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선택받은 백성들의 구원과 전도
본문
어느 여집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여집사님의 친정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안 믿으셨습니다. 여집사님은 젊은 시절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 믿는 남편을 만나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집사님은 친정 식구들을 다 전도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몇 년이 걸려서 친정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식구들을 다 전도했습니다.
이제 친정 아버지만 전도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아버지의 구원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항상 아버지께 잘 해드리려고 노력했고, 그러면서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수치스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아세요 바로 우리 같은 죄인들 때문이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이에요. 아버지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제발 예수님 믿으세요. "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 내 기도를 들어주시려나 기대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친정 아버지께서는 몇 년 후 병환으로 돌아가시면서 임종 직전까지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이 임종 직전까지 예수님을 믿으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끝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셨습니다. 너무 낙심한 집사님은 며칠을 금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내 기도 안 들어주십니까"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를 구원 대상에서 제외시키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망스럽지만,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열심히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구원에 관해서 믿고 따르는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가르침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멸망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몇몇 성경구절들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새겨보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도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성도들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 첫 번째 가르침,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성경구절이 벧후 3:9下 말씀입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 않느냐 그런데 어째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냐' 하는 것이 가장 크게 떠오르는 의문입니다.
이 구절을 살펴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라는 말을 그냥 우리 편한 대로 생각해서 "모든"이라는 말로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를 "모든"으로 바꾸어서 쓸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앞뒤 문맥이 구원을 말하면서 그 구원이 인류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선 "약속"이라는 말부터 살펴봅시다. 벧후 3:9上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 여기서 "약속"은 "약속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약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약속"을 "아무도"와 연결시켜서 이 "약속"을 '구원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해서, '인류 전체를 구원할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예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약속"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든 '선택하신 백성'이든 '구원'에 관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에 관한 약속입니까 이에 대해서 앞뒤 문맥이 말해줍니다. 세 군데만 봅시다.
벧후 3:3, 4,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3:10上,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 3:12上, "여호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문맥은 9절의 "약속"이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3, 4절에 나오는 거짓 선생들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없다. 봐라. 세상이 창조된 때로부터 그대로이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온갖 죄를 밥먹듯이 짓는 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도 베드로가 썼습니다. 베드로후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너희 믿는 자들은 저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이 하지 말라.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답게 신실하게 살아라'는 내용입니다.
베드로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왜 이리 빨리 안 오시지' 이렇게 조바심 난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씀이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예수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는 그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조바심 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오래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짧습니다. 기다린 시간으로 따지면 우리가 훨씬 더 많이 기다렸지만, 그러나 우리도 8절 말씀에 비춰서 생각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약속하신지 이틀도 안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해가 A. D. 30년인데, 지금이 2005년이니까. 맞죠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 이렇게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다시 보내시기를 지체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꾸물거리고 계시기 때문입니까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까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9中 말씀에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 여기 잘 보면, "오직 너희를 대하여"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온 인류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헷갈리겠지만, 3:1을 보면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감동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 그리고 8절의 "사랑하는 자들아"와 9절의 "너희"는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벧후 1: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받아서 읽을 성도들은 믿음을 획득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취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9절의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대해 의심하거나 트집을 잡거나 억지를 부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제 본론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9절下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무도"가 8절의 "사랑하는 자들"과 9절의 "너희"를 가리키므로 "아무도"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임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그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의 재림을 길이 참고 계십니다. 이것이 참을성 없는 우리가 보기에는 더디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아~ 2천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재림 안 하시네. "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볼 때 너무 더디게 보여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노래를 불러도 예수님의 재림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인들의 수가 충분히 찬 뒤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롬 11:25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성할 택하신 백성들을 다 모은 후에야 예수님을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은 한 마디로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따라 택하신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따라서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벧후 3:9 외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성경구절이 여러 군데 있는데,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합니다. 요 1:29, 3:16, 17, 6:33-40, 12:47, 17:2, 롬 5:8, 고후 5:19, 히 12:6, 요일 4:19 등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이 중에서 요 3:16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의 중심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죽는데 내어주시게 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동기는 '사랑'입니다. "믿는 자마다. "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누구에게 내어주셨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믿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세상"(kosmos)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믿는 신자들입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를 향해 나타나는가를 성경구절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잘 알 수 있습니다. 롬 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입니다. 히 12:6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여기서 징계 받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일 4:19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마 18:33). 감사치 아니하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십니다(눅 6:35).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는 오래 참으십니다(롬 9:22).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사랑하십니다(요 3:16).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택하신 자들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누가 구원받느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주권으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자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살펴 볼 문제는 "선택받은 백성들만 구원받는다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면, 만일 성자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면, 만일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부께서 택하신 자들만 살리신다면 무작정 세상에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죄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삽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모순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사람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성격 그 자체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선포하는 것이지, 권하거나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여호와 하나님의 좋은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죄인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약속하고, 때가되매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셨습니다. 이것은 절대 복종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이 절대 복종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 24:14에 기록된 말씀처럼 온 세상에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존귀한 가치를 만민이 듣도록 전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뿐만 아니라 전파되는 복음에 인을 쳐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그 복음이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소망 없는 인생들에게 천국 소망을 심어주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다 불러모으실 때까지 이 일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모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열심을 잘 받들어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고후 2:15, 1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초대교회 교인들은 말 그대로 죽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물론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느니만 못한 처참한 고문과 모욕 속에서 목숨을 잃으면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켰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하고 죽일수록 더 신앙이 굳세지는 것을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이런 순교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많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순교자들은 아무도 이방인들 멱살을 쥐어 잡고 예수 믿으라고 고함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함으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전도꾼들이 돌아다니면서 퍼뜨리는 달콤한 '제안'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냥 '초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해진 로마 황제들의 박해는 그 잔인함과 엽기적인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히 황제급 박해였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까지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대표적인 황제를 보통 네로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더 잔인했습니다. 기독교 교회역사가인 필립 샤프(PhilipSchaff)는 제임스 메이슨(James Mason)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로의 악마적 잔인함, 도미티아누스의 질투적 분노, 아우렐리우스의 냉정한 혐오, 발레리아누스의 교묘한 계략도 저마다 몹시 견디기 힘든 박해였으나 로마 제국 최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집중적으로 가해진 박해와 비교하면 그 빛을 잃게 된다. " 한마디로 잔인무도 했습니다.
이런 핍박을 받으면서도 마치 전염병이 돌 듯이 순교가 확산되었습니다. 심지어 소년 소녀들까지도 놀랄 만큼 확실한 신앙을 고백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예수만이 소망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흔해 빠진 사탕발림 식의 전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 보실래요" 같은 유치한 제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역겨운 것입니다.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포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면서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전도는 전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하지 말아야 할 성질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믿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믿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는 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신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에는 그 선물을 머리 속에 담아 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몸만 교회에 왔다갔다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단지 머리로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협하지 않는 굳건한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진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서 우리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냄새,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중학생이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느 주일에 교회에서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기다렸습니다. "어디 갔다 왔냐" "교회 갔다 왔습니다. "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 "저는 아버지가 아무리 반대해도 교회에 안 나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예수님 믿고 천국가셔야죠. "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망이가 사정없이 아이에게 날아들었습니다. "교회 갈래 안 갈래" "갈래요. " 아이는 반항하지 않고 계속 맞았습니다. "이래도 갈래" "갈거예요. " 아이의 입에서는 거의 죽어 가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한참을 때리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를 불러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내가 어제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한 대만 더 때리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그만 때렸다. 네가 그렇게도 목숨 걸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도 한 번 믿어 보자. " 그 순간 아이는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택하신 백성들만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오직 택하신 백성들만을 위한 일입니다. 과학이 첨단을 논하는 이 시대에도 못 만든다는 것이 피입니다. 피는 아무한테나 안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복음은 세상 끝날까지 선포될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처음 선포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여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복음 증거의 완성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일에 기쁘게 순종하며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의무요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을 전할 때이지 신자들끼리 교회 안에서 옥신각신 할 때가 아닙니다.
한 주간도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친정 아버지만 전도하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아버지의 구원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항상 아버지께 잘 해드리려고 노력했고, 그러면서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수치스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아세요 바로 우리 같은 죄인들 때문이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의인이 아닙니다. 죄인이에요. 아버지 죄를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제발 예수님 믿으세요. "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 내 기도를 들어주시려나 기대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친정 아버지께서는 몇 년 후 병환으로 돌아가시면서 임종 직전까지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이 임종 직전까지 예수님을 믿으라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끝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셨습니다. 너무 낙심한 집사님은 며칠을 금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왜 내 기도 안 들어주십니까"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기도를 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를 구원 대상에서 제외시키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망스럽지만,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맡기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열심히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구원에 관해서 믿고 따르는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가르침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여호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은 멸망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몇몇 성경구절들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새겨보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도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성도들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이 첫 번째 가르침,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성경구절이 벧후 3:9下 말씀입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시지 않느냐 그런데 어째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냐' 하는 것이 가장 크게 떠오르는 의문입니다.
이 구절을 살펴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앞뒤 문맥에 비추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라는 말을 그냥 우리 편한 대로 생각해서 "모든"이라는 말로 무조건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를 "모든"으로 바꾸어서 쓸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앞뒤 문맥이 구원을 말하면서 그 구원이 인류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선 "약속"이라는 말부터 살펴봅시다. 벧후 3:9上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 여기서 "약속"은 "약속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약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약속"을 "아무도"와 연결시켜서 이 "약속"을 '구원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른 말로 해서, '인류 전체를 구원할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예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절을 찾아야 합니다.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약속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약속"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인류 전체'든 '선택하신 백성'이든 '구원'에 관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에 관한 약속입니까 이에 대해서 앞뒤 문맥이 말해줍니다. 세 군데만 봅시다.
벧후 3:3, 4,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 3:10上,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 3:12上, "여호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문맥은 9절의 "약속"이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는 3, 4절에 나오는 거짓 선생들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없다. 봐라. 세상이 창조된 때로부터 그대로이지 않느냐'라고 말하면서 온갖 죄를 밥먹듯이 짓는 자들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서 사도 베드로가 썼습니다. 베드로후서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너희 믿는 자들은 저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이 하지 말라.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답게 신실하게 살아라'는 내용입니다.
베드로 당시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왜 이리 빨리 안 오시지' 이렇게 조바심 난 성도들을 향해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씀이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예수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오시기를 바라는 성도들에게는 그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가 '조바심 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오래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짧습니다. 기다린 시간으로 따지면 우리가 훨씬 더 많이 기다렸지만, 그러나 우리도 8절 말씀에 비춰서 생각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약속하신지 이틀도 안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해가 A. D. 30년인데, 지금이 2005년이니까. 맞죠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 이렇게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다시 보내시기를 지체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꾸물거리고 계시기 때문입니까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까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9中 말씀에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 여기 잘 보면, "오직 너희를 대하여"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온 인류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헷갈리겠지만, 3:1을 보면 성령님께서 베드로를 감동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 그리고 8절의 "사랑하는 자들아"와 9절의 "너희"는 같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벧후 1: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받아서 읽을 성도들은 믿음을 획득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취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9절의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 대해 의심하거나 트집을 잡거나 억지를 부릴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제 본론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9절下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여기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멸망치 않기를 원하시는 "아무도"가 8절의 "사랑하는 자들"과 9절의 "너희"를 가리키므로 "아무도"는 '인류 전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임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기에 그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자 예수님의 재림을 길이 참고 계십니다. 이것이 참을성 없는 우리가 보기에는 더디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아~ 2천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재림 안 하시네. "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볼 때 너무 더디게 보여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노래를 불러도 예수님의 재림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인들의 수가 충분히 찬 뒤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롬 11:25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자신의 백성들을 불러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성할 택하신 백성들을 다 모은 후에야 예수님을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은 한 마디로 은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따라 택하신 백성들이 모두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따라서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벧후 3:9 외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성경구절이 여러 군데 있는데, 성경 전체가 증거하고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합니다. 요 1:29, 3:16, 17, 6:33-40, 12:47, 17:2, 롬 5:8, 고후 5:19, 히 12:6, 요일 4:19 등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만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이 중에서 요 3:16만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의 중심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죽는데 내어주시게 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동기는 '사랑'입니다. "믿는 자마다. "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누구에게 내어주셨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입니까 믿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세상"(kosmos)은 누구를 가리키겠습니까 믿는 신자들입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를 향해 나타나는가를 성경구절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잘 알 수 있습니다. 롬 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입니다. 히 12:6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 여기서 징계 받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요일 4:19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마 18:33). 감사치 아니하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십니다(눅 6:35). 진노의 그릇에 대하여는 오래 참으십니다(롬 9:22).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은 사랑하십니다(요 3:16).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은 택하신 자들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성경 어디를 펼치든지 '누가 구원받느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주권으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자들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살펴 볼 문제는 "선택받은 백성들만 구원받는다면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한된 수의 사람들만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면, 만일 성자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만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다면, 만일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부께서 택하신 자들만 살리신다면 무작정 세상에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죄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에 안 가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삽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모순되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사람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성격 그 자체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선포하는 것이지, 권하거나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여호와 하나님의 좋은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죄인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복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약속하고, 때가되매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오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셨습니다. 이것은 절대 복종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이 절대 복종을 온 세상에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 24:14에 기록된 말씀처럼 온 세상에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존귀한 가치를 만민이 듣도록 전파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뿐만 아니라 전파되는 복음에 인을 쳐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그 복음이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소망 없는 인생들에게 천국 소망을 심어주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을 다 불러모으실 때까지 이 일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택하신 백성들을 불러모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열심을 잘 받들어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냄새를 풍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고후 2:15, 1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초대교회 교인들은 말 그대로 죽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믿음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물론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느니만 못한 처참한 고문과 모욕 속에서 목숨을 잃으면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켰던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하고 죽일수록 더 신앙이 굳세지는 것을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이런 순교자들의 태도를 보면서 많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순교자들은 아무도 이방인들 멱살을 쥐어 잡고 예수 믿으라고 고함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선포함으로,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전도꾼들이 돌아다니면서 퍼뜨리는 달콤한 '제안'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냥 '초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해진 로마 황제들의 박해는 그 잔인함과 엽기적인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히 황제급 박해였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저렇게까지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대표적인 황제를 보통 네로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더 잔인했습니다. 기독교 교회역사가인 필립 샤프(PhilipSchaff)는 제임스 메이슨(James Mason)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로의 악마적 잔인함, 도미티아누스의 질투적 분노, 아우렐리우스의 냉정한 혐오, 발레리아누스의 교묘한 계략도 저마다 몹시 견디기 힘든 박해였으나 로마 제국 최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집중적으로 가해진 박해와 비교하면 그 빛을 잃게 된다. " 한마디로 잔인무도 했습니다.
이런 핍박을 받으면서도 마치 전염병이 돌 듯이 순교가 확산되었습니다. 심지어 소년 소녀들까지도 놀랄 만큼 확실한 신앙을 고백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예수만이 소망이라는 것을 입술로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흔해 빠진 사탕발림 식의 전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 보실래요" 같은 유치한 제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역겨운 것입니다.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포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면서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전도는 전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하지 말아야 할 성질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믿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믿을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는 것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정신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에는 그 선물을 머리 속에 담아 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몸만 교회에 왔다갔다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단지 머리로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협하지 않는 굳건한 반석 같은 믿음을 가진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서 우리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냄새,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중학생이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 믿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느 주일에 교회에서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기다렸습니다. "어디 갔다 왔냐" "교회 갔다 왔습니다. " "내가 가지 말라고 했지" "저는 아버지가 아무리 반대해도 교회에 안 나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예수님 믿고 천국가셔야죠. "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망이가 사정없이 아이에게 날아들었습니다. "교회 갈래 안 갈래" "갈래요. " 아이는 반항하지 않고 계속 맞았습니다. "이래도 갈래" "갈거예요. " 아이의 입에서는 거의 죽어 가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한참을 때리던 아버지가 어느 순간 때리기를 멈추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를 불러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내가 어제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한 대만 더 때리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그만 때렸다. 네가 그렇게도 목숨 걸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도 한 번 믿어 보자. " 그 순간 아이는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택하신 백성들만 십자가 복음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은 오직 택하신 백성들만을 위한 일입니다. 과학이 첨단을 논하는 이 시대에도 못 만든다는 것이 피입니다. 피는 아무한테나 안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 복음은 세상 끝날까지 선포될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처음 선포될 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여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복음 증거의 완성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일에 기쁘게 순종하며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의무요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에 만족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이루어 가시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복음을 전할 때이지 신자들끼리 교회 안에서 옥신각신 할 때가 아닙니다.
한 주간도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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