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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본문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마게도냐로 건너가 유럽선교를 시작하게 된 바울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 철학의 중심지 아덴에까지 오게 되었고 그곳의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연설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17-18절을 봅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 바울은 회당에서나 장터에서나 가리지 않고 전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유대인이나 경건한 사람들이나 날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했음을 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당시 희랍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을 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그러한 전도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17절에서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고 하고, 18절에서는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했다고 하며, 또 20절에서는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 했다는 것 보면 역시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의 전도는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전도에 대한 아덴 시민의 반응에 관한 종합적 보고를 우리는 본문 32-34절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전도에 대한 아덴 시민의 반응이 세 갈래로 갈린 것을 봅니다. 첫째는 조롱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 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수용입니다. 34절에서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 합니다.
몇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하며 믿었고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도 있었으며 여인도 있었던 것을 보아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는 완전한 실패라고는 할 수 없으나 큰 성공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32절 하반절과 3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라 합니다. 분명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다음인 18:1에 보면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아덴에는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유대인들의 반발과 난동과 위협이 그를 다른 도시로 옮겨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적 지혜만을 좇는 아덴 사람들의 기질과 지적 거부가 그를 떠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아덴에서의 전도경험은 바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덴에서의 씁쓸한 경험은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전도원리를 분명하게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그 전도원리를 고전1:18-29에서 길게 언급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 말씀은 전도에 임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에 잘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 말씀에서 위로와 용기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으며 그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멸망할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그 십자가의 도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자기 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여호와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
고전2:1-14의 말씀도 전도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을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 함과 같으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 그리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새롭고 상업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 바울도 처음에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스스로를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대한 전도자, 목회자로 만든 것은 설득력 있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였고 성령의 역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일은 성령의 역사 아래 있지 않는 육의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로 들릴 뿐입니다. 성령께서 알게 하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을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전할 뿐입니다. 우리가 전할 때 역사하시고 안 하시고는 성령의 몫이고 자유입니다. 그러나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믿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나 전할 사명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우리는 새문안 새 생명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태신자 작정도 하고 잃은 양, 숨은 양 찾기운동도 벌이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가 전도하는 훈련도 계속합니다. 그 누구를 만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든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주눅들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모든 전도운동이 미련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망설임을 아직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미련한 것 아닙니다.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미련한 것입니다.
미련할 뿐 아니라 가련한 것입니다. 최고의 지성과 철학적 사고를 자랑하던 아덴에서도 남녀고하를 막론하고 믿는 사람이 생긴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오늘날도 최고의 과학자들 가운데 오히려 순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만드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으며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고 사도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오늘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사람의 지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에 달린 것임을 사도 바울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의 전도의 경험과 거기서 얻은 확신이 또한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는 전도도 아니고 혼자 하는 전도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도고 성령을 따라 하는 전도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복음전파에 기쁨으로 나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부활주일의 예배출석인원이 칠천 명을 넘어섰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도약 1070의 목표를 정한 금년 말까지 칠천 명 이상의 고정적인 출석교인을 확보하고 내년에는 팔천 명 이상의 목표를 바라보며 날아오르는 비상 1188의 새문안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희생적 전도/행11:19-21
물에 빠진 아들을 건져 내기 위해 아버지가 강물에 몸을 던져 아들을 건져 내고 죽었던 사건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희교회의 아이 이야기입니다. 동생을 건져 내고 대신 죽은 일도 있고 열차에서 놀던 아이를 구하고 다리가 절단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 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도 이와 다를 바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되는 법이 없습니다. 수고가 있어야 되고 눈물이 있어야 되고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합니다. 사실 당원에 입당시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누구 한 표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굉장히 어렵고 희생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마귀가 그냥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일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문제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제이기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려고 하니까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사탄이 영혼을 움켜쥐고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당원서 받은 것은 쉽습니다. 한나라당 입당원서나 열린 우리당 입당 원서는 받기 쉽지만 천당입당원서는 어려운 이유가 영적 문제이기 때문이라 이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을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자 라고 정의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롬 15:5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은 즉’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전 인류가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볼 때 70-80년의 삶을 사는 것이 생명이라고 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긴 세월일지 모르지만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이 세상에서 몇 십년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저 어항에 몇 달 살다가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침 이슬처럼, 안개처럼 금방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생의 길이요 인간의 현주소 아닙니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은 이런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가 영원한 것이며 그 영원성에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원함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것이며 죽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다시 살 길을 여신 것이지요. 그것은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짐어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단순한 사건과 진리가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사건과 역사인지 모릅니다. 죽을 사람이 사라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리고 살아난 삶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또 살리기 위해서 전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전도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입니까
로마서 1장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복음전하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복음밖에 생명을 살릴 길이 없기에 이 복음은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능력이 되지요. 생명을 살리니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능력이 아니면 생명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입니다. 상대방이 답을 모른다고 해서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부끄러울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세상지혜로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동시에 구원받을 길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하는 것을 바울은 알게된 것입니다. 왜 미련한 전도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아침에 가계에 들어가서 ‘할머니 예수믿으세요’그러면 곧 바로 소금을 뿌립니다. 미련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미련한 방법이라기보다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그러면 보여봐! 아무소리 말고 보여 보라니까 그러면 믿을께' 이러고 있단 말입니다. 설득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미련한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이 가장 복된 방법이기에 능력이 됩니다. 그러니까 복음전하는 것이 부끄러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전도는 가장 보람된 일이고 가장 아름다운 일이고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오신 목적이 영혼 구원 아닙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일이요, 주님의 유언을 성취하는 일이라 보람있는 일이요, 주님의 삶을 사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희생이 따라야합니다. 왜냐하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지혜로는 가치 없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구원을 위해 누가 처음으로 희생되셨습니까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외아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취루었습니다. 성자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놓았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받친 것입니다. 성령여호와 하나님은 어떻게 희생하셨습니까 그는 이 세상에 오셔서 교회 안에서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떠나지 않고 돌보고 계십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12장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여기서 한 알의 밀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 썩은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희생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날아난 것이지요. 그냥 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천국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값없이 아무 공로없이 그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구원을 이루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이처럼 희생 하셨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뒤를 따라 생명 살리는 일에 헌신하기를 당부하시고 우리를 불러 세웠습니다. 우리에게 그냥 가서 희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셔서 가라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간절히 여호와 하나님의 희생에 동참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시고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누군가의 기도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부모님의 기도덕분에, 아니면 여러분들을 전도하기 위해 섬기고 찾아오고 호소하고 복음을 전하고 이런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25%로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세계가 깜짝 놀랄 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열 교회를 뽑으면 우리나라가 두 세 교회가 포함될 정도로 신앙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연히 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와 선배신앙인들의 헌신과 믿음의 유산과 충성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양화진에 가면 많은 사람들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1세기 전에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풍토병에 걸려 적응하지 못해서 죽은 어린아이들의 무덤과 어떤 선교사 부인의 무덤이 있습니다. 명대로 살지 못한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들은 무명선교사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런 분들 앞에 빚진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빚진 감정으로 그들이 희생한 그 희생의 대가를 거두어 들어야합니다.
사실 주위에 큰 교회들이 많습니다. 요즘 큰 교회들은 부흥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큰 교회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큰 교회는 저절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희생한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 이렇게 부흥한 것입니다. 눈물로 뿌리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정성을 다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절대로 교회는 부흥하지 못합니다. 희생한 사람들이 누리는 감격은 그냥 큰 교회니까 해택을 누리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보는 앞에서 눈물로 씨앗을 뿌리고 밤낮으로 모여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밤을 세워가며 염려했든 그 희생이 지금 열매로 거두는 모습을 보는 그 자체가 복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은 부활 하셨다’고 힘차게 외쳤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자 피 맛을 들인 무리들이 사나운 야수처럼 변화여 믿는 자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람들 앞에 끌어다가 예수를 욕하라 예수를 모욕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다가 감옥에 투옥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흩어져서 한 무리가 예수살렘에서 450KM 떨어진 안디옥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안디옥은 그 당시 로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그 당시 인구만 해도 50만이 넘었고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밤에 가로들을 켜 놓고 있었던 도시입니다. 이런 풍족함을 간직한 도시인지라 다양한 민족들이 몰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인해 여러 가지 우상들도 따라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번영된 도시라 쾌락에 젖어서 흥청망청 사는 도시입니다. 로마귀족들이 은퇴 하면 여기 와서 별장을 짓고 온천과 경마와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도시에 한 무리가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 안디옥에 복음을 들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때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사도행전 11:21절 말씀입니다. 시체와 같은 사람들이, 쾌락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리하여 성경에 가장 유명한 안디옥 교회가 탄생한 것이지요. 안디옥교회는 세계선교의 발상지입니다. 이 교회에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을 받았습니다. 누가가 이 안디옥에서 전도를 받았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떻게 짦은 시간에 부흥이 일어났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안디옥에 들어온 이름모를 성도들에 의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실 예수님 때문에 신세를 망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무일푼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족도 데리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기될 때도 없고 앞날이 막막한 그런 상태의 사람들이였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포기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살아갈 그런 형편의 사람들 이였지만 그들은 가는 곳 마다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예수는 부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외치며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해 전 삶의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이 생명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위대한 안디옥 교회를 탄생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는 하늘나라의 가치이며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가치입니다. 그러니 희생이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도개전도법의 박병선집사의 간증을 들은 적인 있는데 그 분이 처음으로 교회 나올 때 새 신자 그 교회가 1000여명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을 건축했는데 출석교인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나 봅니다. 그래서 빈 의자가 눈에 들어오는데 마음에 이런 기도를 드렸답니다. ‘ 여호와 하나님 제가 저 빈의자를 채우겠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옵소서’교회 처음 나와서 빈 자리를 보고 그런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끝난 후에 성령이 감동을 주시는데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처음 나온 기념으로 목사님께 식사 초대를 했는데 몇 분이 오실 줄 알았더니 29명이나 왔더랍니다. 식당에서 식사가 나오는 동안 이 분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저가 처음 교회에 나와서 보니까 빈 자리가 많습디다 여러분들이 한 명씩만 데려 오면 600명이 될 것 아닙니까 그 나머지는 내가 채우겠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장로님이 ‘교회 나온 것도 고마운데 식사대접까지 하고 또 빈자리를 채우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와 칭찬을 받고 헤어졌습니다.
그는 교회 다닌지 1년만에 800명이 넘는 불신자를 전도한 사람입니다. 그가 간증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고 고백하면서 이 분이 시의원 선거를 4개월 전에 뛰어 들었는데 4개월 전부터 준비를 했다는 것은 바위에 게란 던지기입니다. 당선 가능성이 그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선거운동은 안하고 전도만 하려 다닙니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온 줄 아십니까 순천에서 최다 득점으로 당선이 되었답니다. 그가 시 의원을 하는데 시의원 22명중에 20명을 전도 했답니다. 그랬더니 시 예결 위원장을 시켜 주드례요. 예산서를 보니까 불교는 예산이 측정되어 있는데 기독교는 없더랍니다. 왜 기독교는 예산이 서 있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불교는 문화제 관리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병선집사님도 그러면 기독교도 예산을 세워야 되지 않느냐 해서 순천시 기독교 성지화지원에 따르는 조례를 1표자이로 통화 시켰답니다. 이제 순천은 눈이 많이 와서 교회가 무너지면 보상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박병선집사님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한 영혼을 구원했을 때 그 기쁨을 날마다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한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800명이 넘는 사람을 전도하는데 얼마나 큰 희생이 있었겠습니까 자기 교회 다니는 권사님이 남편의 전도를 부탁받고 두 달 동안 먹을 것을 사가고 찾아갔는데 그 할아버지가 이런 노래를 부러더랍니다. ‘전도는 아무나하나 교회는 아무나가나’이런 모욕과 시련을 참아내며 복음을 위해 희생한 삶이 기쁨이요 영광이란 고백입니다. 정말 가치 있는 일이지요. 축복된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인격적으로 멸시를 받거나 자존심을 구기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구두쇠처럼 살면서 상대방을 위하여 돈을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를 위해 돈을 쓴다고 해서 그가 나를 알아줍니까 이 바쁜 세상에 중요한 약속이나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일부러 시간 내서 만나는 것은 결코 쉬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 준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의 마음과 정성을 이해하고 고마워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귀찮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런 작은 수고와 희생의 재물이 타서 향기가 되어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해마다 실시하는 추수감사주일 전도대회는 우리가 일년 동안 주를 위해 희생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전도사업을 통해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깨닫고 주의 뜻과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마다 전도대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잔치를 여는 예배가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반드시 일어나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일을 했느냐의 예배에 우리는 너무나 소홀히 한 것같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생명을 구원하는 예배가 되어 천국잔치의 예배로 성화되는 축복을 누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은 일에 희생은 반드시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감격과 은혜와 축복으로 이어지는 희생이기에 복되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이지만 주님의 은혜 안에서 보면 희생이 아니라 축복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 선교사로 일하다가 생을 마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이신 리빙스턴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16년동안 밀림지대에서 선교를 하다가 잠시 영국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자에게 물린 팔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살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마른 몸으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설교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 곳에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주셨다는 것을 놓고 한번도 즐거워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 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을 하며 말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을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이것이 그의 설교였습니다.
슈테른베르크가 그린 유명한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와 유대인들 앞에서 조롱을 받으시면서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그림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이 그림을 보고 감동한 하버겔이 쓴 찬송가가 18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과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였습니까 그리고 그 영광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손자가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한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앞에 놓고 예수 믿으면 안 된다고 수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손자는 아란 곳 하지 않고 교회를 나가는 것입니다. 할어버지의 반대가 소용이 없습니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교회가지 말라는데 왜 교회를 가느냐며 손자의 목에 칼을 더리대며 교회나가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그런데도 손자는 죽어도 좋으니까 교회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의사를 표시하자 할아버지는 칼을 거두고 손자의 뺨을 힘차게 때리면서 ‘그렇게 좋은 예수라면 나한테는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고 했답니다. 그 후 손자와 함께 신앙생활을 잘 했다는 실화적인 사건입니다.
우리가 좋으신 주님을 은혜의 주님을 다른 사람도 함께 공유하는 축복이 있어야합니다. 사람 살리는 일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만이 살릴 수 있는 이 일에 우리교회가 힘을 모아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역사를 이루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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