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TOP
DOWN

[성서] 보는 신앙에서 듣는 신앙으로

본문

우리 속담에 '귀 장사 말고 눈 장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어떤 소문이나 정보를 듣고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들었으면 현장에 가서 확실하게 눈으로 확인을 해보고 일을 추진해야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귀보다는 눈이 더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 옛날 중국 한나라 선제 원년에 '강'이라는 티벳 계통의 유목민족이 한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선제는 경험이 많은 후장군 조충국에게 '누가 이 싸움에 대군을 이끌고 나갈 장군으로 적임자인가'를 물어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조충국은 "내가 비록 나이 늙었지만 나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한무제 당시 흉노족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운 장수였습니다. 그의 나이 칠십이 넘어 있었지만 아직은 원기 왕성했습니다. 선제는 보고를 듣고는 곧 조충국을 불러들여 '반란군 진압에 어떤 군략을 쓸 것인지, 또 반란군을 제압하려면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그 때 조충국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겁니다. "폐하,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군사의 일이란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계획을 짜기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급히 금성으로 달려가 현지 도면을 놓고 방안을 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그러자 선제는 웃으며 쾌히 승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충국은 금성으로 달려가 현지 답사로서 정세를 파악한 다음 '둔전책'을 세웠습니다. 보병 약 만 명을 각지에 배치시켜 농사일을 해가면서 군무에 종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곳에 1년을 함께 있으면서 마침내 반란을 진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국의 전력을 알아보려면 직접 가서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궐내에 앉아서 전령들의 보고나 듣고 전략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이 속담을 근거로 귀와 눈의 신빙성을 비교해 본다면 일대 백의 비율입니다. 그만큼 귀보다는 눈이 더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믿음의 세계는 정반대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보는 것에 의지하면 망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마음을 두면 그는 일어납니다. 그는 다시 삽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소망이 가득 찹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날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을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오직 성경'을 외쳐야 합니다. 왜입니까? 성경에 우리의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우리 앞길의 어두움을 밝히 비추어 주시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기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우리의 차가운 피를 덥혀 주는 사랑의 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7~80년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시간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만 나의 완성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만 내가 살아있는 이유와 삶의 보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내 배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수의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성서주일에 성경이 우리들에게 이르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먼저, 성경은 우리에게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으로 피가 피를 뒤대는 삶을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호4:1절)고 외칩니다. 호세아 뿐만 아닙니다. 에스겔, 아모스, 예레미야를 비롯한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이 패망으로 치닫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한결같이 외친 소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위로와 경계, 칭찬과 책망, 격려와 훈계 등, 각각 교회마다 그 내용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 계시를 전한 후에 요한이 끝맺는 말은 늘 같았습니다. 일곱 번 모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는 말로 끝납니다. (계2~3장)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들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여러 차례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셨는데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자주 하신 말씀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는 말씀입니다. 그 한 예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1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진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바울은 14년 동안이나 홀로 간직했던 비밀을 오늘 본문에서 털어놓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지만, 사실 이 체험은 너무도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말합니다. 아마 요즘 사람 같으면 이런 체험을 14년 동안이나 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올라갔었노라고, 거기 가서 놀라운 것들을 보고 왔노라고, 그곳은 이렇게 또 저렇게 생겼노라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휘를 사용해서 설명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놀라운 체험을 14년간이나 숨기고 홀로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꼭 필요해서, 말해야 할 상황이 되어서 그 체험을 끄집어내면서도 그리 장황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절수로 말하면 겨우 네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먼저 단서를 붙이고 말을 꺼냅니다. 어떤 단서입니까? 1절입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무익하나마' 분명히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 놀라운 광경들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상과 계시를 무익한 것으로 돌립니다. 우리의 신앙에 별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언젠가 퍼시 콜레라는 사람이 '내가 본 천국'이란 책을 써내서 참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찌나 자신이 다녀온 천국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지, 읽는 사람들이 마치 천국을 보는 듯한 그런 책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 책이 진실이냐'는 비판으로 떠들썩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 책도 퍼시 콜레도 잠잠합니다. 그리고 그 책 때문에 신앙의 큰 유익을 얻었다는 사람도 지금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진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 본문에 바울이 자신이 보고 온 셋째 하늘에 대해 하나라도 묘사하고 설명한 것이 있나 확인해 보십시오. 본 것에 대한 설명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4절) 들은 것을 말합니다.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광경을 본 것도 있을 터인데, 들은 사실만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적인 진리들을 보는 기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듣는 기관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그림책으로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얼마든지 성경에 그림이 아닌 사진까지도 박아 주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시대를 따지시겠습니까? 사람이 만든 사진을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시지 못하시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성경책 얇은 종잇장 위에 동영상도 구현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으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은 듣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도, 진리도,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을 통해 알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보는 것에 의존 하다가 믿음에 파선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으로 가보면 인류가 타락하게 되는 뼈아픈 장면이 소개됩니다. 간교한 뱀이 연약한 여자 하와를 타겟으로 찍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짓말'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진다고 유혹을 합니다. 여기까지였다면 하와는 뱀의 유혹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 하와는 눈을 들어 그 나무를 쳐다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창3:6절上) 보았더니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사람은 보는 것에 약합니다. 보는 것은 우리를 현혹합니다. 듣는 것에서 유혹을 받는 일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뒤흔드는 말도 한번쯤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은 다분히 감각적이고, 사람을 즉흥적으로 만듭니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각은 현혹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둠의 세력을 이기려면 보는 것도 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는 것을 어떻게 귀로 볼 수 있느냐고요? 아니요, 귀로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이 우리의 머릿속에 접수 될 때에 보는 대로 판단하여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동시에 내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진실도 아닙니다. 진리도 아닙니다. 귀로 들리는 것이 진리요, 진실이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를 세워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에 들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만이 우리를 곧추세워주십니다.

 셋째, 보기를 원하는 신앙이 듣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보기를 원합니다. 보았으면 합니다. 보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보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듣는 것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여호와 하나님께 확실하게 보여달라고 요구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 (요20:27,29절) 여호와 하나님은 왜 보는 채널보다 듣는 채널을 택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눈은 다분히 감각적이고 즉흥적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문화는 듣는 문화가 아니라 보는 문화입니다. 라디오 시대가 아니라 텔레비전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맘에 드는 것이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손에 쥐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면 우정이고 정의고 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이 성경주일에 우리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만이라도 보는 신앙에서 듣는 신앙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나 이적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믿음의 법칙은 들리면 보이는 것이지, 본 다음에 듣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한다면, 그 음성듣기를 즐겨하시기 바랍니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이집트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시저가 죽은 후에 그의 부하였던 안토니우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안토니우스가 시저의 양아들이면서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와 싸워 패배할 때 클레오파트라는 자기 시종 알렉서스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렉서스, 너는 나의 용감한 안토니에게 다녀온 덕에 그분의 빛으로 다소 빛나 보이는구나. " "여왕폐하, 그 어른은 마지막으로 이 진주에 여러 차례나 키스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하신 분부는 이 가슴에 못 박혀 있습니다. " 그러자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의 음성을 얼른 뽑아다 내 귀에 넣어야겠다. " 여러분, 얼마나 사모했으면 시종의 가슴에 못 박혔다는 말을 뽑아서 자기 귀에 넣으려 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뽑아다 귀에 넣고 마음에 새기려는 간절함으로 성경을 펼치는 행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