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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말씀이 생각났더라

본문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여호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11:1~18 살다 보면 때로는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흔히 생기죠? 억울해서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에 무얼 하셨습니까? 잠은 잘 안 오고, 이 억울한 것을 어떻게 갚나? 시간이 약입니까 아니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저도 드물긴 하지만 이 억울함을 어떻게 갚나 해서 밤새 공상을 하기도 하고 머리 속에서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봅니다. 그러다가 내리는
결론

은 내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슈퍼맨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이 세상이 다 뒤집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자잘한 일에 화를 내고, 머리 속에서지만 이렇게 원수를 못 갚아 안달하나? 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어떤 분이 어릴 때에 가출을 해서 깡패들 소굴에 붙잡혀가서 도둑질 교육을 받았는데 도둑질을 못하겠다고 버티다가 엄청나게 혼이 났답니다. 주일학교 때에 배운 선생님의 말씀 '도둑질은 나쁜 것이다'는 한마디가 생각이 나서 못하겠다고 버티었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도록 맞았답니다. 꽃동산교회라고 어린이 전도로 아주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해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어릴 때 고아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 한마디 때문에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은 우리나라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 분에게 있어서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그 한마디는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죠. 가끔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서 더 이상 나쁜 길로 가지 아니하고 행동을 조절할 수 있었던 분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말씀이나 누구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생을 붙들어주고 있습니까?

오늘은 성서주일이라고 합니다.
성경주일이라고 하면 더 좋겠는데 성서주일이라고 하는군요. 성서주일을 맞이해서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힘을 지니고 있는 지 생각해 봅시다. 어려울 때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잠 못 이룰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결론

을 미리 말씀드리면 힘들고 어려울 때에나 잠 못 이루는 밤에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와 닿기를 바랍니다. '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그 말씀으로 인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불려가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더니,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절을 보세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문하여 가로되' 라고 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은 유대에 있는 사도들, 형제들, 그리고 할례자들 입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그 소문을 듣고 이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충격을 받고 실망한 사람들은 할례자들입니다. 할례자들이라고 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을 그대로 지키는 유대교 신자 같은 사람들이죠. 예수를 믿으면서도 유대교적인 사고방식을 전혀 버리지 못한 이런 사람들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사고 방식은 여전히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유교적이라든가 우리 조상들이 전해준 전통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도 읽고 배우지만 뭔가를 결정할 때는 부모들의 그릇된 충고나 이기적인 본능에 따르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물도 필요없고 신앙만 좋으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결혼할 때가 되면 신앙이 제일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경우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사고 바탕이 성경적이어야 하고 성경말씀이 내게 무어라고 하느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서 우리가 성경대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삽시다 하면 체면상 '아멘' 하고 교회 문밖을 나서면 '목사님이야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말씀을 그리 하시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서 살아 갈려면 또 다른 지혜가 필요한 거야' 그러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말씀 따로, 사는 것 따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힐난했던 사람들이 아마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반대로 바울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버렸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말씀대로 살면서 자랑할만한 것, 좋은 것, 귀한 것들을 깨끗하게 버렸습니다. 무엇으로 여기고요?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구약의 모든 율법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이 할례자들이 베드로가 돌아오자 아주 심하게 질책을 합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그 베드로를 향해서 질책을 합니까?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한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죠.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베드로, 베드로, 이웃집 아저씨 부르듯이 잘 부르지만 초대교회 때의 베드로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교황을 떠받드는 것 이상으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가 즉사한 사건이 얼마 전에 있었는데도 그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힐난할 수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이 할례자들은 간이 굉장히 큰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거꾸로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베드로를 책망할 수 있을 정도로 베드로가 잘못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예사 일이 아니다. 아무리 베드로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담대히 나설 수 있을 만큼 할례자들이 볼 때는 베드로가 잘못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잘못이기에 이럴까요? 이방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까지 간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던 일입니다. 왜요? 유대인들이 생각을 할 때에 이방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기도에는 이방인을 가리켜서 '지옥의 불쏘시게로 쓸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사람 취급도 않던 이방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 이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전해라고 했을 때에 요나가 왜 도망을 갔습니까? 도대체 여호와 하나님이 말도 안되는 것을 자기에게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슨 왕이라고 불렀죠?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여겼지 결코 세상의 구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의 사고방식 속에는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도 안되고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 교제도 안 했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을 따라서 이방인의 집에 가서 먹고 자면서 말씀을 전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이지요. 놀랜 사람이 할례자들만이 아닙니다. 사도들도 놀랐고 형제들도 여전히 놀랐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극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할례자들이었지 다른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큰 잘못을 베드로가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3절에서 15절까지 보면 베드로가 경과를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이 부분만 보면 베드로가 성질이 참 좋은 사람 같지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 베드로의 인품이 아주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성질이 얼마나 급한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시면 맞고 틀리고를 가리지 않고 제일 먼저 나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말고의 귀를 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명답을 말한 사람도 베드로이지만 돌아서서 '이 사탄아' 소리를 들은 사람도 역시 베드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해변가에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한 분이 있어서 말씀대로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은 요한입니다. 저 분이 누굴까 하고 한참 바라보던 요한이 '아! 예수님이다' 그 말을 듣고 먼저 행동하는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고기를 잡느라고 벗어두었던 옷을 입고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어가서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배를 몰고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릴 수 있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성미가 얼마나 급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 할례자들의 비난을 들으면서 3절부터 차근차근 설명을 해 나갑니다. 베드로가 언제 사람이 이렇게 변했을까요? 오순절 때에 성령을 받고 수양이 많이 되었거나 성령의 인도하심 때문에 이렇게 유순해졌을까요? 사람의 성격이 그렇게 쉽사리 변하는 게 아닙니다.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그만큼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성미대로 급하게 설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베드로가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의 설명을 잘 읽어보면 베드로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이건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베드로 자신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다른 신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럴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성격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성미가 급하고 불같은 사람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그렇게 나설 문제가 아니더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급하고 바쁜 사람이더라도 중요한 문제가 부닥치면 사람이 차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를 여기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성미 급한 베드로조차 차분하고 끈기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일이 여기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으면 복음은 이스라엘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을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질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가야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뒤를 이은 바울도 등장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는 바울이 그 뒤에 등장할 수 있도록 베드로가 지금 길을 닦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이런 작업을 못해 놓았으면 다음에 바울이 나와서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기초를 닦은 것입니다. 본문을 차근차근 한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환상 속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보자기입니까 그릇입니까? 그릇입니다. 보자기라고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계시죠?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보자기가 아니고 '보자기 같은 그릇'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시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여기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만 때로는 작은 관찰 하나가 엄청난 은혜를 주시기도 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 왔는데 그 그릇이 보자기 같더라. 어마어마하게 크더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여러 짐승들이 내려왔는데 부정한 짐승입니까 먹을 수 있는 짐승입니까? 이 말씀만으로는 부정하다는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6절을 보면 땅에 네 발을 가진 것, 들짐승과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라고 되어있지요? 이것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뒤에 말하는 베드로의 말을 보아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이 부정한 짐승을 먹을 수 없다고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말라'고 말씀하시는 환상을 세 번 보았을 때 밖에 사람들이 찾아왔더라는 거예요. 환상 때문에 갔습니까? 그 사람들이 오라고 해서 갔습니까? 환상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갔죠? 성령의 명령에 의해서 간 것입니다. 가서 보니까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더라는 말이에요. 그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했더니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걸 보고 베드로도 놀랐습니다. 베드로의 요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이것은 나의 의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이방인에게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져야 된다라고 깨달은 것은 무엇 때문인지 본문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세 번의 환상이지요? 이 환상 때문에 베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아닙니다. 환상을 보고도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데 사람이 찾아온 거죠. 이런 환상을 보고 묵상중인데 '웬 사람이 찾아왔다? 날 데리러 왔다? 아하!'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성령이 가라고 하면 말귀를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이방인들하고 같이 가면서 환상의 의미를 깨달아 알 수가 있지 않았을까요? 알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몰랐습니다. 가서 말씀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했더니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더라는 거예요. 그걸 보고 아!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까?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깨달았습니까? 여전히 아닙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베드로는 이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언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나 한번 보세요. 16절입니다. 중요하니까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합니다. 놀라운 경험을 연속으로 하면서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베드로는 지금 모르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의사가 아니에요. 일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시키시는지 베드로는 모르는 겁니다. 그러다가 문득 떠 오른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이 생각났더라는 겁니다. 그 말씀이 생각하는 순간에 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이방인에게까지 증거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죠.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밤에 환상을 세 번이나 보았으니까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되어가는 상황을 보니까 아! 이건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무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자기가 말씀을 전했을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음을 알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을 그 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모르고 들어놨던 그 말이 바로 이런 상황에서 딱 떠올랐습니다. 아! 예수님의 말씀이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구나!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말씀이 떠 올라줌으로 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꿈에 여호와 하나님께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에 부합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고민스럽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 적절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입력을 좀 해 놓아야 합니다. 다 알고 입력을 하는 게 아니고 잘 모르더라도 그냥 입력을 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민하고 걱정하다가 보니까 '아참, 성경에 이런 말씀이 들어있더라'는 생각이 나지요. 평소에 입력해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실 때에 걱정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내가 가면 너희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이것을 가장 크다고 해야할지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까?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 말씀들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성령의 사역이 그것만은 아니지만 중요한 사역의 일부인 것은 확실합니다. 성경말씀이 예수님에게도 얼마나 소중하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항상 성경말씀을 인용하셨을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에 기록된대로 움직이시면서 사역하셨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이길 때도 항상 성경말씀을 가지고 이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고 그랬습니다. 어떻게 해서 회개하게 되었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 예, 맞습니다.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있는데 닭이 울더라는 말입니다. 닭이 우는 순간에 닭소리를 듣고 회개했습니까? 닭이 우는 그 순간에 머릿속에 팍 떠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지요?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펑펑 우는 겁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회개하게 되었다고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더라.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고민되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할 때에 성경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입력이 된 게 없으면 떠오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야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시끌벅적한 이상한 영화가 하나 들어와 있죠? 니코스카잔차키스 라는 사람이 1950년 경에 '마지막 유혹'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나라에 영화로 들어와서 시끌벅적 하거든요. 이 분이 기독교를 깎아 내리거나 해롭게 할려고 그 소설을 쓴 것은 아닙니다. 자기는 나름대로 이 소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앙적으로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썼고 그와 비슷한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이 작가는 예수님을 메시야적인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아주 위대한 위인으로 보는 것이죠. 내용인즉 예수께서 위대한 인물로서 사역을 잘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정신이 혼미할 즈음에 이전에 물러갔던 마귀가 다시 찾아와서 예수님을 미혹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내려와서 이 고난을 당하지 말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라는 거예요. 소설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부분이 가장 비중이 높게 그려집니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다른 게 있습니까? 메시야의 임무를 버리고 내려와서 평범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가 나이가 많아서 해가 넘어가는 저녁노을을 처자식을 데리고 즐기고 있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좀 길어요.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에게 마귀가 환상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길게 진행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립니다. '아 이게 마귀가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구나. 내가 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마귀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전하게 다 감당하고 돌아가셨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걸 영화로 만든 사람이 원 저자의 그 의도를 얼마나 충실하게 살렸는지 다른 의도적인 왜곡은 없는지… 조금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소설을 읽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하고 질문을 좀 받기도 했습니다마는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은 읽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런 장면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듣기로는 결혼하고 연애하는 장면이 너무 사실적이고 외설스럽게 묘사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순간에 사탄의 그런 유혹을 받고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건 누구의 생각이죠? 이 소설을 쓴 그 저자의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볼 때에 예수님은 위대한 인간으로서 그 어려울 때에 그런 유혹을 받을 수도 있고 또 그 유혹을 이겨내었으니까 더욱 위대한 것 아니냐는 겁니다. 그 분이 생각하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건 그 작가가 그려낸 그 작가의 생각이며 위대한 위인들은 그런 어려움을 견디어낸 사람이니까 그렇게 묘사하면 예수님이 더 위대한 인간으로 보여진다는 의도입니다. 기적은 인정하지 않지만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시편을 찾아보겠습니다. 69편 16절부터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의 시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란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하소서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21절을 주목하십시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이 구절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순간에 묵상하고 계셨던 성경구절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이 극심할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 구절을 묵상하고 계셨다고요? 말이 될까요? 십자가의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우리는 상상을 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다 동원해도 예수님의 그 고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약한 고통을 당하면서 힘들어 할 때에 성경구절을 생각하시는 분이 잘 계실까요?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이 심하다고 하데요. 그 고통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셨으며 이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아야!' 하신 분 계세요? 예수님을 보세요. 십자가에 달려서 그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사실은 시편의 이 구절을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기억하시면서 '내 주변에 있는 저 사람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나에게 쓸개를 먹이며 초를 먹이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깨달으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행동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목마르다'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하실 말씀이 그렇게도 없었을까요? 아니 목마른 게 제일 고통일까요? 십자가에 달려서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데 목마르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다급한 일이었겠느냐는 겁니다. 하실 말씀이 그것 외에 없어서일까요? 다 이루었다 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내가 목마르다 하셨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함으로 저기에 있는 저 무리들이 시편에 예언된대로 이 일을 이루게 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이 좀 이상합니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구요? 요한복음 19장 28절입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왜 목마르다 하셨어요?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무슨 성경요? 조금 전에 보았던 그 구절입니다. 조금 전의 그 구절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는 겁니다. 도저히 동의할 수 없을 것 같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동의할 수 있구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조금 전에 니코스카잔차키스의 그 소설 얘기를 했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예수님의 위대함은 바로 그 소설의 내용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위대한 분입니다. 이 순간에 이런 유혹을 뿌리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작가는 철학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분입니다. 당대에 유명한 철학공부를 다 섭렵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예수님을 위대한 사람으로 그린 것이 그 소설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그런 식의 위대한 인물로 보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 한 말씀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그 말씀들을 묵상하고 계셨더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도 이 땅에서 해야할 일 중에 남은 일이 있느냐를 그 십자가상에서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쭉 생각해보니까 아! 하나 남았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 하셨다는 겁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던 예수님입니다. 그 후에야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계셨으며 예수님의 행동근거 하나 하나가 구약에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삶이었다는 것을 이것 하나로 족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오셨습니다. 다 큰 사람이 나귀새끼를 탔으니 어울리겠습니까? 더군다나 어른을 태워본 나귀라면 좀 낫겠지요?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나귀 새끼를 다 큰 어른이 올라탔습니다. 위엄에 가득 찼겠죠? 아니, 어떻게 본다면 다 큰 어른이 애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하고 비슷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코메디 같은 일을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그것 역시도 스가랴서에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말씀을 생각하시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다시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가 보았던 그 세 번의 환상보다도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가 더 중요합니다. 아니 이적보다 중요하고 기적적인 병고침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가 더 중요합니다. 성경말씀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중요한 말씀을 여러분은 하루에 몇 장이나 읽으시나요? 중요하다, 중요하다 아무리 증거해도 안 읽는데는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읽으셔야 합니다. 도저히 눈이 아파서 못 읽고 안보여서 못 읽고 바빠서 안되면 어떡합니까? 들으면 되잖아요. 듣는 테이프가 있다고 지난 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읽을 수가 없으면 들어야 합니다. 읽어도 모르겠고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으면 열심히 배워야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교회가 성경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노력하고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 공부할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배워야합니다. 그런 다음 더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GBT 선교사라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번역 선교사라고 합니다. 이 분들은 성경을 번역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그 분들은 훈련을 받고 일정한 지역으로 갑니다. 거기에 가서 그냥 살아요. 살면서 그 나라말과 문화와 언어를 전부 배웁니다. 다 배워서 성경을 그 나라말로 번역하는 것이 임무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영어는 물론이고 외국어 몇 개 정도는 잘 하는 분들입니다. 아주 능력이 뛰어난 선교사 한 분이 선교사로 지원하고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마침 한 방에 나이가 많은 외국인과 같이 거주하게 되었더랍니다.
아침에 일어나려니까 외국 노신사가 먼저 일어나서 성경을 보고있더랍니다. 아침인사를 해야지요.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이걸 영어로 해야되는데 뭐라고 할까? Do you have a good sleep? 한참 궁리하다 생각해낸 게 이겁니다. 한참 궁리 끝에 이제 깨는 것처럼 일어나면서 'Do you have a good sleep?'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Good morning'하더랍니다. 미국 사람이 아침인사를 Good morning이라고 한다는 거 모르는 분은 안 계시지요? 아니, 선교사님이 그 인사를 몰랐을까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지금까지 영어 배우고 공부하면서 서양사람들의 아침인사가 Good morning이라는 걸 수도 없이 배웠을 거예요. 그런데 막상 그 현장에서 열심히 생각해낸 게 왜 그 모양입니까? 인사를 그렇게 한다는 거 많이 배웠지만 실제 경험이 없으니 구체적인 상황에 들어가니까 그런 코메디 같은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용을 잘 알죠.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많이 읽어놓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실천해서 내 것으로 살아보기 전에는 구체적인 상황에 부닥치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잘 아는데 현장에 부닥치면 성경말씀이 안 튀어나오고 엉뚱한 게 튀어나온 예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천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번 더 정리를 합니다. 베드로는 놀라운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을 보고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아 이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을 할만한데도 불구하고 선뜻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말씀이 베드로를 인도해 갔습니다. 말씀이 초대교회의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어도 성경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적절한 성경말씀이 머리 속에 문득문득 떠올라서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는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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