생이 세상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누가 꺼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 내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라고 했나요 아닙니다. 아버지가 말했나요 아닙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종들이 그랬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유일하게 맏아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옵니다. 자기 동생을 아주 비하하면서 어두운 면을 과장합니다.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날린 이 아들"이라고 혹평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혹여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어찌 그 어두운 면만을 과장하여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가지고 여러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염소새끼하나 준적 없다고 불평하는 모습에서 교회에 봉사한 유일한 이유는 염소새끼가 아니라, 유치한 보상심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는 모습이 거짓이라는 말씀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왜 맛난 반찬을 드시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시는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왜 추워하시는지 왜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외면하고 살았던 못난 자식이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요! 거짓말입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고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기쁨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잔칫집 분위기를 망가뜨린, 가정의 행복을 꺽어버린 자식이 맏아들이었는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모두를 어긴 것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모두 어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가 동일하게 준비한 것은 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게 오게 되어 일들이 발생됩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열 처녀의 비유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50%는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립니다. 형식도, 예식도, 직분도, 헌신도 합니다. 헌금도 합니다. 하지만 겉모양은 있지만 복음의 핵심이 없는, 복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그리스도인, 그저 Church man은 있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을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없는 것은 다 껍데기일 뿐입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다 복음을 영접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목사의 열정은 한가지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이것저것 다른 교회에서 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없어도 좋아요! 교회가 부족해서 교제 시간에 풍성히 음식을 먹지 못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헌금이 적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부르짖는 기도는 "저희 교회가 복음을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저희 교회에 왔다가 그냥 가는 사람이 없도록 해 주세요. 우리 교회는 원초적인 복음, 꾸밈이 없는 복음을 말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복음, 복음, 복음"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이 없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 쓸모 없는 것들입니다.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만삭이 된 여인이 크리스마스 전 날밤 선교사 마을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영하 16도의 혹산 속에서 미끄러지고 또 올라가고 미끄러지고 또 올라가고 하다 깊은 산 속에서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신작로 바닥에 솔잎가지를 꺾어 덮어놓고 치마를 벗어서 그 위에 깔고 출산을 했습니다. 아기가 얼굴을 내밀자 여인은 웃옷까지 벗어서 아기의 얼굴을 감쌉니다. 이른 새벽 선교사가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지프차를 타고 언덕을 넘어가는데 벌거벗은 여인이 불빛에 비춰지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여인은 아기에게 한 겨울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새우등처럼 몸을 꼬부린 자세로 아기를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온 산등성이에 피가 뿌려져 있었던 걸로 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없애기 위해 그 주위를 뒹굴었던 것 같습니다. 경찰과 함께 이 여인의 정체를 수소문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고 선교사는 그 여자의 아이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아이가 청소년이 되었을 때 선교사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불러다 놓고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양아버지인 나를 따라서 가겠니 아니면 너의 어머니 나라인 여기에 남겠니 네가 선택해야 될 시간이 되었다. " 충격을 받은 아들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추운 겨울 맨발로 밖을 뛰쳐나갔습니다. 달리고 뛰던 이 아이는 동구 밖을 빠져나가 하늘을 향하여 오열하고 절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머님의 무덤에 달려가 무덤 주위에 나있는 가시나무를 꺾고 갈대 잎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쌓인 눈을 다 쓸어 내렸습니다. 한 자락 한 자락 자신의 옷을 벗더니 어머니의 무덤을 감쌌습니다. 쌓인 눈 위에 발가벗은 채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만큼 추우셨습니까 핏덩어리 같은 날 살리기 위하여 어머니께서 죽으셨다죠. 날 살리기 위해 벗으셨다죠.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뒤쫓아 온 선교사 부부는 너무나도 장엄하고 엄숙한 이 상황에서 만류 할 수 없었고 그저 큰 소나무 뒤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선교사의 스토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십니까 로마의 채찍은 20cm의 길이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가죽 끈 마디마디에다 짐승의 뼈를 쪼개어 꽂고 그 다음에 납덩어리를 달고 이것을 돌리면 소름끼치는 소리가 납니다. 태형은 이것으로 한번에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리는 것이 기본인데 40대를 때리면 죽기 때문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때리는 게 로마의 태형입니다. 이탈리라 트리노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수의의 신비"에 보면 예수께서 태형을 두 번, 80대 맞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병정 망나니들은 유대인들을 만나면 가끔 옆구리 쪽으로 채찍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옆구리가 터져 창자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형으로 인해 목 밑에서부터 종아리까지 살이 흐물흐물 다 떨어져 나갔고 뼈가 밖으로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그 상처가 죽을 만큼 쓰리라고 그 살갗에서 나는 열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입고 계시던 수의에 사진이 찍혔다고 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장 5절).
미국의 톰슨이란 고고학자가 예수님의 몸에 박힌 못을 연구했는데 그것은 육각형으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못이었다고 합니다. 들면 묵직하고 박으면 뼈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강력한 못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손과 발에 이 못이 박혔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사 53장 5절)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한 그림에 보면 예수께서 하반신에 천을 두르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의 십자가형은 창피와 수치를 주는 형이기에 천으로 가릴 수 없고 완전히 발가벗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여인들이 바라 보고있고 제자들이 바라보고 있고 로마 군인들이 조롱하고 있습니다. 만유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발가벗김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발가벗겨 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가 나를 위해서 채찍에 맞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분이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아버지에게 대드는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합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을, 잃어버린 것이 찾아진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하는 것은 오늘 아버지의 대답과 말씀으로 말씀기록이 마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그 다음에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33절은 성경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록할 뿐인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버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로 먼길을 떠나는 33절이 가능합니다.
제가여러분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성경게 기록하는 오늘 말씀 33절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위해 살기로 다짐을 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예수님 한분 때문에 행복하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분과 더불어 살다가 그분과 함께 죽기로 각오하십니까" 대답하십시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복음에 살기를 진심을 축원합니다. 복음에 살고 복음에 죽는 그런 신실한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병원에 가면 호스피스라는 직업이 있습니다. 마지막 임종을 하는 사람을 돌보는 직업입니다. 아무도 이런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에 산다고 하면 그들에게 가서 자신있게 말해야 합니다. "조그만 힘내세요. 우리의 복음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십니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저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평안히 주님의 나라에 거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누군가 나의 옆에서 죽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옆에 영혼이 죽고 있을 때 여러분은 진정 복음의 호스피스가 될 수 있습니까 혹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주님도 여러분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복음이 자랑스러운 사람이 됩시다. 예수가 자랑스러운 자가 됩시다. 복음에 살고 복음에 죽는, 예수에 살고 예수에 죽는 귀한 성도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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