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
본문
“은총의 30년! 이웃과 함께, 세계와 함께” 라는 표어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했습니다.
그 첫 발자국으로 지난 주 우리는 Miss Mang 선교사를 우상을 섬기는 나라, 미얀마에 파송하는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목표 아래 삼삼삼의 비전을 품었습니다.
삼삼삼 비전은 ‘삼백명의 헌신된 리더를 양육하여, 삼백개의 건강한 소그룹을 만들고, 삼십명의 사역자를 열방에 파송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삼삼삼의 비전을 이루는 감격적인 첫 발을 힘차게 내딛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미약하지만 앞으로 더 창대케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임할 것을 기대합니다.
올 해 실천목표는 “원 플러스 운동으로 도약하는 해-예배, 봉사, 전도”입니다.
지난 주 예배 원 플러스에 이어, 오늘은 전도 원 플러스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원 플러스의 의미는 숫자적으로 ‘한 번 더’ 라는 의미와 ‘한 단계 더’ 라는 성장과 성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올 해 우리가 중점적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목표가 바로 “전도 원 플러스”입니다.
이 시대는 전도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들조차도 전도에 대한 거부감 내지는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확장된 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은 열정적인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지교회가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이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행5:42)
그 결과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지교회가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우선순위를 전도-생명을 살리는 일에 두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전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높고 높은 보좌에서 가장 낮은 동물의 마굿간에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시키고자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역의 우선순위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두셨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생명을 살리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자녀가 있다면 마땅히 부모님이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행할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부모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부모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귀한 선물을 드린다고 해도 불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도에 무관심하다면 본질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누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자일까요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이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 나의 손길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나의 마음이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길이 멈추는 곳에 나의 발걸음이 멈추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에 머무는 곳에 나의 관심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증거는 바로 전도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역시 전도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 역시 전도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전도라는 사명을 버리고서는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자기 기쁨은 누릴 수 있지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디서부터 전도를 시작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십자가의 은혜’로 부터입니다.
전도는 누군가의 강요나 억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발견하거나 깨닫게 되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우리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다음에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가장 미련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심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을 값없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은혜, 그 사랑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 308장)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하셨네
여호와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당연히 내가 받은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올인(all-in)한 주인공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장 핍박했던 자입니다.
율법의 의를 이루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철저히 거부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인생은 송두리째 바뀝니다.
자신의 모든 의를 포기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만 자랑하는 자가 됩니다.
편안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나갑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이유는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고백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내에서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사도로 인정받으려면 예수님의 제자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12제자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9장 전반부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께서 인쳐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9:2)
그리고 자신은 얼마든지 사도로서 먹고 마실 권리도 있고, 아내와 함께 살 수도 있고, 얼마든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이 복음의 장애가 될까봐 오히려 그 권리를 주장하거나 쓰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가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16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쓰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임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게 됩니다.
전도는 쉽게 말하면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19절)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유자였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출세나 권세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즉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 다 얻어내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전도하고자 하는 자를 위해 나의 유익을 양보하거나 희생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전도하려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양보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 오셔서 간증했던 옥경이, 칠갑산 작사 작곡가인 조운파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캐딜락을 타고 다는 권리를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캐딜락을 처음 사서 시속 150, 180km을 달려도 차속의 물 컵의 물이 그대로 있는 것이 처음엔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찔림이 오면서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렇게 고급 차만 타고 다니면 전도할 사람은 언제 만날 수 있겠느냐"
이때부터 캐딜락을 여호와 하나님께 반납하고 버스 카드와 전철표를 사서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희생 없이, 섬김 없이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려면 먼저 종으로 살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둘째로, 율법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0-21)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는 율법 있는 자 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 같이 행동합니다.
이런 행동은 어떻게 보면 이중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줏대가 없는 신앙인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 전도에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 될 수 만 있다면 자신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만 전파될 수 있다면 자기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바울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너무 율법적인 사고에 묶여 있으면 복음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여전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신음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바울처럼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통해 복음이 전달되고,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일을 우선순위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눈 높이를 맞추었습니다. (22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힘이 있지만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대상자의 눈 높이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이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든지 높은 보좌에서 말씀으로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치료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창기,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동행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하려면 대상자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내 입장이 아닌 그 사람의 눈 높이에서 접근할 때 마음의 문을 쉽게 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즉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23절)
오늘 우리는 바울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전도는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모든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라는 책에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20대 초반,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길버트 빌레지키안 교수님의 말씀을 통해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평생 뭔가에 삶을 바칩니다. 쾌락이나 재물, 인기, 권력 등 대상은 달라도 누구나 뭔가에 삶을 쏟아 붓습니다. ”
이 말은 들은 하이벨스는 자신은 과연 무엇에 삶을 쏟고 있는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당시 하이벨스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려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른 채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 버림과 소외를 당하고 절망에 허덕이는 사람,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는 성취와 명예를 위해 사는 사람,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먼 돈을 좇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의 삶의 목적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관심을 가지셨고, 집착하셨던 바로 바로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불타는 열정을 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빌레지키안 교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는 그분의 소망을 알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줍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인도하는 일에 자기 일생을 바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 섬기는 인생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
저는 작년 구역장 세미나 시간에 이 책을 함께 읽으면서 제 가슴 속에 깊숙이 박힌 한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 섬기는 인생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
저는 이 문장만큼 전도를 쉽고,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우리의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리켜주는 표지판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 표지판입니다.
표지판은 우리들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안내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안내판, 표지판 구실을 해야합니다.
만약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계룡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산 중턱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비 속에서 우리 앞에 길을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표지판을 따라서 한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원하는 목적지는 나오지 않고 점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되돌려 표지판이 있는 곳에 다시 왔습니다.
화가 난 친구가 표지판을 발로 걷어차는 순간 표지판이 빙그르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돌려놓았는지, 아니면 낡은 표지판이 바람에 밀려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잘못된 표지판을 보고 시간을 낭비한 것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의 삶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믿은 자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행실이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가리켜준다면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전도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지금 가장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쏟는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단 한번 뿐인 인생,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주님 앞에서 가장 멋진 인생으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landmark)’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 원 플러스-그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전도해야 할 대상자(6P)를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날마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빛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 올려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생명의 열매를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우리 모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 전심전력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이루어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자”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주님께 인정받는 가장 고귀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첫 발자국으로 지난 주 우리는 Miss Mang 선교사를 우상을 섬기는 나라, 미얀마에 파송하는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목표 아래 삼삼삼의 비전을 품었습니다.
삼삼삼 비전은 ‘삼백명의 헌신된 리더를 양육하여, 삼백개의 건강한 소그룹을 만들고, 삼십명의 사역자를 열방에 파송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삼삼삼의 비전을 이루는 감격적인 첫 발을 힘차게 내딛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미약하지만 앞으로 더 창대케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임할 것을 기대합니다.
올 해 실천목표는 “원 플러스 운동으로 도약하는 해-예배, 봉사, 전도”입니다.
지난 주 예배 원 플러스에 이어, 오늘은 전도 원 플러스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원 플러스의 의미는 숫자적으로 ‘한 번 더’ 라는 의미와 ‘한 단계 더’ 라는 성장과 성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올 해 우리가 중점적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목표가 바로 “전도 원 플러스”입니다.
이 시대는 전도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들조차도 전도에 대한 거부감 내지는 부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 확장된 다는 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은 열정적인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지교회가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이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행5:42)
그 결과 날마다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지교회가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우선순위를 전도-생명을 살리는 일에 두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복음을 증거 하는 전도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전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높고 높은 보좌에서 가장 낮은 동물의 마굿간에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시키고자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역의 우선순위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두셨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생명을 살리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자녀가 있다면 마땅히 부모님이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행할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부모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부모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리 귀한 선물을 드린다고 해도 불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도에 무관심하다면 본질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누가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자일까요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나의 시선이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 나의 손길이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나의 마음이 머무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길이 멈추는 곳에 나의 발걸음이 멈추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에 머무는 곳에 나의 관심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최고의 증거는 바로 전도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역시 전도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섬김 역시 전도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전도라는 사명을 버리고서는 주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로서 자기 기쁨은 누릴 수 있지만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어디서부터 전도를 시작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려주신 십자가의 은혜’로 부터입니다.
전도는 누군가의 강요나 억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베풀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전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좋은 것을 발견하거나 깨닫게 되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우리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다음에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가장 미련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심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을 값없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은혜, 그 사랑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 308장)
♬그 크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하셨네
여호와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당연히 내가 받은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증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올인(all-in)한 주인공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장 핍박했던 자입니다.
율법의 의를 이루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철저히 거부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인생은 송두리째 바뀝니다.
자신의 모든 의를 포기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만 자랑하는 자가 됩니다.
편안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 좁은 길로 나갑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면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불러주신 이유는 바로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고백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내에서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사도로 인정받으려면 예수님의 제자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자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12제자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9장 전반부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주님께서 인쳐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9:2)
그리고 자신은 얼마든지 사도로서 먹고 마실 권리도 있고, 아내와 함께 살 수도 있고, 얼마든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들이 복음의 장애가 될까봐 오히려 그 권리를 주장하거나 쓰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가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16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쓰지 않고 일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부득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사명이요 존재이유임을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게 됩니다.
전도는 쉽게 말하면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19절)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유자였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출세나 권세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즉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 다 얻어내고,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전도하고자 하는 자를 위해 나의 유익을 양보하거나 희생하지 않는다면 결코 전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전도하려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양보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 오셔서 간증했던 옥경이, 칠갑산 작사 작곡가인 조운파 집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캐딜락을 타고 다는 권리를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그가 캐딜락을 처음 사서 시속 150, 180km을 달려도 차속의 물 컵의 물이 그대로 있는 것이 처음엔 그렇게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찔림이 오면서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겠다고 큰소리치면서 이렇게 고급 차만 타고 다니면 전도할 사람은 언제 만날 수 있겠느냐"
이때부터 캐딜락을 여호와 하나님께 반납하고 버스 카드와 전철표를 사서 전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종이 되고자 하는 희생 없이, 섬김 없이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려면 먼저 종으로 살기를 결심하셔야 합니다.
둘째로, 율법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0-21)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는 율법 있는 자 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 같이 행동합니다.
이런 행동은 어떻게 보면 이중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줏대가 없는 신앙인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목적은 생명을 살리는 전도에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 될 수 만 있다면 자신은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만 전파될 수 있다면 자기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바울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너무 율법적인 사고에 묶여 있으면 복음에 대해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여전히 율법의 멍에를 메고 신음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바울처럼 진리 안에서 자유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통해 복음이 전달되고,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일을 우선순위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눈 높이를 맞추었습니다. (22절)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힘이 있지만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대상자의 눈 높이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이유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든지 높은 보좌에서 말씀으로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치료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당시 유대인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창기,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동행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하려면 대상자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내 입장이 아닌 그 사람의 눈 높이에서 접근할 때 마음의 문을 쉽게 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즉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23절)
오늘 우리는 바울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전도는 결코 이론이 아닙니다.
모든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입니다.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라는 책에서 빌 하이벨스 목사님은 20대 초반,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길버트 빌레지키안 교수님의 말씀을 통해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평생 뭔가에 삶을 바칩니다. 쾌락이나 재물, 인기, 권력 등 대상은 달라도 누구나 뭔가에 삶을 쏟아 붓습니다. ”
이 말은 들은 하이벨스는 자신은 과연 무엇에 삶을 쏟고 있는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당시 하이벨스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려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모른 채 영원한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 버림과 소외를 당하고 절망에 허덕이는 사람,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는 성취와 명예를 위해 사는 사람,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먼 돈을 좇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의 삶의 목적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관심을 가지셨고, 집착하셨던 바로 바로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불타는 열정을 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빌레지키안 교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는 그분의 소망을 알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줍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인도하는 일에 자기 일생을 바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 섬기는 인생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
저는 작년 구역장 세미나 시간에 이 책을 함께 읽으면서 제 가슴 속에 깊숙이 박힌 한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 섬기는 인생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
저는 이 문장만큼 전도를 쉽고,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는 우리의 삶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리켜주는 표지판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 표지판입니다.
표지판은 우리들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안내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삶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안내판, 표지판 구실을 해야합니다.
만약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잘못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계룡산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산 중턱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비 속에서 우리 앞에 길을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표지판을 따라서 한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원하는 목적지는 나오지 않고 점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되돌려 표지판이 있는 곳에 다시 왔습니다.
화가 난 친구가 표지판을 발로 걷어차는 순간 표지판이 빙그르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돌려놓았는지, 아니면 낡은 표지판이 바람에 밀려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잘못된 표지판을 보고 시간을 낭비한 것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의 삶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믿은 자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행실이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가리켜준다면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전도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지금 가장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쏟는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단 한번 뿐인 인생,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이 주님 앞에서 가장 멋진 인생으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일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landmark)’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 원 플러스-그것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전도해야 할 대상자(6P)를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날마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그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빛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께 올려드리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생명의 열매를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우리 모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 전심전력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이루어가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자”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주님께 인정받는 가장 고귀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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