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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때 늦은 전도와 인생

본문

전도는 성도의 필수과목입니다.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우리 교회는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라는 표어대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금주는 특별히 전교인 전도실천 훈련집회를 3일간 갖게 됩니다. 모두 훈련받아 좋은 전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시고 집회기간 반드시 참여하십시오. 또한 전도할 대상을 모시고 오십시오. 금번 기회에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만일 하늘의 소망이 없다면 지금 건강하고, 많은 부를 지니고, 풍성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가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과정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후(死後)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은 천국과 지옥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은 죽음 이후에는 이 세상에서 하지 못한 것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로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지옥 간 부자는 고통을 당하면서 가족들을 구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전도 소원입니다. 정말 전도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귀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인생은 공존(共存), 공사(共死)한다는 것입니다.
1) 한 부자가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한 부자' 라는 말이 그의 이름을 대신했습니다. 당시에 라틴어로 극치에 이른 부자를 디베스(Dives)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색옷은 겉옷이고, 고운 베옷은 속옷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왕이나 귀족들이 입은 값비싼 옷들입니다. 이것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의 34,000배에 해당되는 고가의 옷이라고 합니다.
그는 호화로운 연락으로 인생을 즐겼습니다. '호화로운 연락'이란 이국적이고도 값비싼 요리와 함께 주연과 주색으로 흥청거리는 쾌락을 뜻합니다. 그것이 부자의 일과였습니다.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습니다. 그는 세상 즐거움에 빠져사는 육체주의의 삶을 살았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 없는 자의 삶,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삶,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무신론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물질을 행복으로 여기는 유물론자요, 현실주의자였고, 쾌락주의자였습니다. 철저한 금세주의자였습니다. 부자에겐 오늘은 있으나 내일은 없었습니다.
2) 한 가난한 사람도 세상에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이는 히브리어의 '엘리에셀'에서 온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이란 뜻입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여호와 하나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거지 곧 걸인이었습니다. 헌데를 앓아 이제 기동도 못하는 지경에 이른 자였습니다. 심지어 근동의 개들은 그의 냄새나는 헌 데를 핥았다고 하였습니다. 부자의 대문을 숙소 삼고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며 살았습니다. 너무 가난하고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삶 중심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공존할 뿐 아니라 공사(共死)합니다. (눅16:21-22) 거지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눅16:22) 그의 장사지냈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아무도 그의 죽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눅16:22) 그런데 이 부자는 장사되었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는 화려한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류(類)의 실존이 다같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가난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부자는 그 부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가난한자도, 부자도 죽고, 남자도, 여자도 죽습니다. 생(生)이 만인의 것이라면 죽음도 만인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죽음은 있습니다.
2. 내세는 분명히 실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2절에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한 말을 유의해 보십시오. 거지인 나사로는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천사들이 받들어 주었습니다. 이는 지극한 영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란 실존하는 천국의 넉넉함과 안전함 그리고 풍요함과 행복함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이 품은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 곧 천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거지였지만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이 땅에 살 때는 정말 초라했습니다. 죽을 때도 누가 장례식 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천사들의 큰 영접을 받아 아브라함의 품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소망입니다.
반면에 부자는 나사로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는 음부로 떨어졌습니다. (눅16:23) '음부'라는 단어 헬라어 '하데'와 히브리어 '쉐올'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표상입니다.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또 그가 자선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음부에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불신앙 때문입니다. (요16:9) 복음은 단순합니다. 예수 믿으면 약속대로 천국이요, 믿지 않으면 약속대로 지옥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 참혹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요3:18-19)
내세는 분명히 실존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예수 믿으면 천국이요, 믿지 않으면 지옥이다. 옆 사람에게 절대로 지옥가지 맙시다. 천국의 백성된 것을 축하합니다. 아멘.
부자는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눅16:23) 눅16:28절에서 부자는 음부에서 '이 고통받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고통이 무엇인가 그것은 소원대로 안 되는 고통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① 그는 천국(아브라함의 품)을 보고도 못 가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눅16:23) ② 불꽃 중에 고민하는데 한 방울의 물로 혀를 적실 수도 없었습니다. (눅16:24-25) ③ 단절의 고통이었습니다. (눅16:26)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기 때문에 오거나 가거나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구렁'이란 '크게 벌어진 틈'이란 뜻인데 영원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고정해 놓으신 완벽한 간격을 뜻합니다. ④ 전도 소원의 거절입니다. 즉 기회의 상실입니다. (눅16:27-30) 사실 기회가 없는 것처럼 속상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회사에서 직원을 뽑는데 '키 몇 cm이상, 나이 27세 이하' 그러면 이에 해당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응시하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던 부자는 뼈저리게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골육형제가 생각났습니다. 지옥 간 부자의 간절한 소원, 큰 소원이 나타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구하오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정말 지옥 간 부자의 애타는 소원입니다. 아니 절규의 소원입니다. 이미 자기는 어쩔 수 없지만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 다섯이 자기가 고통받고 있는 지옥에는 절대 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원마저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때늦은 전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전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때늦은 전도는 인생을 불행하게 합니다.
1) 죽은 다음에 구원하려는 것은 때늦은 것입니다.
부자는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육체로 일락을 즐기다가 여호와 하나님 없이 죽었습니다. 그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들만은 절대로 지옥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전파는 죽음 이후에는 할 수 없습니다. 복음전파의 기회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뿐 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제사하는 것이 다 헛된 것입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사후에도 구원받을 기회가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연옥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후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그 어떠한 속죄 공덕 행위도 전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자는 죽은 나사로를 환생시켜 이 세상에 보내면, 죽은 자가 환생하는 일로 인하여 저희 형제 다섯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눅16:27-30)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눅16:29,31) 모세와 선지자는 율법과 예언을 가리킵니다. 율법과 예언의 중심은 예수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예수(율법과 예언)의 복음을 전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의 전도를 받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옥 간 부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하면' 저희가 회개 할 것이라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는 착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것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때늦은 전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2) 지옥간 부자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들만큼은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살아 계신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죽은 부모를 위해 제사를 드린다거나, 죽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속죄 공덕을 쌓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헛된 일이요, 죄악입니다. 지옥 간 부자의 외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발 우상숭배(제사)하지 말고, 미신 섬기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영이 산 사람에게 결코 의사전달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때늦은 전도는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 한국의 상황에서는 조상제사문제가 가정마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어떤 남자 분은 말합니다. "술, 담배문제와 제사문제만 허용하면 신앙생활도 할 만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수용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편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여기에 앉아 계신 많은 분들도 어려운 제사문제를 잘 극복하고, 예배드리며 승리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굳센 신앙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 가족을 구원하고, 복된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내일이면 늦을 것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키호테 "태양이 비취고 있는 동안에 건초를 만들어라" A. 리톤 '기회는 모든 자들에게 찾아오지만 그것을 잘 활용하는 자는 소수다. ' 한국속담 '고기 보고 기뻐만 하지말고 가서 그물을 던져라. ' 이는 모두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뜻이 아닙니까(요11:9,딤후4:2,히3:13)
때늦은 전도는 인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때늦은 전도는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 가족, 친척,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옥에 절대로 오지 않기를 바라는 부자의 소원처럼, 우리는 지옥 가서는 안될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길은 믿음과 불신으로 갈라집니다. 우리 성도들은 일할 수 없는 밤(죽음)이 오기 전에, 즉 때가 늦기 전에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구령(救靈)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라는 짧은 말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첫째, 약한 것을 강하게 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근본적으로 죽은 자, 멸망할 사람을 살리십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고구마 전도법으로 유명한 김기동 집사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고구마전도법"을 간단하게 말씀드립니다.
"나가면 있고, 안 나가면 없다" "말하면 있고, 말 안하면 없다" 생 고구마 걱정말고, 노는 입에 찔러 보자!
 첫번째 젓가락 찌르기: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믿으십니까"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칭찬과 호감을 표현한다. "너무 친절하시네요, 혹시 예수 믿으십니까"
 두번째 젓가락 확실히 찌르기: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 "너-무-좋습니다. " 생 고구마는 대개 거부하거나 딴소리를 합니다. 그럴 때 변명하려고 하지말고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너- 무 - 좋습니다. "
 세번째 젓가락 찌르기: "기도하고 있습니다. " 한 번 이상 확인된 생 고구마를 다음에 또 만날 경우에는 "제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수시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계속 젓가락으로 찔러보면 어느 정도 익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기회는 지금입니다. 때늦은 전도는 후회와 아픔뿐입니다. 주어진 전도의 기회를 상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옥간 부자의 간절한 소원처럼 사랑하는 가족, 친지, 형제들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부지런히 전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며, 또한 영원한 삶을 보장받는 복된 성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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