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 가치관의 전도
본문
이제 더운 여름이 시작됩니다. 여름에 더위를 해소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괴기영화를 보면서 땀을 식히는 방법도 있고, 수영장에 텀벙 뛰어드는 방법도 있고, 아주 좋은 책을 보며 더위를 잊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도 이 여름에 우연히 책을 보게 되었는데, 지난 1988년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했을 때, 올림픽에 얽힌 뒷이야기들 기록해놓은 책 몇 권이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더위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어쨌든, 우리나라가 자동차 문화가 굉장히 좋은 선진국이었고, 한강물도 깨끗했고, 공기도 맑았고, 사람들도 친절했고, 그 기간 동안에는 부정부패 등의 스캔들도 별로 안 보였습니다. 그런 기록들을 읽으면서 우리도 한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책 가운데에서 소박한, 아주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얘길 오늘 드리겠습니다.
올림픽 때 각국의 선수들이 입장하는데, 입장할 때면 맨 앞에 그 나라 국기 피켓을 든 여자를 따라서 입장합니다. 그 도우미를 피켓걸이라고 하는데, 피켓걸들이 제일 앞에서 입장하면 그 뒤를 따라서 선수단, 임원이 입장하는 장면, 다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국기 피켓을 든 도우미가 있었는데, 아마 그 나라 선수단이 볼 때 그 여성이 굉장히 아름답고 좋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수단 임원 중 하나가 나중에 이 아가씨를 찾아와서 프로포즈를 했답니다.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우리나라에서 부자다. 얼마나 부자냐 하면, 재산도 많고 아내도 네 명이나 된다. 그대를 다섯 번째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 만약 오케이만 해준다면, 나는 부자니까 소 서른 마리를 선물로 주겠다. ” 아마 아프리카 식으로는 굉장한 부자였나 봅니다. 아내를 넷이나 거느리는 것은 상당한 재산이 있는 것이고, 소 서른 마리를 주겠다는 것은 엄청난 제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 보면 이 프로포즈를 받은 아가씨가 한 대답은 딱 두 마디입니다. “No, Thank you. ”
그 아프리카 사람은 자기가 본 여성을 다섯 번째 아내로 맞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복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사랑을 아프리카 식으로 소 삼십 마리로 사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 생각에는 당연히, 사랑은 소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 나누는 것이며, 자신은 소 서른 마리에 팔려갈 정도의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했을 것입니다. 물론 나라마다 프로포즈를 하는 방법도 다르고, 결혼할 때 주고받는 것도 다를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끼리의 친교도 우애도 돈 주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동해야, 마음이 서로 통해야 되는 겁니다.
이 얘기를 제가 아프리카 사람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습니다만, 오히려 지금 이 땅에, 올림픽을 치른 선진국이라고 내세우던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인간애를, 우애를, 정의를 돈으로 사고팔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팔고 삽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렇게도 쉽게 깨지고 맙니다. 질그릇보다도 더 쉽게 그냥 깨집니다. 사랑이 깨지면 마음도 깨지고 인생도 깨집니다. 그런데도 사고팝니다. 사고파는 관행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사람까지도 사고팔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건은 팔 수 있어도 어떻게 사람을 팔 수 있습니까
성서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죄로 얼룩져 있고, 죄를 지은 인간은 전부 멸망시켜야 되겠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되겠는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죄 값을 직접 치르기로 하고 소 서른 마리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값으로 치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죄를 다 씻기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 사셨습니다. 이게 성서의 얘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사실 때, 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분신인 예수를 통하여, 아니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대신 내주고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 겸 부탁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몸을 내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존귀한 피조물이므로, 하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인간들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 감격하여 우리의 사랑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은총을 입은 온전한 사람으로 서서, 사람의 향기를 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참 인간의 향내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슬픔, 기쁨, 울음, 웃음, 인간적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면서 우리한테 은총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한테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상통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아마 하늘나라와 다름이 없을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을 주고 사신 여러분, 좀 모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과 서로 마음 깊은 곳에서 대화를 나눠 봅시다. 가슴을 열고, 좋으면 찬송하고, 힘들면 기도하고, 기쁘면 웃고, 어려우면 울기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가슴에다 우리 가슴을 한번 맞대 봅시다. 한번 가슴으로 만나 보십시다.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오늘 여기서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교회 나오는 게 무슨 이유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만나기 위함입니다. 오늘 그래서 우리는 예배 장소에 모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드릴 것을 드리십시오. 받을 것이 있으면 간구하십시오. 조건 없는 만남, 이런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상생하는 만남, 이 만남을 오늘 여러분이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만남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무 교만해질까 봐 내 육체에 찌르는 가시 하나를 주셨습니다. 내가 교만할 때마다 이 가시가 나를 찌르는 그 아픔 때문에 나는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 그 말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내 편의대로 활용하고 싶었는데, 가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가시는 무엇입니까 성서를 주석하는 많은 분들이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천주교 측에서는 주로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독신으로 그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인간적인 성적 충동도 있었을 것이고 죄를 짓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텐데 이것을 이겨야 했던 것이 바울의 가시였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그런 해석도 있지만, 사도 바울의 육제적인 약점을 상정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안질도 있었고 편두통에다 간질병까지 있었고, 키는 작고 못생긴데다 대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고 돌아다니면서도 바울은 아마 자신의 이런 모습과 질병들이 가시가 되어서 자랑하고 싶어도 교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게 만들 만큼 고통스러운 가시! 이 가시 때문에 사도 바울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가시 좀 없애주십시오 하고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하시는 말씀은, “그 가시가 있어서 내 은혜가 너한테 족하다. 네가 약해야 내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이라는 사람은 가시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도 바울인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얼마나 유혹과 좌절이 많았겠습니까 사도, 성직자,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고요, 그래서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직을 벗어 던지고 자유인으로 맘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나도 해방 받고 싶다. 사도직을 하루만이라도 떠나고 싶다. ” 그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시로 찔러서 사도의 길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한 가시는 십자가에서 예수가 머리에 쓴 가시관의 가시와 같습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 스가랴서를 보면, 스가랴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야 했던 우리 백성 이제 해방되어서 돌아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합시다. 성전을 재건해야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 해방의 주님인 그분이 오십니다.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십시다. ” 그런데 메시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이사야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하겠습니다. “메시아는, 여러분이 기다리는 그분은 꼭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입니다. 형편없이 생긴 사람, 사도 바울보다 더 못한 사람이 메시아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상을 화가들이 그릴 때 아주 아름다운 얼굴로 그립니다만, 이사야서를 생각한다면 그 잘 생긴 모습은 진짜 예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오는 분이 무슨 메시아입니까 이사야가 답변합니다. “그런데 험상궂고 형편없는 그 모습 속에 하늘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얻었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는 병에서 나음을 받았습니다. 험상궂은 형편없는 얼굴 속에 구원의 은총이 들어 있습니다. ”
그러니 우리는 형편없어 보이는 이 사람, 질병과 모욕 속에 있는 이 사람, 가시에 찔린 이 사람, 가시관을 쓰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 그러나 그 가시 속에, 그 십자가 속에 부활의 영광을 품은 이분을 오늘 만나보아야 합니다. 이게 오늘 메시지의 전부입니다. 이분을 만나셔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로 행복하고, 진실로 기쁘게 됩니다. 많이 가진다고 행복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행복에 관한 두 가지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을지로6가를 가시면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서 찾아봤는데, 그 회사는 을지로 6가에 있었습니다. 굿모닝시티! 무슨 말 하는지는 다 아시죠 요즘 언론마다 그 일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 원이 로비자금으로, 부정한 자금으로 더럽고 더럽게 사용되었습니다. 그 건물을 보면서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얼마나 가지면 행복합니까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면 행복해집니까 그 권력과 돈을 따라 얼마나 많은 부정과 부패가 자라납니까 이런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한두 해 있어온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행복은 많이 갖는 데서 생기는 겁니까 아니면 행복은 욕망을 줄이는 데서 가능한 겁니까 재산을 늘려서 행복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것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재산을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을 조금씩 줄여 가면 그 만큼 행복의 잣대도 커질 겁니다.
이렇게 험한 이야기, 읽기조차 싫은 보도들만 접하다가, 엊그제는 신문에서 아주 신선하고 훌륭하고 감동적인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안양에서 공장을 경영하던 어느 회장님이 공장 부지를 안양시에 기증하고 경상남도 함안으로 이사한다는 것입니다. 공장 대지가 4,364평인데, 이것이 주택지 가운데 있어서 시가로 따지면 300억 원쯤이나 된다고 합니다. 적은 돈이 아닙니다. 두 차례나 가족회의를 열어서 온 가족이 동의하고서 시에 기증했습니다.
기증하는 이유는, 그 동안 공장의 소음과 분진으로 주위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것이 미안해서, 보상 차원에서 그 땅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내 것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 회장님은 남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 땅을 내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안양시에서는 그 땅을 받아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 공원의 이름을 공장의 이름을 따서 삼덕공원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땅에는 이제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설 것입니다. 300억 원이 됐든 얼마가 됐든, 꼭 같은 돈이 한쪽에서는 구린내가 나고 다른 쪽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안양의 이 분은 돈을 잃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300억 원이 없어졌지만, 그것으로 후손의 후손까지 깨끗한 공기를 마시게 되는 것, 자손들이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 그 뜻을 기리게 되는 것 등을 비용으로 따지면 300억 원만 되겠습니까 3,000억이 될지, 3조가 될지 따지기도 힘든 일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수백억 원을 로비로 날린 을지로6가의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것을 내어놓고 누리는 행복, 이런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더러운 이야기, 깨끗한 물, 더러운 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바로 살고 하늘 뜻대로 살게 됩니까 우리 모두 이 안양 분처럼 부자여야 됩니까 갑부여야 됩니까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크기의 믿음만 있어도 됩니다. 그런 작은 믿음만 있다면, 나무 중에서 뿌리가 가장 깊다는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가서 뿌리를 내리라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위로, 한마디의 말, 작은 봉사, 한 톨의 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겨자씨만큼 작도고 생각하는 것, 그것 한번 베풀어 보십시오. 베풀면 뽕나무도 옮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베풂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험하게 생겨서 귀한 분인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모습으로 왔던 예수 가운데에 부활이라는 구원의 엄청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 믿음, 작은 봉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담깁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실 공간, 여호와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그때는 어쨌든, 우리나라가 자동차 문화가 굉장히 좋은 선진국이었고, 한강물도 깨끗했고, 공기도 맑았고, 사람들도 친절했고, 그 기간 동안에는 부정부패 등의 스캔들도 별로 안 보였습니다. 그런 기록들을 읽으면서 우리도 한때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책 가운데에서 소박한, 아주 작은 에피소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얘길 오늘 드리겠습니다.
올림픽 때 각국의 선수들이 입장하는데, 입장할 때면 맨 앞에 그 나라 국기 피켓을 든 여자를 따라서 입장합니다. 그 도우미를 피켓걸이라고 하는데, 피켓걸들이 제일 앞에서 입장하면 그 뒤를 따라서 선수단, 임원이 입장하는 장면, 다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국기 피켓을 든 도우미가 있었는데, 아마 그 나라 선수단이 볼 때 그 여성이 굉장히 아름답고 좋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수단 임원 중 하나가 나중에 이 아가씨를 찾아와서 프로포즈를 했답니다.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우리나라에서 부자다. 얼마나 부자냐 하면, 재산도 많고 아내도 네 명이나 된다. 그대를 다섯 번째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 만약 오케이만 해준다면, 나는 부자니까 소 서른 마리를 선물로 주겠다. ” 아마 아프리카 식으로는 굉장한 부자였나 봅니다. 아내를 넷이나 거느리는 것은 상당한 재산이 있는 것이고, 소 서른 마리를 주겠다는 것은 엄청난 제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책에 보면 이 프로포즈를 받은 아가씨가 한 대답은 딱 두 마디입니다. “No, Thank you. ”
그 아프리카 사람은 자기가 본 여성을 다섯 번째 아내로 맞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행복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사랑을 아프리카 식으로 소 삼십 마리로 사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 생각에는 당연히, 사랑은 소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서로 나누는 것이며, 자신은 소 서른 마리에 팔려갈 정도의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했을 것입니다. 물론 나라마다 프로포즈를 하는 방법도 다르고, 결혼할 때 주고받는 것도 다를 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끼리의 친교도 우애도 돈 주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동해야, 마음이 서로 통해야 되는 겁니다.
이 얘기를 제가 아프리카 사람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습니다만, 오히려 지금 이 땅에, 올림픽을 치른 선진국이라고 내세우던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인간애를, 우애를, 정의를 돈으로 사고팔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팔고 삽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렇게도 쉽게 깨지고 맙니다. 질그릇보다도 더 쉽게 그냥 깨집니다. 사랑이 깨지면 마음도 깨지고 인생도 깨집니다. 그런데도 사고팝니다. 사고파는 관행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사람까지도 사고팔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건은 팔 수 있어도 어떻게 사람을 팔 수 있습니까
성서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죄로 얼룩져 있고, 죄를 지은 인간은 전부 멸망시켜야 되겠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되겠는데,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죄 값을 직접 치르기로 하고 소 서른 마리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값으로 치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죄를 다 씻기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 사셨습니다. 이게 성서의 얘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사실 때, 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분신인 예수를 통하여, 아니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대신 내주고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 겸 부탁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몸을 내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것이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존귀한 피조물이므로, 하늘의 형상을 갖고 태어난 인간들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 감격하여 우리의 사랑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은총을 입은 온전한 사람으로 서서, 사람의 향기를 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원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참 인간의 향내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슬픔, 기쁨, 울음, 웃음, 인간적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면서 우리한테 은총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한테 요구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지 않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상통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아마 하늘나라와 다름이 없을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들을 주고 사신 여러분, 좀 모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과 서로 마음 깊은 곳에서 대화를 나눠 봅시다. 가슴을 열고, 좋으면 찬송하고, 힘들면 기도하고, 기쁘면 웃고, 어려우면 울기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가슴에다 우리 가슴을 한번 맞대 봅시다. 한번 가슴으로 만나 보십시다.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오늘 여기서 만나는 것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교회 나오는 게 무슨 이유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만나기 위함입니다. 오늘 그래서 우리는 예배 장소에 모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드릴 것을 드리십시오. 받을 것이 있으면 간구하십시오. 조건 없는 만남, 이런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상생하는 만남, 이 만남을 오늘 여러분이 맛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만남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무 교만해질까 봐 내 육체에 찌르는 가시 하나를 주셨습니다. 내가 교만할 때마다 이 가시가 나를 찌르는 그 아픔 때문에 나는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 그 말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내 편의대로 활용하고 싶었는데, 가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가시는 무엇입니까 성서를 주석하는 많은 분들이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천주교 측에서는 주로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독신으로 그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인간적인 성적 충동도 있었을 것이고 죄를 짓고 싶은 유혹도 있었을 텐데 이것을 이겨야 했던 것이 바울의 가시였다는 것입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그런 해석도 있지만, 사도 바울의 육제적인 약점을 상정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안질도 있었고 편두통에다 간질병까지 있었고, 키는 작고 못생긴데다 대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고 돌아다니면서도 바울은 아마 자신의 이런 모습과 질병들이 가시가 되어서 자랑하고 싶어도 교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게 만들 만큼 고통스러운 가시! 이 가시 때문에 사도 바울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가시 좀 없애주십시오 하고 세 번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하시는 말씀은, “그 가시가 있어서 내 은혜가 너한테 족하다. 네가 약해야 내 능력으로 강하게 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이라는 사람은 가시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도 바울인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이상 얼마나 유혹과 좌절이 많았겠습니까 사도, 성직자,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고요, 그래서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직을 벗어 던지고 자유인으로 맘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나도 해방 받고 싶다. 사도직을 하루만이라도 떠나고 싶다. ” 그럴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시로 찔러서 사도의 길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한 가시는 십자가에서 예수가 머리에 쓴 가시관의 가시와 같습니다.
오늘의 구약 본문 스가랴서를 보면, 스가랴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야 했던 우리 백성 이제 해방되어서 돌아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합시다. 성전을 재건해야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 해방의 주님인 그분이 오십니다.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십시다. ” 그런데 메시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이사야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인용하겠습니다. “메시아는, 여러분이 기다리는 그분은 꼭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 ”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입니다. 형편없이 생긴 사람, 사도 바울보다 더 못한 사람이 메시아로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상을 화가들이 그릴 때 아주 아름다운 얼굴로 그립니다만, 이사야서를 생각한다면 그 잘 생긴 모습은 진짜 예수의 모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오는 분이 무슨 메시아입니까 이사야가 답변합니다. “그런데 험상궂고 형편없는 그 모습 속에 하늘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얻었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는 병에서 나음을 받았습니다. 험상궂은 형편없는 얼굴 속에 구원의 은총이 들어 있습니다. ”
그러니 우리는 형편없어 보이는 이 사람, 질병과 모욕 속에 있는 이 사람, 가시에 찔린 이 사람, 가시관을 쓰고 저주의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 그러나 그 가시 속에, 그 십자가 속에 부활의 영광을 품은 이분을 오늘 만나보아야 합니다. 이게 오늘 메시지의 전부입니다. 이분을 만나셔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실로 행복하고, 진실로 기쁘게 됩니다. 많이 가진다고 행복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행복에 관한 두 가지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을지로6가를 가시면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서 찾아봤는데, 그 회사는 을지로 6가에 있었습니다. 굿모닝시티! 무슨 말 하는지는 다 아시죠 요즘 언론마다 그 일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 원이 로비자금으로, 부정한 자금으로 더럽고 더럽게 사용되었습니다. 그 건물을 보면서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을 얼마나 가지면 행복합니까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지면 행복해집니까 그 권력과 돈을 따라 얼마나 많은 부정과 부패가 자라납니까 이런 것은 우리 사회에서 한두 해 있어온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행복은 많이 갖는 데서 생기는 겁니까 아니면 행복은 욕망을 줄이는 데서 가능한 겁니까 재산을 늘려서 행복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것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재산을 가지고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을 조금씩 줄여 가면 그 만큼 행복의 잣대도 커질 겁니다.
이렇게 험한 이야기, 읽기조차 싫은 보도들만 접하다가, 엊그제는 신문에서 아주 신선하고 훌륭하고 감동적인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안양에서 공장을 경영하던 어느 회장님이 공장 부지를 안양시에 기증하고 경상남도 함안으로 이사한다는 것입니다. 공장 대지가 4,364평인데, 이것이 주택지 가운데 있어서 시가로 따지면 300억 원쯤이나 된다고 합니다. 적은 돈이 아닙니다. 두 차례나 가족회의를 열어서 온 가족이 동의하고서 시에 기증했습니다.
기증하는 이유는, 그 동안 공장의 소음과 분진으로 주위 사람들한테 피해를 준 것이 미안해서, 보상 차원에서 그 땅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내 것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 회장님은 남의 것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 땅을 내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안양시에서는 그 땅을 받아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 공원의 이름을 공장의 이름을 따서 삼덕공원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땅에는 이제 아름다운 공원이 들어설 것입니다. 300억 원이 됐든 얼마가 됐든, 꼭 같은 돈이 한쪽에서는 구린내가 나고 다른 쪽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안양의 이 분은 돈을 잃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300억 원이 없어졌지만, 그것으로 후손의 후손까지 깨끗한 공기를 마시게 되는 것, 자손들이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 그 뜻을 기리게 되는 것 등을 비용으로 따지면 300억 원만 되겠습니까 3,000억이 될지, 3조가 될지 따지기도 힘든 일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수백억 원을 로비로 날린 을지로6가의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기 것을 내어놓고 누리는 행복, 이런 행복도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더러운 이야기, 깨끗한 물, 더러운 물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바로 살고 하늘 뜻대로 살게 됩니까 우리 모두 이 안양 분처럼 부자여야 됩니까 갑부여야 됩니까
아닙니다. 오늘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크기의 믿음만 있어도 됩니다. 그런 작은 믿음만 있다면, 나무 중에서 뿌리가 가장 깊다는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가서 뿌리를 내리라고 해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위로, 한마디의 말, 작은 봉사, 한 톨의 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겨자씨만큼 작도고 생각하는 것, 그것 한번 베풀어 보십시오. 베풀면 뽕나무도 옮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의 베풂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험하게 생겨서 귀한 분인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모습으로 왔던 예수 가운데에 부활이라는 구원의 엄청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겨자씨 믿음, 작은 봉사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담깁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실 공간, 여호와 하나님이 은총을 내리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함입니다.
댓글목록 0